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사/제 2부 종교적 배경

제9장 유대교의 종교적 분파들

w.j.lee 2023. 5. 9. 13:25

제9장 유대교의 종교적 분파들

 

유대인들이 B.C. 538년에 있었던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뒤에 두 가지 경향이 현저히 나타났다. 

그 중의 하나는 성전제사와 의식들을 계속하는 것과 관계가 있었다. 

포로기 이후에는 대제사장이 유대 국가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정치적인 관심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제사장과 왕의 직책이 한 사람에게 부여되었던 마카비의 반란 이후에 더욱 그러하였다.

 

포로기 이후 유대교의 또 다른 경향은 율법에 대한 서기관의 새로운 관심, 즉 율법의 전수와 해석이었다. 

처음에 이 두 관심은 일치하 였으나 얼마 후에 그들 사이에 균열이 일어났다. 

따라서 원래는 동일한 직책을 맡은 사람의 공통적인 책임이었을 성전의 일과 율법의 일이 서로 구분이 되어 한편은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고 다른 한편은 종교적 문제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서기관들은 율법의 보존과 계발에 더욱 헌신하는 반면에

제사장들은 율법에 대한 관심이 전적으로 결여된 채 율법에는 정통하지 못하고

하나의 계급으로서 주로 정치적인 문제들에 그들의 노력을 경주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 는다.

 

1. 바리새파

 

그리스도의 탄생 전후 세기들에 살았던 유대인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모든 파당 사이에서 바리새파는 가장 커다랗고 가장 영향력이 있는 종파였다.

신약성경(주로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서는 유대교의 어떤 다른 종파보다도 더 많이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엄격한 집단이 었다(행 26:5).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바리새파와 또한 다른 종파들의 기원이 모호함으로 가려져 있음을 인정한다.

스네이드(Snaith)는 이렇게 주장한다.

“비록 그들이 갖는 어떤 차이점들은 초기의 포로기에서 기원한다 할지라도 이 모든 종파들은 주로 구약의 결집과 신약시대의 시작이 가져다 준 산물이었다." 

 

『고대사』 (Antiquities)에서 요세푸스는 B.C. 166/159-141년에 활약한 대제사장 요나단의 시대에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의 세 종파 를 언급하고 있다(요세푸스의 책에서 발견된 유대의 종파에 대한 참고 구절들은

Antig, XIII, 5:9;10:6; XVII, 2:4; XVIII. 1, 3-4; XX, 9:1; Wars, III.8~14 들이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바리새 (Pharisee)란 명칭은 “구별되다", 혹은 “로부터 분리되다”란 의미의 히브리어 페루쉬(perush)에서 유래하였다.

바리새란 명칭의 최초의 사용은 요한 힐카누스가 통치하였던 B.C. 1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A.D. 70년 이후 비록 바리새인의 정신은 계속되었지만 그 명칭은 유대교의 연보(annal)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바리새주의(Phariseeism)의 발전에 기여하였던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율법주의, 즉 바벨론 포로 시대에 시작된 토라 종교(the religion of the Torah)였다.

바벨론에서의 귀환 이후 성전 제사의 확장으로 회당에서의 율법공부가 강조되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지도 하에 전통적인 율법해석이 연구되었고 생활에 적용되었다.

아마도 이 시기가 바리새인이 가장 잘 표출된 때였던 것 같다. 

 

두번째 요인은 국가주의 (nationalism)의 정신이었다. 

박해와 고립이 이 정신의 발달을 조장시켰는데, 유대인들이 소수였던 바벨론 포로 시기에 발전하였고, 

또한 귀환 후에도 정세들이 그들로 하여금 다시 그들의 동질성과 국가의 구현을 강조하게 하였다. 

유대인들이 일련의 대대적인 군사행동으로써 근동 아시아를 헬라화하려는 수리아군과 투쟁해야 했을 때 그들은 특별한 민족임을 주장할 필요가 있었다. 

 

바리새주의의 발전에 기여한 세번째 요인은 하시딤의 발현이었다. 

이 집단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종교가 세속화되어 가는 것을 보고 경악하였고 

그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이교적인 정신에 놀랐다.

 그리고 문화와 이상들은 팔레스틴의 유대인 공동체에는 대단한 위험이었다. 

