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창조의 본성(本性)

4장 : 성서에서의 창조 2 [창조 주제]

w.j.lee 2024. 7. 26. 09:23

 

 

4장 : 성서에서의 창조 2 [창조 주제]

 

창조와 이야기

 

비록 창세기 창조 본문이 보통 성서 창조 사상의 우선적인 자료로 간주 되지만, 보다 많은 창조 자료들이 성서에 등장한다.

이 많은 창조 자료들은 창세기 창조 설명과 함께, 매우 다양하게 창조를 설명한다.

우리는 창세기 외의 성서 창조 설명을 '창조 주제(creation motif)'라고 부를 것이다(1장의 “성서에 등장하 는 창조" 참조).

뿐만 아니라 이 창조 자료의 일부는 P문서 또는 J문서(주로 P문 서)와 관련이 있긴 하지만, 그 외 많은 다른 내용들도 있다.

이것은 성서에 '창조신학'이라기보다 '창조 신학들'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월터 브루그만이 설명한 것과 같이, 이 창조 신학들은 “세상을 창조한 야훼를 증언한다는 사실에 의해 서로 연결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예, 창 1, 예언 포함), 지혜로(예, 렘 10:12), 영으로(창 1:2) 창조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창조 교리로 통합하고 싶어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다양성 속에 있는 성서 증언의 핵심을 훼손하는 것이다.

이 책은 창조 주제를 하나님의 본성에 초점 맞출 것인데, 하나님의 본성은 성서에서 결코 분명하게 정의되지도, 쉽게 체계화되지도 않는다.

결론적으로 성서의 창조 신학은 항상 다양하고 다차원적이다.

 

프레트하임은 구약의 창조 주제를 연구하면서 중요한 지적을 한다.

(1) 창조 사상은 하나님에 대해 논의된 모든 것의 중심이 다.

(2) 구약의 창조 사상은 관계적이다. 즉 구약의 창조 사상은 관계 형성을 하나님의 본성과 하나님의 창조에 근본적인 것으로 본다.

만물은 창조주를 반영하며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은 중요한 고찰인데, 프레트하임은 이것을 자세히 설명한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초점을 두며, 우리의 방법대로 이것을 이번 장부터 여러 장에 걸쳐 다룰 것이다.

 

관련된 창조 본문들은 범위가 너무 방대하다. 

우리는 이번 장에서 주로 창조 본문들의 다양성에 관심을 가지며, 과학적 창조관과의 비교에 가장 적절한 창조 주제의 요소들을 찾아낼 것이다.

여기에서 고려할 첫째 유형은 구약 성서의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그중 창세기 1~11장은 태초의 창조 이야기다.

창세기 1장에서 열왕기하 25장까지, 그리고 그 이후를 함께 살펴보면, 이 방대하고 다양한 역사 산문은 인류의 시작부터 이스라엘의 시작까지, 그리고 포로기의 이스라엘과 유대의 사실상의 멸망을 넘어 예루살렘의 일시적 재건에 스라-느헤미야)까지의 거대한 이야기다.

 

창조 주제의 관점에서, 이 거대한 이야기의 중요한 순간은 대홍수와 출애굽,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는 순간이다.

 

홍수 이야기(창 6~9)에서, 하나님은 P문서와 J문서의 창조물 대부분을 파괴하고, 노아와 모든 생물과 언약을 맺으며 새로운 창조를 한다(9:1~17).

이언약은 인간과 동물에 제한을 둘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제한을 두는데, 하나님은 결코 같은 방법으로 피조물을 심판하지 않기로 선언한다.

이것은 창세기 1장 26~30절에서 이미 시작된 창조주와 피조물의 상호 의존 관계를 발 전시킨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과 동물에게 창조의 책임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이들 행동에 의해 기꺼이 어느 정도 제약을 받는다. 

 

비슷한 방식으로, 출애굽을 통한 이스라엘 국가의 창조에서 하나님과 백성을 더 나은 상호 의존 관계로 엮는 시내산 언약이 특징적이다.

비록 출애굽 이야기가 관례적으로 '창조'보다는 '구속(redemption)'으로 분류되기는 하지 만, 프레트하임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출애굽 도중에 일어난 대부분의 사건에 대한 이해의 근거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프레트하임은 출애굽기 1장 7 절을 중요하게 보는데, 이 구절은 출애굽 이야기가 시작될 때,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P문서의 창조적 명령에 복종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집단 학살(출 1:8~16)로까지 이어지는 바로 (Pharaoh)의 이스라엘 인구 제한 시도는 창조에 대한 위협이다.

 

이에 대응하여 하나님은 일련의 징조들, 특히 출애굽기 7~10장의 저주들과 홍해를 가르는 일(출 14~15)을 행한다.

이런 징조들은 창조와 비슷한 규모로, 창조의 적(바로) 을 향해 우주적 위협을 가한 것이다.

특히 홍해 횡단은 바로를 궁극적으로 격파한 극적인 장면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거룩하게 질서 지어진 섭리 체계로 되돌아감을 의미하는 일련의 기적들을 통해 창조는 스스로 회복되고, 이스라 엘 민족은 광야에서 풍부하게 공급되는 음식과 물을 먹고 마신다(출 15~17).

 

이 이야기에 이어서 예배 공간인 성막의 건축이 묘사된다(출 25~31, 35~40). 

성막 묘사와 P문서의 창조 묘사 사이의 유사성이 오랜 기간 주목받았는데, 이 것은 우리가 3장에서 우주 신전으로서의 창조에 대해 살펴본 것과 유사하다. 

 

더욱이 성막 묘사는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는 복잡한 이야기와 함께 나온다.

현대 독자들은 모호성과 복잡성 때문에 비교적 이 본문을 자세히 연구하지 않지만, 이 본문은 이스라엘 세계관과 창조관에 대한 풍부한 통찰을 담고 있다.

 

다음에 다루겠지만(5장의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고 방식"), 이 율법은 '정결'과 '부정', '거룩한 '것과 '혐오스러운' 것 같은 차이로인해 기억하기 쉬운, 삶의 전체를 위해 질서 지어진 체계다. 

사회적이고 의례적인 인간 세계는 전적으로 이 체계에 포함되고, 농업 세계와 자연 세계도 마 찬가지다.

세계는 공생하며 존재하고, 보존과 번영을 위해 서로 의존한다.

 

율법(토라)은 유대인의 종교적 세계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율법은 창세기부터 열왕기하까지, 그리고 성서의 더 많은 곳에 나오는 창조와 구속을 설명하는 중요한 이야기에 잘 통합된다.

토라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수많은 구별과 경계는 우리의 세계관과 매우 다른 세계관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우리가 토라를 통해 유대인의 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특히 법칙, 창조, 종교, 과학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그럴듯한 범주화에 저항하는 것은 배울 만하다.

 

이제 우리가 성서의 시문학에서 창조 주제를 생각해보기 전에, 시편 19편을 인용해 이 절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시편 19편은 자연법칙(해가 뜸)을 토라에 너무 밀접하게 관련시키기 때문에 자연법칙과 토라는 창조주에 관계되는 방식뿐만 아니라 창조주의 본성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상호 보완적으 로 보이는 것이 분명하다.

만약 하나님, 인간, 자연 세계가 상호 의존적이라면, 마찬가지로 법칙, 창조 같은 추상적인 개념도 상호 의존적이다.

 

[태양이]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으로 돌아가니, 그 뜨거움을 피할 자 없다.

주님의 교훈은 완전하여서 사람에게 생기를 북돋우어 주고, 주님의 증거는 참되어서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준다.

(시 19:6~7)

 

창조와 시

가장 장엄한 몇몇 시편은 모든 자연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찬양하는데(예, 시 33), 이것은 아마 창세기 창조 설명과 유사하다. 

