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계시는 하나님에 눈뜨다
태초에 존재하는 건 물질이 아니었다.
물질은 스스로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이 생겨나려면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그 원인이시다.
태초에 법칙이 있지 않았다.
법칙은 창조 세계가 따르는 과정을 가리키는 이름에 불과하다.
그 과정은 누군가가 설계해야 하는데,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물질과 법칙의 자존存)하는 원인이신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께 반응하는 영적 훈련
모든 것의 근원이시요 창세전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신다.
다윗은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함께하시면서 생명이 펼쳐지는 신비를 지켜보셨음을 알았다.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 "(시 139:7~16).
'임재'와 '임재의 나타남'은 다르다.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지금 여기 충만히 계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의식할 때만,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의식하는 만큼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내주하신다.
우리가 성령께 순복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게 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이들의 노력이 결실할 수 있음은 그분이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다가오심, 또는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다가감은 물리적 거리 개념이 아니다.
이는 경험과 관련된 것이며, 관계적 개념이다.
우리는 부재하신 하나님을 향해 어떤 공간 너머로 소리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어떤 사람들은 희미한 빛 아래서 헤매는가?
그 차이는 하나님 쪽이 아닌, 그분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에서 발생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위대한 성도(聖徒)로 꼽히는 이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영적 수용성'(spiritual receptivity)이다.
이는 친화성, 경향, 공감적 반응, 받아들임, 갖고 싶은 바람 등 영혼의 여러 요소가 뒤섞인 복합적인 것이다.
그 성도들 안에 있는 뭔가가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고, 하나님 쪽으로 다가가도록 그들을 재촉했다.
그들은 '영적 의식'이 있었고 이를 함양했다.
내면의 갈망을 느꼈을 때 무시하지 않고 어떤 조치를 취했다.
즉 '영적 반응'이라는 습관을 길렀다.
그들은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거스르지 않았다(행 26:19).
다윗은 고백한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8).
영적 수용성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데, 그 목적을 실현 하려면 우리가 힘써 그것을 함양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에게는 옛 성도들이 귀중하게 여긴 '함양'과 '훈련'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자동화와 기계 시대에 자라난 사람들은 함양과 훈련을 느리고 평범한 것으로 치부 한다.
빠르게 흘러가는 자극적인 것에 익숙해진 성도들은 그러한 세상 방법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적용했다.
그 결과 공허한 종교 철학, 흥미 위주의 집회,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관행, 종교의 외형 추구, 신앙의 탈을 쓴 교제, 영업 사원의 전략 같은 교회 홍보, 활동적 성격을 성령의 능력으로 오해하는 어리석음 등의 병폐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누구든지 돌이켜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하나님을 추구하면, 이전과 다른 숭고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성경을 묵상하는 경건 훈련을 시작하면, 변치 않는 영원한 진리를 발견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우리 죄를 덮으신 사랑의 하나님께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는 영적 수용성이 커지는 만큼, 지금 여기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선명히 경험하고 그분을 더 깊이 알게 될 것이다.
- 글 : A. W. 토저 -
A. W. 토저
20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목회자다. 타락한 세상에 하나님 사랑을 강력히 선포해 '이 시대의 선지자'로 불렸다.
-하나님을 추구 하다 -, - 온전한 믿음을 추구함 - 등을 저술했다.
출처 : 생명의 삶 /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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