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창조의 본성(本性)

6장 :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w.j.lee 2024. 7. 26. 09:22

 

 

6장 :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무로부터의 창조

 

지난 150년간의 과학 혁명은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법에 지대한 영행을 끼쳐왔다.

물리학과 생물학에서 강조된 진화 모델은 하나님의 초월성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친밀하게 세계에 현존한다는 성서 관점을 재평가하게 했다.

 

이 장에서 우리는 성서 창조 자료의 신학적 구조를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바라볼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유형을 구별하기 위해 종종 사용되는 두 범주, creatio ex nihilo(무로부터의 창조)와 creatio continua(계속적 창조)를 고찰할 것이다.

이 범주들은 종종 과학-신학 영역에서 사용되었지만, 성서의 창조 사상과 관련해서는 지위가 확실하지 않다(앞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범주들이 성서에서 드러나는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 모델에 대한 중요한 사항들을 제공한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비록 이 범주들이 성서 본문이 처음으로 기록되었을 때보다 수백 년 뒤에 형성되었지만, 그것들은 성서 본문을 신학적으로, 그리고 과학적 해석과 연결해서 읽는 유용한 방법을 제공한다.

 

우리는 이미 무로부터의 창조(하나님이 태초에 세계를 창조할 때, 글자 그대로 '무로부터' 창조했다는 사상)를 언급했다(1장 참조).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세계에 의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세계의 한 부분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반면에 세계는 존재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이것은 범신론(세계가 신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믿음) 또는 범재신론(세계가 신 '안에' 있거나 신의 한 부분이라는 믿 음)과는 대조적인, '유신론(신이 세계와 구별되는 객관적 존재라는 전통적인 믿음)'의 기본 진술 중 하나다.

 

유신론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인격적이고 활동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은 태초에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했고, 계속 세계를 지원하고 유지시키며, 세계 안에서 활동한다는 말이다.

세계가 우선 (태초에) 존재하기 위해 하나님에게 의존했기 때문에, 세계는 존재를 지속하기 위해 하나님에게 계속해서 의존한다.

세계는 말하자면 우발적 · 의존적이다.

 

사실, 만약 하나님이 매 순간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때 이 말은 세계가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며,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무로부터의 창조의 신학적 지위는 어떻게 사물이 시작되었는지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어떻게 사물이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는 지에도 관계된다.

요약하면 무로부터의 창조는 '태초'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 창조된 세계와 창조주의 계속적인 관계에 대한 진술이다.

 

윌리엄 스토저는 하나님과 빅뱅에 대한 논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조는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관계, 즉 궁극적 의존의 관계다."

이 관계가 하나님 측면에서는 초월적이고, 세계의 측면에서는 우발적이다.

이 관계를 다른 방법으로 정립해보면,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반면, 세계는 하나님에게 의존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은 전능하고, 세계가 계속해서 존재하도록 지원한다.

하나님이 세계의 자연 질서를 유지시킨다는 견해가 성서에 등장한다.

이 부분은 낮과 계절의 리듬으로 인해, 그리고 수확물의 공급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구절이다(예, 시 74:16~17, 145:15~16, 렘 5:24).

 

복음서도 비슷하게 하나님의 지원이 모든 참새와 들의 백합화를 돌 볼 만큼 모두에게 충분하다고 말한다(마 6:25~29, 눅 12:6, 12:24~28).

하나님의 명백한 지원이 없으면 세계가 파괴된다는 사상은 노아의 홍수 이후, 무지개로 상징되는, 하나님이 모든 생물/땅과 맺은 언약에서 뚜렷하게 발견된다(창 9:12~17).

 

무로부터의 창조 관점에 흐르는 하나님의 초월 사상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초월성을 말할 때, 하나님이 마치 너무 멀리 있어서 세계와 접촉하지 않는 것처럼, 창조된 세계 위에, 그리고 창조된 세계를 넘어 존재한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발견되거나 발견되지 않는 어떤 공간적 또는 시간적 준거 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초월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처럼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시간과 공간 밖에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전능하기 때문에, 시공간 안의 모든 사건 또는 물체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는 힘으로 존재한다.

 

모든 사건 또는 물체가 무로 회귀하려는 것을 막는 분이 하나님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했다는 주장과 유신론은, 하나님이 세계를 지원하고 유지 시킨다는 전체적 결론을 구체화한다.

만약 현대 과학이 우리에게 창조 이야기가 모두 시간적 시작에 대한 것이라고 믿도록 해왔다면, 이때 무로부터의 창조는 우리로 하여금 성서가 주장하는 사상 일부를 이해하게 도와줄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창조주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신론(Deism)

유신론이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체계는 아니다. 

현대 과학의 등장과 과학이 창조주를 언급하지 않고도 세계를 성공적으로 설명하게 된 것은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가 철학적 · 신학적·과학적으로 면밀하게 연구되어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나의 대안적 체계는 이신론적 체계다.

유신론과 마찬가지로, 이신론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첫 창조 행위를 논한다.

그러나 첫 창조 이후 하나님의 초월성과 행위는 사라지는데, 이는 이신론이 하나님이 창조 이후 세계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이신론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데, 이 초월성은 태초 이후 하나님과 세계 사이를 실제로 분리시킬 정도까지이고, 일단 세계가 생겨난 후에 하나님은 세계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주가 신적 개입 또는 인도 없이 처음에 설정된 길로 나아가도록 허락하기 때문에, 기적과 계시를 믿는 것은 이신론의 세계관에서 부인된다.

 

하지만 이신론이 무로부터의 창조 사상을 반드시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세계 활동과 밀접하게 상호작용한다고 믿지 않은 채, 하나님이 세계를 보편적이고 섭리적으로 유지시킨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신론은 세계 역사를 통한 무로부터의 관점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계에 내재한다(다른 말로 피조물에 내재한다. 즉 피조물에 아주 근접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신론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근대 초기 뉴턴의 결정론적 세계관 내에서, 이신론은 하나의 매력적인 신앙인 듯 보였는데, 이는 이신론이 과학으로 하여금 과학이 되게 했기 때문이다.

즉 과학적 과정은 어떤 신적 개입의 필요 없이 자연적이고 규칙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비록 이신론이 합리적인 신앙으로 그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신론은 우리가 과학적 상황에서 기적과 계시 이야기들을 이해하려 할 때 명백하게 드러나는, 보다 무의식적인 유산을 남겼다.

즉 이제 '개입'에 대한 이신론적 논의를 피하는 것은 정말 어렵게 되었다.