시편 8편이 좋은 예다. 

시편 8편에서는, P문서와 마찬가지로, 인류가 피조물을 지배하는 권한을 가진다 (시 8:3~8과 창 1:26~30을 비교). 

시편의 많은 부분이 하나님의 행위(예, 시 9) 또는 하나님의 신성(예, 시 117)을 이유로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권하는데, 동일한 이유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구절들도 있다(예, 시 65,98).

창조주를 인지하는 것은 본성적으로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같다.

 

이것은 우리가 창세기 2장에서 기독교 창조 교리의 근본이라고 논의했던 우발성을 보여 준다.

모든 피조물은 태초부터 역사를 통틀어 계속해서 생존을 위해 창조주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는데(즉 피조물의 생존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철 저히 의존되어 있다),

찬양은 이런 단순한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의존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의존한 다는 것을 인지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시편 구절들은 우발성을 비슷하게 인지하면서,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을 찬양한다(예, 시 105). 

만약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기 위해 하나님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우발적이라면, 이스라엘은 국가의 형성, 출애굽을 통한 구원, 적으로부터의 계속된 해방을 통해 하나님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우발적이다.

특히 시편 136편이 창조와 구속을 이유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흥미로운 예다.

시편 136편은 P문서의 창조 설명과 잘 연결되지만(시 136:8~9과 창 1:16~18을 비교), 곧 창조 주제를 또 다른 중요한 신학 패턴, 즉 출애굽 사건처럼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에 연결시킨다(시 136:10~16).

 

모든 주 가운데 가장 크신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큰빛들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낮을 다스릴 해를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밤을 다스릴 달과 별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집트의 맏아들을 치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스라엘을 그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스라엘을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이끌어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홍해를 두 동강으로 가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바로와 그의 군대를 뒤흔들어서 홍해에 쓸어버리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 136:3, 7~15)

 

창조와 구속의 연결은 바빌론 포로기(기원전 6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제2 이사야'(사 40~55)에서 특히 효과적으로 사용되는데, 바빌론 포로기는 이스라엘인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길 갈망하고, 그들의 왕정과 성전 예배의 회복을 갈망하던 때이다. 

제2 이사야는 아마 다신론적 바빌론 종교에 반응하여 형성된 P 문서 창조 설명같이, 종종 구약 성서에서 가장 예리하게 유일신을 말하는 부분으로 일컬어진다.

오직 하나의 신만이 존재하고 그 신이 야훼라는 것을 말하는 부분으로, 유일한 창조주로서의 지위가 특히 강조된 다(예, 사 40).

 

동시에 바빌론 포로로부터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예언하는데, 이것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새롭고 영광스러운 출애굽이 될 것이고(사 40:3~5, 41:17~20, 42:16, 43:14~21,48:20~21,49:8~12, 52:11~12, 55:12), '새로운 일'이 될 것이다(42:9, 43:19, 48:6~7).

제2 이사야가 '새로운 창조'를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한데, 새로운 창조는 바빌론 포로에서의 해방을 출애굽 사건에 연결시킨 다. ('새로운 창조'를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이해하는 사고는 다른 중요한 포 로기 예언서인 에스겔 40~48장에도 등장한다.)

새로운 창조 주제, 특히 새로운 창조와 현대 과학의 연결은 9장에서 보다 충분히 논의할 것이고, 여기에서는 성서 창조 주제의 추가 요소로서 간단히 설명할 것이다.

 

제2 이사야 일부 구절은 P문서처럼 야훼를 구속자와 창조자로 묘사한다 (예, 44:24). 

그러나 다른 구절들은 창세기 1장에서 명백히 드러나지 않은 신화적 용어를 사용하며 다른 창조 패턴을 보인다.

여기에서 '라합(Rahab)'에 대한 언급이 특히 중요하다.

 

깨어나십시오! 깨어나십시오!
힘으로 무장하십시오, 주님의 팔이여!
오래전 옛날처럼 깨어나십시오! 

라합을 토막 내시고 용을 찌르시던 

바로 그 팔이 아니십니까?
바다와 깊고 넓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의 깊은 곳을 길로 만드셔서, 

속량 받은 사람들을 건너가게 하신, 

바로 그 팔이 아니십니까? 

주님께 속량 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들이 기뻐 노래하며 시온에 이를 것입니다. 

기쁨이 그들에게 영원히 머물고, 

즐거움과 기쁨이 넘칠 것이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입니다. 

(사 51:9~11)

 

여기에서 제2 이사야는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모든 주제를 하나로 묶는다.

첫 창조와 첫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의 구속은 시온을 향하는 새로운 출애굽과 새롭고 영원한 창조의 형성에 중요한 역사적 준비 단계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첫 창조가 라합과 연결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창조 신화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라합(Rahab) : 고대 신화 속에 나오는 바다 괴물로, 구약 성서의 욥기 9장 13절, 26장 12절에 등장한다. "난폭하게, 소란스럽게, 거만하게 행동하다" 라는 뜻을 가진 라하브(rahab)에서 유래된 말로, 해룡(海龍)이라고도 하고, 온몸이 물로 이루어진 괴물이라고도 한다. 바빌론 창세 신화에서는 여신 티아맛(Tiamat)이 낳은 열한 마리의 괴물 중 하나다. 유대 전승에서는 원래 천계의 천사였지만, 천지창조 때 신을 거역해서 바다에 던져졌고, 악마의 일종이라고 여겨진다.


창조와 신화

고대 근동의 몇몇 신화들은 주된 신과 혼돈의 힘 사이에서 벌어지는 어마 어마한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시리아의 우가릿에서 발견된 가나안 《바알 신 화집》 이전, 이 전승의 주요 자료는 바빌론 창조 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쉬》였다.

《에누마 엘리쉬》에서 마르둑(Marduk)은 바다의 여신 티아맛과 싸워 승리하고, 티아맛의 몸을 둘로 잘라 하늘과 땅을 만든다.

이집트 또한 유사한 창조 신화가 있는데, 창조주 레(Re)는 뱀인 아포피스(Apophis)와 싸운다.

 

비록 물을 나누는 창공의 창조와 같이, 《에누마 엘리쉬》와 창세기 1장 사이에 유사성이 있고, 또한 궁켈은 히브리 단어 '깊은과 '티아맛'이라는 이름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창세기 1장을 창 주와 혼란의 화신인 용과의 어마어마한 전투에 연결시킬 명백한 유사성은 없다.

반면 아담과 하와 이야기에서 악을 의인화한 뱀이 중요하게 등장한다(창 3).

고대 근동 신화에 익숙한 독자는 아마 이 뱀을 고대 야훼의 어마어마한 적으로 보고자 할 것이다.

 

그렇지만 창세기 창조 설명과 다른 신화들 사이의 이 유사성들은 개략적인 것에 불과하다.

고대 신화와의 보다 실질적인 관련성이 성서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특히 우가릿에서 발견된 《바알 신화집》을 고려할 때 그렇다.

《바알 신화집》에 나오는 전투는 《에누마 엘리쉬》에 나오는 마르둑과 티아맛의 전투와 너무 유사하다.

즉 바알(Baal)은 마르둑에, 얌(Yam)은 티아맛에 대응된다 (티아맛은 또한 구약 성서에서 묘사되는 리바이어던 혹은 라합과 대응되는 듯하다.)

존 데이(John Day, 1948~)는 이 신화적 주제의 인식을 보편화하기 위한 많은 연구를 해왔는데, 그는 이 신화적 주제를 '신과 용/바다의 전투'로 언급한다.

성서에서 이 주제는 첫 창조 때에 발생한 전투로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구원 또는 하나님의 왕 되심에 연결되는 듯하다(예, 시 29, 65, 74:12~17, 77:16~20, 89:7~19, 93, 104:5~9). 

