솔개 '연鳶' 字 이야기
'연작이 홍곡을 촌탁하랴?' 란 말은 제비나 참새같이 작은 새가 기러기나 고니같이 큰 새의 뜻을 알겠느냐는 뜻이다.
여기서 쓰인 연작의 '연'은 제비 연 燕字이다.
오늘 날은 고시(사법, 행정, 외무, 기술)가 있어 정부직의 등용문이 되고 있지만 조선 시대엔 과거 제도가 있었다.
기본적으론 3년에 한 번 있고 비정규적으로 별시가 추가될 수 있었다.
황순원의 소나기라는 단편 소설에 나오는 윤 초시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사람이었다.
초시에 합격하고 나면 그 뒤에는 복시가 기다리고 있고 최종적으론 전시가 있었다.
역사상 과거 시험의 최고령으로 장원급제한 사람은 남원 사람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농공상의 세월을 살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글공부 밖에 없던 남원의 한 선비는 평생을 과거공부만 하고 있으니 그 부인의 삶은 너무나도 고통스러 웠다.
글공부하는 남편을 대신해 평생 힘든 생활을 하며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나, 과거만 보면 계속 낙방거사가 되었다.
연로한 그가 마지막 각오로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예나 지금이나 급제의 길은 멀기만 해서, 또 다시 낙방을 하고 만다.
그는 부인과 동네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어 자살을 결심한다.
죽기를 결심한 그는 며칠 간 서울 구석구석을 유람한 뒤 서울이 한 눈에 바라보이는 인왕산에 올라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저 아래 천길 낭떠러지로 몸을 던졌다.
마침 그 날 대궐에서는 어전 회의가 열렸다.
며칠 전에 과거 급제를 한 자가 어사주를 마시고 어사화를 머리에 꽂은 채, 금의환 향하던 중에 낙마를 하여 죽었으니 이를 어찌 하면 좋으냐는 회의였다.
차점 자를 장원으로 올리자는 의견과 공석으로 두자는 의견, 재시험을 보자는 의견으로 나뉘어 갑론을박하다가 결국 재시험을 보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정조는 호위무사인 구장사를 데리고 인왕산으로 미행을 나갔다.
그 순간 뛰어 내린 노인을 구장사가 낚아채서 임금 앞에 데려왔다.
"아니, 노인장! 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것이요?"
임금이 질문하니 그 노인은 자신의 신세 한탄을 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임금은 그에게 '솔개 연鳶글자 한자를 써 보이며 이것이 무슨 자냐고 물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재시험이 있다하니 다시 응시 해보라는 말을 남기도 홀연히 떠나갔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거짓말 할 위인은 아닌 것 같아 속는 셈치고 시험장엘 갔다.
시험방식은 넓은 대청에서 곤룡포를 입은 임금이 직접 질문하고 답을 듣는 방식이었다.
시험의 순서는 거의 마지막 그 노인의 뒤에는 젊은 총각 하나가 서있을 뿐이었다.
임금 앞에 나가 고개를 드니 아무래도 어디서 본 듯하다.
가만 생각해보니 놀랍게도 그는 어제 그 글자를 보이며 '노인장, 이게 무슨 글자요?' 라고 묻던 사람이 아닌가.
긴장도 되었지만 나이가 있어선지 영 생각이 나지 않고, 다만 날아다니는 새의 종류라는 것만 생각이 나던 그는 드디어 대답을 했다.
"상감마마! 그 글자는 꿩 연자 인줄 아뢰오.”
대답을 듣고 왕은 비록 안 되었지만 국가의 대사인 과거에 더 이상의 사심이 있어선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노인을 시험 장에서 나가도록 한다.
시험장을 나온 그 노인이 마지막 수험생인 총각 앞을 지나가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아! 총각, 그 글자는 솔개 연 자인데 그만 꿩 연자라고 답변한 것이 너무나 아쉽네.”
전라도 말을 하며 아쉬워하는 노인과 작별한 총각이 천천한 걸음으로 임금 앞에 섰다.
똑같은 질문이 나오자 그 총각은 “상감마마, 서울 표준말로는 솔개 연자요, 전라도 사투리로는 꿩 연자 인 줄 아뢰오."
임금이 괜히 임금이겠는가!
그 총각의 깊은 뜻을 헤아린 임금은 그 노인을 불러 공동 장원을 시켰다는데, 노인이 보직을 받았는지는 확인 할 수 없지만, 다만 그 깊은 배려심과 상생의 마음을 갖고 있던 총각은 후에 정승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나라면 그냥 솔개연이라 했을 텐데 선배님이신 그 총각은 상생의 마음으로 솔개연이지만 전라도 사투리로는 꿩 연자라고 했던 것을 상기 할 때마다, 지금까지 허겁지겁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에게 새록새록 채찍으로 다가온다.
출처 : 잡설산책 (김연태 지음, 글샘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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