 

이신론에 직면하여 유신론적 관점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로, 과학은 근대 초기 뉴턴 이래 중요하게 발전했다.

19세기 다윈주의의 등장과 20세기 새로운 물리학(특히 상대성, 양자 역학, 카오스 이론의 발견과 함께, 규칙적이고 거의 기계적인 뉴턴 세계관은 대부분 본질상 새로움과 참신함을 인정하는, 상당히 많이 개방된 과학적 세계관으로 대체되었 다.

 

둘째로, 이신론은 거의 성서 세계관에 맞지 않는 관점이다.

비록 일부 구절들이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시 115)고 암시하고, 이것이 하나님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지만,

성서의 하나님은 역사와 자연 세계에도 친밀하고 역동적인 관심을 드러낸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이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서 피조물의 일환이 되기 위해 피조물에게 너무 친밀하 게 다가갔고, 성령으로서 피조물 안에 내재하여 계속 일한다는 놀라운 사상을 발견한다.

만약 성서의 하나님이 초월적이라면(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차이를 암시), 이때 하나님은 또한 내재적이며 현존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세계에 실제로 내재하며, 세계와 분리될 수 없다.

비록 성서 본문이 무로부터의 창조를 확실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무로부터의 창조와 일관된다(앞으로 살펴볼 것이다).

 

성서 본문은 분명히 하나님이 초월적이며 동시에 내재적이라는 유신론적 사상의 증거들을 풍부하게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비록 유신론이 현대 과학에서 배척당하는 어려움에 직면했고, 이신론이 설득 력 있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유신론적 관점이 성서의 세계관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주장할 것이다.

 

유신론이 신앙의 진술로서 또 하나의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무신론과의 논쟁에서 이신론보다 강한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신론은 하나님의 영향권을 물질 세계에서 영적인 세계로 옮기므로 이원론의 한 형태로 보 일 수 있다.

이신론에 따르면,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가 오직 영적인 차원에만 한정되며, 따라서 믿음과 예배는 인간의 지적이고 영적인 행위다.

이 이원론적 진술은 예배에 참여하는 전 우주의 갈망에서 너무 생생하게 표현되 는 창조주와 모든 피조물의 관계(4장의 결론 참조)가 결국 부인된다는 것을 의 미한다.

 

비인간 피조물들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설계(design)'를 암시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신성한 의미가 없다(오직 인간만이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고, 이성적 이다).

비인간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존재한다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받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그래서, 예를 들면 홍수가 "박수를 치거나" 산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즐겁게 노래한다"(시 98:8) 고 제안하는 본문들은 그 본문들이 지닌 풍부한 의미를 대부분 잃을 것이다.

유신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 본문들은 신성하게 창조된 피조물로 인해 창조주를 찬양하는 우주적 예배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비인간 피조물은 창조주가 "매우 좋았다" (창 1:31)라고 평가한 피조물이다.

이신론적 관점에서는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따라서 비인간 피조물이 예배하는 본문들은 인간이 세계를 찬양하는 것에 대한 은유로 여겨진다.

 

이것은 신의 존재에 대한 종교적 주장들이 이신론의 등장으로 대부분 힘을 잃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 주장들이 더 이상 우주를 창조주와의 관계로 설명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우주는 인간의 영적 지적 삶을 위한 수동적이고 내적인 장소가 되었다.

 

이때 이신론은 세계가 현재의 모습으로 드러난 이유를 설명하는 가설로써 신을 제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은 설계자를 소환하지 않고도 세계의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이신론은 과학에 반하는 본질적으로 설득력이 약한 주장이다.

 

유신론은 비인간 실재에게 이신론이 부여할 수 없는 영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며 전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한다.

모순적이게도 최근 수십 년간, 생태학적 관점에 대한 중요성이 증가하면서 자연 세계를 존중하 는 마음도 같이 증가했다.

이것은 과학의 발전에 관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피조물이 신의 관점에서 본질적 가치를 갖는다는 유신론적 진술과 잘 어울린다(장 참조).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이 책에서 유신론적 관점을 주장함에 있어서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이것은 현대에 종종 신앙의 적합한 진술이었던 이신론을 경멸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의 방향을 성서에 기록된 방향으로 가능하면 가깝게 조정하려는 것이다.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

무로부터의 창조가 하나님의 세계 초월에 대한 근본적인 유신론적 진술 이라면, 계속적 창조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내재성을 말하는 유신론적 사상을 표현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적극적이며 창조적으로 세계에 참여하며, 세계에 현존하고, 세계와 함께한다.

 

그러나 이런 초월성과 내재성 은 세계의 관점에서만 관계를 묘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우발성이 강조된다. 즉 무로부터의 창조는 우선 세계 존재의 우발성을 표현하는 반면, 계속적 창조는 계속되는 세계에서의 모든 새로운 창조와 사건의 우발성을 표현한다.

 

그러나 과거에 이 부분이 약간 불확실했다. 

왜냐하면 무로부터의 창조 관점은 이미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세계를 지원하고 보존한다는 사상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저명한 신학자들에 의해 계속적 창조의 형태로 해석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에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의 태초 창조와 계속되는 지원을 같은 하나의 신적 '보존' 행위로 간주하며, 둘 사이를 구별하려 하지 않았다.

반면 다른 신학자들은 보존이 창조와 같지 않고, 전적으로 독창적인 특별한 행위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태초 행위인 무로부터의 창조와 하나님의 보존 행위를 철저하게 구별했다.

 

하나님이 계속해서 세계를 지원 · 보존· 유지하는 행위가 '창조'(또한 '계속적 창조)인지의 여부는 오랜 논의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때에, 이 논의에 새로운 물결, 즉 현대 과학의 물결이 밀려왔다.

현대의 과학 신학 대화는 우리의 창조 이해에 있어서 진화 모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 문에, 우리는 진지하게 계속적 창조라는 용어를 무로부터의 창조와 구별되는 독창적인 행위를 표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무로부터의 창조와 계속적 창조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판넨베르크의 다음의 말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미리 가정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무로부터 창조된 것들을 계속적으로 보존하는 역할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게만 적용된다.

그러면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전적으로 새로운 형태들은 어찌 되는가?

 

우리는 심지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생명들에 대해서도 질문할 수 있다.

즉 '새로움'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보충하는 새로운 종류의 범주를 요청한다.

