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창조의 본성(本性)

5장 : 성서 창조의 구조

w.j.lee 2024. 7. 26. 09:23

 

 

5장 : 성서 창조의 구조

 

자연적 그리고 초자연적

 

5~6장에서 우리는 우선 성서 본문의 자연적 구조를, 이어서 신학적 구조를 이해하는 방법을 논하면서, 어떻게 성서의 창조 본문이 현대 과학 - 신학 분야의 논의에 통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비록 우리 문화에서 신학적 담론과 과학적 담론을 구별하는 것이 복잡하지 않을지 몰라도, 성서에 접근하면 이 문제는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고대 히브리 과학 체계의 상당 부분이 신학적 용어로 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신학적 용어의 상당 부분이 과학적 용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적 세계의 개념과 이에 반대되는 물질 세계, 즉 사물의 기적(초자연적)과 이에 반대되는 일상 체계(자연적)를 말하기 위해 '자연', '초자연적'이라는 일반적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자연'이란 용어가 모호한 것처럼, 이 용어들도 다소 모호 하다.

'자연'이 야생동물의 세계 (인류와 떨어져 존재하는 지구의 식물군과 동물군) 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이 용어가 과학의 소관인 전문 용어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연'이 하나님과 분명히 다른 모든 피조물을 의미하는 신학적 용어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자연적 사건을 일반적인 과학적 실험 방법과 가설의 검증을 통해 과학으로 묘사될 수 있는 사건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초자연적 사건이 어떤 수준이든지 간에 분명한 자연적(과학적) 설명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할 수도 있다.

우리는 보통 초자연적 사건이 이 세계 위에 (초월해) 있는 힘에 의해 야기된다고 여기며, 극적인 기적 이야기를 초자 연적 사건의 증거로 간주한다.

 

성서의 창조 자료 일부는 솔직히 '자연적'으로 묘사될 수도 있다.

특히 '해가 뜨는'(예, 말 1:11) 것 같은 일상 사건을 언급할 때 그렇다.

하지만 이제는 심지어 매일의 반복적 현상인 이와 같은 예에서도, 코페르니쿠스를 따르는 우리 현대인들은 태양이 뜨는 것에 대한 과학적 배경을, 이 본문들을 처음으로 구성하고 읽은 사람들과는 매우 다르게 이해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해석은 심지어 우리들이 이 자연적 예가 실제로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 헌신을 위한 신학적 은유라는 설명을 받아들이기 이전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말 1:11).

 

심지어 성서의 '자연적 언어와 같이 겉보기에 간단한 예 에서도, 수많은 해석 단계들이 동시에 작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과학적 용어를 넘어서게 한다.

이것은 심지어 우리가 '자연적'이란 용어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주의 깊게 정의한 후에도 마찬가지다.

 

아마 성서에서 자연적/초자연적 범주들 사이에 모호하고 겹치는 부분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영'이란 단어에서 나온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ruah]와 그리스어 [pneuma]에서 똑같이 '바람'으로 해석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영'을 근본적으로 초자연적으로, '바람'을 자연적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단어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서 하나의 실재가 자연적/초자연적으로 언급될수 있다는 사실은, 성서 시대 사람들이 실재를 우리와 같은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과 '바람'은 보이진 않지만 각각의 방법으로 감지될 수 있는 힘이었고, 이것들 사이의 엄밀한 구분이 불필요했다.

 

요약하면 성서 본문에서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의 구분은 쉽지 않다.

이런 구분은 한참 이후 철학의 발전으로부터 생겨났고, 현대 과학적 세계관과 더욱 가깝다.

예를 들면, 우리가 "골짜기마다 샘물이 솟아나게"(시 104:10) 한 야훼의 창조 행위를, 요단강의 흐름을 기적적으로 멈춰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널 수 있게 한 야훼의 행위(수 3:16)와 다른 종류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는가?

 

첫 번째 예는 매일 있는 현상이어서 우리의 귀에 본래 자연스럽게 들린다.

그러나 이 본문이 요단강을 건넌 기적인 두 번째 예와 신학적인 면에서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어떤 암시도 그 본문에 나오지 않는다.

아무튼 두 번째 기적은 간헐적 지진이 요단 강둑에 사태를 야기해서 강의 흐름을 막은 것으로 과학적으로 쉽게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두 본문을 현대 과학과 관련해 해석하는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두 본문의 핵심은 이 자연 현상들이 하나님이 "온 땅의 주권자"(수 3:13) 이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연적 행위와 초자연적 행위를 구분하는 것은 신적 행위에 대한 두 개의 상호 배타적인 관점을 암시하는 것이고, 이것은 적어도 이 두 본문에서 성서 저자가 말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한편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개울과 강의 범람과 같은 많은 물리 환경의 특징들을 주기적으로(그러므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여겼음에 틀림없는 데, 이는 현대 과학적 세계관과 다소 유사하다.

그들은 심지어 이 특징들을 자연법칙의 예로써 인정한 듯 보인다.

 

예를 들면, 물이 보통 아래로 흐르고, 시간이 흘러 개울 혹은 강을 형성하며, 모래 또는 흙에 수로를 만든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현대 과학 혹은 물리 지질학을 세세하게 알 필요는 없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많은 주기적 현상에 대한 자연적 설명이, 현대 과학이 도래하기 전에도 항상 존재해왔음에 틀림없다.

 

사실 주기적인 현상이 우리의 '법칙'(자연법칙의 경우와 같이) 개념에 반드시 관계되지는 않지만, 성서에 주기적 현상이 인식된 증거가 있다. 

다음 구절은 고라의 반란에 휘말린 사람들의 운명을 먼저 예언하고, 이어서 그 결과를 묘사한다.

 

그때에 모세가 말하였다. “...... 이 사람들이 보통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죽 는다면, 곧 모든 사람이 겪는 것과 같은 죽음으로 죽는다면, 주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들이 듣도 보도 못한 일을 일으 켜서, 땅이 그 입을 벌려, 그들과 그들에게 딸린 모든 것을 삼켜, 그들이 산 채로 스올로 내려가게 되면, 그 때에 당신들은 이 사람들 이 주님을 업신여겨서 벌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그가 이 모든 말 을 마치자마자, 그들이 딛고 선 땅바닥이 갈라지고, 땅이 그 입을 벌려 그들과 그들의 집안과 고라를 따르던 모든 사람과 그들의 모든 소유를 삼켜버렸다.

(민 16:28~32)

 

듣도 보도 못한 일을 일으 켜서 : 개역개정에는 “새 일을 행하사"로, 공동번역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을 하실 것이다"로, KJV에는 “make a new thing"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저자는 NRSV의 번역인 "creates a new creation"에 초점을 맞춰 논지를 전개한다.

 

이 본문은 상당히 흥미롭다. “보통 사람이 죽는 것/겪는 것"과 "듣도 보도 못한 일"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자.

현대 과학적 세계관은 우리가 이와 같은 이야기에 접근하는 데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인 '무엇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즉 무엇이 땅을 갈라지게 했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문득 떠오르는 분명한 설명은 지진이다.

반면 이 사건이 부서지기 쉬운 굳은 사막 표토 때문에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사막 표토는 일부 지역에서 비가 온 후에 예상외로 급격히 갈라질 수 있다. 

 

이 본문은 이 두 해석 가운데에서 하나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물리적 단서를 거의 제공하지 않지만, 우리는 '무엇이 실제로 일어났는지'에 너무나 많은 관심을 두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선 지진은 종종 신적 전사가 나타날 때 등장하는 한 요소로(예, 삿 5:4~5, 시 29, 합 3:6), 신화적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 사건의 신화적 또는 상징적 차원은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넘어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한다.

