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 과학적 종말론과 새로운 창조
과학적 종말론 : 세상 종말 모델
성서의 창조 주제는 이 주제의 한 부붖인 '새로운 창조'가 고려되기 전까지는 충분히 다루워 진 것이 아니다.
세상의 시작은 오직 세상의 끝에서 그 진정한 의미가 드러날 것이고, 새로운 시작에서 완성될 것이다.
즉 (전 적으로 우리의 관점에서) 물리 우주의 진화는 신학적 중요성을 갖는데, 이 중요성은 오직 종말의 관점에서 명백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성서의 종말론적 본문들이 어느 정도까지 물리 세계의 운명을 문자적으로 예언하는가?
물리 세계에 대한 성서의 종말론적 예언들이 역사 속에서 사회적, 정치적 혹은 종교적 변화에 대한 은유로 이해될 수 있는가?
2,000년의 기독교 전통은 이런 본문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에 무게를 두었지만, 우리는 '과학적 종말론'을 살펴본 후에 이 문자적 이해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인간 문명의 종말과 지구의 종말
많은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종말이 머지않았다"라고 경고해왔다.
종말은 일부 신자들에게 계속적인 관심 주제였을 뿐만 아니라, 웰스의 공상 과학 소설인 《우주 전쟁》(1898)에 많은 영향을 받은 21세기 수많은 소설과 영화의 대중적 주제였다.
미래 종말에 대한 문화적 집착은 17~18세기의 '격변설(오늘날의 지구는 주로 비교적 최근에 노아의 홍수의 거대한 격변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믿음)'을 어느 정도 대체했다.
새로운 지질 과학은 격변에 대한 믿음을 거의 쓸모없게 만들었다.
지구가 6,000년 또는 어셔가 계산한 연대보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었다는 점, 그리고 사실 격변이 아닌 광대한 역사를 통해 매우 느리고 균일한 과정에 의해 대부분 형성되었다는 점이 18세기 말과 19세기 전반기 연구에서 분명해졌다.
이 사상은 '균일설'로 알려졌으며, 격변설에 반대하며 대체로 줄곧 과학 사상을 지배해왔다.
균일설이 지질학에서만 사실인 것은 아니다.
다원주의는 생물학 분야에서 균일설에 상당히 영향을 받은 과학 모델 중 하나다.
그러나 최근 몇십 년, 우주가 격변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함께 격변설에 대한 과학적 관심이 다시 증가했는데, 이는 약 6,500만 년 전 공룡이 약 지름 10킬로미터의 엄청난 소행성과의 충돌로 멸종되었을 것이라는 연구에 영향을 받았다.
이 소행성은 비정상적으로 큰 것인데, 단지 지름 100미터 크기 의 혜성 또는 소행성이면 오늘날 거대한 파괴와 함께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게 할 수 있다.
대량 멸종은 지구의 생명 역사에서 평균 3,000만 년에 한번 씩 발생했다고 알려지는데, 아마 대부분 혜성 또는 소행성의 충돌이 원인일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지구를 이런 우주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치적인 논의를 야기했다.
지구 생명이 연약하다는 인식이 점차 증가 하고 있고, 이것은 불가피하게 신학적인 질문을 야기한다.
우주로부터의 충돌에 대한 위험뿐만 아니라, 빛의 근원인 태양과 열도 언젠가 지구에서 생명이 살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혜성과 소행성의 충돌은 어느 정도 사전에 예측 가능하며, 언젠가 태양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없앨 것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태양은 점차 팽창하고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50억 년 후에는 태양이 최대로 커져 '적색거성(red giant)'이 되며, 이때 태양의 반지름은 너무 커서 사실상 지구를 삼킬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 한참 전에 지구의 바다와 대기는 사라질 것이다.
만약 인류가 그 먼 미래에도 생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주에서 살 수 있는 다른 행성을 찾아야만 한다.
우주의 종말
물리학자들은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도 유한하다고 오랜 기간 예측해왔다.
19세기 초에 이것을 예측한 학자들은 모든 물리 과정이 고립계에서 엔트로피의 양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을 것을 암시하는 열역학 제2법칙에 근거했다.
시간이 지나며 엔트로피가 최대에 도달할 때까지 에너지가 더욱 균등하게(즉 임의적으로) 분산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엔트로피 : 1865년 독일의 클라우지우스가 열역학 제2법칙을 포괄적으로 설명 하기 위해 제안한 것으로, 자연 물질이 변형되어 다시 원래의 상태로 환원될 수 없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인간이 자연에서 얻는 에너지는 언제나 물질계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만약 우주가 이런 하나의 고립계라면, 현재 별과 행성이 지니고 있는 (우리의 경우,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에너지와 물질이 천천히 균등하게 우주로 분산되어 '열사'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엔트로피가 최대가 된 열 평형 상태.
이때 새로운 별, 행성, 또는 생명체가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제임스 진스(James Jeans, 1877~1946)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균일하게 분산되고 우주의 모든 물질이 같은 온도에 도달하 때인 '열사' 때에 우주가 종말에 이를 수 있다.
이 온도는 너무 낮아서 생명체가 살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이 마지막 상태에 이르게 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 여행의 끝에는 반드시 우주의 종말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진스의 수사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는 아직 결론 내려지지 않았으며, 현대 우주론에서 논의되고 있다.
전 우주가 실제로 열역학 제2법칙에 종속된 단순한 고립계로서 간주될 수 있는가?
그리고 빅뱅 모델이 암시하는 것처럼 만약 우주가 팽창 중이라면, 분명 우주에 최대 가능한 엔트로피 양도 아마 실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속도보다 더 빨리 증가하여, 결코 열사에 이르지 않을 수도 있다.
비록 우주는 계속 팽창함에 따라 계속해서 차가워지 고, 아마 언젠가 전적으로 사람이 지내기 힘든 상태가 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지만, 결론적으로 이것은 불확실하다.
이것이 빅뱅 모델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결론이다.
비록 빅뱅 모델이 현재까지는 우주의 거대한 진화에 대한 일관된 과학 사상을 제공하는 데 상당히 성공적이었지만, 빅뱅 모델이 우주의 먼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은 수많은 요인들, 특히 우주에 있는 물질의 총량에 대한 무지, 따 라서 우주의 밀도에 대한 무지로 인해 상당히 제한된다.
문제는 천문학자들에 의해 관찰될 수 있는 물질이 예상되는 전체 물질의 2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물질 대부분은 보이지 않거나 '어둡다'고 여겨지는데, 이 '어두운 물질'이 어떤 형태인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상당히 신비스럽고 직접적인 실험 관측이 불가능한 어두운 물질의 존재는 하늘에 있는 많은 은하들과 이 은하들의 공간분포 모양에서 추론된다.
그럼 우주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가?
우주는 현재에도 계속 확장되고 있지만, 아인슈타인이 1920년에 제기한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프리드만과 르메트르의 고전적 해결 방법에 의하면, 우주의 팽창에 대한 세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가 있는데, 이 시나리오는 모두 우주의 밀도에 임계적으로 의존한다.
이 시나리오들은 우주의 밀도를 빅뱅의 팽창에 반대로 작용해서 우주를 다시 원위치시키려는 중력에 관계시킨다.
그러므로 이 시나리오들은 중력의 당기는 힘이 밀어내는 원심력에 비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한 추정에 기인한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물질이 공간을 휘게 만든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에, 우주의 밀도가 크면 클수록 시공간은 더 많이 휘어질 것이다.
첫째 시나리오는 우주의 밀도가 임계값보다 더 높은 상황이다.
이 경우 중력은 언젠가 우주의 팽창을 멈추게 될 것이다.
이 유형의 우주는 '닫힌 우주'라고 불리는데, 즉 우주는 유한하고, 우주의 경계는 구의 표면과 같다.