그러므로 계속적 창조는 종종 과학-신학 분야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단지 첫 세계 창조에 제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계속 지지하거나 보존하는 데에도 제한되지 않으며, 항상 계속되고, 새로우며, 생기 넘친다는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계속적 창조는 우선 무로부터의 창조를 전제로 삼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즉 하나님이 시간, 공간, 물질이 무로 회귀하려는 것을 막는다), 우리는 계속적 창조가 무로부터의 창조에 의존한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적 창조는 여전히 세계가 계속 만들어지는 상태에 있다는 현재 과학의 일치된 의견을 표현하기 때문에 유용한 범주다.

 

다시 말하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창조 계획은 초기 빅뱅 상태에서 완전히 완성되지(성취되지?) 않았고, 존재 해왔고 지금도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지원으로도 성취되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적 창조는 창조 행위가 영구적으로 새롭고 생기 넘치는 세계의 모든 가능성을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과학적 용어인 계속적 창조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단지 명확한 법칙과 원리로 인한 예측 가능한 행위로서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창발하는' 행위로 보는 것이다.

계속적 창조는 과학-신학 영역에서 과정 신학의 범재신론적 신관에 영향을 받은 아서 피콕과 이안 바버 같은 학자들과 관련이 있다.

(과정 철학과 과정 신학은 세계를 계속적으로 유지시키는 가장 미세한 단계 까지, 자연의 모든 독립체 사이의 관계와 과정을 강조한다는 것에 주목하자. 하나님은 세계와 함께 변하고, 심지어 세계의 고통에 참여한다고 일컬어지는 정도까지 친밀하게 세계에 관련된 듯하다.)

 

그러나 보다 전통적인 유신론적 관점 안에서 계속적 창조를 주장하는 것 또한 가능한데, 이는 하나님의 내재성이 성령의 창조 행위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예, 시 104:30).

폴킹혼이 설명한 것처럼,

“무로부터의 창조에서 창조주의 행위가 신적 초월의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이, 계속적 창조에서 창조주의 행위는 신적 내재의 방식으로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무로부터의 창조와 계속적 창조는 하나님세계 관계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강조하지만(그러므로 다른 모델의 하나님을 강조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둘은 하나님이 창조와 관련해서 초월적이고 내재적이라는 일반적인 유신론적 관점과 양립한다고 볼 수 있다.

무로부터의 창조 관점이 보다 근본적인 한편, 이 관점과 함께 계속적 창조 관점을 주장하는 것이 유용하다.

왜냐하면 계속적 창조는 우연과 돌연변이가 모든 것이 사실상 결정되었다는 이신론적 시각으로 간주되는 것을 막으며, 선뜻 우연과 돌연변이를 우리의 신학적 모델 안으로 통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무로부터의 창조와 계속적 창조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가?

이 두 창조 범주가 어떻게 세계의 시작과 진화에 대한 과학적 이해에 관계 될 수 있는가? 

빅뱅 모델과 창세기 1장을 비교 연구하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 듯이(3장의 "창세기 1장과 현대 과학" 참조),

빅뱅 모델과 창세기 1장은 둘 다 우주가 역사의 결정적 한 지점에서 극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에,

빅뱅 모델을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신학 사상과 연결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예를 들면, 코판과 크레이그는 빅뱅 모델이 말하는 '우주의 절대적 시작'이 '중대한 신학적 영향을 지닌다는 것에 근거해서 빅뱅 모델과 무로부터의 창조를 연결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에 대한 성서적 · 신학적 근거를 고려해볼 때, 우리는 정상 상태 우주 또는 영원히 요동하는 우주보다 빅뱅 우주 같은 이론이 관측되기를 기대해야 한다.

증거를 고려해 볼 때, 빅뱅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그럴 듯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이렇게 밀접하게 연관 짓는 것에는 여러 문제들이 있다.

 

코판과 크레이그의 주장과는 반대로 빅뱅은 무로부터의 절대적 시작이 아니다.

왜냐하면 빅뱅은 초기 상태 이전이 분명히 신학적 의미의 '무'였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무로부터의 창조는 신학적 무를 분명히 주장한다).

 

반면 빅뱅 모델에서는 우리의 시공간이 생겨나기 전에 '무엇' 인가가 존재해야 한다.

이 '무엇'이 무엇인지에 대한 많은 타당한 가능성들(예를 들면, 아마 우리 우주는 이전의 우주로부터 야기되었고, 이전의 우주는 우리 우주가 생겨났을 때 파괴되었다)이 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우리 우주가 '다중우주'로 알려진 거대한 총체의 일부로서, 함께 존재하는 많은 우주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빅뱅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어떤 개념적 양자 우주론의 틀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모든 과학적 설명은 어느 정도 추측에 불과하며, 신학적 '무(피조물의 부재)' 개념이 정의상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과학적 설명도 어떤 것이 존재하기 전에 글자 그대로 '무'였다는 신학적 주장과 양립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빅뱅 우주론은 단지 무로부터의 창조 연구가 주장하는 '무'를 재현할 수 없다.

기껏해야 빅뱅은 우리 우주의 시작을 시각화하는 생생한 수단에 불과하고, 우리가 무로부터의 시작을 시각화하는 데에는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러나 무로부터의 창조를 빅뱅에 연결하려는 시도 기저에 더욱 심각한 어려움이 있다. 

이 시도는 무로부터의 창조만 우주 전체 역사에 관련된다고 말할 위험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무로부터의 창조를 빅뱅에 연결하려는 시도는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적 상호작용을 첫 창조에 제한하는데, 이것은 세계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초월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하 는 것이고, 결국 이신론의 관점으로 기우는 것이다.

 

계속적 창조 관점을 우주론적 진화 모델(빅뱅 우주론이 제공)과 생물학적 진화 모델(예, 신다윈주의)에 연결시키려는 유사한 시도가 있다. 

2장에서 개략적으로 설명한 것처럼, 빅뱅 모델과 신다윈주의는 세계가 지금처럼 존재하는 방법에 대한 과학적 설명으로서 상당히 중요하다.

 

비록 두 모델에 결정론 적 요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구성은 우연과 창발적인 과정의 작용을 강조하는데, 우연과 창발적인 과정은 다양한 시대에 태초에 예측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독립체들이 등장하는 원인이 된다.

이 과정은 세계의 창조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진행 중임을 암시하기 때문에, 정말로 창조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과정은 계속적 창조에 대한 신학 사상과 유사하다.

이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신학자들로 하여금 계속적 창조를 새롭게 보도록 격려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사실 폴킹혼은 무로부터의 창조 사상이 하나님이 피조물에 대해 초월적이라는 인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항상 형이상학인 반면, 계속적 창조 사상은 세계가 진화한다는 과학적 견해에 의해 보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오브리 무어가 한 세기 전에 제기한 유명한 주장인데, 무어에 의하면, 다윈주의는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열띤 논쟁을 유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다윈주의 이전 시대의 이신론이 더 이상 성립될 수 없게 했다.