 

이 사건이 '새로운 창조(듣도 보도 못한 일)'로 묘사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지진이 항상 기적과 상징으로 여겨졌는지의 여부는 현 논의의 영역을 넘어서지 만, 이 특별한 사건은 분명 기적으로 여겨진다.

반대로 놀라운 사건이 신성에 의해서가 아닌, 일상적 상황에서 '우연'에 의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인식이 도처에서 나타난다(삼상 6:9).

또한 우리는 위 본문에서 원어를 직역하면 “모든 사람의 죽음 같이" 또는 "모든 사람의 운명"으로 번역되는 “보통 사람이 죽는 것" 과 “보통 사람이 겪는 것"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죽음이 보편적일 뿐만 아니라 신적 섭리에 의해 회피될 수 없다는 사상은 아마 성서에서 '자연법칙' 에 가장 가까운 진술일 것이다.

"온 세상 사람이 가는 길"(수 23:14, 왕상 2:2, 반대 로창 19:31에서는 '삶'의 개념 포함), 또는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전 7.2) 와 같이 다른 부분에서도 자연법칙의 흔적이 드러난다.

 

이 어구는 성서에서 우리의 '자연' 개념, 특히 인간과 피조물들이 특정한 '자연적 성향, 특성, 기량과 비슷하게 창조되었다는 개념(예, 지혜 7:20, 마카베오4서 5:8~9, 5:25, 롬 1:26~27, 11:21, 11:24, 고전 11:14, 벧후 2:12)에 좀 더 유사한 것을 언급하는 곳에 'physis(자연의 성장 원리)'라는 단어와 이 단어의 파생어들이 종종 사용된다.

 

P문서와 에스겔 일부 에서는 '모든 종류의'란 반복되는 구를 사용하여 피조물을 묘사하는데, 이 구는 우리의 '자연' 개념을 인류와 구별되는 다양하고 풍부한 야생 생물의 세계로서 인식하게 한다(창1:12, 1:24~25, 6:19, 7:14, 겔17:23,

39:4, 39:17).

 

그러나 우리는 이 고대 '자연'의 증거를 성서 저자가 개울과 강이 흐르는 것 같은 자연 현상을 묘사할 때에 고려한 것은 하나님이 근본적 원인으로 드러나는 신학적(초자연적?) 설명이었다는 주장과 화해시켜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초자연적인 것들이 자연적으로 보일 수 있었고, 자연적인 것들이 초자연적으로 보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관점은 인간/비인간 세계에서 만물의 질서정연하고 예측 가능한(법칙 같은?) 규칙을 논의하는 전도서 3장에 등장하지만("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하 나님의 목적에 의해 뒷받침된다.

 

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와 너무 다르지 않은 과학적 방법으로 사고할 수 있었고, 또한 그것을 문학 으로 표현할 때에는 아주 철저한 유신론적 신학을 사용해 표현할 수 있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사고방식'?

성서 학자들은 지적인 면에서 고대 세계와 현대 세계 사이를 갈라놓는 경향이 있었다.

비교적 최근까지 성서 학자들은 고대 히브리 사고방식이 신화와 미신에 빠져서 기적을 더욱 받아들이는 한편 매우 이성적이지 않아서, 우리보다 '원시적'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대 사람들의 사고 과정과 우리의 사고 과정 사이의 분명한 차이는 루시 앙 레비브륄의 저작들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중에서 특히 [고대 사고방식]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런 고 대 사고방식의 범주화는 이제 고대 문화를 열등하고 '어리석다'고 암 묵적으로 판단한다고 비판받는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 상당 기간 동안 근대 이전의 사고는 거의 '과학 이전의' 사고였고, 근대 사고에 비해 비판적 엄격함과 능력이 부족했다고 종종 간주되었다.

하지만 최근 수십 년간 포스트모던에 대한 인식이 시작되면서 객관성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감소했고, 고대의 지적 성취가 재평가되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어리석지 않고, 계몽되었으며, 비판적인 현대인이라고 너무 확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명백해졌다. 

과학은 우리 세계를 이해 하는 데 있어서 많은 기술적 진보와 변화를 가져왔고, 20세기에 서구 유럽에서 전통적 종교 관습들이 상당히 감소되었지만, 근본적인 영적 믿음이 이 넓은 세계에서 쇠퇴하고 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사실 우리 세계는 종교적 믿음과는 상당히 먼, 문화적 가치와 국가별 고정관념 등을 강화하는 일종의 신화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심지어 과학 시대에도 파드레 피오의 유명한 제의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기적에 대한 믿음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

 

파드레 피오(본명 Francesco Forgione)는 이탈리아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사제로, 23세 때 몸에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릴 때 입은 상처인 성흔과 같은 상처가나 피가 나온 것으로 유명해졌다.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성흔을 보인 성직자로 기록되었고, 기적적인 질병 치유 능력을 지닌 것으로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81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200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또한 점성술과 대체(보통 개인적) 영성에 몰두하기도 한다.

심지어 누군가는 UFO와 음모설을 믿는 것을 우리 사회에 작용하는 '신앙'의 다른 면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입증되지 않은 사상에 대해 학자들이 생각하는 만큼 철저하게 회의적이지는 않다.

 

코너가 지적한 대로, 비판적인 학자들은 종종 '현대인들이 모두 기적에 대해 보편적인 회의감을 갖고 있다'고 너무 쉽게 가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윌리스도 1994년에 행해진 조사에서 미국 인구의 87 퍼센트가 예수의 부활을 확실히 믿는다고 답한 것에 주목하며, 코너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오늘날 학자들은 근대 이후의 존재 의미를 토론하지만, 교회 좌석에 앉아 있는 사 람들은 아직 학자들이 근대 시대라고 부르는 시대 - 모든 전통적 신앙이 비판 받고 가능한 한 거부되는 시대 - 에 조차 들어가지 않았다고 비평가들은 신중하게 결론 내릴 수도 있다. 현대인들이 학문 분야에서 믿을 수 없다고 말해온 것들을 평신도 기독교인들은 쉽게 믿는다.


만약 현대인들이 기적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기적에 대해 열렬히 회의를 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첫째로, 요세푸스는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군대가 비교적 최근에 모세와 비슷하게 바다를 건넌 것을 이야기하며,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이야기(출 14)를 옹호하려 한다.

요세푸스는 많은 사람들이 출애굽 이야기를 지지하는 알렉산드로스 이야기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애굽 이야기에 회의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 모두가 각자의 의견을 갖는 것을 환영한다"라고 결론 내린다.

 

둘째, 한참 최근의 예로, 영국 사회에서 영적인 것에 대한 회의론을 비판한 한 종교적 저술가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오직 볼 수 있는 것만 믿고, 선하고 악한 천사들이 존재하는 것, 인간의 영혼이 몸이 죽은 이후에 존재하는 것, 또는 어떤 다른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 말을 누가 했는지 알지 못하면, 현대 교회의 관계자가 한 말로 생각할 수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을 한 사람은 기원후 약 1200년경 잉글랜드에서 비판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암흑의 시대'에 동료들의 회의론을 비판한 콘월의 피터였다.

 

아무튼 고대 히브리인들은 우리가 '과학적'이라고 인정할 수도 있는 방법으로 자연 세계를 관찰하고 분류하여 설명할 수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예를 들면, 뛰어난 솔로몬의 지혜는 자연 세계에 대한 타당한 지식도 포함한다고 여겨졌다(왕상 5:13, 불가타와 많은 영역본에서는 4:33).

그리고 성서의 시문학 일부는 자연 현상 또는 지구상의 피조물에 대해 묘사하는데, 여기에서 피조물의 행동과 본래의 습관에 대한 기민한 관찰을 볼 수 있다(욥 38~41, 시 104).