이와 유사한 신화적 내용이 '신적 전사(Divine Warrior)'의 현현으로 알려진 부분에서 드러난다. 

즉 마르둑과 바알 같이, 야훼는 심지어 창조가 명확하게 묘사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종종 폭풍, 바람, 비와 함께 나타나는 폭풍 신으로 묘사된다(예, 출 15:1~18).


신화적 투쟁 이야기는 특히 욥기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주제다.

욥기는 아마도 주제 때문에(불가해한 상황에 직면해서 하나님의 방법을 설명하는 신정론), 창조에서 하나님의 역할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

태초의 창조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에서 투쟁 이야기가 수없이 언급되며(욥 9:8, 9:13, 26:12~13, 38:8~11), 신적 전사의 현현 또한 두드러진 특징이다(욥 38:1).

 

그러나 두 짐승 베헤못(Behemoth, 욥 40)과 리바이어던 (Liviathan, 욥 41)의 자세하고 환상적인 묘사 에서, 우리는 이 주제가 창의적으로 발전하여, 창조를 위한 태초 전투와 아무 런 연관이 없게 되는 것을 본다.

이 두 짐승은 종종 각각 하마와 악어로 해석 되지만, 존 데이는 그것들이 아마 신화적 괴물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특히 리바이어던은 치명적이고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용으로 묘사되고,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 두 짐승을 정복하거나 길들일 수 없다고 여겨진다.

이 본문의 의미는 신화적 괴물이 인간의 통제 혹은 이해를 훨씬 넘어서는 것처럼, 하나님의 방법은 그보다 훨씬 어마어마하다는 말이다.

 

윌리엄 브라운은 시편 104편이 욥기 38~41장의 흥미로운 대응 본문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욥기처럼 시편 104편이 창조의 풍부한 다양성을 묘사하고, 바다에서 '노는' 리바이어던을 언급하기 때문이다(시 104:26).

하나님과 바다 사이의 어마어마한 전투를 말하는 본래의 신화적 상징은 더 이상 부각되지 않고, 두 본문에서 리바이어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질서 지은 세계에 거하는 하나님의 피조물 중 하나다.

 

신화적 여신인 용의 상징이 길들여지고 적응될수 있다는 것은, 다른 고대 근동 문화를 상당히 경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고대 근동 창조 신화가 이스라엘 문화에 어느 정도까지 저항하면서 남게 되었 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용과의 전투 주제가 당대 정치학에서 사용될 수 있는 흔한 은유가 되었다는 사실(예, 시 87:4, 사 30:7), 또는 그 주제가 하나님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한 미래의 종말적 처벌에 대한 진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예, 암 9:3, 사 27:1) 에서 보다 잘 설명된다.

심지어 이 주제는 다니엘의 환상에서, 바다에서 나와 하나님을 반대하는 네 마리 괴물로 묘사된다(단 7).

이것은 결국 기독교계에서 바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 보이는 악마의 이미지(계 12, 13, 20)가 되기에 적절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용/바다와 투쟁하는 이미지는 다양하게 해석되기 때문에 모호하긴 하지만 상당히 중요하고, 이것은 우리에게 창조 주제가 어떻게 다른 신학적 주제들과 연결되는지 보여준다.

물을 분리시킴으로써 바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준 홍해 사건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사야 51장 9~11절은 라합과의 신화적 전투를 통한 첫 창조를 출애굽에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포로들이 시온으로 돌아올 때의 새롭고 영원한 창조에 연결시킨다.
하나님과 용/바다의 투쟁 이야기에서 일종의 과학적 의미를 추출해서, 이 주제를 '비신화 화'할 수 있다. 

이 경우, 이 이야기는 무로부터의 창조 이야기가 아닌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말하는 이야기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이전에 형태가 없는 물질에서 질서를 부여한 하나님을 말하는, 성서의 다른 창조 주제들과 연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토기장이처럼 점토로 창조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사 29:16, 45:9, 64:8, 집회 33:13, 롬 9:20~21).

그러나 아마도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말하는 창조의 가장 두드러진 예는 P문서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은 무질서의 상징인 '혼돈과 공허'와 깊은 흑암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어둠에서 분리된 빛의 창조에 의해 질서가 생긴 것처럼, 물과 육지의 분리에 의해 땅에 질서가 생긴다. 

우리는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말하는 이 창조 주제가 현대 과학에서 묘사된, 수많은 자연의 창발적 속성과 상당한 유사성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9장 참조).

 

 

창조와 지혜

창조 주제에 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성서의 지혜 문학에 등장한다(특히 잠언, 욥기, 전도서, 집회서, 지혜서),

성서의 창조 주제에 있어서 지혜 문학의 중요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지혜 문학은 다른 창조 전승만큼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약 성서 창조 신학의 대부분을 형성하고,

특히 자연법칙에 대한 현대 과학관과 비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집회서[ Ecclesiasticus 集會書 ]
요약 구약성서 외경(外經)의 한 책.
외경 중에서 가장 방대하며 초대 교회 사람들이 애독한 문서이다. 그리스어역에서 《벤 시락의 지혜》라고 하였지만, 《집회서》라는 성서는, 라틴어의 에클레시아스티쿠스(Ecclesiasticus)의 번역으로 ‘교회적인 책’ 또는 ‘교회서’라고도 번역한다. BC 180년경 헤브라이어로 시락의 아들(벤 시라) 예수에 의하여 씌어졌고, BC 130년경 이집트로 가지고 간 동명의 인물(원저자의 손자)에 의하여 그리스어(語)로 번역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이를 구약성서(그리스어역)의 일부로서 인정하였다.
이 책은 구약성서의 지혜 문학(《잠언》 《전도서》) 등과 비슷한 데가 많아 《솔로몬의 지혜》와 함께 지혜 문학서에 속한다. 제1부(1~23장), 제2부(24∼50장) 및 추가(51장)로 되어 있으나, 그 내용에는 줄거리가 없으므로 분류가 어렵다. 주로 실제 생활에 경험이 많고 구약성서에 밝은 저자가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문제를 취급하여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지혜의 시작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라는 등 지혜에 관하여 많은 것을 쓰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이 책을 ‘제2정경(正經)’으로 채택하고 있다.

지혜서( Book of Wisdom 知慧書)
구약성경 제27권 지혜서는, 그리스어를 말하는 학식있는 유대인이 집필한 것으로 추측되며 저술 시기로는, 대략 기원전 220년 ~ 50년 사이에 쓰였습니다. 주요 내용은 하느님의 지혜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그 지혜가 하는 역할을 들려줍니다. 즉 지혜는 모든 행복과 영생의 원천임을 찬미한 것으로 총 19장 436절로 되어 있습니다. 
지혜서는 개신교에는 없는 성경입니다.

참고로 가톨릭과 개신교 성경의 권수 차이: 
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기 상·하,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의 7권을 2005년 천주교 중앙협 새 번역 성경 기준으로 가톨릭에서는 정경으로 인정하는 반면, 개신교에서는 이를 외경으로 분류하고 있다. (토유마하지집바 7권)
따라서 구약은 가톨릭이 46권, 개신교가 39권으로 신약 27권을 합하면 가톨릭은 73권, 개신교는 66권이다.  

 

우리는 이미 욥기가 어떻게 하나님과 바다가 싸우는 신화적 주제를 사용하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지혜 문학으로 분류되는 다른 성서와 마찬가지로, 욥기 38~41장은 자연 세계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중요시한다.

흥미롭게도 브라운은 자연 생명에 대한 욥기의 빛나는 묘사를 비글 호를 이용한 다윈의 획기적인 항해와 비교한다.