임계값 : 독립 변수 X가 어느 값이 되었을 때 종속 변수 Y가 특이한 상태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 이를 임계(臨界) 라 하며, 임계 상태에 있을 때의 특정한 X값을 임계값이라 한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집을 떠나 계속 직진하면 결국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우주가 스스로 빅뱅에 대한 극적 반전을 일으키며 수축하기 전까 지, 즉 '우주 대수축' 때까지, 우주는 아마 지금부터 5,000억 년 동안 계속 팽창할 것이다.
새로운 우주가 현재 우주의 재로부터 탄생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는 모든 생명체가 그때부터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붕괴하는 과정에서 우주는 엄청 작은 크기로 줄어들 것이고, 새로운 빅뱅이 발생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온도가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시나리오는 우주의 밀도가 임계값보다 낮은 상황이다.
이 시나리오 는 '열린 우주'라고 불리고, 이 우주의 크기는 무한하다.
만약 누 군가가 자신의 집을 떠나 계속 직진하면, 결코 출발점으로 되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과거 140억 년 동안 그랬던 것과 동일하게 우주는 무한히 팽창할 것이다.
만약 이 경우라면, 우주의 온도는 점차 감소할 것이고(빅뱅 이래 감소한 것처 럼), 결국 우리가 아는 생명체는 살 수 없는데, 이것은 '거대한 동결'이라 불린다.
셋째 시나리오는 우주의 밀도가 임계값과 정확히 같아지는 상황이다. 이 우주는 '평탄한 우주(Hat universe)'라고 불린다. 이 우주는 '닫힌' 우주와 '열린' 우주 중간에 위치하지만, 또한 무한하며 '거대한 동결'을 초래한다.
이 세 시나리오 중에서 실재를 가장 잘 묘사하는 시나리오를 선택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우주의 전체 질량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 만 우주는 상당히 평탄해 보인다. 많은 우주론자들은 아마 아직 알려지지 않 은 보다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우주가 정확히 평탄하다고 밝혀질 것이라 추 측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주는 무한정 팽창해 수십억 년 후에 차갑고 어둡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세 시나리오는 현재 다소 단순하게 이해된다.
우주 팽창 비율 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지고 있고, 이것이 이 세 시나리오로 설 명되려면 일반 상대성 이론의 방정식에 추가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까다롭기로 소문난 '우주상수'다.
아인슈타인은 초기 에 정적인 우주를 생각하기 위해 우주 상수를 포함시켰지만, 우주가 결국 정 적이지 않다는 것이 관찰 증거로 분명해지기 시작하자 우주 상수를 버렸다.
사실 아인슈타인이 우주 상수를 버린 것은 그의 생애 가장 큰 실수였다.
모순적이게도 우주론자들은 현재 프리드만의 세 가지 시나리오로 예측된 팽창을 설명하기 위해 우주 상수를 다시 도입하고 있다.
우주 상수의 물리적 근거는 현재 분명하지 않고, 보통 가상의 존재인 '암흑 에너지'측면에서 해석되는데, 암흑 에너지는 (암흑 물질 처럼) 보이지 않고 신비롭지만, 우주 질량에너지의 70퍼센트를 차지할 수도 있다.
암흑 에너지 : 만유인력과 정반대되는 밀어내는 힘으로, 팽창을 가속화하는 우주 에너지이다. 중력만 있다면 우주가 한 점으로 수축했겠지만, 우주가 계속 팽창하고 있기 때문에 중력보다 강한 척력이 있을 것을 추정하여 나온 개념이다.
암흑 물질 : 은하계에 존재하는 물질 중 아무런 빛을 내지 않는 물질이다. 어떠한 전자기파로도 관측되지 않지만, 질량을 가지 고 있기 때문에 중력에 의해서만 그 존재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암흑 에너지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암울한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암흑 에너지와 아인슈타인의 우주 상수가 있든 없든, 이 시 나리오들에 따르면 생명이 무한히 생존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지구상의 생명이 이 시나리오들이 제안하는 것보다도 더 빨리 생존 불가능하게 될 것 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마 지금으로부터 50억 년 후, 태양은 적색거성이 되기 위해 팽창하면서 지구를 삼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중간기 생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다른 거주지를 알아봐야 하는데, 이때는 심지어 장기적인 문제들이 고려되기도 전이다.
사실 다른 거주지를 발견하는 것 또한 장기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현재 우주론과 분자 물리학 연구는 우리 우주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우주가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
우주에 있는 블랙홀은 우리 우주가 거주할 수 없는 곳이 되기 전에 다른 더 젊 우주로 가는 관문(웜홀)이 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 우주에서 생물학적 생명이 불가능하게 될 먼 미래에 생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말하는 여러 과학적 제안들이 있었다.
프리먼 다이슨이 1979년에 제시한 영향력 있는 주장에 의하면, 만약 생물학적 생명이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인공적이지만 의식하는 존재로 대체될 수 있다면 '생명'은 열린 우주에서 영원히 계속될 수 있다.
그가 제안하는 한 가능성은 자기 조직화된 티끌 구름의 가능성이다.
다이슨에 의하면, 만약 그러한 형태의 '생명'이 매우 낮은 온도에서 생존할 수 있다면, 이때 그런 '생명'은 무한이 지속될 수도 있다.
이것은 흥미로운 제안이지만 많은 질문을 야기한다.
생명이 정보 처리로 환원될 수 도 있다는 가정은, 물리적 실재가 영적 실재에 비해 환상에 불과하다는 영지 주의와 상당히 유사하다.
만약 물리적 실재가 (세 우주론 시나리오가 예측하는 것처럼) 파멸될 수밖에 없다면, 이를 벗어나는 방법은 영적(정보 처리) 영역에서 찾아진다.
다이슨은 '열린' 우주가 장기적으로 생명에 가장 알맞은 미래를 제공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열린 우주 모델을 선호했다.
반면 프랭크 티플러는 닫힌 우주를 가정하며 낙관적인 과학적 종말론을 제시했다.
티플러에 의하면, 탄소에 기반한 모든 생명체는 높은 온도 때문에 우주 대수축에 이르면 생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종점이 특히 중요한데, 티플러는 종점을 '오메가 포인트'라고 부른다.
오메가 포인트는 티플러 도식에서 신에 상응한다.
티플러에 의하면, 인간 기술 능력이 향상됨에 따라 언젠가 생물학적 생명은 사실상 살아 있는 보다 회복력이 뛰어난 컴퓨터 에뮬레이션으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오메가 포인트에 가까이 이르러 '생명' 은 증가해 우주에 가득 차게 되어, 전 우주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은 편재, 전지, 전능해져서, 신처럼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주의 과거 모든 지식이 이용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에, 한때 존재했던 모든 생명 형태는 오메가 포인트에서 컴퓨터 에뮬레이션으로 부활할 수 있다.
에뮬레이션 : 한 하드웨어 시스템에 부가장치를 부착하여 다른 하드웨어를 모방하는 것으로, 하나의 컴퓨터가 다른 컴퓨터와 똑같이 행동하도록 만들어진 마이크로프로그래밍의 소프트웨어를 이용하는 기법이다.
티플러에 따르면 비록 우주가 끝나겠지만 오메가 포인트에 접근할 때, 시간은 사실상 무한히 늘어 날 것이고, 여기에서 생명은 실제로 '영원한 생명'이 될 것이다.
티플러의 제안은 상당히 사색적이고, 과학자들과 신학자들로부터 상당히 많은 비판과 불신을 초래했으며, 일부 학자들은 그의 주장을 '공상 과학 소설' 이라고 불렀다.
모순적이게도 과학자들은 과학적 방법과 발견을 이용해, 전통 신앙의 주장 못지않게 의기양양하고 본질적으로 낙관적인 가설을 정립할 수 있다.
사실 홍해 사건 같은 기적을 연구하는 것은, 과학자들도 과학을 이용해 성서 기적의 가장 어려운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신앙 의 주장들을 설명함에 있어서 과학자들의 이해력을 초과하는 것은 거의 없어 보이는데, 이로 인해 과학적 · 신학적 문제로서 기적의 본성과 정의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들이 제기된다.