 

팔레스틴의 주요 도시들에 상당수의 그리스인들이 살았다. 

요단의 동 북부 지역에 위치한 데가볼리 (Decapolis)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이 살았다.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는 많은 유대인들을 유혹하였고, 그들 중의 일부는 영향을 받아 그것에 사로잡혔다.

그리스의 생활방식과 예절, 어투를 사용한다는 것은 사회적이며 정치적 성공의 길이었다.

그리하여 이교의 철학과 문학, 종교에 의하여 유대교의 신앙은 도전을 받았다.

 

유대 나라에서는 타협적인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이 있었으며 이러한 태도 때문에 그들은 친헬라파, 혹은 헬라주의자(Philhellenes, Hellenists)로 불리웠다.

하시딤은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헬라화시키려는 자들의 노력을 배격하는 특수한 계급이 되었다.

이들은 기꺼이 지고한 제물이 되기를 원하면서 율법과 야훼 경외, 조상의 종교를 고수하였기 때문에 마카비의 반란 때에 탁월한 활동을 수행하였다.

하시딤은 그들이 셀류키드 왕조에 대항할 때 마카비 일가를 계속하여 지원하였으며 이 관계는 그들과 힐카누스 사이에 공개적인 결렬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에 대한 박해 때문에 하시딤은 그들 의 활동에 자부심을 가졌으며 결과적으로 역시 유대의 다른 사람들 보다 우월감을 가졌다. 하시딤은 이름을 밝히지 않은 바리새파의 선구자였다.

즉, 그들의 교리는 정통 유대교의 교리가 되었다.

알렉산 드라(B.C. 76-67) 치하에서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세력을 되찾았으 며, 그녀는 그들에게 유대인과 관계된 고위직을 제공하였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알렉산드라의 통차에 대하여 "그녀는 명목상의 통 치자였으며 바리새인들이 실권을 장악하였다”(Antig, XII, 16, 21)라고 기술하고 있다.

 

B.C. 135년 경 바리새파는 유대의 다른 사람들과 구별을 이루었다.

요한 힐카누스(B.C. 134~104)는 그들의 제자였었는데 그들을 떠나 사두개파에 가담하였다(Antig.. XIII. 10, 5와 6).

이 때까지는 바리새파가 하베림(chaberim), 즉 동료와 형제들로 불리웠었다.

당시부터 그들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집단이 되었다.

그들은 율법이 완전히 준수될 때 메시야가 강림하시며 유대인들이 적국의 통치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전 재산의 십일조를 준행 하였다. 

그들은 또한 죽은 짐승의 시체를 만진 사람이나 어떤 경로로든 불결하게 된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였다.

그들은 이방인이나 다른 파에 속한 평민들과 어울리기를 거절하였으며 이방인과의 통혼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바리새파는 자신들의 복장으로 다른 파와 구별하였다. 

마태복음 23 :5은 그들이 차는 경문(phylactery)을 넓게 하며 

옷술(the borders of garments)을 크게 하였다고 말한다.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경문은 신명기 6:6~8, 11과 출애굽기 13:1~16에서처럼 이마를 두르고 손목에 매어졌다.

경문의 가죽 주머니에서는 쉐마(Shema,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문구-역자주)와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적혀 있었으며 이것은 바리새인을 손쉽게 식별하는 표지 역할을 하였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6천명에 달하는 바리새인이 있었다.

 

이 종파는 유대인의 세계에 있어서 모든 계급에서 그 구성원을 취하였다.

그러나 바리새파 중에서 극히 소수만이 제사장들이었고 대다수는 평신도였다.

경건한 바리새인 집단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모두 포함되었다.

트리코트(Tricot)는 말하기를 이 종파에 가입하려면

“계명과 전통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소유하며그 종파의 박사들의 가르침을 신봉하며 안식일의 휴식이나 의식상의 정결, 레위기에 적힌 십일조에 관한 모든 교훈들을 정확히 준행함으로써 자신을 구별하는 것 이 필요하였다”라고 한다

 

바리새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는 서기관이었으며 이들은 신약에서 바리새파와 밀접한 관계로 항상 나타난다.