다윈의 항해는 생명이 '다양한 생명이 있는 다중 우주'에 존재한다는 현대적 인식에 영향을 주었는데 욥기는 다윈보다 수천 년 전에 이미 이것을 언급했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주라면, 하나님은 또한 모든 지혜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인류를 하나님의 엄청나고 경이로운 창조의 상황 가운데 위치시킴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중요성, 우리 지혜의 부족함, 하나님의 지혜와 법칙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을 더 잘 평가하게 된다. 

 

이것이 전도서뿐만 아니라 욥기에서 반복되는 주제다.

전도서는 창세기 1장 또는 잠언 8:22~31과 같은 자료들과 비슷하게 질서정연한 창조를 강조하기 때문에 주목 할 만하다.

그러나 창세기 1장과 잠언 8:22-31은 하나님이 세계를 단계적으로 질서 있게 창조하는 것을 강조하지만, 전도서는 창조를 계절과 시간의 끊임 없는 반복적 순환으로 묘사한다.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
해는 여전히 뜨고, 또 여전히 져서,
제자리로 돌아가며, 거기에서 다시 떠오른다. 

바람은 남쪽으로 불다가 북쪽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고 저리 돌다가 불던 곳으로 돌아간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도,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
강물은 나온 곳으로 되돌아가,
거기에서 다시 흘러내린다. 

(전 1:4~7)

 

자연에 대한 이런 관점은 "모두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전 1:14)는 저자의 비관주의를 강화한다. 

삶에는 좋은 것뿐만 아니라 고통도 있다. 

창조 세계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반면, 우리는 누구나 피할 수 없이 죽음에 이르게 된다(전 12:1~7).

이런 관념이 2,000년도 훨씬 이전에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현대 과학적 세계관과 유사한 부분이 많은데, 특히 다윈이 주장한 적자생존을 통한 자연선택 이론이 그렇다. 

 

자연은 개체 혹은 심지어 전체의 운명을 감지하지 못한 채, 끊임 없는 투쟁과 경쟁의 반복을 통해 발전한다.

만약 이런 생명 관점에서 드러나는 공허함이 오늘날 새로운 무신론자 들로 하여금 종교에 반대하도록 이끈다면, 전도서 저자가 수천 년 전 동일한 공허한 감정을 인정했지만, 이것이 종교와 하나님에 대한 고백(모든 것 위에 계 신다)을 더욱 더 중요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전 12:13).

 

삶의 허무에도 불구하고, 전도서는 분명히 삶에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에 주목하는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위로부터 발생하는 지혜다. 

그러나 욥기에서 처럼 평범한 인간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지혜다(전 8:16~17). 

욥기에 따르면, 비록 인간이 마치 고귀한 금속을 찾기 위해 깊은 동굴을 파는 것처럼 지혜를 찾고자 해도 여전히 인간은 지혜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욥28). 

게르 하르트 폰 라트가 지적한 것처럼, "그러므로 '지혜' 와 '이해'는 하나님이 피조물 안에 주입한 '의미' 즉, 창조의 신적 신비 같은 것을 의미함에 틀림없다."

 

지혜 문학의 일부에서 지혜는 하나님에 의해 주입된 '의미'를 넘어 혹은 심지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할 때 사용한 매개체(잠 3:19)에 의해 주입된 '의미'를 넘어, 의인화된 여성의 지위에까지 높아진다.

지혜의 적절한 신적 지위, 그리고 지혜와 창조의 관계는 특히 잠언 8장의 유명한 지혜 찬양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잠언 8장에서 지혜는 중요하고 핵심적인 진술을 한다.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님께 서는 나를 데리고 계셨다" (잠언 8:22).

이 구절은 어떻게 지혜가 모든 창조 과정에서 하나님을 수행했는지를 묘사한다.

그리고 30절에서 지혜는 '전문 건설업자' 또는 '건축가'(또는 심지어 '어린아이', 의미는 불확실함)처럼 묘사된다.

아무튼 지혜는 하나님의 '기쁨'이다(8:30).

 

그러나 얼마나 정확히 지혜가 하나님과 관계되는가? 

핵심적 구절인 잠언 8장 22절의 동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가 불분명하다. 

지혜는 '창조'되었는가, 혹은 '잉태되었는가, 혹은 심지어 습득되었다는 것이 보다 적절한가?

이 불확실성과 지혜의 잠재적 신적 지위는 분명 이스라엘의 유일신 이해에 질문을 제기한다(그리고 유일신론은 특히 기원후 4세기 예수의 신성에 관계된 아리우스 논쟁에서 골치 아픈 논제가 되었다).

 

지혜는 하나님의 인격과 존재의 한 면, 아마 여성적인 면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고대 종교에서 발견 되는 것처럼) 창조주 남신의 배우자인 여신 같은 존재인가?

그것도 아니면 하나님을 수행하는 천사처럼 독립되어 있으나 창조된 독립체인가?

이런 질문 들에 자신 있게 대답하기는 너무 어렵지만, 학자들은 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태어나서, 하나님의 인격의 한 면을 묘사하는 문학 장치로 이해하며, 8장 22~31절에서 묘사된 지혜의 가변적이고 은유적인 본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지혜서 7~9장은 창조에서 지혜의 중심적 역할을 언급하며, 심지어 더 인 격화된 지혜를 말한다.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펼쳐지며, 모든 것을 훌륭하게 다스린다"(지혜 8:1).

지혜와 세계 질서의 관계는 혼돈 신화를 생각 나게 할 수도 있다(앞의 "창조와 신화" 참조).

이런 지적은 타당한데, 왜냐하면 혼돈 신화가 욥기 (또한 아마도 잠 8:29)를 제외하고 지혜 문학에서 '현저하게 부재 한다'는 것이 주목받아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잠언 8장과 비교해 지혜서에서 눈에 띄는 것은 지혜와 하나님의 인격/존재 사이에 더욱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떨치시는 힘의 바람이며,

전능하신 분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의 티없는 빛이다.

그러므로 티끌만한 점 하나라도 지혜를 더럽힐 수 없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찬란한 광채이며,

나님의 활동력을 비추어주는 티없는 거울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형상이다. 

(지혜 7:25~26)

 

만약 잠언 8장에서 지혜의 신적 지위 여부가 불확실하다면, 지혜서가 그것을 명확하게 하는 듯 보인다. 

지혜는 하나님과 동일하지 않고, '좋음'과 같은 창조된 세계의 속성도 분명 아니다.

대신 지혜는 하나님의 인격의 유출, 즉 세계에 거하며 세계를 질서 짓는 하나님의 선물(잠 8:21)이다.

그리고 지혜는 세계에 목적과 조화를 부여하며, 세계에 주입된 신적 의미 그 이상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세계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세계의 형성자'이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지혜를 인격화하여 묘사하는 구절이 집회서 24장에 나온다. 

여기에서 지혜는 하나님같이 피조물을 초월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만약 이 본문에서 지혜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명령만 기다린다는 것이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았다면, 이 본문을 하나님의 자기 묘사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으로부터 나왔으며,

안개와 같이 온 땅을 뒤덮었다.

나는 높은 하늘에서 살았고,

내가 앉는 자리는 구름기둥이다.

나 홀로 높은 하늘을 두루 다녔고,

심연의 밑바닥을 거닐었다. 

바다의 파도와 온 땅과 모든 민족과 나라를 나는 지배하였다.

나는 이 모든 것들 틈에서 안식처를 구했으며,

어떤 곳에 정착할까 하고 찾아다녔다.

온누리의 창조주께서 나에게 명을 내리시고,

나의 창조주께서 내가 살 곳을 정해주시며,

"너는 야곱의 땅에 네 집을 정하고, 이스라엘에서 네 유산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시간이 있기 전에 나를 만드셨다.

그런즉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집회 24:3~9)

 

현대 과학 시대에 특히 매력적인 지혜의 속성 중 하나는 지혜가 자연법칙에 관계된다는 것이다.

