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창조의 본성(本性)

8장 : 고통과 악

w.j.lee 2024. 7. 26. 09:22

 

 

8장 : 고통과 악

 

고통과 죽음의 문제

 

7장에서 우리는 역사적 타락(죄, 죽음, 구원에 상당히 중요한 근본적 기독교 사상)이 과학적인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성서에서조차 별로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타락에 너무 의존하지 않고, 인간악과 죽음, 그리고 자연 세계에서 진화가 야기하는 고통에 대답할 수 있는 적절한 진화 신학이 형성될 수 있는지를 숙고해보고자 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진화의 상황을 고려하여 죄와 죽음을 설명하는 신학은 종종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으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나는 '진화 신학(evolutionary theologies)'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미 그렇게 부르는 많은 학자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연구는 진화를 신의 관점에 서 이해하는 방법이 아닌, 신을 진화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방법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즉 이런 연구는 어디까지나 생물학적이라기보다 신학적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진화 신학'이란 용어가 '유신론적 진화론'이란 용어보다 명료하다고 생각한다.

 

고통과 죽음의 문제는 성공적인 진화 신학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우주가 무계획적이고, 아픔과 파괴와 죽음으로 가득 찬 고통을 비인격적으로 무시할 때, 우주를 들판의 모든 새와 백합과 풀을 돌보시는 대단히 후한 창조주의 사랑의 행위(마 6:26~31)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전통적으로 아픔, 파괴, 죽음은 '타락(fallenness)'의 징후, 즉 인류 타락(Fall)의 결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인류가 지구상에 매우 늦게 출현했다는 사실은 그런 설명을 지지 하기 어렵게 만든다.

 

아무튼 고통과 죽음이 절대적인 악은 아니고, 설명의 여지가 있다. 

우선 자연의 고통은 성서에서 복잡하게 묘사된다. 

고통이 동물의 세계에서는 악 혹은 '타락'의 징후로 간주되지 않는 듯하다. 

육식 동물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구절들이 있다(창 49:27, 욥 38:39~41, 시104:21, 147:9).

 

반면에 미래에는 포식(食)에 대한 신성한 종말론적 해결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 데, 즉 “늑대가 양과 뛰놀며  ...... 그들이 모든 내 거룩한 산에서 상하거나 파괴되지 않을 것”(사 11:6~9, 65:25 참조)이다.

추론해보면, 육식과 포식은 원래부터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제사장(P) 문서에 따르면, 인간과 동물은 원래 홍수 때까지는 초식 동물이었다(창 1:29~30, 9:1~4).

아마 이사야의 종말론적 비전은 그러한 전원의 상태로 돌아가는 희망을 암시하는 듯하다.

 

어쨌든 포식 동물이 생존을 위해 먹잇감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죽음이 역설적으로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사실은 악으로 표현될 수 없다.

인간 세계에서도 자연 재해나 질병이 악 또는 '타락'의 결과가 아니라, 거룩함 과 순종의 방법을 강조하기 위해 행해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일컬어진다(예, 출 23:28,32:35, 레 26:21, 민 14:37, 16, 25, 계 15~16).

 

고려해볼 만한 다른 관점은, 우리가 인정하듯이, 고통과 죽음이 생명에 필 요하다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사우스게이트는 고 통이 완전히 신학적인 악으로써가 아니라, 생존 과정에서 풍부함과 성숙으로 나아가기 위해 극복해야 할 피할 수 없는 장애물로 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역경을 극복한 인간 개인의 삶의 이야기를 생각하든, 아니면 전체 생물 학적 종이 더 높은 형태로 진화하는 것을 생각하든, 이것은 사실이다.

이처럼 죽음이 완성된 삶을 향한 평화롭고 자연적인 끝이라면, 죽음이 반드시 악은 아닌데, 이 정서를 반영하는 성서 구절들이 있다(예, 눅 2:25~32). 아무튼 피조물 들이 다시 생성되기 위해 죽지 않았다면, 우리 행성의 천연 자원/음식은 벌써 고갈되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윈이 전적으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아니었다. 즉 아픔, 고통, 죽음으로부터 발생하는 신학적 난제들은 인간 문화가 시작된 이래 계속 있어왔고, 이에 대한 긍정적인 세계관도 존재해왔다.

존재의 허무 대한 신학적인 문제가 극심해지는 순간은 바로 고통이 보상되지 않을 때, 즉 고통이 명백히 유익을 주지 않으며 부당해 보일 때인데, 이것은 다윈주의가 진화 과정에 내재된 엄청난 생명의 낭비를 말하며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에 서 균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즉 고통과 죽음은 그 자체로 악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고통과 죽음의 특별한 본질(qualities)이 문제가 되는데, 현대 과학은 그 것들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을 때부터 세상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한다. 이것이 고통과 죽음이 종종 '자연악'이라는 포괄적인 용어로 언급되는 이유다.