이 질문들은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서기에, 겉보기에 (인간 사회에서) 가장 불가능하고 이상한 시나리오들에 대해 자연스러운 설명을 제안한 티플러의 종말론과 같은 과학적 종말론들이 과학적인 만큼 또한 신학적이라는 정도만 말하겠다.
티플러의 제안에 대해, 특히 성서와 교리에 기반해 그의 제안 못지않게 이상하고 기이한 미래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해의 차이는 은유의 차이에 관계되는 듯하다.
티플러는 과학 사상을 이용해서 자신의 모델을 발전시키는데, 이것이 실재가 실제 로 출현할 수도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반면 신학자들과 성서학자들은 신앙에 대한 종말론적 묘사가 본성상 은유적이라고 보는데, 우리는 이 부분을 이후에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주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날 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은유들을 검토하고자 한다면 티플러의 접근을 너무 쉽게 묵살할 수는 없다.
티플러의 설명은 가능한 미래에 대한 또 하나의 은유(우리가 현재 우주가 닫혔다기보다는 평탄하다고 믿는다는 것을 고려해볼 때 분명 받아들이기 힘든 은유이지만)로 가장 잘 평가될지 모르지만, 여전히 은유에 불과 하다.
이 경우 우주론과 신학이 한 목소리를 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종말론적 미래에서 우주론과 신학은 하나이자 같은 분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우주의 미래에 대한 신학적 연구가 우주론에 제한적으로 관계하고, 우주론을 제한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상당히 실망적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서적 종말론을 고려할 때, 그것이 현재 시점(단지 먼 미래가 아닌)에서 직접적으로 타당한지를 보는 것이다.
이것은 종말론의 현재적 중요함에 관한 성서적 요청이 있다는 것 을 암시한다.
아무튼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단지 과학이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광범위한 종말론적 관점을 필요로 한다.
성서의 종말론
새로운 창조
전적으로 새로운 시작에 대한 사상은 성서에, 특히 구약 성서에 상당히 자주 나온다.
이것은 여러 방법으로 표현되는데, 때로는 신화적 언어로, 때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예, 출애굽 또는 다윗 왕)에 대한 은유와 환상으로, 때로는 자연·사회 세계와 상당히 유사한 이미지로 표현된다.
히브리 예언서에서 새로운 창조, 회복, 구속에 대한 예언은 특히 생생한데, 새로운 시작이 새로운 사회를 (그리고 때때로 새로운 자연 세계도) 포함하는 하나님 백성의 구체적인 해방을 수반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해방은 다양한 방법으로 묘 사된다.
즉 해방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성취이자 완성으로,
이스라엘의 실수에 대한 최종적인 회복으로,
이방의 압제로부터의 자유로,
이스라엘에서 비할 데 없는 번영과 화합의 시기로,
예루살렘 시온 산에서 야훼를 향한 최고의 예배로 묘사된다
(예, 암 9:11~15, 호 14, 사 2, 11, 35, 렘 31~32, 겔 40~48,욜 3, 슥 8).
비록 구속이 종종 이 세상의 이미지를 사용해서 말해지지만, 구속은 항상 신적 행위다.
특히 후기 예언서인 제2이사야(40~55장)와 제3이사야(56~66장)에서 왜 구속이 창조(세계에서 첫 신적 행위) 사상과 연결되는지를 설명한다.
구속은 '새로운 창조'의 언어에서 절정에 달한다.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
(사 43:19)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사 65:17)
포로기에 쓰여진 제2이사야는 출애굽 은유와 함께 자연적 ·신화적 창조 은유를 통해 창조와 구속을 종종 연결한다
(사 40:3~5,27~31, 41:17~20, 42:5~9, 16, 43:1~2, 5~7, 14~21, 44:1~5, 45:11~13, 48:20~21, 49:8~13, 51:9~11, 55:10~13).
아마 예루살렘 귀환 이후에 쓰여진 제3이사야는 미래의 구속을 새로운 물리 세계를 만드는 것으로 묘사하며,
새로운 창조 사상을 가장 명백하게 보여준다("새 하늘" 과 “새땅", 사 65:17, 66:22).
비록 하늘과 땅(즉 물리 우주)의 재형성을 말하는 '새로운 창조' 사상은 오직 제3이사야에서만 명백하게 진술되지만,
이 사상은 예언서에서 구속에 대한 다양한 언어와 심판의 언어에 연관된다.
이 사상은 비록(우주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재난을 은유적으로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우주적 언어로 표현 된다(예, 사 2:5~22).
히브리 예언서에서 심판의 메시지와 구속의 메시지는 병치 되는 경향이 있다.
히브리 예언서들은 물리적·사회적·정치적, 또는 종교적 세계에 관하여 말할 때, 한편에서는 비판을,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창조에 대한 희망을 말한다.
구속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가 (a) 항상 회복을 말한다는 의미에서 일관되고, (b) 인간과 자연 세계의 많은 다른 이미지들을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은유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메시지를 '새로운 창조'의 영역에 포함시킬 것이다.
'새로운 창조'라는 용어가 이 세상의 문자적 종말에 대한 생각을 떠오르게 하더라도 히브리 예언자들이 그렇게 문자적으로 생각했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제3이사야는 새로운 물리 세계를 암시하며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사 65:17)이라는 예측을 기록했을 수도 있지만, 그가 이것을 이 세상에서의 정치적 변혁에 대한 은 유로서 기록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 부분을 간략히 탐구할 것이다.
묵시적 사조(Apocalyptic)
구속과 새로운 창조가 신약 성서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묘사하기 전에, 우리는 틈틈이 하나의 중요한 사조를 고려해야 한다.
이 사조가 어떻게 발생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묘사된 포로귀환 직후, 기록된 예언 장르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유형의 비전으로 변화된 듯한데, 이것 이 바로 '묵시적 사조'다.
이 장르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의견이 상당히 불일치했다.
그러나 이 장르는 종종 천사 같은 중재자를 동반한 천국 장면과 끔찍한 미래 사건에 대한 비전을 묘사하는 데에, 즉 상징과 난해한 이미지로 암호화된 천국 여정의 비전을 묘사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고 일반적으 로 일컬어진다.
이 묵시적 사조는 특히 종교적 박해로 인해 어떻게든 고립되고 위협을 느꼈을 공동체에서 발생했다고 여겨진다.
기원전 8세기 히브리 예언서들(아모스, 호세아, 미가, 제1이사야)이 미래를 향한 희망을, 현재 세계의 사회 적·정치적 회복의 측면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묵시적 공동체들은 종종 하나님에 의한 새로운 시작을 잘 표현하는 보다 우주적인 용어로 공동체의 희망을 묘사했다.
이 새로운 시작은 우선 현재 세계 질서의 극적인 종말을 필요로 하며, 묵시적 공동체의 윤리적 순수성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과 심판이 뒤따른다.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이 공동체의 '새로운 창조'는 이 세상 회복의 상징이 아니라, 완벽하게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사 6622)에 대한 상징이다.
하지만 묵시적 공동체가 이 부분이 문자적으로 읽히도록 의 도했는지의 여부는 이후에 살펴볼 중요한 부분이다.
묵시적 본문들은 구약 성서에 비교적 적게 등장하지만(주로 다니엘 7~12장, 아마 이사야 24~27장과 스가랴 9~14장), 구약 이후에는 많이 등장한다.
신약 성서는 수많은 묵시적 개념과 이미지들을 신약의 공용어처럼 사용한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은 결국 다니엘 12장에 처음으로 묘사된 부활의 비전으로부터 나온다.
"땅속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수치와 함께 영원히 모욕을 받을 것이다" (단 12:2).
바울은 그리스도를 이 비전의 "첫 열매"(고전 15:20, 23)로 보았고, 히브리 예언서와 묵시 문학에 표현된 구속과 새로운 창조에 대한 희망의 대부분은 특히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 맞춰지는데, 그러므로 이 희망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바울도 유사하게 신자들이 오래된(현재) 세계와 새로운 세계에서 동시에 살고 있다고 가르치고, 그의 윤리적 가르침의 상당 부분은 이런 긴장을 나타 낸다(예, 고전 5~7).