 

한역본의 경우, 새번역·개역개정에서는 4:43, 공동번역에서는 5:13, "레바논에 있는 백향목으로부터 벽에 붙어서 사는 우슬초에 이르기까지, 모든 초목을 놓고 논할 수 있었고,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두고서도 가릴 것 없이 논할 수 있었다.

 

그 런 점에서, 비록 성서의 자연 세계 인식은 심오한 과학적 이해의 측면에서 보면 많은 결점이 있지만, 우리와 비교해 자연 세계 인식의 범위가 결코 제한될 정도는 아니다.

또한 성서 저자들이 농업, 광산업, 천문학의 다방면에 대한 유용한 지식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예, 욥 9, 28).

그들은 또한 기초적인 수학적 지식도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 수학적 지식이 아마 바빌론 또는 이집트 문화 같은 주변 문화의 지식만큼 정교하지는 않았겠지만, 성서는 수학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다양하고 뛰어난 공학 기술과 건축 계획을 언급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가 규빗이라고 부르는 치수에 대한 특별한 기하학적 특징 들을 인식하고 있다(왕상 7:23, 대하 4:2). 

 

성인의 팔꿈치에서 중지까지의 길이로 약 45cm이며, 새번역은 "자"로, 공동번역은 "척"으로 번역하였다.

 

'원시적 사고방식(primitive mentality)' 개념에 대한 중요한 비판은 존 로저슨이 제기했다.

예를 들면, 인과론(세계의 사건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 에 의해 묘사)에 대한 기본적 과학 사상에 관해, 로저슨은 우리 사상 체계와 고대 히브리인들의 사상 체계 사이에 너무 깊은 틈을 만들지 말라고 당부한다.

우리는 정교한 과학적·역사적 체계를 갖고 있어서, 이제는 신을 세계 사건에 대한 설명(원인)으로 연결시킬 필요가 없게 된 반면,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모든 것의 원인을 신으로 생각했다고 종종 평가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이 자연 세계의 규칙성을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함(창 8:22)의 면에서 보았을 가능성이 큰 반면, 우리는 보다 기계적인 세계관에서 바라본다.

하지만 이 차이를 너무 강조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신석기 시대와 철기시대 사이(대략 구약 성서가 기록되었을 시기)에 만들어진 많은 기술적 진보를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 진보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기본적인 과학 기술과 농업 기술을 완벽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에 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자유 의지냐, 결정론이냐)는 오랜 문제 에 관련해서, 로저슨은 구약 성서가 이 문제를 유일신의 폭넓은 구도 내에서 신학적으로 접근하려 한다는 점에서 분명 특별하다고 믿는다. 

사실 악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거의 신학적인 문제다.

악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분명 성서에 근거하고 있다.

 

악과 도덕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는 지력의 진보가 결코 일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보여준다. 

보편적 인간 권리와 평등을 강조하는 서양에서, 우리는 세련된 도덕적 의제를 발전시켰고, 거대한 의학적·기술적 진보의 유익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심지어 우리 세계에서도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뿐만 아니라 현대 문명은 때로는 고대 세계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장 극단적인 야만적 형태로 퇴보 했다.

과학은 인간 세계에 기술적 진보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물질 세계의 종말도 초래했다.

 

현대와 고대 사상 사이에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우리는 이미 창세기 1 장을 창조하는 것을 넘어 질서 짓는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3장의 “첫 번째 창세기 창조 설명: 창세기 1:1~2:4a (P문서)" 참조).

우리의 우주 질서 관념이 자연 과학에 아주 많이 영향을 받은 반면, 이스라엘인들의 사고는 창조를 우리가 거의 인지하지 못하는 질서와 무질서의 구별 측면에서 본다. 

 

특히 이것은 먹을 수 있는 음식과 그렇지 못한 음식의 구별과 같이, 사회적·의례적 상호작 용을 규정하는, 존재의 '정결'과 '부정'한 상태의 구별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신화가 현실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세계에 살았던 것이 아니라(학자들이 과거에 종종 이렇게 생각했다), 질서와 예절의 면에서 우리와 다르게 여겨지는 세계에 살았던 것이다.

 

사실 고대 히브리 세계관과 우리의 세계관의 차이는 현대 과학적 사고방식대 소위 '원시적인' 사고방식으로 구별되기보다, 아마 종교적인 용어로 가장 잘 표현된다.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한 가지 예는 신에 대한 믿음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비록 현대 사회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떻게든 선택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선택 사항이기 때문이다.

반면 고대 히브리 문화에서 믿음은 당연 하게 받아들여졌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가?

이것이 이 문제의 핵심에 접 근함에는 틀림없지만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변화하는 종교적 사고 패턴에 관한 역사적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

 

한편 우리는 뉴턴의 우주관이 우리 의 종교적 사고에 가져온 영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비록 뉴턴 물리학 이 21세기 물리학의 발전(우리의 물리 세계관에 새로운 개방과 불확실성을 가져온 발전)으로 거의 대체되었지만, 뉴턴에게서 발생한 이신론적 신관은 현대 종교적 믿음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성서 시대보다 유신론을 지지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것은 중요한데, 그 이유는 이 책이 성서와 현대 과학 사이의 공통 분모를 신학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즉 이책은 특히 유신론적 관점에 근거해서, 성서에 드러난 신적 본성과 신적 행위에 대한 이해를 자연 세계와 관련해 설명한다.

따라서 성서 해석에 있어서 이신론으로 향하는 어떠한 경향도 신중하게 고려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우리의 과학적 사고방식을 성서에서 발견한 사고방식과 비교할 때 발생하는 일부 예비적 주제들을 충분히 생각해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시간,숫자, 공간이라는 중요한 과학적 개념으로 이동하고자 한다.

 

 

시간

“태초에”?

 

성서에서 시간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진술 중 하나는 성서의 첫 부분인 "태초에 "(창 1:1)이다.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상이 성서의 많은 부분에서 암시되고 있다(예, 잠 8:22~23, 사 40:21, 41:4, 요 1:1, 골 1:18, 요일 1:1, 집 회 39:20).

창세기 1장 1절은 물리 세계의 시작으로 해석된다.

즉 창조 이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창조 이후에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 사상은 '무로부터의' 창조로 언급되어왔다.

 

그러나 창조를 이렇게 창조 이전과 이후로 말하는 것에는 분명한 역설이 존재한다.

즉, 만약 문자적으로 시간을 언급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창조 이전의 시간을 말할 수 있는가?

이 난제를 고민하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명한 결론에 도달하는 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해 존재함에 틀림없으며, 시간을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창조했다는 것이다.

 

사실 시간의 창조에 대해 창세기 1장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빛과 어둠, 낮과 밤, 저녁과 아침을 창조했고, 그래서 '첫째 날'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1:4~5).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분리해서 시간을 창조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6~10절에서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를 분리해서 공간을 창조한다.

 

그러나 창세기 1장 1절이 항상 모든 것(시간 포함)의 절대적인 시작을 묘사 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라바Genesis Rabbah》 (기원 후 3~6세기에 기록된 미드라쉬 문서)에 기록된 유대 랍비들의 주장에 의하면,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 이전에 많은 것들이 존재했고, 

시간은 창세기 1장 5절에 언급된 첫째 날의 저녁과 아침 훨씬 이전에 존재했다.

 

랍비들은 하나님이 우리 세계 이전에 많은 세계를 만든 경험이 있으나, 만족하지 못해서 그것들 을 모두 파괴시켰고, 만족할 만한 세계(구원이 가능한)를 만들 수 있는 해결책이 떠오를 때까지 창조 행위를 계속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우리가 사는 세계가 창조되었고, 이 지점이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로 시작되는 곳이다.

 

또 다른 랍비의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 2,000년 전에, 천국, 지옥, 메시아의 이름, 회개와 같은 유대교에 중요한 다른 특징들과 함께 지혜와 토라를 창조했다.