 

하나님을 가끔씩 방문하는 분으로 묘사하는 것이 현재에는 더 이상 불가능한 개념이 되었다 ......... 다윈주의가 등장했고, 적을 가장하여 친구처럼 행동했다. 다윈주의는 철학과 종교에 헤아릴 수 없는 유익을 가져다 주었고, 우리에게 두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즉 하나님은 자연의 어디에나 존재 하든지, 아니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동시대 신학자들이 이와 거의 일치하는 주장을 한다. 

예를 들면, 제임스 매키는 간결하게 말했다.

"진화는 단지 계속적 창조에 대한 명칭이다."

그리고 우리는 생물학자이자 신학자인 아서 피콕의 매우 중요한 진술을 무시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창조주 신관은 이제 하나님이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있고, 계속해서 존재하게 한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이 항상 창조주 라는 것과, 세계가 계속해서 창조된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계를 일반적 질서와 구조로 유지시킨다는 전통적인 관점은, 이제 극적이고 창조적인 차원-하나님에 의해 부여된 내재적 창조성을 지닌 과정 속에 계속적으로 피조물을 유지시키는 신 모델-으로 더욱 다양해져야 한다. 하나님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영구적으로 부여된 창조성을 통해서 (그리고 창조성 안에서), 세계가 존재하는 모 든 순간에 창조한다.

 

피콕의 지적은 적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주적 또는 생물학적 진화를 계속적 창조 범주에 너무 밀접하게 관련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너무 밀접하게 관련시키면, 우리는 위에서 살펴보았던 것과 같이, 빅뱅을 무로부터의 창조에 너무 밀접하게 관련시키는 것과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속되는 창조 사역이 어떤 면(특히 진화 과학 모델로 묘사될 때)에서는 다른 면에서보다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하나님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 안에 현존한다기보다, 새로운 형태의 생명의 진화를 통해 내재하는 듯 보인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계속적 창조를 자연적 구조에, 무로부터의 창조를 초자연적 구조에 연관시키며, 이 둘 사이의 중요하지 않은 차이를 너무 강조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적 창조를 말할 때, 하나님의 행위가 과학의 소관이고 자연적이라는 것을 의미 하지 않도록, 반대로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할 때, 하나님의 행위가 신학적이며 본질상 초자연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차이가 성서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5장 참조).

 

이런 이유로, 무로부터의 창조와 계속적 창조를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하고, 이 범주들을 과학에 의존하게 만들지 말고 무엇보다 신학적 범주로 이해 하는 것이 유익하다.

특히 한 범주(계속적 창조)는 현대 과학의 발견과 상당한 유사성이 있는 듯 보이지만, 이것이 이 범주를 다른 범주(무로부터의 창조)보다 덜 신학적이거나 더 과학적이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현대 과학은 세계의 진화를 이해하는 데 우연과 새로움의 중요성을 강조해왔고, 계속적 창조는 우연과 새로움을 구체적인 과학 모델로 분명하게 정의하지 않은 채 우리로 하여금 이 사상을 상당히 널리 우리 신학에 통합하게 한다.

사실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항상 법칙 같고 질서정연하다는 가정(이런 사고방식이 우리를 이신론으로 이끌었다)에 반대하며, 이런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을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무로부터의 창조와 계속적 창조가 근본적으로 신 학적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들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하나는 내재적으로, 다른 하나는 초월적으로 묘사한다.

이를 또한 역으로 말할 수도 있다.

즉, 만약 생물학적 진화가 특히 하나(계속적 창조)에 잘 맞는 듯 보인다면, 생물학적 진화가 발생하는 세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선 다른 하나(무로부터의 창조)를 필요로 한다.

이 두 범주는 하나님이 어떻게 피조물에 현존하고, 어떻게 피조물에 초월적인지를 설명하는 상호 보완적 범주다.

이것이 유신론으로 알려진 전통적인 해석 방법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성서는 무로부터의 창조와 계속적 창조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무로부터의 창조

 

무로부터의 창조와 계속적 창조를 둘러싼 논의를 개략적으로 설명한 것 을 바탕으로, 이제는 이 범주들이 성서 창조 본문에 얼마나 반영되었는지 살펴보자.

 

첫째로 무로부터의 창조와 계속적 창조 사상은 성서 기록 이후의 역사적 논의와 상황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이 사상을 성서에 적용하는 것이 옳은지 부터 논해야 한다. 

베스터만은 우선 이런 이유 때문에 무로부터의 창조를 창세기 본문에 적용할 때 주의를 당부한다.

 

물론 시대착오적인 생각은 성서 또 는 고대 문헌 해석에서 계속되는 위험 중 하나다.

즉 후대의 해석 범주들이 원 저자의 세계관과 역사적 상황에 대한 충분한 숙고 없이 함부로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앞에서 삼위일체 신관을 논의하며 이 문제를 언급했다(4장의 "창조와 삼위일체 신관의 시작" 참조).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능한 한 신학을 성서에 대해서가 아니라, 성서로부터 도출해야 하는 것임을 확실히 하는 것이 중요 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후대의 해석 범주들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후대의 해석 사용을 금지 하는 것은 성서를 우리의 관점에서 범접할 수 없는 지위까지 고양시켜, 실제 로 읽을 수 없게 만들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서 본문이 경전으로서의 바로 그 특성 때문에, 역사적 테두리 안에 갇힐 수는 없다는 것이 신학 해석에 있어서 중요하다.

성서 본문의 역사적 기원이 여전히 존중되고 우선 순위를 차지하는 한편, 성서는 새로운 역사적·과학적·문화적 통찰로 신학적으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무로부터의 창조 사상은 아마 창세기 1장이 처음으로 기록된 후 적어도 800년이 지난 기원후 2세기까지는 명확하게 두각을 나타 내지 않았다. 

무로부터의 창조와 연관성이 있는 창조 개념이 초기 교회 신학자인 이레니우스, 테르툴리아누스, 안디옥의 테오필루스의 글에서 등장하는 데, 이들은 회의적인 그리스 문화적 상황에 직면해서, 기독교의 창조주 하 나님을 말하는 유대적 근거를 변론했다.

 

대체로 다신론적인 그리스 세계관 은 플라톤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리스 세계관에 따르면, 우주는 선재 한 물질로 만들어졌고 사실상 영원하며, 물리적 실재는 고차원 형 태보다 덜 중요하다(기원후 첫 몇 세기의 영지주의 사상에 따르면, 물리적 실재는 열등한 신이 만들어서 아마 심지어 본질적으로 악하다).