사실 '새로운 창조'란 표현을 명백하게 부상시킨 사람이 바 로 바울이지만, 그는 이 표현을 새로운 물리 우주를 묘사하는 데 사용하기보 다는 완전히 새로운 신자들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데 주로 사용한다(고후 5:17, 갈 6:15).
비록 바울이 모든 피조물이 미래에 변할 것이라는 희망을 말하기도 하지만(롬 8:18~25), 새로운 창조는, 특히 성령의 체험을 통해(고후 1:22) 이미 부분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삶에서 실현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종말론적 희망이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역을 통해, 그리고 신자 들과 함께하는 성령의 현존을 통해 일부 실현되었다는 의미와 더불어, 미래 에 대한 분명한 희망이 있다.
이 희망은 격변하는 물리적 변화를 상기시키 며, 아마 심지어 세상의 종말을 환기시키는 용어로 종종 표현된다(예, 막 13, 히 1:10~12, 계 15~19).
그리스도의 재림은 공관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매우 중요한 한 곳(살전 4:13~18)에서 현저하게 이런 비전을 드러낸다. 특히 마태복음은 그 리스도의 재림을 심판의 날과 연결시키는데, 심판의 날에 일부는 지옥으로 떨어지며, 다른 일부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예, 마 25:31~46).
요한계시록은 구속이 신실한 사람들에게 임할 때, (글자 그대로) 깜짝 놀랄 만한 미래 사건을 예측하는 묵시록이다.
요한계시록 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전의 하 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진"(1절) 이후에 있을, 전 우주 영역에 걸친 미래 구속의 비전을 묘사한다.
비슷하게 베드로후서 3장에서 "현재의 하늘과 땅"(7절)은 모두를 향한 심판이 있는 "주님의 날"(10절)에 불에 다 타버릴 것이다.
이런 묘사는 다가올 파괴와 심판에 대한 진지한 메시지를 담은 구약 성서의 수많은 이 미지들을 종합한 것이다(예, 사 66, 말 4).
이 메시지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심판과 지옥으로, 복 받은 사람들은 천국으로 간다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예상을 비교적 글자 그대로 지지해왔다.
그러나 이것이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지 도록 의도되었을까?
실재에 대한 질문
여러 학자들은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성서 언어, 특히 세상의 종말을 예 측하는 듯 보이는 성서 언어는 항상 은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반면 1906년에 예수는 글자 그대로의 임박한 종말,
즉 세상의 종말을 기대했다는 사상을 제시한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획기적인 역사적 예수 연구 이래, 이런 신앙이 내포하고 있는 희 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20세기 학자들의 지배적인 경향이었다.
또한 그런 언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전통적 기독교 신앙에 직면해서, 이런 신앙이 내포하고 있는 무언의 가정에 질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결국 성서의 시문학과 예언 문학은 은유적 상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대개의 경우 유명한 표현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 23)처럼, 어느 누구도 시문학과 예언 문학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성서 언어의 대부분은 분명 하나님의 본성과 세상에서의 현재 사역을 은유적으로 묘사하는 데, 이 묘사들이 신성에 관계되기 때문에, 정의상 거의 은유적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본문이 미래 사건을 말할 때는 더욱 해석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이사야가 "해와 달과 별들이 떨어져서 가루가 되고, 하늘은 마치 두루마리처럼 말릴 것이다”(사 34:4)라고 예언했을 때, 이사야는 세상의 종말을 의미 했는가, 아니면 보다 난해한 무엇인가를 의미했는가?
이 경우, 이 본문에는 우리가 이 이미지를 상당히 쉽게 해석하도록 만드는 단서가 있는데, 조지 케어드에 의하면, 이 본문은 문자적으로 물리 세계가 끝나는 것에 대한 기대로 받 아들여져서는 안 되고, 적국인 에돔에 대한 생생한 정치적인 문제(사 34:5)로 받아들여져야한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의 종말론적 가르침은 특히 현대 학자들에게 논란이 되어왔다.
이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은유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만약 은유적이라면 무엇에 대한 은유인가?
예를 들면 예수가 해와 달이 어둡게 되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인자가 구름을 타고 다시 오는 것을 예언했을 때(마 13:24~26),
이것이 인자가 하늘에서 육체적으로 재림할 때 세상이 끝난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예언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이것이 전적으로 현재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의 사회적·정치적·종교적 변화를 말하기 위해 구약 성서에 나오는 이미지를 사용한 암호화된 언어였는가?
일부 학자들은 우선 예수가 결코 이런 것들을 실제로 말하지 않았고, 이것들은 예수의 육체적 재림을 간절히 원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해 예수가 한 말처럼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며, 이 어려운 질문을 피해간다.
예를 들면, 학자들의 모임 중 하나인 예수 세미나는 예수에 관한 묵시적 가르침이 대부분 예수의 진짜 발언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후기 전승으로 믿었다.
20 반면에 알베르트 슈바이처를 따르는 일부 학자들은 묵시적 가르침이 역사적 예수의 참된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예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여전히 일부 다른 학자들은 이 가르침이 진짜라고 믿지만, 이것들 이 은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의하면, 묵시적 가르침은 이스라엘에 임박한 사회적·정치적 심판에 대한 예수의 암호화된 경고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그 것들은 세상의 종말을 묘사하는 듯 보이지만, 예수는 그것들을 정치적 대참사에 대한 은유로 언급했다(라이트에 의하면 예수의 청중들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물론 이 대참사는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사실로 드러났다.
우리 논의의 핵심을 라이트가 지적하는데, 그에 의하면, 슈바이처 이래 현대학자들이 예수의 묵시적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 한 이유가, 현대에 만연해 있지만 포착하기 어려운 이신론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신 론에 의하면 세계가 거의 신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독립적인 체계로 여겨지며, 신이 평상시에는 부재하지만 때때로 세계 질서에 상당히 어긋나게 개입 할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만약 라이트가 옳다면 학자들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묵시적 담론이 오직 문자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며, 이신론적 언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세상의 종말과 새로운 시공간 우주를 다시 창조할 때(문자적 의미의 새로운 창조)를 제외하고는 세상에서 역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일부 학자들이 예수의 묵시적 가르침의 진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즉 그들은 실제로 성서의 종말론을 이신론적으로 읽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경우 우리는 예수의 묵시적 가르침의 진위보다는 이 가르침의 기저에 있는 함축된 실재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의 묵시적 언어 기저에 있는 실재에 대한 질문은 중요한 논제들을 양산한다.
우리 시대의 과학은 물리 세계의 실재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뛰어난 척도로 여겨지지만, 과학은 실재의 본성을 다루면서 직관에 반대되는 수많은 놀라움과 끊임없는 신비를 드러냈다(2장 참조).
뿐만 아니라 과학 철학자들은 방법론적으로 과학이 간단한 방법으로는 실재를 드러내지 못한다고 주장 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과학 모델이 세계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고 주장하는 '소박 실재론'에서부터, 과학 모델은 관찰과 실험의 결과를 예측하는 유용한 수단(도구)이지만 기저에 있는 실재를 본질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도구주의'에까지 걸친 다양한 학파가 있다는 정도만 말하겠다.
잘 알려진 이둘의 '중간' 위치는 '비판적 실재론'이다.
소박 실재론과 비슷하게 비판적 실재론은 과학 모델을 실재의 표상으로 여기지만, 과학 모델이 또한 인간의 산물이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일시적이라고 인식한다.
비판적 실재론을 성서 본문에서 역사적 실재를 찾아내기 위해 세부 사항에 접근하는 유용한 유비로써 보는 일부 신약학자들(예, N. T. 라이트와 D. G. 던) 처럼, 수많은 저명한 과학-신학자들(바버, 핫슨, 피콕, 폴킹혼)은 비판적 실재론에 대한 지지를 천명했다.