창세기 1장 1절이 때때로 “태초에"가 아닌,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혜로 창조했다"라고 번역되는 것은 랍비 사상(절대적 시작을 중 요하게 봄)에서 지혜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분명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라는 진술을 시간과 모든 피조물의 시작으로 볼 필요가 없는 대안적인 방법들이 있었다. 기원후 얼마 안 된 시기에 랍비들이 창세기 1장 1절을 그렇게 해석했다면, 우리는 P문서 저자가 의도했던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P문서 저자는 시간의 시작(첫째날)을 특징짓기 위해 빛과 어둠의 형성을 고려했을지 모르지만, 저자는 또한 이 모든 것 이전에 존재한 창세기 1장 2절의 "혼돈과 공허를 말한다(6장 참조).

 

그러나 2,000년 이상 지난 우리에게 있어서, 창세기 1장 1절을 물리 세계의 절대적 시작으로 읽어 온 수세기에 걸친 기독교 사상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최근 수십 년, 빅뱅 모델의 엄청난 영향력은 너무 성공적으로 대중적 상상력을 자극해서, 빅뱅은 "태초에", "빛이 있으라" 같은 구절과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빅뱅 모델의 발전은 더 많은 문제들을 야기했다. 

우리가 이미 언급 한 것처럼 (2장의 “빅뱅 모델" 참조), 빅뱅의 첫 양자 단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시간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 옳은지의 여부에 질문을 제기했다. 

최근의 연구는 빅뱅을 전적으로 물리적 · 수학적(즉 조건적) 용어로 보며, 빅뱅 '이전'에 무 엇이 있었는지, 무엇이 빅뱅을 야기했는지를 추측했다. 

 

아마도 빅뱅은 초기 우주(earlier universe) 같은, 물리학에 의해 묘사된 상당히 이른 초기 단계에 발생 한 일이었다.

우리 우주가 단지 상당히 큰 '다중 우주'(2장의 "우주, 시간, 물질" 참조)의 한 부분이라는 가설은, 많은 우주론자들이 우리 우주가, 만약 우리가 아는 물리 법칙이 아니라면, 수학적으로 묘사된 더 넓게 창조된 기반에서 시작되었다고 믿는 것과 관련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랍비들이 지혜와 토라(즉 법칙)가 '태초'보다 앞선다고 주장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P문서의 '태초'를 역사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에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 지만, 과학은 절대적 시작의 모습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데, 이는 이것이 신학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성서에서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간은 한편으로 시작(태초)과 함께 정의된다. 

우리는 이 시작이 절대적 시작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시작이다.

시간은 적어도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기에 하나의 창조된 독립체로 여겨진다.

시간이 또한 끝이 있어 보인다(새로운 창조)는 사실은 시간이 철저히 우발적인 실재임을 나타낸다.

즉 시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역사적 시간을 우발적으로 보는 관점은 예언서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여기에서 물리학과 유사점이 있다.

열역학 제2법칙은 엔트로피(무질서)가 항상 증가한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시간이 우주에서 증가하는 엔트로피의 방향(시간의 화살)에 관계되어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며, 전적으로 전에 발생했던 것의 여하에 달려있다.

 

'태초'의 시간과 이에 뒤따르는 7일에 대해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요점이 있다. 

태초의 시간과 7일 동안의 시간이 중립적 · 객관적 시간을 표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일곱째 날은 시간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데 그 이유는 일곱째 날은 하나님에 의해 "복되고 거룩하게"(창 2.3) 되었으며, 그날을 안식일로 매주 기념하는 것이 이스라엘 문화의 핵심이기 때문이다(출 20:8~1, 신 5:12~15).

 

위르겐 몰트만도 비슷하게 안식일의 중요성을 말한다.

“안식일은 피조물의 참된 미래를 위해 피조물의 길을 열어준다.

세계의 구속은 안식일에 고대하면서 찬양된다.

안식일 그 자체는 영원이 시간 속에 현존하는 것이고, 도래할 세계에 대한 맛 보기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은 창조의 핵심이다.

일곱째 날은 시간이 거룩 하게 되고, 모든 피조물이 그날을 하나님과 함께 즐기며, 그날은 도래할 시간의 완성을 의미한다.

마침내 일곱째 날은 하나님이 시간 속으로 들어간 중요 한 표식이다.

앞으로 우리는 간략하게 이 부분을 탐구할 것이다(이후 "하나님 의 시간" 참조).

 

 

시간의 끝?

 

테드 피터스(Ted Peters, 1941~)가 지적한 대로, 존재하는 것에는 미래가 있다.

우리는 과거에 발생한 일에 근거한 역사적 존재인 듯 보이지만, 미래 지향 적 관점을 놓치면 안 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계속해서 피조물이 거할 미래를 만든다고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단언컨대 예수 부활의 종말론적 중요성과 함께,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이다.

 

성서에서 가장 극적인 종말론적 본문 일부는 세계의 시작에 빗대어 세계 의 대재앙적 종말을 말한다(예, 벧후 3:10~13). 

태초에 대한 설명이 여러 의미를 포함하는 것처럼, 종말은 아마 최후의 끝이라기보다 완성 또는 성취, 즉 새로 운 창조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사 65:17, 66:22). 

많은 본문에서 대재앙 을 넘어 최후 승리와 구원을 말하고(예, 암9), 심지어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언급한다(예, 계21~22).

그러므로 성서에서 많은 종말론적 본문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시간이 거대한 규모로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쿨만은 영향력 있는 저서 《그리스도와 시 간Christ and Time》에서, 초기 기독교가 그리스의 순환적 시간관(시간은 구속을 위해 벗어나야 하는 끝나지 않는 순환이다)에 반대하며, 직선적 시간관을 확립했다고 주장했다.

쿨만에 의하면, 초기 기독교 관점은 시간의 시작을 첫 창조로, 끝을 마지막 구속으로 여겼다.

 

이 시작과 끝 사이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행위가 그리스도를 통한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은 마지막 구속으로 향하는 '타임 라인(time line)'에 연결되어 있다.

영원은 끊임없이 확장된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타임 라인은 사실상 또 다른 라인에 연결된다.

 

이 직선적 시간관은 근본적으로 시간을 순환적으로 보는 동양 사상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어느 정도까지만 사실이다.

확실히 성서 본문은 윤회 사상처럼 죽음과 재탄생의 끊임없는 우주적 순환을 말하지는 않지만, 전적으로 직선적 시간관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쿨만의 관점은 신약 성서보다는 "진보낙관론을 상당히 받아들이는 뉴턴의 절대적 시간”에 의해 더 영향을 받았다고 비판받는다. 

 

성서에 정말로 일종의 순환적 시간관이 드러난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데 (9장 참조), 특히 쿨만이 영원에 대한 성서적 관점에서 종말론의 중요성을 과소 평가했다면 더욱 그러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거대한 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즉 첫 창조 기간의 끝이 새 창조의 시작이 된다.

그리고 구속은 사실상 시간의 순환을 통해 성취된다.

만약 시간이 거대한 규모로 재순환 한다면, 더 작은 규모로도 재순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홍수(창 6~9)는 이전의 세계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하는 하나의 가능한 종말론적 순환을 표상한다.

이는 하나님이 홍수 이후에 사실상 시간을 재창조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창 8:21~22).

특히 개별 신자들의 삶과 기독교 공동체에서 더 작은 시간의 순환도 인식되는데, 신자들의 삶은 새로운 창조(고후 5:17, 갈 6:15) 일 뿐만 아니라 '시간 속에서' 진행된다.

 

그리스도의 구원과 성령의 선물 덕분에 신자들은 현 세계에 살면서 도래할 세계의 삶을 미리 경험한다.