서기관들의 대다수가 바리새파에 속하였으며 이 종파가 민중과 산헤드린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은 바로 서기관들을 통해서였다.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에만이 아니라 팔레스틴의 전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들의 율법에 대한 헌신과 종교적 열심 때문에 그들은 하층 계급의 사랑을 받았으며, 

그들이 지닌 민중에 대한 영향력 때문에 상류계급은 그들을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사두개파는 그들의 대단한 적수였다.

바리새파에서 떠나 사두개파에 가담한 요한 힐카누스는 그의 임종시에 부인에게 바리새인들이 이전에 누렸던 권세의 자리를 그들 에게 회복시켜주도록 충고하였다.

그리스도의 생존시에 본디오 빌라도는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하였는데 72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는 많은 바리새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23:15에서 말씀하셨듯이 그들은 이방인에 대한 진정한 선교열을 보여주는 반면에 또한 그들의 엄격한 율법의 준수가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전통주의에 몰두하였다. 모울드 (Mould)는 바리새인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내적인 정신을 무시하는 경배의 외적 형식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편협하고 비판적이 며 자기가 주장하는 의인이었으며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반면에 십 일조와 수업료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보다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하나의 무거운 짐이 되었다. 

 

바리새파의 서기관들은 세대를 계승하면서 그들이 계발하고 전승시 켜온 규례들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은 그것이 우발적으로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듯이 “율법에다가 울타리를 치고자” 시도하였다.

요세푸스(Antig, XII, X, 6)는 말하기를 그들은

“모세의 율법책에는 기록되지 않은 조상으로부터 전승되어진 대단히 많은 율례들을 백성에게 가르친다.

그리고 이 러한 이유 때문에 사두개인들은 그들을 배척하였고, 말하기를 우리는 기록된 말씀 안에 있는 것을 준행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조상들로부터 전해진 것들을 준수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사두개 파와는 반대로, 바리새파는 구전(the oral tradition)의 옹호자였다.

 

바리새인들은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풍유적인(allegorical) 해석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전승을 구약과 동등하게 취급하였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 교리를 강조 하면서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하늘의 상급을 주실 것이며

악인을 멸하실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들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견해는 이렇다 [요세푸스].

“말하자면 그들은 모든 섭리를 하나님께 돌린다.

그러나 비록 운명, 혹은 섭리가 모든 행위에 있어서 협력하지만 옳은 일을 행하거나 그 반대로 악한 일을 행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생 각한다."

게만(Gehman)은 바리새파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한다.

“이러 한 교리들은 그들을 사두개파와 구별시키지만 바리새주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종교란 율법의 준수이며 율법을 준행하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한다는 종교의 개념에서의 최종적이며 필 연적인 귀걸이 바로 바리새주의다. 종교는 외부적인 것이 되었다. "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은 이따금 바리새인에 대하여 말하면서

율법의 해석에 있어서 그들이 예수님과 빚는 충돌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구 절들은 율법과 바리새인들의 극히 사소한 생활모습을 규정하고 있는 장로들의 유전에 대하여 그들이 대단히 열심인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안식일을 준수하며, 길게 기도하고, 불필요한 십일조를 바치며, 자주 금식하고, 그들의 경문을 넓히며, 여러 가지 많은 의식상의 결례(Washings)를 행하였다.

그들은 자만하여, 탐욕스럽고, 시장에서 인사받으며 랍비라 불리우는 것을 좋아하며, 회당과 연회에서 스스로 상석에 앉으며, 자기네처럼 엄격하지 않은 모든 사람을 경멸하였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거절하였고 니고데모나 바울, 사도행전 15장에 언급된 사람들 정도의 극히 적은 수효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예수께서 그들의 유전과 일치하지 않고,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시며, 그들의 표준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 극렬한 적개심이 타올랐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들을 위선자라고 힐난하셨다.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의 주된 원인은 그 분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로 자처하셨다는 것이었다.

 

2. 사두개파

 

이들은 유대인 가운데서 두번째로 중요한 종교적 종파였으며, 신약 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들은 구전 율법(Oral Law)을 주장하는 반면 에 서기관과 바리새파의 유전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육체 부활에 있어서 바리새파와 동의하지 않으며 (눅 20:27~40, 행 23:8) 미래 의 심판을 부정하였다. 