이 연구의 범위는 우선 실재가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가 실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포함한다.
특히 성서가 이 세계에 관한 초자연적인 것들을 말할 때, 유사한 질문이 성서 본문에, 그리고 성서가 언급하는 진정한 실재를 발견하기 위한 우리의 능력에 제기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성서 본문의 기적, 신적 계시,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해석은 복잡한 해석상의 질문 들로 가득 차 있다.
예수의 미래 예언
예수의 묵시적 언어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의도되었는지 아니면 은유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의도되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본문 기저의 실재를 연구할 때 발생하는 해석학적 어려움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어느 분야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언제나 상당히 불확실하다.
그러나 원리상 우리는 보통 실현될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예측이 가리키는 실재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예수는 묵시적 언어로 가르쳤고(막 13, 마 24~25, 눅 21), 특히 "곳곳에서 지진이 일어날 것"(막 13:8)을 예언했다.
이것은 세상의 임박한 종말을 의미하는 징조이며, "큰 권능과 영광에 싸여 구름을 타고 오는"(막 13:26) 인자의 재림에서 정점을 이룬다.
지진이 비교적 지질학적으로 잘 이해 되기 때문에, 우리는 현대 과학의 발견을 이 이미지에 적용할 수 있다.
만약 적용한다면, 우리는 이 이미지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땅이 사해 단층 때문에 지진이 발생하기 쉽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된다.
지진이 성서의 예언서, 시문학, 묵시 문학에 널리 퍼진 이미지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보통 신적 계시 또는 신적 심판의 이미지로 작용한다(예, 삿 5:5, 욥 9:6, 사 5:25, 슥 14).
과학은 이 이미지를 더 잘 이해하게 도와줄 수 있고, 또한 과학은 아마도 어떻게 개인적 경험이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이미지를 더욱 생생하게 만드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물론 특정한 본문의 지진 이야기들이 실제로 완전히 다른 무엇인가에 대한 암호, 즉 아마 정치적 격변의 암호 였다는 것을 그 시대 청자들과 독자들이 널리 이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이미지 기저의 실재였다는 것을 성서 본문이나 타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 방법이 거의 없다.
사실 복음서 저자들이 적어도 한 이미지, 즉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의 이미지 기저에 암호화된 실재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암시하는 곳이 예수의 묵시적 예언에 등장한다.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그때에는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막 13:14).
마가의 애매한 편집 의견인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는 여기에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 있음을 암시한 다.
조금 더 늦게 기록된 마태복음에는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거룩한 장소(예루살렘 성전?)"에 있을 것이고, 이것은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마 24:15) 것이라는 부분을 덧붙여 더욱 분명하게 하고자 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종종 읽혔을 다니엘서와 상당한 유사성이 있음을 고려해볼 때, 마태의 부연 설명은 거의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아마 기원전 2세기 마카베오 전쟁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의 훼손 (1마카 1:54)을 떠올리는 반복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단 9:27, 11:31, 12:11).
마태의 부연 설명은 아마 독자들이 이 예수의 말씀을 의심 없이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한 언급으로 읽도록 하기 위해 첨가되었고, 아마 마태가 기록할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파괴되었을 것이다(그 러나 여전히 예수에게 있어서는 미래의 일이다).
마가의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비록 분명하게 암호화된 힌트이지만)라는 표현은 그야말로 마태의 기록만큼 상당히 명확하지 않았다.
복음서 저자들이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보다 분명히 설명하 지 않은 채 이 신비한 단서를 준다는 사실은, 그들이 이 본문을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그들의 시대에 발생할 사회적·정치적 실재에 대한 암호로서 여긴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기에 어느 정도 불확실한 것이 있다.
우리는 마태의 경우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언급한다고 추천한 수도 있지만, 이것은 확실하지 않고, 심지어 이것이 마가가 언급한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또한 이것이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의 묵시적 가르침 중 유일하게 의도적으로 암호를 푼 것이었다면,
우리가 이 묵시적 가르침에 포함 된 또 다른 징표들의 실재를 알아내고자 할 때에는 심지어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한다.
현대 독자들이 이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현대 생활과 거의 관계가 없는 기이한 비유로 해석하곤 하는 것도 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3장의 "창세기 1장과 현대 과학"에서 살펴본 것 처럼, 이것은 더 깊은 기저의 실재들을 다루지 않은 채, 문자적으로 읽히거나 '시'로 읽히는 경향이 있는 창세기 창조 이야기와 유사한 면이 있다.
창세기 본문처럼, 묵시적 가르침은 많은 다른 기저의 실재들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이것은 은유의 단점이자 장점인데, 은유는 너무 성공적으로 은유가 언급하는 대상의 위치에 서게 되어 자기도 모르게 은유가 언급하는 실재가 될 수도 있다.
신적 행위에 대한 어떤 묘사도 정의상 은유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큰 어려움에 봉착한다.
우리가 미래의 종말론적 사건들을 말하든, 아니면 성서의 기적 전승과 같이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을 말하든 이것은 사실이다.
이 사건 들은 이 세계의 물리적 실재의 면에서 신적 실재를 말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은유적이다.
이것은 심지어 우리가 기적에 대해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 지'에 관한 어려운 질문을 제기하기 전에도 사실이다.
우리는 본문이 우리에 게 문자적으로 말하는 것을 넘어 본문 기저에 있는 객관적 실재에 분명하게 접근하지 못하는데,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이 본문은 실제로 신적 실재에 대한 은유다.
반면에 역사적 연구를 통해 성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물리적 실재들을 말한다고 여길 만한 곳이 성서에 많이 등장 하는데, 그중 일부는 심지어 독립적으로 입증될 수도 있다.
왕과 군사 작전에 대한 설명이 좋은 예이고(5장의 “날짜와 숫자" 참조), 앞에서 언급한 비판적 실재론은 이런 종류의 본문을 역사적으로 연구하기에 완전히 적절한 접근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적 또는 신적 행위와 같이 전적으로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것을 묘사하는 성서 본문을 이해하고자 할 때에는 상당한 차이가 발생한다.
새로운 창조에 대한 예언은 본성상 신적 행위이자 새로운 행위에 관계된다.
분명히 신성한 것들과 세속적인 것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모든 논의는 본질상 은유적인데, 이는 초자연적인 것들을 현 세계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새로운 창조를 우리의 창 조 언어로, 즉 다른 세계의 실재를 우리 세계의 이미지들을 사용해서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창조는 본성상 미지의 영역이다.
우리는 정말로 새로운 창조의 실재를 새로운 창조가 어떤 모습일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창조는 근본적으로 새롭고, 창조에 대한 신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곧바로 세겹의 은유(new, creation, divine)가 등장하는데, 여기에 더해 우리가 예수에 관계 된 많은 묵시적 이미지들의 암호를 풀 열쇠를 갖고 있지 않다는 더 복잡한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새로운 창조 기저에 있는 실재를 이해하고자 함에 있어서 망망대해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신학적인 고정점이 있다.
천사와 함께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이미지는 근본적인 그리스도인들, 즉 요한계시록 20장 해석을 두고 무천년주의/ 후천년주의와 대조적으로 전천년주의와 '휴거'의 본성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구분하는 이미지 중 하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의심할 바 없이 이 이미지의 기이하고 신화적인 함축 때문에, 이 이미지에 관해 어느 정도 불가지론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재림 사상은 새로운 창조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요점을 말한다.
하나님이 성육신을 통해 인간의 모습으로 드러난 것처럼, 하나님은 피조물을 구속하기 위해 완성의 순간에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것이 신약 성서가 그리스도를 세상의 토대이자, 최후 심판의 날의 궁극적인 완성과 질서로 간주할 수 있는 이유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의 창조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보여주고, 현재의 창조에서 신자들에게 희망과 목적을 제공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윤리적 가르침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함을 나타내며, 새로운 창조에서 미래의 실재를 암시한다. 그리스 도의 부활이 핵심이다.