 

 

자연과 타락

자연악에 직면해서 어떻게 선한 하나님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는, 오랜 문제이자 성서에서 두드러진 특징이다(예, 창 18:22~33, 욥기). 이런 이유로 자연악에 대한 현대의 신정론이 반드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신정론은 '자연악'과 '타락'이란 용어 뒤에 숨어 있는 어려움들을 전면으로 가져온다.

자연악을 말하는 것은 사실상 자연 세계의 파괴적이고 어려운 면을 불러내어 그것들을 신학적으로 악의 범주로 분류하는 것이고, 하나님에게 파괴적이고 어두운 면에 대한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아무튼 자연은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에 대해 비난받을 수 없다.

우리는 여기에 모호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상치 못한 지진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인 자연법칙이, 수 백만 년 넘게 육상 생물들의 번영을 위해 안정적이고, 온화하며, 비옥한 대륙을 제공한 바로 그 자연법칙이라는 것이다.

이 과정은 분명 자유 의지를 지닌 인간 행동이 악이 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악'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성서적 관점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과정이 사실상 "보기 좋았다"(창 1:10)고 결론 내려야 한다.

'자연악'이란 개념은 쉽게 거부되는 개념이다.


'타락'이란 무엇인가? 

중요한 성서 본문 중 하나가 로마서 8장 18~23절인 데, 여기에서 바울은 '피조물' 전체가 그리스도의 구속을 열렬히 갈망하고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피조물이 "허무"(20절)에 굴복했고, "썩어짐의 종살이"(21 절)에서 해방되기를 열망하고 있다고 본다.

로마서에서 바울의 이전 논의는 인류의 죽음에 초점을 두었지만(7장), 8장의 초점은 '허무'와 '부패'(혹은 '타락) 가 전 세계에 관련된다는 우주적 관점으로 상당히 변한다.

바울이 언급하지 는 않지만,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이 타락은 에덴동산에서 지은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이다.

이런 이해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이 경험하는 고통과 죽음은 타락의 직접적인 결과다.

만물은 '타락한 상태로 존재한다.

 

바울이 이것을 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현대의 진화 묘사에서 이런 관점은 상당히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만약 우리가 더 이상 역사적 타락을 전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면, 이때 자연 세계가 인간 죄의 확산으로 인해 '타락한 상태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과학은 진화의 투쟁과 '적자생존'뿐만 아니라 열역학 제2법칙으로 설명되는 "썩어짐의 종살이"가 태초부터 세계의 일부였다고 본다.

창조에 대한 시각은 근본적으로 모호하며, 우리는 다윈의 무척 생생한 다음의 진술에 동의할 수도 있다.

 

"자연의 서툴고, 소모적이며, 엉터리이고, 조잡하며, 무섭도록 잔인한 활 동들을 책으로 쓴다면 '악마의 사도'라고 명명해야겠군!" D. 후커에게 1856년 7월 13일에 보낸 편지).

 

다윈은 자신의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 설명이 지구상의 생명 진화에 내재 하는 고통, 잔인함, 낭비와 부패를 효과적으로 요약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락'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좋은' 창조 안에 모호함, 혹은 더 나은 말로 '어두운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 야한다.

 

 

어두운 면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대부분의 죄와 타락은 이기심으로부터 생겨나는 데, 이 이기심은 바로 자연 세계에서 드러나는 지배를 위한 투쟁에 관련될 수 있다.  

마이클 루스는 우리로 하여금 원죄를 진화 용어로 이해하게 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 이기적 유전자를 비유적으로 말하는데, 이것은 유전자가 소유자의 목적에 맞춰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소유자가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 특히 인간 같은 지성적 존재에게서 적응은 대부분 동료들과 협력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사냥하거나, 먹이를 찾아 다니거나, 공격자들과 싸우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은 상당한 유익을 준다.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즉 우리가 어리거나 늙거나 병들 때,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데, 도움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이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간에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너는 내 등을 긁어주고, 나는 너의 등을 긁어 줄 것이다.

그래서 진화 덕분에 우리는 다소 이기심과 우호감/이타주의의 긴장된 혼합 속에 있다.

이것은 분명 원죄가 기독교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련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따라서 우리는 본래 선하다.

그러나 우 리는 타락했고, 타락이 이제 우리 본성의 일부가 되었으며, 그래서 우리는 또한 악하다.

이기심과 이타주의가 불안정하게 뒤범벅되어 있다.