그들은 천사와 영들의 존재를 반박하였으며 바리새파 가운데서는 강렬하였던 메시야의 대망과 예견이 사두개파에 의하여 촉진되지는 않았다. 

사실상 바리새파가 귀하게 여긴 모든 교리들을 사두개파는 무관심하게 대하거나 철저하게 배격하였다.

게만 (Gehman)은 사두개파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하였다.

 

장로의 유전을 대단히 강조하는 바리새파와는 반대로 사두개파는

그 들이 성경 안에서만 발견하였던 교리들로 그들의 신조를 국한시켰다.

그들은 기록된 율법만이 준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Joseph. Antig. XIII. 10, 6).5)

 

"사두개"(Sadducee)란 명칭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가지 견해가 주장 되어 오고있다.

헬라어 Sadukaioi 는 "의로운"이란 뜻을 지닌 히브리 어 Zaddik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히브리어 Zadukim에서 파생되었다.

외스텔리(Oesterley)는 이러한 유래가 언어학상 불가능하다고 하여 배격한다.

코울리(Cowley)는 "사두개"가 "이교도"(infidel)란 뜻의 페르샤어 Zinkik (아랍어 Zindikun, 복수는 Zanadiku)의 와전이란 설을 발전시켰다.

이 이 단어는 B.C. 220년 경에 "조로아스터교인” (Zoroastrian)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외국의 사상을 좋아하고 일반적으로 유대인에 의하여 지켜지는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들을 지적하 는데 사용되었으리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솔로몬의 치세 때 대제사장에 있던 아비아달을 밀어 내고 대신 그 자리에 올랐던 사독(Zadok)의 이름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

사독의 자손들은 포로 시기에 세습적으로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대하 31:10, 겔 40:46:48:11),

이 이름은 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들을 이르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수자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극히 소수였으나 학식을 겸비한 자들로서 특히 그 나라의 계급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의 운세는 시시때때로 다변적이었다.

요한 힐카누스의 말년에는 - 또한 알렉산더 얀내우스(B.C. 103~ 76) 때도 - 영향력이 있었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B.C. 67~63)가 통치 하는 동안에 다시 막강한 세력을 장악하였으나 헤롯에 의하여 박해를 받고 그 수효가 감소되었다.

로마가 유대를 합병시켰을 때 대제사장은 유대인의 공식적 대표자로서 간주되었기 때문에 사두개인들은 지배계급에 머물게 되었다.

A.D. 60년과 70년 사이의 대제사장은 항상 사두개인이었으며,

이것은 그가 공공의 문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 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들의 본거지는 성전이었으며, 바리새인들은 회당에서 그들의 지지자를 발견하였다.

사두개인의 수효는 바리새인과 비교하여 그다지 열세에 있지도 않았다.

요세푸스는 당시 그리스에서 유사한 종교관과 저급한 도덕생활을 하였던 에피쿠로스 학파(Epicureans, 철학적으로 쾌락주의를 표방한 Epicurus의 추종자들-역자주)와 사두개인들을 비교하였다.

사두개파는 그리스도에 대한 반대를 드러내고 조직화시키는데 있어서 바리새파와 또한 헤롯당과 합세하였다.

 

3. 에세네파

 

만일 쿰란 공동체 (Qumran community)의 종파들과 에세네파를 동일시한다면 많은 학자들은 그들의 영향이 자명하다고 믿고 있는 반면에 신약은 에세네파(the Essenes)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들의 기원이 모호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종교 집단에 대하여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그들이 바리새파보다 더욱 극단적인 원래적 종파에 속하고 동양과 그리스의 철학의 영향으로 그 성격이 완만해졌다고 하는 마카비 시대에 보다 엄격했던 하시딤의 후예라는 말은 거의 있을 수 없는 말이다.

 

에세네파에 대한 정보의 주된 근원지는 필로 유대우스(Philo Judaeus)와 요세푸스(둘다 A.D. 1세기 인물)이다.

프리취(Charles Fritsch)는 「쿰란 공동체』(The Qumran Community)에서 에세네파에 대한 필로와 요세푸스의 책에 수록된 진술들을 전하고 있다.

이 외에도 플리니(Pliny)의 『자연사』 (Natural History)에서 에세네파에 대한 재미있는 구절이 남아 있다.