부활, 그리고 창조의 세 번째 범주 : '오랜 것으로부터의' 창조
여기에서 창조의 신학적 범주들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창조가 무로부터의 창조 또는 계속적 창조와 일치하는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세 번째 범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오랜 것들의 구속을 의미하는 창조는, 한편으로는 오랜 것들의 변화인 동시에 오랜 것들로 부터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로부터의 창조도 아니고, '계속적' 창조도 아니다.
폴킹혼이 제안한 '오랜 것으로부터의 창조'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새로운 창조가 '오랜 것으로부터의' 변화라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성서의 예가 예수의 부활이다.
빈 무덤 전승(마 28, 막 16, 눅 24, 요 20)은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의 육체적 부활(즉 부활한 예수가 전적으로 영적인 존재만은 아니다)을 믿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그들은 예수의 부활이 육체적 부활 그 이상을 의미했다고 믿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마음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벽을 통과해 걸으며, 승천하는 것같이 불가능할 것 같은 능력을 소유한 분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한 몸을 하늘나라와 지상 세계의 여러 이미지를 사용하며 상당히 암시적으로 묘사하는 듯하지만, 그가 고대하는 새로운 종류의 실재는 분명 오랜 것들과 다소 불가분하게 관계되어있다(고전 15:35~57).
바울이 부활한 몸을 '영적인 몸'으로 이해했을 수도 있지만, 여전히 "몸"(고전 15:44)이며, 게다가 '썩지 않고' '멸하지 않는 몸이다.
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부활한 몸'이란 표현은 대부분 상당히 은유적이다.
부활한 몸은 곧바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인간적이고 육체적인 상태임이 암시되지만, 또한 무엇인가 새롭고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기독교 전승은 항상 예수의 부활 상태를 신자들이 새로운 창조 때에 변화될 상태의 전조로 여겼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은 근본적으로 구속적 변화다.
즉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보상했으며(redeemed), 또한 “세상 죄"(요 1:29)에 대한 예수의 구속 사역에 관계된다.
오랜 것들이 거부되지 않고 다가올 창조의 원료가 된다는 것은 상당한 희망의 메시지다.
새로운 창조에 대한 기독교 사상은 모두 예수의 부활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정도의 기적을 믿기 어려워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영적인 용어로, 천국을 복받은 사람들의 비물리적 영혼이 영원히 거하 는 영적인 실재로 생각하기를 선호했다.
이 경우 '부활'은 영혼이 죽음을 통해 물리적 몸에서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원론적 은유가 된다.
이런 사고는 물질성(materiality)의 도전을 피할 수 있을지 모 르지만, 영지주의적 사고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현대 신학 자들은 영혼을 인간 몸에서 분리된 독립체로 말하기를 꺼리며, 대신 인간을 심신상관의 연합체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
마스칼에 의하면, 기독교는 우리의 마지막 상태가 예수가 보여준 것처럼 영적으로 불멸하며 육체적으로 부활한다는 것을(종종 강한 저항을 무릅쓰고, 종종 난처한 상황에 처하며) 끊임없이 주장해왔다.
다음은 전 우주를 향한 심오한 결론이다.
우리는 본성상 우리 몸의 신진대사에 의해 서로간에, 그리고 물질 세계에 연결된 육체적 존재이기 때문에(de la Mare의 말대로, “Miss T.가 먹는 것은 무엇이든 Miss T.로 변한다"), 우리의 부활은 그야말로 전 물리 질서의 변화를 포함할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육체적 부활은 진화의 '어두운 부분에 굴복하여 현재 고통당하는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는 전 우주적 변화를 의미한다.
육체적 부활은 현재 "썩어짐의 종살이"(롬 8:21) 가운데 있고 "썩는"(고전 15:42) 상태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어느 정도 은유적임에 틀림없는 이런 예언들 기저에 있는 것을 이해하려 는 시도는 우리의 상상력을 극도로 자극한다.
성서는 "다시는 죽음이 없고 고통도 없을 것이다"(계 21:4)라고 예언하지만, 현재의 과학 지식을 고려해보면, 어떻게 이런 꿈이 실제 생물학적으로 가능한지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고통, 통증, 죽음을 초래하는 부패와 썩는 것은 유한한 자원을 가진 이 세계에서 생물학적 생명의 번영에 (역설적이게도 꼭 필요하다.
예를 들면 육체적 통증을 느끼는 기관은 (적어도 인간에게는 중요한 생물학적 보호 작용을 한다.
이보호 작용이 없으면,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에게 심각한 상처를 가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 "통증은 선물"이다.
그러 나 우리는 고통과 죽음이 다가올 삶에서는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과학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렇게 변화된 세계는 더욱 이상하고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성서의 예언이 너무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여져서는 안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희망에 대한 은유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체 장르가 잘못 이해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세계에서 이런 은유의 놀라운 속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자연법칙을 거론해야 한다.
즉 그러한 변화가 가능하려 면 자연법칙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자연법칙이 우선 변할 수 있는가?
어느 정도까지 현재의 과학이 그런 논의에 기여할 수 있는가? (우주론자들은 이미 물 리 법칙이 다중우주의 다른 곳에서는 다를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는 것에 주목하자.)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연속성을 거론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부활 과 변화를 문자적으로 말한다면, 내가 죽을 때의 몸으로 부활할 것인가, 아니면 21살 때의 몸으로 부활할 것인가?
부활한 존재는 '불멸할 것이기 때문에, 부활한 존재가 나의 현 존재와는 어느 정도 단절된다고 여겨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단절될 것인가?
내가 '나'로 남기 위해서 계속 남아 있어야 하는 것 은 무엇이고, 변화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순식간에 생겨나고, 순식간에 모호해지지만 그것들이 결코 새로운 질문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질문들을 충분히 고려했고, 그보다 몇 세기 전 바울도 이것들을 고려했다(고전 15:35~54).
이 난제에 대한 대답은 희망적이고, 순수하며, 간단한 듯 보인다. 희망은 하 나님의 목적, 즉 "우리 모두가 변화될 것”(고전 15:51)이라는 위대한 '신비' 가운데 있다.
잭켈렌은 우리가 우리의 현존재 형태와 다가올 세계 사이의 인간적 연속성을 희망하면 할수록, 창조의 '어두운 면'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에게 더 욱 적은 자유를 주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무조건적인 희망에 내어 맡김으로써, 우리의 참된 자 아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여 로마서 8장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피조물 전체가 현재 불분명한 무엇인가를,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8:19) 간절히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불분명하다.
그리스도가 오랜 것으로부터 부활한 사건은 부활의 변화 패턴을 보여주는데, 그리스도 의 부활이 유일한 고정점이다.
그러나 성서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우리는 고정점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미래 종말론적 변화의 신비적이고 신성한 본성을 유지시키는 것과, 성서 본문에 어느 정도 비판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둘 다 상당히 중 요하다.
이것들을 너무 밀접하게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창조가 물리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연구하기 위해, 이미 예수의 부활에 과학적 관점을 적용하고자 했던 여러 시도가 있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면, 새로운 창조는 새로운 차원이거나, 또는 우리 우주와 어떻게든 관계가 있는 평행 우주로서 존재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런 주장들은 아직 잠재적인 문제들을 계획하는 초기 단계에 불과한데, 4월 킨슨의 주장을 제외하고는 성서 본문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이것은 결정 적인 실수인데, 그 이유는 부활 본문이 적절한 해석상의 문제들을 상당수 포 함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료가 부활한 예수로부터가 아니라 신약 본문으로부 터 나올 때 우리는 신약에 묘사된 부활한 예수가 새로운 창조의 물리적 특징 을 재확립하는 자료로써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전적으로 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의문의 대상(부활한 예수)으로부터 거리를 두는데, 거리 두기는 해석학적 관점에서 상당히 중요하고 상당히 복잡하다.
다양한 성서의 부활 전승들이 존재하는데, 이것들은 쉽게 조화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다양하다.