그들에게 시간은 '이미' 이면서 동시에 '아직'이다.

이때 직선적 시간관은 힘을 잃게 되고, 시간은 복잡하고, 역동적이며, 다차원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은 우리가 구약의 시간관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다. 

학자들은 예언적 종말론(현실 사회, 정치, 역사적 상황에 관한 실제 역사적 시간에서 구원을 찾음)과

묵시적 종말론(세계를 새로운 창조에 뒤따르는 우주의 극적인 종말의 측면에서 보며, 역사와 이 세계를 초월하여 구원을 찾음)을 구별했다.

경우에 따라 이 두 종말론이 겹치기도 하며, 특히 몇몇 난해한 묵시적 예언에서 제기되는 매우 어려운 해석상의 문제들이 있다.

요약하면 묵시적 예언서들이 단지 역사적 시간에서 정치적 구원을 은유적으로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완벽한 최종적인 우주적 구속을 문자적으로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9장에서 이 해석상의 문제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그리 고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만약 성서적 시간에 일종의 시작이 있다면 일종의 끝도 있고, 어떤 면에서 새로운 시작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약 하면 성서적 시간은 완전한 직선이 아니다.

만약 뉴턴적 세계관이 시간을 직선적이고 영원하다고 여겼다면(2장의 "공간, 시간, 물질" 참조), 지난 100년간의 과학 혁명은 전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는데, 이것은 어떤 면에서 성서 본문의 복잡성과 잘 어울린다.

 

 

역사적 시간

 

태초와 종말 사이의 시간(즉 역사적 시간)은 어떠한가? 역사적 시간이 어느 정도까지 직선적 시간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가?

 

우리는 성서 히브리어와 성서 그리스어가 시간을 각각 다르게 표현하고, 현대 영어와도 다르게 표현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성서 히브리어는 추상적 시간을 말하는 용어가 없고, 우리가 알듯이 과거, 현재, 미래 시제가 없다.

대신 히브리어는 동사의 형태에 대략 행동이 완료되었는지 아닌지에 상응하는 두 개의 상(相)이 있다.

이런 이유로, 비록 히브리어를 제대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개략적으로 접근하는 것이지만, 이 두 히브리어 동사 형태는 종종 각각 '완료'와 '미완료'에 대한 인도-유럽어 시제와 비교되었다.

이것이 구약 시대 사람들이 시간을 우리와 다르게 생각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

내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많은 학자들이 히브리어 동사에 '시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아주 엄밀하거나 직선적이지는 않았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작가와 시인은 시간의 개념에 익숙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과거, 현재, 미래 사건으로 가득한 글을 썼다.

 

여기에서 우리는 히브리어 동사 형태가 구약의 시간관이 "아주 엄밀하게나  직선적이지는 않았다”는 증거를 제공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구약의 시간관이 "아주 엄밀하거나 직선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이 증거 때문만은 아니다.

분명 성서에 드러난 히브리 사고는 고전 그리스 철학이 해온 방식대로 추상적 시간을 탐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에 사는 우리가 보다 발전된 역사적·과학적 시간관으로 탐구해온 방식으로 시간을 탐구한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게다가 성서 시대 사람들은 시계 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었다.

우리가 알기로, 그들은 바쁜 사회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일지를 쓸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생활 속도는 분명 우리와는 매우 달랐을 것이고, 이로 인해 그들의 주관적 시간 경험이 우리와 달랐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동일한 물리적 주기의 날, 주, 달, 계절, 해(年)를 갖는 물리적 인간으로서, 우리 모두는 동일한 시간의 흐름을 경험함에 틀림없다.

분명 구약의 이야기들은, 단지 두 형태의 동사를 사용하고 엄밀한 의미에서의 시제는 없지만, 우리 시대 만큼 인간 사는 이야기들을 정교하게 보여준다.

성서도 인간 수명을 분명 우리처럼 시간이 꾸준히 '흐르는' 것으로 평가하는 데, 시편 90편의 잘 알려진 구절이 그 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시 90:10)

 

그러므로 이스라엘인들이 직선적 시간 개념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기에 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비록 그들이 정확하고, 수학적인 시간 개념을 가졌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소 우리가 경험하는 것같이 '흐르는' 시간 을 경험했다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듯하다(2장의 “공간, 시간, 물질" 참조).

 

하지만 성서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역사적 시간에 신학적 중요성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만약 성서가 '태초'를 시간의 고정점으로서 떠올 릴 수 있다면, 성서는 출애굽과 같은 중요한 역사적 순간들도 고정점으로 떠 올릴 수 있다(예, 왕상 6:1, 대하 6:5, 히 8:9).

이것은 직선적 시간관도 아니고, 순환적 시간관도 아니며, 자연 세계의 계절과 규칙적인 패턴 같이 반복되지도 않 는다.

사실 이 관점은 시간을 결코 비인격적이거나 객관적인 요소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은 하나님의 인격적 의지와 목적이 계시되는 영역이다.

축제와 거룩한 날들(안식일 포함)은 관련된 고정점을 표상하는데, 이런 날들을 통해 원 사건의 '단 한 번의' 특징을 여전히 지닌 채 신학적 시간은 매일의 삶에서 주기적으로 인지될 수 있다(예, 출12).

 

마지막으로, 종종 등장하는 예언적 주제인 "주님의 날"(예, 암 5:18, 5:20, 겔 30:3)은 미래의 신학적 고정점이며, 이 고정점에서 역사적 시간은 종말론적 시간이 된다.

신약 성서에서 이 미래 고정점은 때때로 그리스어 단어 카이로스(마 8:29, 막 1:15, 롬 13:11)를 사용하여 설명된다.

보통 중성단어인 'time'으로 영역되는 카이로스는 실제로 정확하게 대응되는 영어 단어가 없고, 종종 '적절한 시간' 또는 '기대된 시기'를 의미하곤 한다.

그러므로 카이로스는 신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미래 고정점에 대한 좋은 예인데, 이것이 신약 성서에서는 신판의 날로 묘사된다(막 13:33, 벧전 4:17).

 


하나님의 시간

 

성서에서 신학적 시간에 대한 다른 요소, 즉 하나님 자신의 시간이 등장한다.

 

주님 앞에서는 천 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순간과도 같습니다.
(시 90:4)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벧후 3:8)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시간 경험을 놀랍게도 최근 과학에서 말하는 역설 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시간 경험은 종종 과학-종교 대화에서 제기되는 과학 적인 '블록' 시간관과 유사한데,

여기에서 모든 시간은 상대론적 물리학에서 말하는 4차원의 '시공 연속체'로써 동시에 경험된다(2 장 참조).

위에서 인용한 두 성서 구절이 글자 그대로 상대론적 물리학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구절들은 우리의 시간 개념(흐르고 피할 수 없는)이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다르기 때문에 전적으로 객관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시간을 '블록'으로 경험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와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비슷한 관점을 제시하며, ‘블록' 시간관을 옹호한다.

와드는 하나님이 시간의 '외부'인 '영원' 속에 존재한다고 보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원'을 시간의 부재로, 즉 과거와 미래는 없고 계속되는 현재만 있는 상태로 생각했다.

와드의 주장에 의하면, 사실상 하나님은 시간을 블록으로 만들고, 소위 시간을 경험하면서, 외부에서 시간을 들여다본다.

 

와드의 설명은 하나님과 시간의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현대 물리학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호소력이 있다.

이 역설은 물리학적 관점에서 제기되는 역설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서 제기되는 역설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주관적이고 지역에 한정되어 흐르는 시간 개념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와드 제안의 난제는 만약 하나님이 시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시간과 상호작용을 하는지에 대해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세계의 인과관계에 대해 여전히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여기에서 하나님이 시간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다소 이신론적 신관이 제기된다.