수네시우스(Synesius)는 1세기의 이교도 작가인 디오 크리소스톰(Dio Chrysostom)이 에세네파를 찬양하는

“소돔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팔레스틴의 심장부에 있는 사해 근처에 위치한 그들의 완벽한 성의 번영” 을 말하고 있다고 전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에세네파는 마카비가의 요나단 때 (B.C. 15년 경)에 활동적이었다고 묘사되며 에세네파의 하나인 어떤 유다라는 인물에 대하여 특별히 기술하고 있다.

요세푸스의 『고대사』 XL 5, 9는 에세네파를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더불어 철학자들로 구분하였다.

고대의 저술가들은 에세네파가 금욕주의를 실천하고 성격상 은둔적인 종교집단이었다고 전한다.

그리스도 당시에는 그들의 수효가 약 4천 명에 달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의 몇 마을, 사해의 서쪽 해안에 있는 엔게디 (Engedi)에서 볼 수 있었다.

사해의 황야가 특별히 그들의 거처였다.

에세네파는 세상과 분리되어 인간사회와 극히 제한 된 교류가 있었다.

각 그룹(colony)은 자체의 회당과 식사와 회집을 위한 공동의 홀, 공중목욕탕을 보유하였다.

 

에세네파에 입단하길 원하는 자는 세개의 상징, 즉 곡괭이와 앞치마, 흰 옷을 받았다.

그리고 1년간의 견습 기간이 지나면 지원자는 목욕을 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이어서 2년간의 견습이 있고 이 기간이 끝나면 지원자는 공동의 식사에 참여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정규회원이 되기 전에 그는 내부의 규정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서약을 하였다.

아이들은 정규회원이 될 수 없었으나 교육을 받았다(회원들은 사유재산을 갖지 않고 모든 것은 공동 소유였다).

대부분의 에세네인들은 특별한 의복을 짜면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왕에 대한 충성도 거절하였다.

B.C. 21년 헤롯 대왕은 에세네파에게 자기에 대한 충성의 서약을 면제해 주었다.

 

대부분의 에세네인들은 독신생활을 하였으며 양자로 받아들여진 아이들에게 에세네파의 생활양식을 훈련시켰다.

어떤 그룹은 3년간의 시험적인 결혼을 허락하였다.

결혼한 한 쌍이 이 시험 기간에 아이를 낳으면 그 결혼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물건을 사거나 팔지 않았으며 한 사람의 청지기가 관리하는 공동기금을 조성하였다.

많은 도시에 에세네파는 여행자를 위한 숙박소를 설치하였으며, 무엇인가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었다.

 

에세네파에는 노예가 없었다. 기름붓는 일이 금지되었다. 

매 식사 때마다 식전에 찬물로 목욕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들은 죽은 동물로 더럽혀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식물성 옷감인 아마포로 만든 옷을 입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에 예물을 보내었지만 성전의 종교적 의식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쿰란에서의 고고학적인 증거는 그들이 희생제사를 드렸다는 것을 보여주어서 한 때 그들은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주장을 논박하였다.

그들의 공동식사는 제사음식의 성격을 지녔다.

그들의 신학적 신앙에 대하여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The Jewish War) 2권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몸은 썩어질 것이며, 신체를 구성하는 물질들은 일시적 이고, 반면에 영혼은 불멸하며 섞어지지 않는다는 확고한 신앙이 있었다.

최선의 정기(ether)에서 발산되어진 이 영혼들은 일종의 자연 적인 마력에 이끌려 신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언젠가 그들은 마치 오랜 노예의 생활에서 해방이 되듯이 신체의 구속으로 부터 벗어나질 때 기쁨 가운데 위로 올라간다.

그들은 그리스인의 신앙의 영향을 받아 선한 영혼은 바다 건너의 처소가 예비되어 있는 데 그곳은 비나 눈이나 열로 어려움을 겪지 않으며 바다에서 불어오는 서풍의 부드러운 바람으로 신선해지는 곳이라고 믿었다.

반면에 악한 영혼은 음침하고 격렬한 소용돌이의 지옥으로 추방되어 결코 끝이 없는 극심한 형벌을 받게 된다. 