 

비인간 동물들 또한 이기적인 모습과 이타적인 모습을 보이고, 돌고래와 같은 동물들에게 도덕적 의식에 대한 징후가 있다고 주장되어왔다. 

동물의 부도덕함이 소위 말하는 그런 죄가 되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루스는 인간 안에 있는 죄가 우리의 진화 배경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과, 그 죄가 일종 의 원죄(죄가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죄로 향하는 경 향성)라는 것을 주장한다.

 

이 진화적 접근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전통적 타락 개념을 요청하지 않는 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우리가 반복적으로 강조해온 문제, 즉 하나님의 선성을 위협하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 관점은 하나님이 원죄 를 진화의 피할 수 없는 부분으로 삼았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관점은 인간이 죄를 변명할 수 있게 한다(죄가 우리 유전자 속에 있다)는 데에 어 려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정말로 끔찍하고 극악한 악을 기억할 때(유태인 학살이 항상 심각하게 거론된다) 죄를 인간의 경향성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전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루스는 이 문제들을 하나님이 피조물을 만들기로 선택한 것처럼, 

하나님 이 인간을 매 순간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행동의 과정에서 자유롭게 평가하 고 결정하도록,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결정을 자유롭게 실행에 옮기도록" 만들 었다는 것을 제안하며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자유는 본성상 남용될 소지가 있고, 이기적 행동 과정은 탐욕과 죄를 초래할 것이다. 

루스의 요점은 이것이 자유로운 세계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루스에 의하면, "우리가 죄로 물들었거나 혹은 우리가 그런 경향성을 물려받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잘못은 아니다."

 

피콕도 자유롭게 진화하는 세계에서 고통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자유로운 피조물의 창조가 하나님 스스로에게 제한을 가하는 역설이 있는 셈이다.

 

이것은 신정론에 있어서 해결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질문 중 하나다. 

심지어 전능한 창조주가 혼돈이 아닌 조화로운 법칙 같은 창조(자의식이 있고 번식하는 복잡한 독립체들의 자유로운 활동 무대이자, 창조주가 기뻐하는 생물의 풍부한 다양성이 존재하는 창조)를 할 수 있는 방법에는 내재적인 제약이 있다.

 

하나님의 영역에 제한을 가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피콕은 인간의 창조 과정(출산부터 예술 창작까지)이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데에서 유추하여, 하나님이 피조물의 고통을 공유하면서 스스로를 제한한다고 말한다. 

만약 피콕이 옳다면, 이때 이런 고통은 신성시되고, 만약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고통에 참여한 다면, 이때 고통을 자연악의 한 유형으로 말하기는 매우 어렵게 된다.

 

반면에 진화를 하나님이 현재와 같은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유일한 방법' 접근은 진화의 고통과 죽음에 직면해서 하나님의 선성을 보존해줄지는 모르지만, 고통 중에 있는 피조물에게 위안을 주지는 못한다.

 

실제로 이 '유일한 방법' 논의는 1710년 악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모든 가능한 세계 중 최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답한 라이프니츠의 상당히 긍정적인 대답과 관련된다.

 

볼테르는 1759년 자신의 소설 《캉디드Candide》에서 이런 주장을 공격했고, '유일한 방법' 신정론에 대한 볼테르의 비판(이런 낙관주의는 거대한 고통에 직면해서 공허하게 들린다)은 여전히 힘을 갖고 있다.

 

이런 어려움에 직면해서, 사우스게이트는 보다 예리하게 접근한다.

그는 진화 과정의 고통과 죽음이 우리 세계에 필요해 보인다는 것에는 동의하며, 우리가 유일한 방법 논의에서 시작해야 하지만, 거기서 끝날 수는 없다고 본다.

 

우리는 또한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단언해야 한다.

하나 님은 냉담한 고통이 있는 전 체계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피조물이 번성할 때 기쁨을 느끼고, 상처받은 사람들과 함께 우는 하나님이다.

 

뿐만 아니라 종 말론적 미래에 창조의 '어두운 면을 완전히 해결할 대단히 중요한 신적 계획 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모호한 상태에 산다. 즉 피조물은 "매우 좋게" (창1:31) 창조되었지만, "고통 속에서 신음"(롬 8:22)하고 있다.

 

사우스게이트의 진화 신학의 장점은 그가 비인간 세계를 강조한다는 것과, 특히 모든 피조물의 진화의 고통이 하나님에 의해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류가 세계 천연자원에 대한 탐욕 때문에 야기된 세 계의 고통에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지만, 인간 중심적으 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사우스게이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들(창 1.26~27)이 스스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부여된 특별한 지위를 존중해야 한다 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 진화의 고통과 인간 죄의 고통을 짊어진 것처럼, 인간도 자연 세계를 보살핌에 있어서 보다 희생 적인 역할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진화 신학에 종종 적용된다. 