 

이에 직면하여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세계를 무로부터 '좋게' 창조한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혁명적인 사상을 제시했다.

테오필루스, 이레니우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것을 혁명적 이라기보다 구약 성서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말한 것을 설명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구약 성서가 실제로 무로부터의 창조 같은 사상을 주장하는지 는 의문이다(곧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이 신학자들은 단지 주석적 관심에서라기보다 그리스 사상의 전제("어떤 것도 무로부터 나올 수 없다"고 주장)와 분명한 거리 두기를 원했기 때문에, 피조물이 무로부터 생겨났다는 사상을 주장한 듯하다.

 

어쨌든 여기에서 세계가 창조주와 완전히 다르다는 개념(이 또한 그 리스 사상에 반대됨)이 나왔다.

우리는 이 기저에 있는 변증 논리를 볼 수 있다.

즉 아들을 통해 세계를 창조한 한 분 하나님이 세계를 구속한 바로 그 하나님으로 이해된다면, 기독교의 보편적 의의가 성육신한 아들을 통해 평가될 수 있다.

 

비록 창세기 1장이 그리스 문화보다는 바빌론의 다신론적 환경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만, 분명 무로부터의 창조 사상이 생겨난 역사적 상황은 창세기 1장의 역사적 상황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무로부터의 창조 사상을 적용하기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구절이 창세기 1장에 나온다.

 

이 구절은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이전에 '무'였다고 분명하게 진술하지 않는다.

우리가 5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원후 첫 몇 세기 랍비들은 수많은 피조물들이 창세기 1장 1절, 특히 지혜서와 토라에서 말하는 '태초' 이 전에 존재했었다고 확신했다.

 

다시 말하면 랍비들에 따르면, 창세기 창조 이 야기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이 P문서 저자가 수백 년도 더 이른 본문을 함께 넣어 편집하면서 의도했던 것을 우리에게 조금도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이것은 테오필루스, 이레니우스, 테르툴리아 누스 시대에 창세기 1장의 해석이 한결같이 무로부터의 창조로 해석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창세기 1장이 무로부터의 창조와 양립할 수 있는지에 관련해 고려해야 할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창세기 1장의 핵심적인 1~2절이 네 가지 의미로 이해 가능해서, 번역하기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다.

그중 두드러진 두 번역이 출간된 영역본 성서들의 주를 이룬다.

이 두 번역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땅은 형체 없이 공허했다......
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시작했을 때, 땅은 형체 없이 공허했다......

 

첫째 번역은 첫 창조 행위가 땅을 "형체 없이 공허하게" 만드 는 것이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반면 둘째 번역은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할 때, 땅이 이미 형체 없이 공허하게 존재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무로부터' 창조하지 않았고, 이것은 하나님의 첫 창조 행위가 실제로 창세기 1장 3절에서 묘사된 것(“빛이 있으라”)임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무로부터의 창조와 가장 잘 어울리기를 바라며 첫째 번역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혼돈의 창조가 성서 관점에 모순되기 때문에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한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과 바다의 투쟁 이야기를 묘사하는 창조 주제의 신화적 요소를 다루며 살펴보았다(4장의 "창조와 신화" 참조).

 

혼돈은 하나님과 정반대 되기 때문에 창세기 1장 2절의 형체 없이 공허한"(히브리어로 tohu wabohu) 혼돈이 결코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결과가 될 수는 없지만, 보통 창조의 시작점이 되곤 한다.

이 경우 둘째 번역이 좀 더 그럴듯해 보이고, 창세기 1장의 첫 부분(1~10절)은 무로부터의 창조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선재한 혼돈 상태의 물에 경계를 부여해서 질서 지어지는 과정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난해한 히브리어구 가 예레미야 4장 23절에서 다시 등장 하는 것을 주목해볼 만한데, 여기에서 예레미야는 창조의 반전(질서에서 혼돈 으로)을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에 대한 우주적 상징으로 묘사한다.

인간의 사악함(하나님의 측면에서는 무질서)이 태고의 땅에 대한 상징으로 간주된다.

 

만약 둘째 번역이 정확한 이해라면(상당히 불확실하지만),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을 새로운 물리적 실재를 만드는 분 못지 않게, 선재한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분으로도 묘사한다.

우리는 3장의 "우주 신전에서 이것에 관한 해석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해석은 여전히 모호하고, 따라서 창세기 1장을 무로부터의 창조 관점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종종 선호된다.

 

그러나 무로부터의 창조 관점에 대한 보다 그럴듯한 주장이 있다. 

예를 들면,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 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2)라는 구절은 명백한 무로부터의 창조는 아니지만, 무로부터의 창조와 개략적으로 양립 가능하다.

 

비록 일부 신약 구절 들(특히, 롬 4:17과 히 11:3)이 무로부터의 창조 관점을 말한다고 주장되었지만,

문자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로 여겨질 수 있는 가장 이른 구절은 기원전 2세기 또는 1세기에 비교적 늦게 기록된 본문인 마카베오하 7장 28절이다.

“하나 님께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러나 심지어 이 본문에서도 무로부터의 창조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특히 무로부터의 창조가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주장하기 시작한 후 수 백 년이 지날 때까지, 심지어 아마 15세기까지도 유대인들의 사고에 자리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기원후 첫 몇 세기의 랍비들은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 창조가 문자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였다고 믿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성서에서 무로부터의 창조 관점을 지지해주는 진술을 찾는데 있어서, 우리가 엉뚱한 진술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창조 이전에 하나님만 존재 했다고 말하는 것은 모호한 진술일 수도 있지만 무로부터의 창조 이면에 있 는 사상, 즉 하나님이 전적으로 초월적이라는 사상과 양립할 수 있는 구절들은 많다.

 

결국 성서의 창조 주제는 영락없이 하나님을 계속해서 존재하는 만물의 뿌리와 근거로 보는데, 이것이 '무로부터의 창조'가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성서의 거의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으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가 드러나는데, 이는 피조물,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마카베오하 구절이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를 명백히 진술하고자 의도되었다는 것에 의심이 제기될 수도 있지만, 이 구절의 서술 상황(순교당한 아들의 변호와 부활에 대한 어머니의 희망)에서, 이 구절은 하나님 홀로 생명의 근원이고 생명을 주관한다고 말하는, 무로부터의 창조와 상당히 잘 어울리는 신앙을 표현한다.