 

이런 관점이 성서 본문이 말하는 것을 반영하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반대로 성서 본문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우리의 이해를 넘어 시간을 경험하지만, 시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시간에 관여하지만, 결코 시간에 의해 속박당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시간 밖에 존재한다기보다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공간적 은유보다 관계적 은유를 사용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하나님은 다른 창조된 독립체들(공간도 포함)에 관계하는 것과 유사한 방법으로 초월적이며 내재적으로 시간에 관계한다.

시간을 과학적 사고에 관계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끈 이론(차원만큼 많은 우주 모델을 시도)과 같이 물리학적 발전의 면 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물리학의 도움을 받아 생각해본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차원을 포함해 다른 차원의 시간에 존재한다고 은유적으로 말할 수 있고, 따라서 하나님은 더 높은 차원으로써 낮은 차원에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더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성서에서 시간이 하나님의 소유물로 보이는 부분을 종종 발견한다.

 

낮도 주님의 것이요, 밤도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달과 해를 제자리에 두셨습니다. 

(시 74:16)

 

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네가 아침에게 명령하여, 

동이 트게 해 본 일이 있느냐?
(욥38:12)

 

그리고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 피조물과 언약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창 8:22), 시간은 계속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응답으로 시간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 해 뜨는 곳과 해 지는 곳까지도,
주님께서는 즐거운 노래를 부르게 하십니다.
(시 65:8)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물질 세계와의 관계에서처럼, 하나님과 시간의 관계가 찬양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시간관에 대한 마지막 논의로 영원의 개념을 살펴볼 것인데, 이 것은 충분히 숙고할 필요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원을 시간의 전적인 부재로 생각했지만, 이 개념이 성서에서 발견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영원한'과 '영원'의 의미로 영역되는 히브리어, 그리스어 단어가 분명히 미래(혹은 과거)로의 지속을 나타내는 시간에 관련된 용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관점은 하나님의 수명을 묘사할 때 드러난다.

 

그 옛날 주님께서는 땅의 기초를 놓으시며,
하늘을 손수 지으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모두 사라지더라도, 주님만은 그대로 계십니다.
그것들은 모두 옷처럼 낡겠지만,
주님은 옷을 갈아입듯이 그것들을 바꾸실 것이니,
그것들은 다만, 지나가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주님의 햇수에는 끝이 없습니다.
(시 102:25~27)

 

성서 본문은 영원을 시간이 없는(timelessness) 상태, 즉 영구적인 정지 또는
무감각의 상태로 말하는 대신에, 쿨만이 지적한 대로 '영원'을 결코 끝나지 않 는 시간으로 보는 듯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종말론적 반전이 있는데, 쿨만은 이것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종말론적 반전을 신약에서 너무 중요한 개념인 '영원한 생명'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다(예, 마 19:16, 요 6:54, 롬 6:22, 요일 2:25). 

 

판넨베르크가 지적한 것처럼, 영원한 생명은 영원이 단지 시간의 끝없는 지속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영원한 생명이 끝없이 진행되는 생명을 의미할 뿐 현재 우리 생명의 형태와 유사하다면, 영원의 개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끝없는 시간의 개념만 존재 할 뿐이다."

 

사실 신약 용어에서 영원은 변화에 대한 결정적 행위를 암시한다.

신약에서 '영원한'과 '영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aion 에서 파생되는데(예, 집회 18:10, 벧후 3:18), 이 단어는 또한 '시대' 혹은 '기간'을 의미할 수 있다.

이것은 신약 성서에 풍부한 종말론적 어조와 일치 하는데, 여기에서 영원은 대체로 “이 악한 세대"(갈 1:4)를 속량하기 위해 도래하는 새로운 시대에 부여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가 그 순간에 재림할 것이라는 생각은 이 도식에서 중요한 부분이고, 그래서 그것은 "마지막 때" (고전 15:24)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신약에서는 모든 시간이 (각 시간의 시작과 끝 에) 예수 안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마 1:1~17, 눅 3:23~38, 골 1:18, 계 21:6, 22:13).

이런 의미에서, 신약에서 '영원한 생명'은 종말론적 개념이다.

그것은 '다음 시대로부터의 생명', 즉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적 변화를 근원으로 갖는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이 불멸성을 포함할 수도 있다고 추론하는 것은 합리적이지만(고전 15:50~54), 영원한 생명은 본질상 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우주의 종말론적 변화의 결과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약에서 말하는 영원이 시간이 없는 상태도 아니고, 아마 영원히 끝나지 않는 시간의 상태도 아니며, 

오히려 시간의 목표로써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간의 목표는 도래할 시대의 '첫 열 매'로서, 역사적 시간에서 승천하여(고전15:20) 미래의 어느 순간에 재림하는 인간 예수를 통해 깨달아진다. 

영원은 구체화될 수 없어 보이지만, 곧 도래할 것으로 기대된다(고전 7:29), 

신자들에게 "말세"는 도래했는데(고전 10:11), 신자들은 그것을 이미 부분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들은 이미 현재에 영원한 생명, 즉 영원의 생명(the life of eternity)을 누리 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성서에서 발견하는 영원에 대한 관점을 하나의 관념적인 시간으로 개념화하여 묘사하는 것은 어렵다.

적어도 신약 성서에서 영원은 인간 그리스도를 통해 종말론적으로 묘사됨에 틀림없는데, 영원은 미래 로부터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현재도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결과로 보인다.

이런 시간 개념은 직선적이지 않으며, 순환적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 시간 개념에 관계하는지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즉 하나님은 시간을 영원하게 하기 위해 시간 속으로 들어와 시 간을 속량함으로써 영원으로부터 창조된 시간에 관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영원 그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영원이 "계시되는 것”(롬 8:18, 벧전 1:5, 5:1)인 한, 이에 대해 추측하는 것이 무의미해 보인다.

 

아무튼 잭켈렌은 성서가 시간과 영원을 추상적 독립체 로 간주하지 않고, 시간과 영원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한다고 설명하 며, 이 문제의 요점을 확실히 지적했다.

시간과 영원은 역동적인 관계를 드 러낸다.

즉 하나님은 영원 속에 존재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시간과 영원에 현존한다면, 또한 시간 속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기독교인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산다.

시간과 영원은 하나님과 창조 세계의 역동적 상호작용의 다양한 양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존재론적 시간관은 관계적 관점으로 대체된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영원에 관계되는 한편, 하나님의 내재성은 시간에 관계된다.

 

 

날짜와 숫자

 

시간에 대한 마지막 논의로 성서에서 날짜가 어떻게 기록되었는지에 대 해 살펴볼 것이다. 

성서에 종종 시간과 숫자는 상징적 중요성을 띄는데, 이는 숫자를 객관적이고 공정한 수량으로 보는 것에 익숙한 우리를 놀라게 할 수 도 있다. 

 

제임스 어셔 대주교의 유명한 창조와 홍수 날짜 계산은 족장시대(창 5)와 같이 성서에 기록된 날짜와 족보에 의존한다. 

17~18세기에 어셔의 연대 표는 거의 완벽하게 여겨졌지만, 18~19세기 지질학의 발전으로 그의 연대표가 글자 그대로의 과학적 시작 연대로 신뢰할 만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기원전 4004년에 지구가 창조되었다는 어셔의 날짜 계산은 단지 몇 천년차이가 아니고, 10배 차이도 아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약 45억 년)가 난 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것은 어셔의 방법론에 어떤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 이전, 적어도 안디옥의 테오필루스 이래, 수많은 학자들이 해온 방식, 즉 성서에 나오는 숫자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 방식을 따랐다.

하지만 어떻게 성서가 읽히는지에 대한 인식론적 변화로 인해 어셔 학파는 몰락했다.