지혜는 세계의 청사진, 목적, 의미, 질서뿐만 아니라 세계의 형성자 같은 존재로, 자연 세계 어디에나 영원히 존재한다고 묘사된다.

또한 지혜는 특히 계몽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 가운에 거한다.

이 것은 반신적 지위까지 승격된, 물리 법칙에 대한 일부 현대의 추측들과 매우 유사하다(2장의 "자연법칙" 참조).

그러나 지혜에는 자연법칙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

 

지혜는 창조 사역에 적극적인 하나님의 특성을 드러 낼 뿐만 아니라, 지혜 문학의 다른 부분에서는 도덕적·윤리적·사회적 지혜가 고려된다.

즉 지혜는 과학 이상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 시대에 신학적으로 이 본문을 적용하는 방법이 바로 지혜를 자연법칙에 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세계의 신적 기반을 말하는 히브리 개념과 현대 자연법칙 사상 사이에는 분명한 연결 고리가 있다. 

이것은 예수의 재림, 성육신, 삼위일체 교리와 함께 신약 성서를 해석할 때 보다 분명해진다.

 

 

창조와 그리스도

신약 성서에서 도덕 기준을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 창조 이야기를 언급한 몇몇 구절들(예, 막 10:2~12, 고전 11:7~12)과 '용'의 특징을 묘사하며 혼돈 신화를 반복하는 부분(계 12, 13, 20)을 제외하면, 창조 이야기는 거의 그리스도에 초점 이 맞춰진다.

이 주제에 종말론적 분위기가 상당히 드러나지만, 지혜 문학에 표현된 의미는 대부분 예수의 가르침에서 더 자세히 진술된다.

가장 잘 알려진 예는 선재(先在)한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1:14, 18)인  '로고스(logos, 말 씀)'를 찬양하는 요한복음의 서두다(1:1~18).

 

요한이 '로고스'란 용어를 선택한 종교적·지적 배경에 대해 학계의 많은 논의가 있었다. 

예를 들면, 로고스가 그리스 철학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로고스를 우주에 부여된 합리적 질서 원리로 이해한 스토아 철학 개념의 영향으로 요한이 그 단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 개념이 현대 물리 법칙의 보다 고차원적 이해와 일부 유사하다는 사실은, 과학신 학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물리 법칙의 형상화로 보는 것에 대한 관심이 증가해온 이유 중 하나다(10장의 “로고스와 물리 법칙" 참조).

 

요한의 로고스 개념 기저에 있는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 개념을 숙고하는 것도 흥미롭지만, 유대 지혜 전승은 보다 그럴듯한 근거를 제시한다. 

요한복음이 로고스에 대해 말하는 것과 잠언, 지혜서, 집회서가 의인화된 지혜에 대해 말하는 것 사이에 밀접한 유사성이 있다.

요한은 로고스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실제로 바로 그 하나님이라고 말하기 때문에(요 1:1), 우리는 하나님과 관련해 로고스의 지위를 설정하는 데에 모호함을 느낀다. 

 

의인화된 지혜는 세상을 창조하는 데 중요하게 거론되고, 따라서 요한은 모든 것이 로고스를 통해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요 1:3).

지혜처럼 로고스도 빛과 비교 되고(요 1:4~5, 지혜 6:12, 7:26), 생명의 근원으로 언급된다(요 1:3~4; 잠 8:35. 지혜 8:13 참조).

지혜와 마찬가지로 로고스는 세상에 존재했지만(요 1:10, 집회 1:15 참 조), 세상은 거의 로고스를 알아보지 못했다(요 1:10, 바룩 3:31 참조).

 

또한 요한복음의 서두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설명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두 본문은 모두 명확한 어구인 '태초에'로 시작한다. 

그리고 요한이 선재한 아들을 로고스와 동일시하는 것은, 창세기 1장에서 하 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형성한 방식을 떠오르게 한다(창 1:3, 6, 9, 14, 20, 24, 26). 

여기에서 발화된 말씀은 모두 효과가 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능동적 으로 세상을 형성할 필요가 없고, 단지 세상이 생겨나도록 명령한다. 

사실 창세기 1장에서 관련 어구들은 종종 신적 허가 또는 '있으라'(예, "빛이 있으라”)의 측면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 너무 강한 표현이다.

만약 그렇다면, 창조 때 발화된 말씀은 명령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격려 행위이고, 피조물이 생겨나도록 격려하는 동시에 피조물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초월적 창조주의 역설적 모습을 보여준다.

 

일단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격려 말씀이 요한복음 1장의 신적 로고스(창조 때 하나님과 함께 일하지만 '육신'으로서 피조물의 한 부분이 됨)로 의인화되면, 파트너 관계는 더 주목을 받게 된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창조 주제가 다른 곳에서도 드러나지만(예, 시 33:6, 33:9, 119:89, 148:5, 히 11:3), 이것은 창조 주제가 요한복음 1장에서 새로운 정점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에서 '로고스'라는 용어의 사용은 창세기 1장과 분명한 유사성이 있는 반면, 이것은 또 한 히브리 예언자들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창조 주제를 하나 님의 예언적 뜻에 연결한다. 

 

이것은 아마 우리가 요한복음의 서두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인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뜻이 (율법과 예언자들에 의해서도 동일한 목적과 뜻이 표현되었는데) "은혜와 진리"(1:14, 16)와 함께 인간의 형태로 육화된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다.

하나 님은 심지어 예수 안에서 '외아들이신 하나님'으로도 불릴 수 있는, 전례 없는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1:18).

 

여기에서 묘사된 친밀감은(계시적 목적이 있는데) 잠언 8장에 나오는 하나님과 지혜 사이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비록 우리가 여기에서 요한복음의 서두에 초점을 맞췄지만, 예수와 유대 지혜 전승의 관련성은 결코 요한복음에서만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관복음서(예, 마 11:19, 25~30)와 고린도전서 1 장 15~20절에서도 그 관련성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 역사 발전의 측면에서, 인간 나사렛 예수와 선재한 신적 아들· 지혜· 로고스를 동일시하는 것은 기독교 첫 세대에 사도들과 초기 신자들이 예수의 유산, 특히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고자 했을 때 발생했음에 틀 림없다. 

이런 동일시가 오랜 기간 신학적 논증에 기반한 일종의 진화의 고리를 통해서인지,  아니면 혹시 계시적 경험을 포함해, 훨씬 갑작스러운(폭발적인) 초기 환경을 통해서 발생했는지를 알 수는 없다.

그러 나 분명 바울 서신들(우리가 가진 가장 이른 기독교 저작)은 기원후 50년대까지는 예수가 신적 존재로 인정받는 데에 문제가 없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가장 난해한 질문 중 하나는 어떻게 초기 기독교인들이 초기 유대교의 유일신 체계 안에 그리스도의 신적 지위를 수용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 로마(만신전)의 다신론적 이해에 직면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신성을 계속해서 유대교 안에서 정립하려 했다. 

그들이 아마도 유대 묵시 문학에서 보이는 반신적 인물(예, 에녹 1서 48장 '사람의 아들)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주장되어왔지만, 유대 지혜 전통이 예수를 창조 때에 하나님과 함께 선재한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문헌적 · 신학적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에, 유대 지혜 전통은 적어도 중요하게 여겨졌음에 틀림없다.

이 지혜 전통이 그리스도와 창조 사이에 자연스러운 연결 고리를 만들었다.

 

요한복음 서두처럼 신약 성서에 놀라운 진술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나사렛의 보잘것없는 목수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한참 전에, 로고스/하나님의 아들이 이미 존재했고, 심지어 태초에 세상을 창조했다는 진술이다(요 1:1~4, 1:10, 골 1:15~20, 히 1:2~3).