 

비록 무로부터의 창조 관점이 후대의 질문과 신학적 문제들로부터 제기 되었지만 이 관점을 지지함에 있어서 베스터만이 인정했듯이, 성서 저자들 이 무로부터의 창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상당히 그럴 듯하다.

 

만약 성서 저자들에게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전에 아무것도 없었는지에 대해 물을 수 있다면, 그들은 아마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을 유일하고 절대적인 존재로 봐야 한다는 관점을 강하게 밀어붙일 것이다. 

 

모든 것을 감안할 때, 무로부터의 창조가 창조 설명의 발단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창조 설명에서 묘사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현존 덕분이자, 성서를 통해 표현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의존 덕분이다.

 

비록 소위 말하는 그런 명백한 진술은 아니지만 코판과 크레이그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철저히 성서적 교리로 보는 강력한 논거를 제시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가 명백하게 진술되지는 않지만, 이 교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자신과 구별되게 창조했다는 사실로 부터 분명히 추론될 수 있다. 

하나님이 초월적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 될 만큼 궁극적으로 신뢰할 만하다고 묘사되는 것이, 아마 성서의 창조 주제가 무로부터의 창조 관점에 연결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를 제공한다.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가 사물이 원래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진술인 것처럼 이 교리가 또한 하나님과 세계의 계속되고 중요한 관계에 관한 진술 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한, 창세기 1장 1~2절이 무로부터의 창조인지, 아니면 선재한 혼돈으로부터의 창조인지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점은 오히려 하나님이 창조에서 초월적인지,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초월적인지의 여부다.

 

 

계속적 창조

 

만약 하나님이 성서에서 초월적으로 묘사된다면 우리는 동전을 다른 면으로 돌려 하나님이 시시각각 새로운 세계를 만들며 내재적으로 묘사되는 범위를 질문해야 한다.

 

이것은 특히 창조에 대한 현대 우주론적·생물학적 진화 사상에 의해 영향을 받은 계속적 창조의 영역이다.

비록 계속적 창조에 대한 최근의 관심이 과학 사상에 의해 고무되었기는 하지만, 우리는 계속적 창조를 어떤 특정한 과학 모델에 너무 밀접하게 연관시키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우리가 계속적 창조의 증거를 성서에서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분명 진화 생물학 또는 우주론에서 제기되는 논의들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한 흥미로운 예외가 창세기 1장인데, 여기에서 마른 땅과 다양한 생물의 등장 순서가 현대 고생물학 연구에서 알려진 순서와 거의 비슷하다.

 

우리가 3장의 "창세기 1장과 현대 과학"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부 학자들은 이것을 P문서 저자가 현대 진화 생물학에 대한 신적 계시를 받았다는 증거로 사용했지만, 우리는 이것이 생물학 또는 지질학에 관한 질문이었다기보다 성서 해석학에 관한 질문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결론적으로 계속적 창조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방향을 전환해, 하나님이 창조 과정에서 내재적이고 친밀하게 여겨지 는 증거들을 성서에서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신적 내재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성서 자료를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욥기 38~41장에 걸친 자연 세계에 대한 상당한 분량의 묘사는 하나님이 자연 세계에 친밀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함을 암시한다.

 

이는 시 편 104편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유로 이 두 본문은 특히 생태학적 연구에 적합하다.

시편 104편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이유로 하나님을 화려하게 찬양하는 것이 독특하고, 또한 현재의 자연 · 동물 · 인간 세계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더불어, 별, 깊음, 하늘의 창조를 말한다.

 

한편 이 본문들은 하나님 의 초월과 내재적 속성을 함께 혼합하는데, 여기에서 지금의 또는 '태초'의 그 어떤 창조 행위도 다른 창조 행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적 속성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포함되는 듯하다.

 

크라우스는 시편 104편을 언급하면서 이 점을 잘 지적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은 야훼를 향해 열려 있다. 즉 피조물은 야훼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야훼 없이는 죽는다. 피조물은 사실상 끊임없이 새롭게 되는 창조 행위로 인해 생명을 유지한다.”

 

그러므로 욥기 38~41장과 시편 104편에서 묘사된 하나님은 태초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창조하는, 본성상 창조적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창조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친밀성을 강조하는 수많은 구절들이 있다.

인간의 임신과 출산 행위가 하나님의 창조(만드는/낳는) 행위에 연결되고(예, 창 2:7~8, 욥 31:15, 시 139:13~16, 전 11:5, 사 44:2, 44:24, 49:5, 렘 1:5), 때때로 하나님의 구원 행위(사 66:9)에도 연결된다.

 

이 모든 것은 창조 중에 계속되는 하나님의 매일의 행위를 강조하면서, 계속적 창조 범주의 역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 매일의 창조적인 '만드는'/'형성하는'/'낳는' 행위가 하나님의 '태초' 창조 행위와 같은 정도로 정말 창조적인지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창조 행위가 '만드는’/‘형성하는’/‘낳는 행위와 무엇이 다른가?

정말 성패가 달린 철학적 · 신학적인 차이가 있는가, 아니면 단지 의미론적인 차이인가?

 

베스터만은 첫 창조 행위와 계속되는 모든 창조 행위를 구별하고자 했고, 그래서 '태초' 이후에 대해서는 결코 신적 창조 행위를 말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대신 그는 하나님의 '복'을 말한다.

이 '복'의 활동은 무로부터의 창조에서 암시되는 계속적인 '보존'을 말하는 것보다는 획기적이 지만, 계속적 창조 사상만큼 혁명적이지는 않다.

 

베스터만의 관점에서 보면 무로부터의 창조는 너무 적게 말하고, 계속적 창조는 너무 많이 말한다.

그러나 베스터만과는 반대로, 프레트하임은 성서 창조 자료를 최대한으로 이해하 고자 한다.

즉 프레트하임은 베스터만이 '복'으로 명명한 것 대부분을 계속적 창조의 증거로 여긴다.

 

둘 중 누가 옳은가?

 

베스터만이 '복'을 '태초' 창조 주제에 대한 계속적인 보충으로서 강조한것은 분명 통찰력이 있고,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복은 피조물을 번성하게 하는 생식력으로 묘사되고(예, 창 1:22), 피조물 중에서 인류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점으로 보인다(창 1:28, 9:1).

 

심지어 복은 인류 역사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묘사한다(예, 창 12:1~3).

그러나 복이 성서에 나오는 창조 언어의 전 영역을 포괄할 수 있을지가 불분명하다.