일부 에세네파의 신학적인 신앙의 기원에 대하여 테니(Tenney)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의 교리 중의 어떤 것들은 그들의 태도에 있어서 스토아 철학과 유사한 점으로 보아 이방의 사상과 접촉한 데 서 유래한 듯이 보인다. "

흥미롭게도 그들은 복음서들에서 한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4. 쿰란 종파

 

그리스 문화가 접목되는 시기에 유대인의 독특한 공동체가 사해의 북단 서쪽에 위치한 불모의 분지에 거주하였다. 

이 종파는 여기서 B.C. 2세기부터 A.D. 70년 경까지 번영하였다. 

고고학적 증거는 이 종교적 공동체가 그 유물이 발굴된 수도원에 일부가 살았고 일부는 근처의 동굴에 살았음을 보여준다. 

이 동굴들에서 발견된 항아리 속에 보관된 문헌들은 매우 가치있는 것이었으며, 이전에 발견된 것 중 가장 놀랄 만한 고고학적 발견중의 하나가 되었다.

전체로 보존된 문헌들이나 단편으로 보존된 문헌들이 11개의 각기 다른 동굴에서 발견 되었다.

이 문헌들은 그 내용들과 함께 본서의 다른 장에서 살펴질 것이다.

이 종파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를 찾으려면 12장의 “사해동 굴에서 발견된 문헌들"을 보라.

 

쿰란에서 발견된 이 수도원적 집단이 에세네파와 동일한지에 대한 학자간의 의견이 지금은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그들의 본거지를 요단 계곡의 사해 근방에 두고 있는 메시야 대망과 세례를 지키는 집단들에 대한 언급이 고대 저술들에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브루스 (Bruce)는 쿰란에서 새롭게 발견된 문서의 주인들을 에세네파와 동일시하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믿고 있다.

프리취 (Fritsch)는 넓은 의미의 에세네파란 명칭 아래 쿰란의 언약 공동체를 포함시킨 것 같다.

 

5. 열심당


요세푸스는 열심당(Zealots)의 시작을 갈릴리인 유다가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던 A.D. 6년으로 잡는다.

열심당은 공물을 바치는 것이 그들의 참된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란 이유에서 로마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을 반대하였다.

요세푸스는 그들을 유대인의 “제4 철학"으로 묘사하였다(Wars, III, 8. 1; Antiq, XVIII 1, 6).

파이터 (Robert Pfeiffer)는 열심당의 시작을 로마 통치 이전으로 잡으면서 "바리새파가 하시딤의 후예인 것처럼 열심당은 마카비 일파의 후예이다” 라고 주장한다.

유대인 역사가들은 그들을 도적과 산적떼로 묘사하지만 그들이 기치를 들었던 사상들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이 애국자들이 었음은 가능한 일이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유대인의 헬라인화를 추구하고 유대교의 신앙과 관습에 대한 노력을 금지하였을 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열심을 내었던 마타디아스와 그의 아들들과 그 추종자들의 본을 그들이 따랐기 때문에 그들은 열심당이라고 불리웠다.

그들은 또한 이스 라엘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보여준 성경상의 비느하스(민 25:11, 시 106:30 이하)의 본을 그들이 좇는다고 믿었다.

열심당은 요세푸스에 의하여 “궤변론자”로 불리웠는데,

이 용어는 열심당의 교육계획이 성격상 단순히 정치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계획된 교육과정이 그들 가운데 있었음을 암시한다.

 

A.D. 6년의 반란이 로마군에 의하여 진압되었을 때 유다 일가의 식구들은 그 정신을 잃지 않았다.

유다의 두 아들은 행정관 알렉산더에 의하여 A.D. 46년 경에 십자가형을 당하였고(Jos. Antig, XX, 5.2).

세째 아들인 메나헴(Menahem)은 로마에 대항한 A.D. 66년의 반란에서 지도권을 장악하고자 노력하였다(Jos. Wars, III, 17, 8 이하).

A.D. 66 ~73년에 있었던 전쟁에 열심당은 매우 활동적이었다.

이 반란은 A.D. 73년 5월에 마사다의 마지막 요새를 함락당하는 것과 함께 끝이 나지만 열심당의 정신은 계속되어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