요한복음의 기록 시기를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1세기 말로 추정하는데, 그 이유중 하나는 요한복음이 신약 성서의 다른 부분보다 상당히 발전된 기독론을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바울 서신에 매우 발전된 기독론 진술들이 나온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후 20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만물은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 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고 전 8:6).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자신을 낮춰 인간이 되었다는 사상은 매우 일찍 정립되었다.

즉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속을 위해 책임을 감수하는 동시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빌 2:10) 모든 피조물에 의해 상응하는 예배를 받는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다른 신학적 묘사들로도 설명했는데, 그중 특히 창조와 구속을 연결하기에 유용한 것은 그리스도를 제2아담으로 묘사한 부분이다(롬 5:12~21, 고전 15:21~22, 15:45~49).

첫 아담과 같이, 그리스도는 창세기 창조 이야기와 인류의 기원에 연결되지만, 구속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역할은 새로운 창조를 하는 것이다(고후 5:17, 갈 6:15).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속 행위로 인해, 그리스도는 아담에게서 시작된 첫 창조의 완성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로 인도하는 새로운 존재다.

그러므로 새로운 아담이라는 이 간단한 암시적 주제로 인해, 창조, 구속, 종말에 대한 신학적 주제들이 함께 엮어진다.

이 사상은 성서의 마지막 장면에서 새 예루살렘이 새 땅의 중심이 되기 위해 새 하늘로부터 내려올 때(계 21~22)에 모든 것이 성취되는 것으로 상징적으로 묘사된다.

 

우리는 9장에서 종말론적 차원을 보다 깊게 탐구할 것이고, 지금은 판넨 베르크가 발전시킨, 창조에서 그리스도의 역할 에 대한 주장을 구체화하며, 예수 부활의 의미를 간단히 강조할 것이다. 

바울 신학에서 예수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십자가에서 예수의 죽음을 입 증한 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당시 유대 상황에서 부활이 갖는 더 포괄적인 중요성 때문이다.

바리새인 같은 초대 유대교 종말론적 분파들은 죽은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의 날에 부활할 것으로 믿었다.

바울은 젊은 시절 바리새인으로 살았는데, 그는 예수의 부활을 곧 도래할 보편적 부활의 '첫 열매'로 해석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왔고(고전 15:20, 23), 그리스도가 우주적 왕(고전 15:24~25, 빌 2:11)이라는 의미가 되었다.

 

판넨베르크의 요점은 종말적 사건으로 보이는 부활이 예수에 대한 모든 신학적 진술을 해석하는 열쇠라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로 인해 인간 나사렛 예수는 태초의 세계 창조에 참여했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 존재로 여겨진다.

예수의 부활은 모든 창조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구체화되고 예수를 통해 의미를 발견하는 (창조의 시작에서부터 포함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로 성육신한 것은 세상이 지닌 통일성의 기준이 되며, 또한 창조 때의 모든 사건과 모든 형태가 결정되는 기준이 된다. 예수와 하나님의 연합이 우선 예수의 부활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오직 예수의 부활을 통해 세상의 창조가 완성된다. 

 

만약 이것이 우리에게 창조와 구속에 대해 매우 인간 중심적 관점을 취하게 한다면, 우리는 신약 성서에서 창조가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류가 아닌, 성육신한 아들 그리스도에 초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튼 로마서 8장은 안목을 상당히 넓힐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본문이며, 최근 생태 신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광범위하게 인용되고 있다.

이 본문은 예수의 부활 주제를, 하나님의 영이 믿는 자들에게 부여되는 종말론적 시대의 시작으로 발전 시킨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롬 8:11).

 

바울은 현재를 고통의 시기로 말하며 새로운 종류의 삶을 묘사하는데, 이 것은 마지막 날에 죽은 자들의 부활을 예시하는 유대 묵시적 사조에 의해 예 견된 종말론적 모습이다.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 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롬 8:18~23)


비록 종말론적 과정이 우선적으로 인간(하나님의 자녀들)의 유익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지만, 적어도 다섯 번 이상 강조된 '피조물(그리스어로 ktisis)'이란 단어에서 드러나듯이, 종말론적 과정은 피조물 전체에 해당한다. 

비록 바울이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하고 '썩어짐의 종살이'에 있음을 말하면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창 3)을 언급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우주적 범위에 관계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첫 열매"로 나타난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속은 단지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뿐만 아니라 피조물 전체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피조물이 "신음하며 고통을 겪고 있다." 즉 새로운 창조가 도래되기 전에 필수적인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피조물은 인류와 공동운명체로 고통을 겪지만, 또한 미래에 같이 구속의 혜택을 받을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 주제를 결코 인간 중심적이 아닌, 우주적 관점으로 발전시킨다.

 

로마서 8장은 또한 이 모든 것이 성령의 힘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언한다.

성령은 믿는 자들에게 새 창조의 생명을 부여하는 영이자(예, 9 절), 부활한 그리스도의 생명이다(11절).

첫 창조 때에 물 위로 움직이며(창 1:2) 현존했던 바로 그 영이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영(Spirit)'은 또한 '숨(breath)'과 '바람(wind)'을 의미하기 때문에, 영은 하나님이 첫 인간에게 불어넣은 생명의 호흡("생명의 기운", 창 2:7) 이자, 대홍수 때에 처벌받은 세대의 숨("코로 숨을 쉬며 사는 것들", 창 7:22)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서, 영/숨은 생물학적 생명의 근원이며(시 104:29~30), 새로운 종말론적 생명의 근원이다.

바로 이 영이 성령 강림 때에 새로운 교회에 생명을 주었다(행 2, 요 20:22).

 

성령의 언급은 삼위일체의 제3위격을 떠오르게 하고, 그래서 만약 우리가 어떻게든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하는 데 혼동이 생긴다면, 

(a) 바울 서신들 이 창조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틀림없이 종말론적으로 발전된 사상으로 볼 뿐만 아니라, 

(b) 바울 서신들이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사역과 성령의 종말론적 사역을 매우 자세히 연결 짓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 때에 하나님의 사역을 성령의 사역에 관련시키지 않고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서 삼위일체 신론이 제기되는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하다.

 

물론 그리스도와 창조에 대해 여기에서 말한 것 대부분이 기원후 1세기 이후에 발생한, 집중된 신학적 숙고와 논쟁으로부터 기인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초대 교회는 골로새서 1장 “그리스도는 세상을 창조한 동시에 십자가에서 범죄자로 죽음으로써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시켰다" (골 1:20)에 포함 된 사상 같이, 신학적으로 발전된 사상을 계속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성숙한 기독론을 발전시키는 데에 수백 년이 걸렸다.

이 역설적 사상들은 설명에 의해서라기보다, 더욱 예리한 역설적 용어(인간성과 신성을 동시에 가진 그리스도)로 재규정할 때 가장 잘 해석되었다.

그러므로 칼케톤 공의회(기원후 451년)는 그리스도의 신성의 측면, 즉 그가 '시대에 앞서 아버지로부터 태어났다'는 것 과, 그리스도의 인성의 측면, 즉 '말세에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났다'는 것 을 말할 수 있었다.

이 두 본성은 한 분 그리스도에게서 "혼동 없이, 변화 없이, 분리되지 않고, 나눌 수 없는" 채로 존재한다.

이런 언어는 기독교 첫 세기 언어와 극과 극으로 다르지만 신약 성서 본문을 이런 의미로, 즉 시대착오적(후대에 충분히 인지되었던 개념들과 실재들로 성서 본문을 읽는 것)으로 읽지 않는 것은 어렵다.

우리가 다음 절에서 논의할 삼위일체 신관이 가장 적절한 예다.