비평적 학문으로서의 지질학, 진화생물학, 성서학이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창세기를 신적 계시의 도움으로 썼다는 오랜 합의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결과적으로 어셔의 연구 방법의 중추가 된 성서의 숫자들에 대한 고도의 비평적 조사가 시행되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숫자에 대한 성서의 개념과 의미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때때로 우리가 특별한 의미 없는 수량으로 볼수도 있는 곳에서, 성서는 더 깊은 실재의 코드와 상징을 나타내기도 한다. 

 

성서에 나타난 많은 날짜는 분명 본문이 형성되는 어느 시점에서 체계화되었다.

예를 들면, 홍수 이전 대부분의 세대는 일반적으로 900~1,000년을 살았다고 말해지지만, 홍수 이후 나이는 모세 이후까지 점점 줄어들어 현재에 이르렀다.

 

인간 생물학을 고려해볼 때, 그런 지나치게 많은 나이가 보통 문자적으로 사실일 것 같지 않다는 논의는 별도로 하고, 이 나이는 분명 창조 이래 인류가 신의 은총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며 생명력을 꾸준히 잃어갔다는 신학적 요점을 만들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더 자세히 보면, 홍수 이전 족장 시대 (창5)의 나이는 일종의 상징적 중요성을 갖는다.

예를 들면 족장 시대의 나이가 5와 60의 배수로 언급되는데, 이것은 숫자를 이용한 바빌론 점술의 특징이 기도 하다.

 

성서 저자들이 우리와는 다르게 숫자의 중요성을 파악한 방법의 또 다른 예가 숫자 40과 40의 배수로 종종 드러난다.

많은 예 중에서 세 개만 언급해보 면, 대홍수 기간에 비는 땅 위에 "밤낮 40일"(창 7:12) 동안 내렸고, 모세는 시내 산에 "밤낮 40일"(출 24:18)동안 있었으며, 예수도 광야에서 "밤낮 40일"(마 4:2) 동안 있었다.

 

많은 학자들이 이런 상황에서의 숫자 40은 '많음'을 의미하는 성서 언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숫자 40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돌아다닌 것을 말할 때 사용되는 것처럼(민 32:13), 한 세대의 동의어로서 도식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열왕기상 6장 1절에 매우 중요한 날짜가 나오는데, 이것은 모든 성서 연대표에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출애굽부터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는 때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은 480 년인데, 이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기원전 5세기에 출애굽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출애굽의 그럴듯한 시기로 기원전 13세기를 선호 한다.

 

아무튼 480년이라는 기간은 480=40×12이기 때문에 예형론(豫型論)적 이라고 보는 것이 상당히 그럴 듯하다. 

또한 이것은 12세대를 나타내거나, 아마 모세 시대부터 솔로몬 시대까지 이스라엘 12지파의 12지도자를 나타내는 듯하다.

 

이와 같은 수많은 예로부터, 성서의 숫자로 계산될 수 있는 날짜는 어느 정도 역사적 주의가 요구될뿐더러, 분명 글자 그대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드러났다.

성서 저자들은 숫자를 인용할 때, 우리의 과학적 세계관과 기술적·문자적 정확성에 대한 관심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래의 두 이유로 인해, 성서 저자들과 우리 사이에 너무 큰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된다.

 

첫째, 우리가 기초 수학을 사용하여 정확한 계산을 수행하는 만큼 이스라엘인들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인들의 놀라운 건축술이 이를 증명한다.

그들이 숫자와 날짜의 중요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것이 우리와 다른 점이다.

창세기 1장의 6일이 좋은 예인데, 6일은 안식일과 함께 하나님의 한주와 인간의 한 주를 상징적으로 연결한다(3장 참조).

 

둘째, 성서에 기록된 모든 숫자와 날짜가 오직 상징적 가치만 있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일부 기록들은 현대 역사가들의 기록과 비슷할 정도로 신중하게 역사적으로 연구한 듯 보인다. 

이것은 특히 열왕기서와 역대기서에서 이스라엘과 유대 왕들의 통치 시대와 기간에서 분명해진다.

 

통치 시대와 기간은 종종 증거와 함께 신중하게 언급되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므낫세는 왕이 되었을 때에 열두 살이었다. 그는 예 루살렘에서 쉰다섯 해 동안 다스렸다 므낫세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저질러 놓은 일과, 그가 지은 모든 죄는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다”(왕 하 21:1, 17).

이 본문은 어느 정도 현대 역사 기록물의 주석과 같이, 포로기 이전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실제 법원 기록을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런 기록들의 일부를 (어셔가 그의 시대에 했던 것처럼) 고고학과 다른 고대 근동 기록들을 사용하여 별도로 입증할 수 있다.

아마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기원전 701년 아시리아의 왕 산헤립이 유다를 향해 군사작전을 벌인 것 인데, 이것은 열왕기하 18~19장에 묘사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은 아시리아 기록과 비교될 수 있다.

 

결론은 물론 성서의 날짜와 숫자를 연구하는 것이 결코 간단한 연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역사적 정확성을 보존하는 데 관심을 갖는 우리와 어느 정도 비슷한 역사적 날짜와 시간 개념을 서술하고 있는 성서 본문들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숫자의 상징적 중요성에 관심을 드러내는 성서 본문들이 있다.

많은 본문들이 이 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고, 그래서 해석하기가 너무 어렵다.

위에서 언급한 열왕기상 6장 1절의 날짜가 좋은 예다.

성서는 현대 세계관과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성서의 과학 인식, 성서의 시간 인식, 성서의 역사 인식을 결코 명백하게 말할 수 는 없다.

성서의 공간인식도 이와 같다.

 

 

공간(Space)

3층 우주

 

이제 우리는 고대 히브리인의 '공간' 개념을 살펴볼 것이다. 

성서에 표현 된 시간의 이해와 마찬가지로, 성서의 공간과 우주 개념은 창조주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성서의 관점에 달려 있다. 

 

우리 문화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주 안에 현존한다고 보지 않고도 우주의 전 영역을 충분히 묘사할 수 있지만, 성서적 관점에서는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이 이 책의 요점 중 하나 인데, 우리의 종교적 사고방식과 고대 성서 저자들의 종교적 사고방식의 차이는 결국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요약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사고방식은 불가피하게 성서 저자들에 비해 이신론의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그들보다 자연 세계를 외부의 영향이 없는 자급자족 체계로 생각 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 시대가 사실상 하나님을 현대 우주론의 외부에 위치시킨다면, 이때 성서는 하나님을 충분히 전적으로 성서에 포함시키지 못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과 물리 세계의 관계를 묘사하는 성서적 장치 중 하나인 거리의 은유를 통해 보다 분명해진다.

때때로 하나님은 가까이 존재하는 분으로, 때때로 멀리 떨어 져 도달할 수 없는 분으로 묘사되는데, 각각 내재성과 초월성에 해당한다.

 

성서의 우주론은 우주의 크기가 제한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종 종 해석된다. 

이것은 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빅뱅 모델에 대한 한 타당한 해석은 우주에 경계가 있다는 것이다(장의 "우주의 종말" 참조). 

만약 우리가 '지구의 끝'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예, 사41:8~9), 이 주장은 지구가 평평한 원반(또는 '모서리'가 있는 평평한 모양)이고, 누군가가 충분히 멀리 간다면, 지구의 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점에 있어서, 하늘 또한 크기가 제한된다고 일컬어진다(예, 시 19:4~7).

 

학자들은 종종 이런 진술을 세 단계 또는 세 층(위로 하늘, 아래로 땅, 땅 아래로 물과 스올)으로 되어 있는 우주의 중심에 있는 평평한 지구를 말하는 것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예를 들면, 이런 관점은 십계명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암시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출 20:4, 신 5:8).