이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창세기 1~2장과 그 이후에 등장하여 '창조하다'로 종종 번역되는 히브리어 동사 bara의 정확한 의미를 더욱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에서 bara'가 사용되었다. bara'는 창세기 1장과 제21 사야(예, 사 40:26)에서처럼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드러나는 본문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이 오랫동안 주목받았고, 게다가 이 동사는 특성상 하나님을 주어로 취한다.

 

다시 말하면, bara'는 때로는 태초에, 때로는 역사를 통해 새로운 것들의 생성을 포함하는 특별한 신적 행위를 묘사하는 듯하다(예, 출 34:10, 렘 31:22).

그래서 bara'는 종종 '창조하다(to create)'로 번역된다(창 1:1, 1:27, 2:3~4).

 

그 러나 이 동사가 무로부터 창조한다는 의미에서 '창조하다'를 의미하는가(즉 이 전에 존재하는 것이 없었던 때를 상기시키며), 아니면 그것이 더욱 미묘한 무엇인 가를 의미하는가?

가능한 의미의 범위를 설정하기 위해 일부 최근 연구를 언 급할 필요가 있다.

 

존 월턴은 bara'가 기능적 의미(물리적 의미라기보다)에서 ‘창조하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즉 선재한 독립체에 기능을 부여하고, 그래서 독립체는 구성상 당연히 작업 방식을 갖게 된다.

그 대신에 판 볼데는 적어도 19세기 이래 종종 제기되었던 제안 창세기 1장의 bara'가 결코 "창조하다”로 번역되어서는 안 되고, 대신에 “분리 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이 경우, bara'는 매우 구체적이고 물리적 의미를 지니지만, 선재한 물리적 독립체를 나누는 공간적 행위를 의미한다.

비슷하게 우리는 이미 창세기 1장 1~10절의 창조가 만드는 행위라기보다는 혼돈 상태인 물을 질서 짓는 행위로 보일 수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반면 코판과 크레이그는 창세기 1장의 상황에서 bara'가 실제로 무로부터의 창조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중요한 동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 상당히 의견이 엇 갈린다. 

또한 창세기 1~2장이 bara'와 유사한 방법으로 'asah('그가 만들었다) 와 yatzar('그가 형성했다) 같은 아주 일반적인 단어들을 사용한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불확실하게 되었다(예, 창 1:7, 1:16, 1:26, 2:7).

심지어 'asah는 문서와 J문서 창조 설명의 연결 지점인 핵심적 구절(창 2:4)에서 bara'와 유사한 듯 보인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bara'] 때의 일은 이러하였다. 주 하나님이 땅과 하 늘을 만드실 [asah] 때에 "(창 2:4).

 

결론적으로 '만드는'/'형성하는/낳는'을 의미 하는 다른 단어들에 비해 bara'를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다른 단어들 또한 신적 창조를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종류의 신적 창조가 드러나는지(그것이 '태초에' 무로 부터인지, 계속적으로인지, '분리'인지, 기능적으로인지, 혹은 다른 방식인지)는 보다 복 잡한 문제이고, 아마 문맥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같은 문제가 이 동사들을 정확히 번역할 때에도 제기되는데, bara' 자체의 번역이 논 란의 여지가 있는 것을 고려해볼 때, '만드는'/'형성하는낳는'이 실제로 '창조하는'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논란거리다.

 

창조 어휘의 측면에서, 우리는 창세기 1~2장의 서술을 하나님이 세계를 만드는창조하는 행위를 묘사하는 다른 본문들과 분명히 분리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2장의 '태초에 만드는/창조하는 행위 묘사가 분명 성서 이야기의 처음에 위치하지만, 이 창조 행위가 이후의 만드는 창조하는 행위보다 본성상 좀 더 '창조적'인지의 여부가 논쟁의 핵심이다.

 

이 것은 베스터만이 이후의 만드는/창조하는 본문들을 진실된 '창조'의 지위로 부터 떨어뜨릴 권리가 있는지, 

그리고 이 본문들을 '복'이라는 기치 아래에 포 함시킬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가 불확실하다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누군가가 사용하기를 선호하는 명명법의 유형에 관한 가치 판단을 요청하는 듯하다. 

 

분명히 만약 누군가가 땅의 산출력과 유지 또는 인류 세대의 형성과 같이, 창조에서 모든 다른 신적 행위와 함께 인류 역사를 하나님의 행위에 포함시키고자 한다면, '복'은 사용하기 좋은 용어인 듯하다.

그러나 나는 '복'이 생명과 새로운 형태의 실재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주제들의 본질을 전적으로 파악했는지를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아마 계속적 창조가 성서 자료에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보다 타당한 유형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묘사된 관계 유형이다. 

만약 우리가 창세기 1 장과 같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봤다면, 조금 전 언급한 본문 같은 곳 에서는 분명 하나님의 내재성과 어울리는 보다 친밀한 관계로 하나님을 묘사 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면, 다음 구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시편 기자가 친밀하게 묘사된다.

성서의 계속적 창조를 논할 때 이러한 친밀함의 역할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은밀한 곳에서 나를 지으셨고,
땅 속 깊은 곳 같은 저 모태에서 나를 조립하셨으니
내 뼈 하나하나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님의 책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 시 139:15~16)

 

계속적 창조 묘사와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초월성을 내재성과 결합한 구절들도 있다. 

예를 들면, 시편 33편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지구를 내려다본다고 묘사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마음을 만들고, 인간을 친밀하게 이해한다고 묘사한다.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사람들을 낱낱이 살펴보신다. 

계시는 그곳에서
땅 위에 사는 사람을 지켜보신다. 

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지으신 분, 

사람의 행위를 모두 아시는 분이시다. 

(시 33:13~15)

 

또한 신약 성서에는 계속적 창조 사상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을 정 도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친밀성을 묘사하는 곳이 적어도 한 구절은 있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행 17:24~28)

 

하지만 신약 성서는 새로운 창조(즉 종말)에서 하나님의 내재성에 더욱 관계된다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의 창조 사역을 묘사하는 본문들이 연결 고리를 제공한다.

우리는 이미 창조에서 성령의 중요한 역할, 특히 생물학적 생명의 '숨'을 유지시키는 것을 살펴보았다(4장의 "창조와 그리스도" 참조).

 

성령은 또한 새로운 창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견해는 구약의 예언자 요엘만큼 이른 시기에 제기되었는데, 요엘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은 새로운 창조의 징표가 될 것이다(욜 2:28~32).