 

 

창조와 삼위일체 신관의 시작

만약 칼케톤 공의회가 예수의 두 본성을 말하며 신약 성서에 내포된 역설 을 강화시켰다면, 우리는 거의 2,000년을 거슬러가 이 모든 것 뒤에 타당한 신학적 추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약 성서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인간으로 죽은 하나님의 아들이 (마 27:40~43, 막 15:39, 롬 5:10) 바로 태초에 세상을 창조 하는데 일조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골 1:13~20).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하나님이라면, 그 아들은 세상을 창조하기에 충분한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창조와 구속은 동일하고 상호 보완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로서 함께 다뤄져야 한다.

여기에서 아마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역설적인 삼위일체 신관이 시작된다.

인류를 구원한 하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남으로써 구원을 이루었고, 그러므로 이 분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한 바로 그 하나님임에 틀림없으며, 현 세계에서 심지어 지금도 영으로 일하는 바로 그 하나님이라는 관찰로부터 삼위일체 신관이 나온다.

 

이런 접근이 우리에게 좋은 신학적 의미를 줄 수도 있지만, 신약 성서에서는 결코 명확하게 진술되지 않는다.

삼위일체를 지적하는 듯 보이는 가장 분명한 신약 본문은,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마 28:19) 세례를 주라고 당부한 부분인데, 이 본문은 예수가 세례받는 순간, 즉 사실상 삼위일체인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예, 마 3:16~17). 

 

다른 본문에서 도 찾아볼 수 있는데, 요한복음의 마지막 가르침으로 불리는 곳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 자신을 생각나게 하고 자신을 증언할 것이라고 말한다(요 14:26, 15:26).

바울 서신들 중에 명백히 삼위일체로 보이는 한 구절이 있는데(고후 13:13), 이외에도 바울은 어디에서든지 성부, 성자, 성령을 매우 밀접하게 연관시킨다.

특히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로마서 8장 18~23절의 바로 앞부분이 그렇다(롬 8:15~17).

 

그리고 바울 신학에서 철저히(또는 명백하게) 삼위일체로 보일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특히 교회(이 땅에서 새 창조의 표상) 에 대한 가르침이 그러한데,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예, 고전 10:32)이자 "그리스도의 몸"(예, 고전 12:27)이며, 성령의 교제 · 참여(고후 13:13)를 유발한다.

 

요약하면 신약 성서에 삼위일체 신학의 태동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있고, 삼위일체는 경륜적(economic) 용어로 표현된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이 창조와 구속의 "경륜". "계획"(엡 1:10) 속에서 상보적 역할을 통해 밀접하게 연관된다. 예를 들면, 로마서 11장 36절은 "만물이 그[하나님]에게서 나고, 그[성령]로 말 미암아 있고, 그[예]를 위하여 있습니다"라고 기록되었는데, 이것은 섭리적 삼위일체 신관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반면 내재적(immanent) 용어,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관계와 행위에 의 해삼위일체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은 후대에 적합한 용어의 발전이 있은 후 에 가능했다.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160~220)가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가 서양 신학에 내재하는 삼위일체 논의의 근거를 형성한 단어인 'trinitas(삼위일체)'와 'persona(위격)'를 중요하게 했기 때문이다.

 

비록 역사 비평가들이 대단히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삼위일체 신관을 심지어 구약 성서에서도 추론할 수 있다.

성부, 성자, 성령에대한 기독교 신앙이 창세기 창조 이야기 같은 성서 본문에 의해 지지받을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하려는 시도는, 적어도 기원후 2세기 이레니우스(Eirēnaios, 130~202) 시대 이래 신학자들에게서 계속되었다(예, 이레니우스는 성자와 성령을, 점토로 아담을 만든 성부의 '양손'에 비유한다35). 

 

현대 학자들도 세심한 주의를 기 울이며 비슷한 연구를 해왔다. 

우리는 이미 구약의 창조 주제가 '시작 단계'에 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그런 하나의 교리로 정리될 수 없다는 부르그만의 경고를 살펴보았다(위의 "창조와 이야기" 참조). 

그러나 구약의 창조 주제는 창 를 삼위일체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모든 자료를 포함한다.

 

왜냐하면 야훼는 말씀으로(창 1:3), 지혜로(렘 10:12), 영으로(창 1:2) 창조했다고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제임스 매키는 말씀, 지혜, 영이 구약과 신약의 창조 주제에서 서로 혼용되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불가 피하게 우리로 하여금 말씀, 지혜, 영의 신학적 지위를 삼위일체 방식으로 생각하게 한다.

 

비록 우리가 구약(또는 심지어 신약)의 창조 본문을 삼위일체 방식으로 발전 시키는 역사적 관점을 꺼릴지 모르지만, 창조 본문에는 역사적으로 접근하기 적합한 요소들이 있다. 

더군다나 삼위일체적 접근은 창조 본문이 처음 기록 된 후 수천 년간 우리의 관점에 수많은 유익을 제공했고, 많은 신학적 혁명을 야기했다.

 

삼위일체적 접근의 첫 번째 장점은 초대 교회로 거슬러가면, 구약과 신약 모두 근본적으로 동일한 하나님의 혁신적인 계시를 증언한다는 신앙을 고수 하는 신학적 성서 해석 전통(따라서 역사적 시대착오를 피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관점을 신약에서 볼 수 있는데, 신약은 수많은 구약 본문들을 취해 그 본문들이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 해석은 유형론적 성서 해석 방법으로 알려졌는데, 구약의 내용을 신약에서 발생할 것을 예시하거나 예측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격언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구약 신약이 숨어 있고, 신약에서 구약이 드러난다."

 

우리가 신약을 구약보다 중요하게 다루고 싶어질 때, 우리는 신약이 구약 없이는 이해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만약 구약과 신약이 동일한 기독교 정경의 부분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정보를 주고 서로 안내해준다는 신학적 접근이 받아들여진다면, 구약과 신약의 상호 연결을 강조하는 것이 적절하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이번 장에서 구약과 나란히 신약의 창조 자료를 언급함으로써 상호 연결하기 시작했다.

 

만약 현대 역사 연구가 (삼위일체 같은 후대 개념을 암시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본문의 역사적 상황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고수한다면, 이때 기독교 해석은 우리가 또한 정경의(canonical) 상황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으로 잘 대답할 수 있다.

 

결국 성서는 기독교의 근본 기준이고, 본질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주장한다.

결과적으 로 성서 창조 본문을 신학적으로 읽는 것은, 이 본문이 역사적 관점에서 무슨 의미가 되던 간에, 삼위일체 신관을 받아들이도록 암묵적으로 요구한다.

 

삼위일체 관점의 두 번째 장점은 해석학적 유용성에 관계된다. 

성서 창조 주제를 다소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탐구하는 이 책에서, 로고스를 창조의 기 저에서 작용하는 원리(자연법칙을 포함)에 연관시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 

창조가 현대 진화 과학을 암시함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영구적인 창조 행위에 현존하는 내재적 하나님으로 드러날 수 있다.

 

이것은 삼위일체 관점의 세 번째 장점에 관련된다. 

5~6장에서 논의하겠지만, 현대 과학 시대에서 하나님을 세계로부터 분리시키는 이신론의 영에 저항하기는 힘들다.

우리의 종교 사상은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이신론의 영에 의해 다각도로 물들었다.

반면, 삼위일체 관점은 하나님이 역사를 통해 세계를 창조하고 구속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삼위일체 관점은 성서의 유신론적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따라서 비록 삼위일체 관점이 성서보다 후대에 더 발전된 신관이지만 이 관점은 단언컨대 유신론적 분위기를 현대 이신론 시대에 정착시키는 최선의 방법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웹스터는 성서 신학을 연구하며, 삼위일체에 대한 중요 한 주장을 했다.