예를 들면 누가는 부활한 예수의 현 세상 속성을 강조하지 만(예, 눅 24:39~43), 바울은 부활한 몸의 다른 세상 속성을 강조한 다(고전 15:50).
즉 쉽게 연결되지 않는 두 개의 그럴듯한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다양성이 존중된다면, 우리가 부활 전승에서 이끌어내는 어떤 결론도 지금까지의 경우보다 더욱 복잡해지고 모호해질 것이다.
이 지점에서 더욱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한다.
예수의 묵시적 가르침에서 부활 전승은 문자적으로 이 세계 밖의 실재에 관계되는데, 이는 현 세계의 용어로 신적인 종말론적 구속을 묘사하려는 시도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 전승 에서 도출한 어떤 결론도 신학적 암시이지 과학적으로 다뤄질 수 있는 물리적 증거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결단코 부활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고, 복음서의 설명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과학의 한계, 그리고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런 본문의 한계에 대한 방법론적인 경고다.
이런 연구로 도출된 어떤 과학적 결론도 기껏해야 유비에 불과하고, 더군다나 이 결론들은 본문과 분리된 실재를 객관적으로 진술한 것이 아니라 본문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이것은 단순한 지적일지 모르나 종종 과학-신학 영역에서 고려되지 않는 부분이다.
신약 성서에서 부활 전승의 지극히 중요한 상황이 과학-신학 영역에서 고려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바로 부활 전승이 현 시대 기독교인들의 삶을 위한 윤리적 안내와 목회적 지원을 위해 기록되었다는 것이며, 또한 부활 전승이 상당히 먼 미래의 삶을,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계 된 한에서만 묘사한다는 것이다(예, 고전 6:9~20, 15:58).
새로운 창조와 순환적 창조의 가능성
성서의 종말론적 세계관을 고려하다 보면, 우리는 성서의 시간관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이미 논의했듯이(5장의 "시간의 끝?" 참조), 태초부터 종말까지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직선적 시간관은 보다 순환적인 특성을 받아들여 재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은 더 작은 규모의 시간에서도 어느 정도 분명하다.
종종 인용되는 전도서 3장은 시간이 끝없이 작은 (계절) 규모로 순환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세상에서 일어 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전 3:1~2).
분명 계절과 자연의 리듬은 순환적이고, 이것 들이 직선적 시간관에 연결될 때, 진화적 신기성이 발생한다.
이것은 종말론적 관점에 의해 좀 더 수정될 수 있는데, 빛과 어둠, 뜨겁고 차가움, 심고 거두는 등의 순환이 종말론적 미래에는 계속해서 대낮만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다.
그날이 오면, 햇빛도 차가운 달빛도 없어진다.
낮이 따로 없고 밤도 없는 대 낮만이 이어진다.
그때가 언제 올지는 주님께서만 아신다.
저녁때가 되어도, 여전히 대낮처럼 밝을 것이다.
그날이 오면,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솟아나서, 절반은 동쪽 바다로, 절반은 서쪽 바다로 흐를 것이다.
여름 내내, 겨울 내내, 그렇게 흐를 것이다.
(슥 14:6~8)
이 부분이 구약 성서의 종말론적 시간 표현에서 발견될 수 있는 미묘함을 잘 보여준다.
예수보다 수백 년 앞선 시대에 쓰여졌기 때문에(한편에서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의 재림에 초점을 둔) 보다 한결 같은 기독교 시간관이 드러나지 않는다.
구약의 종말론적 시간 표현은, 물론 여전히 구속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상당히 다양하다.
구속은 종종 구약에서 세속적 용어로써 야훼가 현세의 역경을 해방시키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최후의 결정적인 새로운 창조 사역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사역이 창조, 타락, 구속의 순환을 통해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부 본문들이 있는데, 구속의 때에 오랜 것들은 원 창조 때처럼 예측 불가능한 방법으로 구속된다.
특히 제2이사야에 좋은 예가 나오는데(43:14~19, 51:9~11), 여기에서 출애굽을 통한 구속은 신화적 창조 주제에 연결된다.
하지만 '타락'(바 빌론 유수)으로 인해 새로운 창조는 새로운 구속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비슷하게 시편의 여러 부분에서 (74, 77, 89), 시편 기자는 창조와 출애굽을 상기시 키며, 하나님의 현재적 해방을 간구한다.
이리하여 시편 기자가 기록할 당시에 어떤 상황에 처했던 간에, 희망은 사실상 은유적인 새로운 창조로 표현된다.
따라서 출애굽에서의 새로운 창조, 즉 가나안 땅 정착이 결코 마지막 구속이 아니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대신 이것은 곧 수많은 창조, 타락, 구속의 순환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사사기에서 묘사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신들을 숭배한다(타락).
결론적으로 이 백성들은 적의 손에 고통을 당하고, 그래서 야훼를 찾는다.
한 사삿(士師)가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선택되고, 그들을 새로운 번영(새로운 창조)의 시기로 이끈다.
이 패턴은 계속 해서 반복된다.
예를 들면, 이 순환은 사사 옷니엘의 행적을 묘사하는 구절(삿 3:7~11)에서 완벽하게 드러난다.
과학적 유비(類比)
이런 순환적 시간 개념에 대한 흥미로운 과학적 유비가 있는데, 이 중대 부분은 '돌연변이(emergence)', 즉 무질서에서 발생하는 새롭고 예기치 않은 실재 개념에 관계된다(2장 참조).
사실 윌리엄 브라운은 이미 돌연변이를, 제21 사야가 절망적인 암울한 상황에서 새로운 창조를 예언한 것에 대한 과학적 유비로 주장했다.
이제 자연의 여러 양상들이 우선 대재앙(타락)을 필요로 하는 창조의 순환을 통해 작용한다는 것이 잘 알려졌다.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비효율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것은 자연 세계 대부분의 특성인 듯하다.
물리학에서 잘 알려진 예가 '자기 조직적 임계성' 현상인데, 여기 에서 창조 사상은 창조의 파괴와 회복에 어울린다.
본질적으로 자기 조직적 임계성은 일부 종(동물, 식물, 또는 광물)의 시스템이 새로운 종류의 존재로 변화 되기 직전에 계속해서 불안정하게 움직이는 상태를 말한다.
즉 이 존재는 거의 안정적이라고 볼 수 없는 임계(critical) 상태에 있지만, 계속해서 불안정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일종의 안정성과 창조성을 보유한다.
가장 단순한 하나의 예는 마른 모래 더미의 움직임이다.
모래가 평탄한 표면에 계속 떨어질 때, 모래는 점점 원뿔 모양으로 쌓인다.
측면은 특정한 임계각에 도달할 때까지 점점 가파르게 된다.
얼마나 많은 모래가 더해지든지 상관없이, 이 더미는 이 임계각을 유지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태는 더미의 옆 부분 아래에 쌓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모래가 더미의 꼭대기에 더해질수록, 사태는 모래를 더 아래로 끌어내리며 균형을 유지한다.
즉 임계각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크기와 빈도에 있어서 무작위적이다.
때때로 심지어 약간의 모래알의 추가가 전체 더미를 포함하는 상당히 큰 사태를 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더미는 임계 상태에 있다고 일컬어진다.
자기 조직적 임계성을 따르는 것이 단지 모래 더미뿐만이 아니다.
이에 대 한 예는 화석 기록으로 보관된 동물의 멸종에서부터 지진과 화산 폭발의 빈도와 크기, 강과 개울의 분포, 노르웨이 해안의 피오르드(fjords)의 발달은 물론, 교통 체증과 주식 시장의 변동 같은 인간 세계의 예에 이르기까지 많고 다양하다.
크기에 상관없이 하나의 사태 후에 또 다른 사태를 겪으며, 시스템이 최고의 격변 상태에 있는 듯 보이는 임계 상태가 종종 가장 선호되는 상태라는 것이 핵심이다.
사태는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시스템을 매 순간 임계 상태에 이르게 하며, 파괴에 어울리는 일종의 적절한 창조 매개체가 자리잡도록 한다.