루스가 지적한 대로, 기독교가 십자가 중심의 종교라는 사실은 고통이 기독교의 중심이라는 것을 의 미하며, 이것은 다윈주의에 대한 설득력 있는 신학적 해결을 제시한다. 

이것은 중요한 지적이며, 계속 연구될 가치가 있다. 

여기에서 전통적 십자가 신학과는 다른 종류의 신학적 움직임이 발생하는 것에 주목하자. 

전통적인 기독교 관점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고, 그럼으로써 인간 세계의 죄를 속죄한다. 

 

그러나 현대 진화 신학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는 생 명 세계 전체의 진화의 고통과 죽음, 즉 분명 인간 죄의 결과가 아니고 따라서 소위 말하는 그런 '속죄(atonement)'의 필요도 없는 고통과 죽음을 추가로 떠맡는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전통적 속죄 신학과는 현저하게 다른 방법으로 사용된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진화 신학이 구성되는 방법을 고찰해볼 것이다.

 

 

피조물의 구속

필연적으로 테야르 드 샤르댕의 진화의 비전이 이 논의의 시작점이다. 

샤르댕은 《인간 현상》에서, 그리스도를 진화 과정의 정점, 즉 전 피조물이 향하는 '오메가 포인트'로 보았다.

샤르댕에게 있어서, 이것은 영 적이거나 은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실제적 의미에서 사실이다.

즉 생물학적 진화 과정은 이 과정의 정점인 그리스도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샤르댕의 사상은 널리 영향을 끼쳤지만 많은 논란도 낳았는데, 학자들은 그의 사상에 많은 의문을 제기한다.

가장 중요한 비판 중 하나는 우주가 그리스도를 향해 정확하게 진화한다는 그의 인식이 다윈주의가 전혀 지지하지 않은 진보관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적인 이유로, 오메가 포인트로써의 샤르댕의 그리스도가 어떻게 역사적 예수와 연결되는지, 그리고 어 떻게 십자가가 부활의 묘사와 연결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요약하면, 샤르댕은 진화를 구원과 융합하는 듯 보인다.

그러므로 샤르댕의 해결책이 신정론의 문제에 적절한 대답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 예를 든다면, 진화는 불가피하게 죽음을 모든 피조물에 얽어매기 때문에, 생명의 부활에 대한 기독교 소망을 완성할 수 없다.

 

샤르댕의 해결 방법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보다 최근의 진화 신학은 샤르댕이 다루지 않았던 수많은 문제들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으로 강조되어온

(a) 비인간 세계와 인간 세계 모두를 구속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이 재강조되었고,

(b) 종말론적 차원이 재강조되었는데 종말 론적 차원에서 구속이 (진화과정 보다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완성될 것이다. 또 한

(c) 하나님이 세상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일 정도까지 신정론 의 도전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게 고려되어왔다.

피콕은 말한다.

생물학적 진화를 통한 창조의 수단으로써 아픔, 포식, 고통, 죽음이 도처에 있는 것은, (도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논리적인 하나님 개념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많은 대가를 지불하며 세상의 창조 과정 안에서, 창조 과정과 함께, 창조 과정 아래에서 고통당한다는 것을 잠정적으로 제안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것이 진실로 도덕적 문제이든 아니든 간에, 분명 고통당하는 피조물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친밀한 현존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첫 창조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끝나지 않았다는, 다윈주의에 의해 야기된 인식과 관계된다.

이것은 또한 진화 신학이 (d) 창조에서 하나님의 내재성과 (e) 하나님의 계 속된 창조 행위에 초점을 두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들은 신학적 창조관을 균형 잡기 위한 복잡한 일련의 요소들이고, 이 중 첫 번째인 그리스도의 고통이 핵심이었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그리스도 희생의 주관적 관점(그리스도가 따를 표본이다)과 객관적 관점(그리스도의 고통은 본질적으로 구속의 객관적 행위이다) 사이를 오가며 복잡한 토론을 야기한다. 

 

예를 들면, 롤스턴은 자연과 인간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구속적 고통의 가치를 주장한다.

진화는 오랜 지구 역사를 통해서 피조물이 타자를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해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이 피조물 간의 대속의 이야기는 그리스도가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예수 수난극과 다를 바 없었다.

태초부터 수많은 피조물들은 다른 피조물들을 위한 몸값으로 자 신들의 삶을 포기해왔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자연 질서의 예외가 아니라 자연 질서의 중요한 예증이다.”

 

이런 방식으로, 롤스턴은 주로 주관적 표상 으로서의 그리스도 십자가를, 자기희생적 가치를 지닌 모든 피조물에게로 발 전시킨다.