그는 너무 자주 성서가 명백한 자연주의, 또는 그 반대인 명백한 초자연주의 관점으로 읽혔다고 주장한다.

자연주의자는 성서가 우선적으로 역사 문헌으로써 인간 기원의 면에서 해석되어야 하고, 사실상 2차적 해석 단계, 즉 성서가 하나님의 자기 소통의 역할을 할 가능성이 경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초자연주의자는 반대로 성서의 역사적 요인을 넘어 신적 계시의 역할을 강조한다.

웹스터는 이 두 주장 모두 성서를 이해함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이해함에 있 어서도 치명적 결함이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 두 주장은 유신론과는 거리가 먼, 하나님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이원론을 드러낸다.

이것은 일종의 이신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웹스터는 말한다.

 

이원론은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에 대한 신학 담론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축소시킬 수밖에 없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가 비삼위일체적으로 인식될 때, 그리고 특히 부활한 그리스도의 현존과 성령의 활동에 대한 기독교 담론이 세상에서의 신적 행위를 말하지 않을 때, 이 신적 행위는 피조물과 무관하며 어떤 실제적 관계도 없게 된다. 하나님은 사실상 외부로부터 피조물에 개입하지만 피조물과는 관계가 없는, 인과론적 힘에 불과하게 된다.


해결책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지지하는 것이며, 이것은 삼위일체 교리를 단도직입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다. 

성서에 관한 한, 웹스터가 지적한 대로, 우리는 성서 본문이 '만들어진 것임'과 동시에 하 나님의 자기 계시의 매개체로서 성스러운 지위를 갖는다는 변증법적 진술을 해야 한다.

 

비록 성서 창조 주제와 삼위일체 신관의 관련성에 관한 이번 절의 논의가 다소 모호하긴 하지만, 우리는 이 논의가 이후 성서 창조 자료를 과학적으로 해석할 때 중요하게 다뤄질 해석학적 접근의 토대를 놓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결론

성서의 창조 주제는 하나의 간결하고 잘 정의된 개념 혹은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그런 '하나의 신학이 아니다.

창세기 1~2장의 창조 이야 기들은 종종 확고한 성서 진술로 받아들여지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들이 서로 구별되고 다른 신학적 주장을 할 뿐만 아니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양한 창조 본문들이 성서에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성서의 다양한 창조 본문들은 창조 주제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성서로부터 하나의 창조 교리가 도출될 수 없으며, 장르, 목적, 내용에 있어서 그야말로 너무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자료들은 유일한 창조주인 이스라엘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한다는 사실에서 연결된다.

 

우리는 성서 창조 자료를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학적 규정으로 읽는 경향이 있지만, 창조 자료는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신학적 규정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이 장의 마지막 몇 절에서 우리는 지혜서와 신약의 창조 자료를 이해하는 방법을 간단히 검토하면서 이 내용을 분명하게 언급했다.

우리는 성서 창조 자료가 기독교인들이 수천 년이 지난 후 에도 여전히 개념화하기 어려워하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신학적 깊이를 암시한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다음 장에서 과학적 · 철학적 연구로 방향을 전환하기 전에, 과학- 신학 영역에서 거의 제기되지 않지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묘사를 이해하는 데 본질적인 한 가지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적절한 인간의 응답으로서의 예배, 경외, 경이에 대한 것이다. 

성서에 보면 창조에 대한 깊은 묵상 찬양으로 이어지는 본문이 있다. 

실제로 심지어 하나님의 구속 행위가 고려되기도 전에 창조는 홀로 예배의 충분한 이유로서 성서에 등장한다.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
주님은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만물은 주님의 뜻을 따라 생겨났고, 

또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계 4:11)

 

창조를 이유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본문 중 가장 눈에 띄는 표현 중 일부가 시편에 등장한다. 

예를 들면, 시편 8편은 인류가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우러나오는 찬양을 묘사하는 한편, 시편 104편은 모든 창조된 생명으로 인해 찬양하고, 시편 98편은 땅의 경치로 인해 찬양하며, 시편 19편은 소리 없는 하늘로 인해 찬양한다.

그러므로 성서의 관점에서 보면, 다양한 피조물들은 창조주를 향한 우주적 찬양의 움직임에 참여하면서 서로를 격려한다.

이것은 우리가 빠지기 쉬운 인간중심주의에 반대하는 가치 있는 대안을 제공하는데, 욥기 38~41장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한 말이 한 예다. 

이것은 보다 보편적인 관점을 제시하고자 하는 최근 생태 신학의 핵심 내용이다. 

 

구약의 창조 자료에서처럼, 신약의 창조 자료에서도 찬양의 상황은 비슷하다.

신약 창조 자료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 자료가 예수에 관계된다는 것과, 그 자료가 예수의 신성, 예수의 선재, 창조에서 예수의 역할, 예수를 찬양할 의무(구약에서 야훼 홀로 찬양받은 것처럼)에 대한 놀라운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예, 빌 2:5~11).

이것은 기독교 창조관과 예배의 필요성에 대해 심오하면서 섬세한 중요성을 드러낸다.

 

데이비드 윌킨슨이 지적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언급하지 않고는 우주가 피조물로써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

자연 신학 (즉 '자연' 세계의 이성과 경험에 근거한 신학)의 관점에서, 이런 진술은 경험상 어떤 단도직입적인 방법으로도 입증될 수 없다.

이것은 자명한 일 이다.

 

윌리엄 페일리는 창조주를 최고의 기술을 지닌 시계공에 비유하며, 자연 신학에 가장 적절한 하나의 예를 제시했다.

이런 설계 논증은 항상 자연에 대한 관찰보다는 계시에 의해 평가되어야 하는 골고다의 기독교 하나님이 아닌, 철학자의 신(인간 논리와 유비의 신)을 구성한다는 이유로 공격받아왔다.

 

반면 현대 진화 신학은 종종 고통당하는 그리스도가 피 조물의 진화적 고통을 '속한다'는 것을 제시하며(8장 참조), 두 주장을 결합 한다.

우선 우리는 그리스도를 창조의 중심에 두는 것이 성육신의 신비를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는 것에 주목하고자 한다.

 

즉 그리스도의 중심성은 계시된 신비이고, 기독교의 핵심이다.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 1:14)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었고,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이것은 새로운 무신론이 자연 신학을 부인하며 창조주와 피조물의 결속을 끊고자 시도할 때, 거의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과학 또는 창조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지지 혹은 반대하는 어떤 가설도 충분하지 않다. 

또한 기독교인에게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우주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또한 우주를 속량한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않는 어떤 가설도 충분하지 않다.

 

이것은 단도직입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이 합리적인 과학적 가설로, 또는 전적인 객관적 타자로 여겨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기독교 인들이 찬양 없이, 괜찮은 논리만으로는 창조의 중요성에 적절하게 반응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자와 성령의 풍부한 신성이 피조물에게 부여됨 에 따라, 피조물은 이에 보답해 하나님에게 최고의 감사를 올릴 의무가 있다. 

 

대니얼 하디에 따르면, "창조와 종말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데, 이 영광은 창조와 종말이 그것들을 향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위를 통해 받은 바로 그 영광이다."

자연주의에서 발견되는 창조에 대한 순수한 과학적 관점은, 결코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이 요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이 과학적 관점은 창조된 세계의 물리적 본성을 묘사할 수 있고, 심지어 피조물이 왜 존경받아야 하고 경이로움의 대상인지 수많은 이유를 제시할 수 있지만, 피조물을 창조주와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과학적 관점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 의 영광의 순간에 스스로 참여할 수 없다.

결국 이것은 과학적 관점으로 성서 창조 본문을 해석할 때 발생하는 심각한 결함이다.


출처 : 성서의 본성(마크 해리스 지음, 장재호 옮김, 도서출판 두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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