교통 체증에 걸리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지만, 모순적이게도, 교통 체증은 아마 모두가 일정한 속도로 운전하도록 상당히 통제된 시스템보다 더 원활 한 교통의 흐름을 가져오는 것으로 드러난다.
분명 이런 예들은 무질서를 통해 정립된 새로운 유형의 역동적인(격변을 일으키는) 질서의 출현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예를 통해 자기 조직적 임계성이 파괴와 재앙의 순환으로 계속 새롭게 되는, 자연 현상의 다양한 유형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조직적 임계성은 창조, 타락, 구속의 순환을 의미하는 성서의 예들과 어울리는 과학적 유비다.
우리가 한 유비를 발견했지만 그것은 분명 성서 본문 기저에 있는 잠재적 실재들에 어떤 존재론적 깊이를 더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유비는 자연 세계에서 연유하는 반면, 성서 본문은 대부분 인간 세계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 유비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임계 상태가 결코 불행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임계 상태는 격변할 수도 있고, 이익뿐만 아니라 손해도 가져올 수도 있지만 이 상태는 진보하기 위해 그야말로 가장 선호되 는 상태다.
우리는 또한 불완전한 인간 세계에서 새로운 창조가 격변하며 순환하는 것을 환영할 수 있다.
타락은 후회스럽고 고통스럽지만 사실상 우리의 불완전한 세계에서 피할 수 없다.
만약 구속이 타락으로부터 나온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결속을 다시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교훈도 얻었고, 아마 더 강해졌다.
이 모든 것들은 장황한 말이 아니라 어떻게 과학으로부터의 유비가 긍정적인 신학 방향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지에 대한 타당한 예다.
물론 이것이 단지 유비, 즉 본문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수도 있는 하나의 기회에 불과함을 분명히 하면서 말이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또 다른 신학적 요점이 있다.
자기 조직적 임계성에 대한 내 이야기를 해본다면, 나는 성서 본문에 대한 '설명'을 분명하게 발견한 것이 아니라, 성서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 드러나는 순환이 자연 세계의 일부와 비유적 의미에서 닮았다고 말하는 유비를 발견했다.
그러나 성서 본문은 거의 인간의 상황에서 순환을 묘사하기 때문에 (유배, 전쟁, 압제로부터의 해방), 우리는 그 순환의 기저에 있는 실재를 설명하기 위해 과학적 예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순환은 이미 인간 경험의 중요한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자기 조직적 임계성에 대한 내 예가 엄밀하지 않은 하나의 유비 이상의 심오한 어떤 것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창조를 묘사하는 다른 유형의 본문, 즉 (세상의 종말에 대한 묵시적 예측과 같이) 자연 세계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본문을 고려해보자.
우리는 티플러와 다이슨처럼 이 본문을 과학적 종말론에 비교하고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조직적 임계성에 대한 내 유비, 즉본 성상 은유적인 본문에 대한 유비가 그런 것처럼, 비교가 유비의 수준에서 작용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내가 유비와 은유에 관련하여 애쓰고 있는 듯 보인다면 그것은 이 부분이 과학-신학 분야에서 너무나 주목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창조 언어가 성서에서 희망에 관한 주제 상당수를 포함한다는 것과, 특히 신약 성서에서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에, 그리고 미래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새로운 창조 언어 기저에 있는 잠재적 실재에 대한 질문을 폭넓게 논의했고, 이 질문이 항상 신적 근원에서 야기되고 신적 구속을 위한 희망을 표현하기 때문에 본성상 은유적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대부분의 이미지들이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는 해석을 선호할지 모르지만, 이 주장은 과학적 설명의 유비적 본성과 성서 언어의 은유적 본성을 동시에 고려할 실제적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통합 된 신학적 접근만이 이 둘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
결론
우리는 이번 장을 지구의 종말과 우주의 종말에 대한 과학적 관점들을 살 펴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우리의 관점에서 먼 미래는 암울해 보였다.
반면에 새로운 창조에 관한 성서 자료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의도하는 다양 한 희망의 표현을 발견했다.
특히 종말론적 본문들은 이것을 현 물리 세계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를 향한 희망의 관점에서 다루는 듯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학자들이 이것을 한때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에 덧붙여 종말론적 예언들은 기껏해야 본성상 은유적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최근 연구는 특히 새로운 창조의 핵심 요소인 예수의 부활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들이 미래에 대한 청사진으로서 읽혀지기 전에, 보다 세심한 해석학적 작업이 행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논의했다.
과학이 성서의 종말론 해석을 도울 수도 있는 은유적 차원을 해석하는 방법으로서, 우리는 세상의 종말 모델이 아닌, 전 적으로 다른 과학 분야에서 '자기 조직적 임계성'으로 알려진 창조와 파괴의 순환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자기 조직적 임계성이 우주 종말에 대한 모델들 보다 성서의 풍부한 새로운 창조 자료에 보다 적절한 과학적 유비를 제공할수도 있다고 주장했고, 자기 조직적 임계성의 역할을 유비적으로 강조했다.
그동안 과학을 고려하는 신학적 종말론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었고, 성서 자료들을 세심하게 고려하지도 않았다.
이런 논의는 이 세계의 물리적 중단을 예측함으로써, 성서의 종말론적 본문들이 비교적 문자적으로 읽혀질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우리 우주의 가능한 운명에 대한 여러 과학적 예측들이 논의되었다.
나는 이러한 사고방식 안에 상당한 '범주 오인'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이제 분명히 하고자 한다.
첫째, 새로운 창조 주제의 전적인 다양성과 미묘함이 고려되지 않았다.
둘째, 새로운 창조가 세상의 실제적 종말을 예측할 만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져 왔 는지에 대한 질문이 간과되었다.
분명 이것은 본문이 의미하는 실재에 대한 주의의 부족과, 성서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수많은 해석상의 문제들에 대한 주의의 부족을 반영한다.
우리는 6장에서 태초의 창조와 계속적 창조를 다루면서, 과학이 성서의 창조 주제에 대해 비교적 거의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살펴본 한편, 이번 장에서는 과학이 창조 주제의 종말론적 차원에 대해서도 거의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처럼 성서적 종말론의 실재는 먼 미래를 설명하는 과학적 모델들이 제시하는 것보다 상당히 더 난해하다.
구약 성서의 종말론은 (비록 우리가 물리적 우주를 전적으로 배제해서 는 안 되지만) 물리적 우주의 형태를 말한다기보다 현재의 희망과 염려에 대해, 즉 사회적·정치적 실재들에 대해 보다 예언적으로 말한다.
비록 신약 성서가 전 우주(모든 막대기와 돌)를 위한 미래 구원을 암시하지만, 이것은 성령을 경험하며 사는 기독교 신자들의 일상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이것의 균형이 삼위 일체에서 드러난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이 미래의 우주적인 새로운 창조사역을 암시하는 반면, 동시에 모든 신자들 안에 있는 성령의 종말론적 사역은 현재적 실재를 암시한다.
근본적으로 성서적 종말론은 다른 무엇보다도 희망의 표현, 즉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에 존재하는 신앙 관계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보통의 신뢰와 신의의 관계처럼, 과학이 공유할 수 없는 도덕적 차원이 요구된다.
잭켈렌이 지적한 대로, 이것은 "존재(is)와 당위(ought)의 차이이다 ........ 성서적 종말론은 세 상의 종말보다는 악의 종말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 "
또한 콜린 건턴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주론의 치명적인 난제는 우주론이 발생시키는 윤리이다.
그리고 티플러의 세상 종말에 대한 관점이 '과학기술의 지배'에 대한 윤리인 반면,
그리고 다른 과학적 우주론들이 끊임 없는 비관주의만을 말하는 반면,
신약 성서의 우주론은 현시점에 존재하는 순수성과 희망에 관한 종말론적 윤리를 촉진시킨다.
신약 성서의 우주론은 적어도 현재에는 과학으로 거의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성서의 본성(마크 해리스 지음, 장재호 옮김, 도서출판 두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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