롤스턴이 이것을 혼자 주장한 것은 아니고, 수많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고통받는 피조물과 연대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행위로 주장해왔다.

하나님은 대체로 고통에 참여함으로써 고통을 해방시킨다고 일 컬어진다.

 

반면 사우스게이트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틀림없이 객관적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이것은 피조물의 자유롭고 주관적인 결정에 의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약 성서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우주 만물을 새로운 창조 때에 객관적 견지에서 변화시킬 것을 증언하기 때문이다(롬 8:19~22, 골 1:20, 엡 1:8~10).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인간 죄와 모든 비인간 피조물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감당한 다”.

사우스게이트가 신중하게 선택한 "책임을 감당한다"라는 표현에 주목하자.

이 표현에는 십자가의 진화 신학을 곤란하게 하는 심각한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구속', '속죄', '희생', '화해'와 같이 종종 사용되는 은유들이 매우 암시적인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사상은 인간의 죄에 있어서, 그리고 신인 관계가 깨지면서 발생하는 모든 것을 바로잡는 데에 있어서 십자가의 역할을 강조해왔다.

죄는 철저히 신학적으로 진술되어야 하는 신학적 개념이다.

'구속', '속죄', '희생', '화해'는 타락, 잘못의 치유, 지불되어야 하는 비용을 말하는 네 가지 일반적 은유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화에서(전적으로 자연적 원인으로부터) 발생하는 고통과 죽음을 말할 때, 그런 은유들에 관해 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만약 진화의 고통과 죽음이 하나님의 '좋은' 창조의 한 부분(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의도한 부분)이라면, 치유 혹은 보상되어야 할 깨진 관계가 아니다.

요약하면, 그런 은유들은 공허하며, 아마 그 은유들이 해결한 것보다 더 많은 문제들을 야기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죄와 비인간 피조물의 고통에 대한 "책 임을 감당한다"는 사우스게이트의 신중한 어구는 다소 모호하지만 현명한 지적이다.

이 어구는 그가 이 책임 감당을 십자가와 십자가의 난해한 은유들보다 더 넓은 측면에서 이해한다는 점에서 적절하다.

 

십자가는 인간 죄를 사하지만, 고통받는 피조물이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온전히 성육신 한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로마서 8장 19~22절이 사우스게이트 통찰에서 결정 적인 부분이다.

사우스게이트에 의하면, 피조물이 굴복한 "허무"(20절)는 진화 과정의 허무다.

그러나 실로 엄청난 수십 억 피조물의 죽음을 거쳐, 결국 하나님이 예수 안에 인간의 몸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고통을 공유하며 단단해진 결속을, 그리고 새로운 창조에서 깨닫게 될 전 피조물의 불안하지만 최종적인 희망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세상을 향한 새로운 가능성을 암시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죄가 속죄되고, 종말론적 미래에 전 피조물이 변화될 것을 암시한다.

사우스게이트는 세계의 진화 투쟁이 “고통 속에서 신음”(롬 8:22) 하는 것이며, 이 투쟁을 통해 우리와 같은 복잡하고 자 유로운 존재들이 탄생할 수도 있었다고 본다.

세상에서 가장 큰 위험이 인간으로부터 발생하지만, 성육신한 그리스도 안에 가장 큰 희망이 있다.

 

사우스게이트의 설명은 성서 전통을 철저히 탐구할 뿐만 아니라 진화 신학을 가로막는 어려움들에 대해 솔직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진화 신학을 가로막는 어려움들이 상당히 많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통의 해결로 제시하는 모든 진화 신학에서처럼(여기에서 하나님은 함께 고통당하는 분으로 묘사된다),

사우스게이트의 접근은 사실상 목적론을 진화 안으로 들여와야 한다(2장의 “우연과 법칙, 우발성과 돌연변이" 참조).

 

즉 하나님의 아들 이 그리스도로 성육신하기 위해 충분한 자의식과 복잡성을 지닌 피조물들이 언젠가 등장했다는 말이다.

위쪽으로의 진보 개념은 진화 생물학에서 상당한 논란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과학 언어에서 만들어진 형이 상학적인 주장인데, 이 주장에는 신학의 발전이 과학에 상당히 의존할 때 발생하는 불가피한 어려움들이 있다(6장 참조).

 

십자가가 진화의 고통을 '상쇄한 다'고 말하는 접근처럼, 신학적 범주들을 과학적 범주들과 혼동할 위험이 있다.

만약 진실로 진화 과정 뒤에 그러한 '목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오직 종말론적으로, 즉 새로운 창조의 관점에서 뒤돌아볼 때 이해될 수 있다.

"알파를 결정하는 것은 오메가다."

