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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길의 옥봉

w.j.lee 2025. 2. 27. 12:46

 

꿈길의 옥봉

 

400여 년 전, 그 때나 지금이나 남녀간 사랑의 깊이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이옥봉이라는 여인이 사랑하는 남자 운강과 떨어져 살면서 너무나도 그리운 그를 그려 쓴 시를 보자.

 

증운강 贈雲江         운강에게 보내다. 

近來安否問如何근래인부문여하    요사이 안부를 묻노니 어떠하신지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달빛 어린 사창엔 이 몸의 한도 많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만약 꿈속에 가는 길에 자취가 생긴다면
門前石路半成沙문전성로반성사    문앞의 돌길이 반은 (곧) 모래로 변했으리
 -꿈길, 이옥봉

 

그리움이 넘치다보니 꿈속에서나마 만나고 싶어 그를 찾아다닌 무수한 흔적으로 돌길의 반쯤은 모래길이 될 정도니 그 그리움이 얼마나 절절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에게서 한번 찾아오겠다는 기별이 왔다.

그러나 온다던 남자는 어찌 그리 오지 않는지.

옥봉은 다시 붓을 들어 기다림에 지친 마음을 시로 쓴다.

 

- 규원閨怨 아녀자의 원망 -
有約來何晚 유약래하만  오신다고 기약하시더니 왜 이리 더디신가. 

庭梅欲謝時 정매욕사시  뜰 앞의 매화는 때 지나 지려하는데

忽聞枝上鵲 홀문기상작  문득 가지 위의 까치 우는소리 들려

虛畵鏡中眉 허화경중미 서둘러 거울 보며 부질없는 단장일세.

- 헛된 기다림, 이옥봉

 

기다림은 너무나 지루하고, 겨우내 기다려 그와 함께 보아야 할 마당의 매화는 어느새 지려는데, 반갑게도 까치가 우는 구나.

 자기 영역을 철저히 지키는 까치는 낯선 사람이 오면 경계를 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반가운 사람이 올 때 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까치 소리에 화들짝 놀라 거울 보며 서둘러 단장을 했는데, 오겠노라 약속하신 그님이 아니시니 부질없는 단장이 되었다는 이 시는 운봉 조원의 문집인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부록에 들어있는 옥봉의 시 32 편중 하나다.

시의 제목인 '증운강'을 문학박사인 유영봉 고려대 연구교수가 그의 역서인 「너도 내가 그립더냐」에서 '꿈길'이 라는 제목으로 번역하고 있다.

 

옥봉은 조선 선조 때 사람으로 본래 이름은 숙원, 호가 옥봉으로 알려져 있다. 1550년 태어나, 1600년 경 타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녀의 시가 오늘 날 우리 앞에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조원의 아들이 명나라에 갔을 때, 그 곳의 대신이 서가에서 이옥봉의 시집을 꺼내 보이며 옥봉이 그리워한 조선의 '조원을 아느냐?"는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옥봉의 부친은 양녕대군의 고손이었으나 모계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는 조선 사회였기에 그녀는 얼녀孼女로 살아가야 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시재를 지닌 그녀를 글깨나 아는 선비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으나 선비인 조원을 사랑한 나머지 자진해서 그의 첩이 되었다.

조원은 옥봉에게 다짐받길, 나에게 오는 순간부터 일체의 시를 짓지 않고 단 한수라도 시를 지으면 바로 헤어지자는 조건을 걸었다.

좋아하는 시를 쓰고 싶어 했으나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봉건적 개념을 가지고 있던 조원은 옥봉이 시와 문장을 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조원의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겨 어쩔 수 없이 시 한수를 지어 해결을 하였는데,

그 속 좁은 조원은 처음 약속대로 그녀를 내치고 만다.

그 뒤 혼자 지내면서 꿈길, 그리움 등의 시를 쓰며 애타게 조원을 기다렸으나 결국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 것 같다.

전해 오는 33수의 시 중, 그녀가 쓴 애통한 시 한 편을 더 보자.

 

- 규정閨情 아녀자의 정 -
平生離恨成身病 평생이한성신병   평생 이별의 한이 병이 되어

酒不能療藥不治 주불능료약불치   술로도 약으로도 다스릴 수가 없네.

衾裏泣如氷下水 금이읍여빙하수   이불 속 눈물은 얼음 아래 흐르는 물 같아서 

日夜長流人不知 일야장류인부지   밤낮으로 흘러도 그 누가 알아주나

- 여자의 속마음, 이옥봉

 

결국 조원을 단념한 옥봉은 넓은 중국 땅으로 건너가 마음껏 시심을 펴려 했으나 그 마저도 여의치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생전에 자신이 쓴 시를 적은 종이를 겹겹이 몸에 감고 바다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다. 

바다에 떠다니던 그녀의 시신을 수습한 중국의 누군가가 보니 '해동국 조선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적혀 있고 몸에 두른 종이에 주옥같은 시가 적혀 있었다. 그 시를 모아 옥봉집이라 이름하였고, 그는 후에 명나라 원로대신이 된다.

마침 조원의 아들인 조희일이 조선의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원로대신이던 그가 '조원을 아느냐?"는 질문을 던지면서 옥봉의 시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조원이라는 한 남성과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시심을 접고 살던 그녀가 결국에는 시 한편을 지은 죄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을 받고 시심을 펴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였다.

 

옥봉이 자신의 삶을 시로 마감하기 위해 시를 적은 종이를 몸에 감고 죽었고, 다행히 중국의 식자에게 시신이 발견되면서 그녀의 시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으니 그나마도 반가운 일인 듯싶다.


출처 : 잡설산책 (김연태 지음, 글샘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