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길/기도 & 묵상

사순절(四旬節) 묵상(默想, meditation) 16 : 포도원의 노래

w.j.lee 2022. 3. 1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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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의 노래

2022년 3월 19일(토)

말씀(이사야 5:1-7)

1.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3.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요절(要節)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 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사 5:4)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는 찬송 구절이 있습니다.

이게 진실일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과장 아닐까 싶었지요.

그러나 이사야의 포도원의 노래를 새겨 읽노라면 이 찬송이 참을 말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포도원을 가꾼 주님의 정성은 지극합니다.

주님은 최선을 다하여 밭을 마련하고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좋은 열매를 기다리기까지 주님은 포도나무의 필요를 오롯이 채우셨습니다.

좋은 포도열매를 얻고자 애쓰신 주님의 돌보심은 세밀하셔서 놓치심이 없습니다.

 

어미가 설사 잊더라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맺힌 것은 들포도였습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시공 어느 순간과 틈도 놓치지 않고 그분은 우릴 돌보셨건만

우리는 덤벙덤벙 하나님 없는 시간을 지나고 그분 머무시는 자리를 스쳐 지나쳐 버린 걸까요?

 

유대인의 안식일 기도에

'하루가 지나가고 한해씩 사라지건만 저희는 기적들 사이를 장님처럼 지나갑니다....

저희가 어디를 바라보는 떨기에 불이 붙었건만

불타서 없어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해 주십사' 청합니다.

 

어느 때에야 우리는 '아하' 하며 눈을 떠 그 사랑의 실상을 보며

'네 정녕 그렇습니다'라고 그 찬란한 사랑의 파노라마에 감격할까요?

멀어 보지 못하고 불평했던 순간들을 부끄러워하며 고개 숙이 게 될까요?

 

주님은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에 더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분의 섭리가 온전하심을 일러주 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정성에 반하는 들포도를 맺은 유대인들을 향한 질타에 고개 끄덕일 것이 아니라

우리 또한 당신의 눈동자같이 돌보시고 정성스레 살피는 은총을 기억하며

그 자비에 놀라 감격하길 기도할 일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를 향해서도 허리를 동이고

시비를 가려보자고 하면 무슨 변명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또한 은총을 잊고 헛된 것에 취하여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의롭던 욥조차 주님께서 허리를 동이고 시비를 가리자고 하셨을 때

그토록 항의했던 자신이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렸고,

알지도 못하며 헤아린 양 말하였음을 부끄러이 여겼습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겠지요.

 

십자가의 길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신학적 명제로 규정하고 넘어간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길이 영원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섭리요 신비라면,

우리는 그 신비 안에 담긴 한없는 그분의 사랑을 길어올려

우리의 메마른 마음을 은총으로 적셔야 합니다.

 

마르지 않는 우물을 그저 바라본다고 해서 무슨 해갈이 되겠어요?

어느 부자집 아들이 창고에 가득한 보물은 잊은 채

장부에 기재된 재산목록만을 날마다 읊조리고 정확히 외운다고 해서

그에게 무슨 하등의 유익이 있겠냐고 물은 선현의 지혜가 옳지요.

 

가없는 은총에 젖어드는 이는 하나님으로 물들고, 하나님의 뜻이 그를 이끌어갑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사랑과 정의가 원의(原意)가 되고 그에 합당한 열매가 은총으로 맺히겠지요.

 

기도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두 이레 강아지만큼만이라도

당신의 사랑과 돌보심에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주께서 허락하시는 이 놀라운 실상을 놓치고 눈먼 장님 처럼

허망하게 지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저희를 도우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