 

그러므로 진화 신학의 난제는 종말론적 미래를 언급할 때 가장 잘 해결되고, 어쨌든 이것은 신약 성서에 다가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고, 심지어 이해하지도 못하며, 미래에 완성될 완전한 신적 행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타당한 진화 신학도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스스로의 주장이 일시적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깨달음이 아니라 약 1,800년 전 이레니우스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종말론적 관점

이레니우스의 창조 사상은 기독교 신학에서 상당히 이른 시기의 사상이다. 이레니우스 사상은 서양 기독교에 받아들여진 아우구스티누스 사상 때문에 오랜 기간 간과되었지만, 진화적 함축을 지니고 있어서 과학-종교 대화에서 점점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레니우스의 창조 사상은 전적으로 성육신적이고, 당대의 영지주의 이원론에 반대하며,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물 질적 창조의 중요성과 '좋음'을 주장한다.

이레니우스는 간결하고 혁신적인 글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의도적으로 완전하지 않게 창조한 이유를 설명한 다. 그 이유는 인간이 미성숙한 상태에서는 완전함을 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태초의 창조는 그것이 '완전하게 될 운명'인 한에서 '좋았다.'

하나님의 계획은 아이들이 어른으로 자라가는 것처럼, 인간이 성숙해지고 완전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처럼,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쉽게 미혹되어 하나님에게 불순종했다.

이레니우스에게 있어서 이것은 타락이라기보다 "상승을 위한 실패"다.

이레니우스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인간이 죄 를 극복할 수 있고, 하나님 안에서 완전을 향해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완전'이란 무엇인가? 한편으로 이레니우스는 완전을 부활한 그리스도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불멸성과 불사성에 연결시킨다.

이레니우스는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기 이전에는 불멸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그는 인류가 항상 영원히 살 수는 없었으며(즉 불완전하며)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미성숙으로 인해 '신성한 힘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레니우스에 따르면, 죽음은 인류의 '창조된 본성'의 결과다.

 

로버트 브라운(Robert P. Brown)은 다음과 같이 이레니우스 사상을 요약한다.

"죽음은 처벌이 아니라 불완전한 피조물의 당연한 결말이다.

인류가 불멸성을 잃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결코 불멸성을 지닌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레니우스는 놀랍게도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의 타락 모델에서 보았던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만약 우리가 이레니우스처럼 첫 창조가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을 완성시킬(재연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해 성숙해간다고 가정하면,

 

이때 우리는 많은 희생을 치르며 역사적 타락을 고수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선성을 고수하기 위해 첫 창조의 완전함을 주장할 필요도 없다.

피조물은 완전해질 것이고, 하나님의 완전한 선함도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태초가 아니라 과정의 마지막에서다.

 

하지만 이레니우스의 창조관이 물리적 혹은 생물학적 진화의 의미에서 진화론적이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의 창조관은 창조의 어두운 면이 전적으로 자연스럽고 하나님에 의해 의도된 것이며, 이 어두운 면이 어떤 생물학적 목적론을 통해서가 아닌, 기적적이고 종말론적인 부활의 과정에 의해 때가 차면 해결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리스도는 우선 창조의 불완전한 '어두운 면(즉 죽음)'을 경험하면서,

그리고 죽음을 통해 어떤 어두운 면도 없는 새로운 종류의 종말론적 생명으로 들어가면서 창조를 완성하고 완전을 이룩한다.

우리는 살기 위해 죽어야 한다. 즉 우리는 진화의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창조가 오직 종말론적 성취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신약 성서에 지배적인 계시 신앙과 일치한다.

사우스게이트의 가장 설득력 있는 요점 중 하나는 진화의 모호성들이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확언하는 대로, 미래에 완성될 것이라는 확고한 비전에 의해서만 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고통당하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그리스도의 생명이라고 말해진다면(물론 십자가 고통을 포함해서), 이것은 오직 미래의 관점, 즉 본질상 그리스도의 부활한 생명에 의해 제공되는 관점에서 완전히 깨달아질 것 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부활은 단지 인간만이 아닌 전 우주를 위한 열쇠다.

하지만 당분간 창조의 어두운 면에 대한 목적론적 대답은 개략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로만 말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특히 현 시대에 만들어진 모든 목적론적 진술들은 미래의 완성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이다(9장 참조).

 

7장에서 중요하게 다룬 문제(로마서 5장의 바울의 속죄 신학에서, 인간의 죄와 죽음 사이의 인과적 연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로 되돌아가서, 

현재로서는 인간의 죄와 죽음이 과학적으로 분명하게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 해야 한다.

하나의 연결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먼 과거에서 진화하는 인간 의식의 자각이, 양심의 자각뿐만 아니라 인간의 유한성(즉 죽음)에 대한 인식의 향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상정한다.