 

이 사상은 신약의 곳곳에서 발전되는데, 예를 들면 오순절 이야기에서(행 2), 바울의 윤리학 (기독교 신자들이 성령의 힘에 의한 새로운 창조의 현장이라는 사상, 갈 6:15)에서,

그리고 특별히 로마서 8장(개별 신자들 안에서 행하는 동일한 성령이 전 우주에 부활을 가져올 것이 암시됨)에서다.

 

그러므로 성령은 새로운 창조의 맛보기로 여겨진다 (욜 2:28~32, 행 2:17~21, 롬 8:23, 고후 1:22, 5:5, 엡 1:13~14).

따라서 계속적 창조는 전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창조 행위를 포함하기 위해, 어쨌든 무로부터의 창조로 더 적절하게 묘사되는) 계속적인 '보호' 또는 '보존'의 논의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간 생명의 친밀한 창조 또한 넘어선다.

 

따라서 성서에 "어떤 계속적 창조도 존재할 수 없다"38는 베스터만의 주장은 너무 성급한 것이다.

만약 창조에서 하나님의 초월을 묘사하는 구절이 무로 부터의 창조 요소를 식별하는 정당한 이유로 받아들여진다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적 내재를 말하는 본문도 계속적 창조의 범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를 말하는 구절이 하나님의 초월적 행위를 말하는 구절만큼 많지는 않지만, 성서 창조 주제에 계속적 창조 요소가 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에는 충분한 양이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는 프레트하임의 보다 포괄적인 관점을 따르지만, 우리가 창조 행위를 관계적 측면으로 접근함으로써 성서에서 다른 종류의 창조 행위를 강조한다는 점 은 프레트하임과 구별되는 중요한 점이다.

프레트하임의 관점은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우리의 관점은 신약을 포함하기 때문에 가장 포괄적인 관점을 취할 수 있다. 

 

즉 일단 우리가 삼위일체 신관을 받아들여 우리의 관점을 확장시킨다면, 그리고 특히 피조물의 성취를 돕는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는 사람은 베스터만과 프레트하임에게서 두드러진 구약의 관점을 넘어, 계속적 창조의 새로운 영역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결론

 

무로부터의 창조와 계속적 창조는 수백 년 후에 발생한 신학 사상에 근거 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 본문들에 대해 시대착오적인 신학적 구분을 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창조 범주들이 적용될 수 있을지를 논의하면서 우리는 성서 창조 사상에 대한 몇몇 중요한 신 학적 특성들을 도출할 수 있었고 이 특성들은 유신론적 신관을 보여주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를 암시하는 본문들뿐만 아니라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초월적 행위를 암시하는 본문들을 발견했다.

일부 본문들은 두 행위 모두를 암시한다.

하나님의 내재성과 동시에 초월성을 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성서에서 묘사되는 하나님의 간과될 수 없는 기본적 특징이다.

 

존 로저슨이 말하길,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구 약의 언어는 고의적으로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오직 모순적이어야만 구약의 언어가 가리키는 실재를 구약의 언어가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로부터의 창조와 계속적 창조를 구체적인 과학 모델들과 동일시하고자 하는 유혹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비록 이 범주들이 서로 유사할지라도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신학적이며, 쉽게 과학적 설명으로 여겨질 수 없음 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에 주목했다.

 

같은 방법으로 비록 우리가 성서 이야기 들이 당시 과학 사상의 흔적들을 포함하고, 특히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있었던 창조 신화의 사상을 포함한다는 것에 주목했지만 성서 이야기들은 과학적 '설명'에 저항해왔다.

 

여기에 관해 마지막으로 고려해볼 요점은 다음과 같다.

 즉 무로부터의 창 조와 계속적 창조는 다양한 종류의 우발성을 생각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무로 회귀하는 것에 반대하는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전적 의존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우발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신학 형태다.

 

반면에 우리는 2장에서 보다 정확하게 과학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우발성의 형태를 살펴보았는데, 이는 우발성이 과학에 의해 드러난 세계의 진화적 속성, 즉 세계가 계속적으로 생겨나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이 우발성의 형태는 종종 계속적 창조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신학적 범주들을 과학적 모델들과 너무 밀접하게 연결하려는 시도에 대해 판단을 보류했다.

 

계속적 창조와 과학적 진화 모델들 사이에 분 명한 유사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계속적 창조는 근본적으로 신학 사상이기 때문에, 더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특히, 만약 무로부터의 창조가 무로 회귀 하려는 것에 반대하는 세계의 우발성을 주장한다면, 계속적 창조는 세계에서 새로움의 우발성, 즉 새로운 기회들을 향한 피할 수 없는 섬세한 충동을 주장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발성은 예수의 비유와 격언 같은 성서 본문들에 의해 간결하게 표현된 예측 불가능하고 종말론적인 차원을 지닌다.

이것은 하나님 왕국의 우발성과 동일한 우발성인데, 이것은 밭에 숨겨둔 보화(마 13:44), 혹은 가장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는 것(마4:30~32)과 같이 기대하지 못한 채 드러난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하늘 보좌에 앉아서 선포하는 예수의 말씀으 로 요약되는 우발성과 동일한 종류의 우발성이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 롭게 한다”(계 21:5). 만약 계속적 창조가 세계에 대한 과학적 모델인 우연과 우발성에 비교될 수 있다면, 또한 하나님에 의한 새로운 창조의 불확실성과 우발성에도 연결될 수 있다.

 

만약 세계에 대한 새로운 과학 모델이 더 이상 결정 론적이지 않다면, 이때 계속적 창조가 말하는 새로운 창조도 더 이상 결정론 적이지 않다.

즉 새로운 창조는 하나님만 아는, 모든 새로운 가능성의 극치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 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막 13:32).

 

우리는 9장에서 성서 창조 자료의 종말론적 차원을 좀 더 자세히 탐구할 것이고, 세 번째 범주인 오랜 것으로부터의 창 조를 소개할 것이다.

또한 9장에서 우리는 세계를 계속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새로움에 대한 사상(계속적 창조)이 현 창조의 종말과 다음 창조 의 시작에서 무엇인가로 새롭게 변화된다는 것에 주목할 것이다.


출처 : 성서의 본성(마크 해리스 지음, 장재호 옮김, 도서출판 두리반)

 

'쉼터 > 창조의 본성(本性)' 카테고리의 다른 글

4장 : 성서에서의 창조 2 [창조 주제]  (0) 2024.07.26
5장 : 성서 창조의 구조  (1) 2024.07.26
7장 : 타락  (0) 2024.07.26
8장 : 고통과 악  (1) 2024.07.26
9장 : 과학적 종말론과 새로운 창조  (1) 2024.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