 

이런 방식으로, '위쪽 으로의 타락(7장의 “역사적 타락?" 참조)'은 도덕성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한 인식이었다.

자유의지를 지닌 인과적 존재로서 우리 자신에 대한 정교한 인지적 자각으로 인해,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에 대한 특별한 인식으로 인해, 인간은 다른 동물들로부터 구별된다.

 

이 두 요인은 우리의 도덕적·영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 행동이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미칠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과, 이 결과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실로 요약 되는 유한한 인간의 불가피한 요소(죄)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죄는 우리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죄와 죽음은 한 꾸러미에 속해 있어서, 만약 우리가 죄에 관계되면,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틀림없이 죽음도 겪게 된다.

 

만약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와 이것을 토론한 펠라기우스주의의 '이단' 사상을 다시 고찰해보면(7장의 “바울과 죽음" 참조),

리는 양심(죄의식)과 죽음에 대해 관념적인 인식이 우리의 진화 역사에서 불가피한 요소라는 것을 받아들 이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이 문제로 인해 걱정할 필요는 거의 없다.

 

다시 말하 면, 내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펠라기우스주의의 오류에 빠질 이유가 없다.

대신에 나는 내 죽음에 대한 인식을 타고난 것처 럼, 불가피하게 '원죄'를 타고났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인식과 원죄는 둘 다 인간 진화의 결과다.

 

우리가 여기에서 제안하는 방법은 죄와 죽음을 연결하기 위한 다소 모호 하고 주관적인 방법이며, 이 방법은 인과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이 주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만약 우리가 바울을 '죽음에 대한 지식이 죄와 함께 들어왔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다"(롬 5:12)는 것을 확언하는 쉬운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죄는 신학적 범주이지만, 죽음은 대개 과학적(자연적) 범주다.

바울에게 있어서 죄와 죽음은 신학적 범주이면서 동시에 과학적 범주가 될 수 있었다.

그러 나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롬 5:2) 종말론적으로 생각했고, 종말의 때에는 죄와 죽음이 과거의 문제일 것이라고 보았다.

 

 

종말론적 도전

고통과 악에 대한 주제에서 마지막으로 고찰해볼 내용은 인류가 지구 자 원을 잘못 사용함으로써 발생한 부가적인 악과 고통, 즉 생태 위기에 대한 것 이다.
종종 생태 신학으로 불리는 이 중요한 사상은 현재의 환경 위기가 기독교 창조 교리에서 비롯되었다는 린 화이트의 주장으로 부터 시작된다. 이 관점에 의하면, 임박한 지구 재난은 성서의 잘못된 해석으 로부터 발생했고, 서구 기독교인들은 P문서에 있는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창 1:28)는 명령을 너무 철저하게 이행해서 그들이 지구를 재난 직전까지 몰고 갔다는 것이다.

 

피터 해리슨은 화이트의 전 체적 요지를 지지하는 한편, 과학의 발전이 (그리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과학의 시도가) 상징과 알레고리 중심의 중세 성서 해석학이 유럽 종교 개혁의 영향으 로 보다 문자적인 접근으로 대체되는 중요한 시기인 17세기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며, 화이트 주장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것은 성서뿐만 아니라 자 연 세계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더 이상 우주가 더 깊은 영적 실재에 대한 표상과 은유로 보이지 않았고, 우주의 중요성은 문자적·물리적 실재로써 이해되기 시작했으며, 우주는 소위 말해 이용되기 시작 했다.

해리슨이 말한다.

세계가 더 이상 초월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없었을 때, 세계는 오로지 물질적 이용을 위해 활발히 개발되었다.  ............ 그러므로 문자주의는 두 가지 독특한 방법으로 자연 과학의 등장에 기여한다. 

첫째는 자연의 상징적 중요성을 빼앗는 방법으로, 

둘째는 창조와 타락에 대한 성서 이야기들의 의미를 제한하는 방법으로다.

즉 창조와 타락에 대한 성서 이야기들은 인류에게 다시 자연 지배를 명하는 것으로밖에 해석될 수 없게 된다. 


해리슨의 요점은 심각한 환경 위기에 대한 책임이 기독교 창조 교리에 그다지 많지는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위기는 서구의 상당히 많은 복잡한 지적 발전으로부터 발생했는데, 이 지적 발전은 세계와 창세기 창조 이야기를 보다 문자적으로 읽게 함으로써 과학을 부흥시켰다.

 

물론 현대 과학의 발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문자주의와 똑같은 지적 경향이, 대부분의 현대 과학을 거부하는 창조론으로 구체화된 것은 상당한 모순이다.

또한 창조론이 대부분의 주류 성서학, 즉 문자주의적 종교 개혁의 또 다른 산물을 거부하는 것도 모순이다.

하지만 성서학은 성서에서 생태적 관점들을 재발견하는 데에 중요한데, 성서의 생태적 관점에 대한 포괄적 논의는 이 책이 포함된 시리즈 중 한 책에 등장한다.

 

예를 들면, 엘런 데이비스는 성서 시대 땅 사용의 윤리를 우리 시대와 비교하면서, 구약 성서의 농업 관점을 정립한다.

데이비스에게 있어서, 현재의 생태적 재앙은 (특히 농업과 관련해 계산해보면) 도덕적이며 신학적인 위기인데, 이것은 구약 성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해석학적 상황을 제시한다.

이런 해석학은 "성서의 땅 중심주의"를 강조하고, 그 '땅'을 돌볼 인간의 소명을 더욱 강조한다.

 

창조 주제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생태적 관점 중 하나는, 모든 생물을 향한 종말론적 희망에 대한 관심인데, 진화 신학을 발전시킨 현대 신학자들은 이것을 주장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만약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과 화해하게 되거나(골 1:20),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고", "모아지고"(엡 1:10), 심지어 "새롭게"되면(계 21:5),

 

그리고 만약 "모든 피조물"(계 5:13)이 언젠가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면,

인간들은 이제 더 넓은 하나님의 창조 영역에 있는 모든 피조물의 지위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런 방식으로, 만약 생태적 인식이 폭넓은 창조 주제에 이미 내재하지 않는다면,

생태적 인식은 성서의 종말론적 본문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성서적 비전들을 논의할 것이고, 그것들이 결코 문자적 예측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한 경우를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환경 위기는, 만약 우리가 현 시대에 지구의 미래에 더 많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이 종말론적 예측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문자적이고 더 빨리 우리의 훼손된 자연 세계에서 실제로 벌어질 수도 있다 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만약 생태적 도전이 (또한 창조의 '어두운 면'이) 우리에게 종말론적으로 사고하도록 충고한다면, 여기에 우리의 현재 행동에 대한 시사 점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결론

6~7장에서 우리는 타락의 역사적 이해에 대한 진화 생물학의 도전과, 이 도전을 막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검토했다. 

우리는 그 시도들이 모두 구약과 신약에 대한 해석으로 불충분하다는 것을 논의했다.

우리는 또한 그 시도 들이 의도하지 않게 창세기 2~3장에 충실하기보다는 바울, 그리고 죄와 죽음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역사적 타락 개념은 보수주의자들이 종종 가정하는 것에 비해 오히려 성서 본문에 덜 중요하다는 것이 세밀한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

우리는 역사적 타락의 지위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성서에 더 가깝고, 현대 진화 과학의 상황에 더 잘 맞는 악, 죄, 죽음의 이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진화의 고통과 죽음을 세상의 '타락'의 결과로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손에 의한 첫 창조의 필수적인 특징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고통과 죽음은 이 관점에서 더 이상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고통과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것을 인간 자유 의지의 결과로 설 명할 수 없고, 대신 그것들을 하나님의 '좋은' 창조의 '어두운 면'으로 이해해야 한다.

 

고통과 죽음은 그것들 자체로서는 악이 아닐지 모르지만, 난해한 모호성을 지니고 있다.

수많은 현대 진화 신학은 이 '어두운 면'을, 특히 그리스 도의 십자가를 통해, 피조물과 함께 고통당하는 하나님을 주장함으로써만 논의될 수 있는 난해한 문제를 표상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엄밀한 연 를 통해 이 주장 자체에 문제가 있음이 드러난다.

즉 이런 관점이 '만회하려는' 잘못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고, 만약 심지어 하나님이 피조물과 함께 고통당한다고 말해져야 한다면, 어떻게 그 관점이 피조물에게 고통의 해 을 위한 희망을 제공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반면에 우리는 타당한 해결로 이레니우스 신정론을 소개했다.

이레니우스 신정론은 첫 창조가 완전의 의미에서 '좋은' 것이 아니라 '목적에 적합한 의미에서 '좋은 것이었고,

종말 론적 미래의 완전을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주장하며,

타락의 수많은 어려움들을 제거한다.

 

이런 신정론은 미래 완성을 강조함으로써 타락을 덜 강조한다.

그러므로 미래를 향한 희망은 인간의 타락과 창조의 '어두운 면'에 대한 중요한 답을 제공함에 틀림없고,

성서의 종말론적 본문들은 그런 희망에 대한 가장 강한 근거를 제공한다.

이제 우리가 살펴볼 것이 바로 이것이다.


출처 : 성서의 본성(마크 해리스 지음, 장재호 옮김, 도서출판 두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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