 

유사한 표현이 신약 성서에도 등장한다.

예를 들면, 예수의 승천(눅 24, 행1)은 천국이 문자적으로 하늘에서 발견된다는 (또는 적어도 하늘을 통해 접근 가능하다는) 생각을 암시한다.

그리고 잘 알려진 빌립보서 구절에 3층 우주론 진술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빌 2:10).

 

3층 모델은 이와 같은 진술의 이해를 도울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것은 학문적으로는 개략적인 것에 불과하다. 

중세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다는 널리 퍼진 현대 도시 괴담이 있는데, 이것은 명백한 거짓이다.

이 도시 괴담이 학자들의 3층 모델에도 있다고 생각해볼 만하다.

 

한 예를 든다면, 층은 보통 평평하지만, "지구의 끝"(예, 시 135:7) 이라는 모호한 이미지를 제외 하면, 성서는 지구가 둥근지 평평한지에 대해 명백하게 진술하지 않는다.

게다가 3층 모델은 성서 자료에서 제기되는 모든 복잡한 특징들을 설명할 수 없 다.

'하늘'이라는 단어가 좋은 예다.

 

하늘이 단단한 경계(문자적으로 '층) 라는 믿음이 많은 본문에서 드러나는데, 그 경계에 해, 달, 별들이 위치하고, 경계 위에 하늘의 물이 있다(창 1:7~8, 7:11, 3장의 “시간" 참조).

하늘이 야훼에 의해 '늘어나거나 넓어진다'고 언급되는 부분들(다소 금속판을 작업하는 장인의 작업 같은)은 또한 하늘이 단단한 '창공' 또는 넓게 트인 공간이라는 믿음을 입증 할 수도 있다(예, 사 42:5, 44:24).

 

반면 'heaven'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그리스 어 단어는 똑같이'sky'를 의미할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heaven'을 땅 위 모든 공간을 의미하는 'sky'와 거의 같은 의미로 이해할지 모른다.

확실히 'heaven/ sky'는 새들이 날아다니는 공간(잠 30:19) 이자, 구름(단 7:13)과 해·달· 별들(예, 신 4:19)을 포함하는 땅 위의 창조된 공간이다.

'heaven/sky'를 '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뿐만 아니라 'heaven/sky'에 대한 묘사가 다소 현대 용어의 'heaven'처럼, 물리적 실재의 묘사를 넘어 신학적 또는 상징적 실재를 묘사하기 시작하는 부분들이 성서에 나온다.

이런 이해는 heaven을 하나님의 보좌가 발견되는 곳으로 말하는 일부 본문들(왕상 22:19, 시 11:4, 사 66:1)을 제외하면, 구약 성서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후기 유대 묵시 문학과 신약 성서를 살펴보면, 우리의 이해와 비슷하게 구체화되는 heaven의 개념을 볼 수 있는데(예, 에녹서 14, 마 18:10, 계 4), 여기에서 'heaven/sky'는 신학적으로 특별히 거룩한 곳이다.

그곳은 하나님의 본래 거주지이고, 우리 머리 위의 물리적 하늘을 훨씬 초월하는, 신실한 사람들이 사후에 가는 복된 낙원이다.

 

만약 3층 모델로 다 표현할 수 없는 'heaven'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다소 난해하다면, 하늘에 얼마나 많은 층들이 존재하는지는 훨씬 더 난해하다.

다시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서 (결국 창세기 1장은 성서에서 가장 완벽한 우주론을 묘사한다), 여기에서 충들 또는 단계들이 서로 구별될 만큼 충분히 묘사되는지가 정확하지 않다(3장의 “우주론" 참조).

 

핵심적인 우주론적 특징을 살펴보면(창세기 6~9장의 홍수 이야기에서 강하게 강조되는데), 지구가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둘러 싸여 있고, '창공'이 위의 물을 떠받치고 있다.

이것은 3층 모델이라기보다 물로 둘러싸인 '덮개(bubble, 또는 보호 천막)'를 묘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3층 모델에서 부족한 히브리 세계관의 중요한 특징, 즉 물의 우주론적 중요성을 강조 하는데,

이것은 성서 창조 주제에서 야훼가 용/바다와 싸우는 신화적 투쟁을 통해 너무 잘 드러난다(4장 "창조와 신화" 참조).

 

살기에 적합한 우주는 무질서한 깊은 물 속에서 야훼에 의해 유지되고 보호되는 잠수함과 같고, 그래서 야훼의 창조 질서는 번창할 수 있다.

다른 본문들은 바다를 하늘, 땅, 스올에 더해 네 번째 층에 포함시킨다(예, 욥 11:8~9, 시 139:8~9).

 

위에서 인용한 빌립보서 2 장 20절과 비슷한 찬가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데, 이 본문은 3층을 말하는 대신에 바다를 포함하여 4층을 말한다.

"나는 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또 그들 가운데 있는 만물이, 이런 말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계 5:13).

 

여기에서 우주는 층이라기보다 거주의 공간으로 묘사 된다.

게다가 만약 우리가 창세기 1장에 대한 가장 이른 해석인 기원후 첫 몇 세기 랍비들의 기록을 보면, 3층도 아니고 4층도 아니고 많은 층(물뿐만 아니라 일곱 하늘과 일곱 땅)을 포함하는 우주론을 추측한 증거가 발견된다.

 

이 논의의 핵심은 3층 우주 묘사를 지나치게 복잡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모델이 고대 히브리 우주론을 문자적으로 묘사할 때의 단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즉 성서 본문들은 단순한 모델로는 설명될 수 없는, 보다 미묘하고 복잡한 관점(또는 관점들)을 취한다.

그러나 3층 모델을 지지하는 증거로 해석되는 대부분의 우주론적 진술들은 사실상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은유 적인 암시이기 때문에, 3층 모델을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우주론적 진술들이 문자적 우주론에 대한 실제 진술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 것들이 신적 현존에 대한 은유로 더 잘 이해되는가?

 

 

하나님의 위치

 

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위치를 묘사하는 우주론적 언어를 보다 면밀히 들여다보자.

하나님이 하늘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무수한 예들이 성서에 나오고, 일부 본문들은 심지어 하나님이 하늘에서 땅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예, 시 14:2, 33:13~14).

이것은 'sky/heaven' 의 이해가 문자적으로 우리 머리 위라는 것을 암시한다.

 

사실 일반적인 기독 교 언어에서 하나님은 종종 'heaven'에 존재한다고 말하지만(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 6:9), 현대인들은 거의 'heaven'을 물리 우주 안에 있는 장소로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무튼 하늘에 대한 고대와 현대 우주론적 관점이 둘 다 하나님의 거주지가 보통의 상황에서 인간이 전혀 닿을 수 없는 곳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같다.

불트만은 히브리인들의 3층 우주론이 성서

 

의 초기 '신화적 사고'가 현대 과학 시대에 맞게 비신화화되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초기 사고방식이 거의 입증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고대인들이 현대 학자들만큼 문자적으로 신화를 해석했을 것 같지도 않다.

조지 케어드(George Bradford Caird, 1917~1984)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성서 시대 사람들은 실제로 위에 하늘이 있고, 아래에 스올이 있는 세계를 구상했 을 수도 있다. 그러나 파러가 지적한 대로, 그들은 비행으로 하늘에 도달할 수 있고, 땅을 파서 스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3층 묘사를 자신이 살았던 세계의 묘사로 받아들였던 사람은 누구나, 3층 묘사가 이 묘사 없이는 종교적 진실의 일부가 이해되거나 표현될 수 없는, 영구적이고 보편적인 상징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였다.


만약 케어드가 옳다면, 현대 학자들의 3층 우주론은 하나의 우주론이라기 보다 '종교적 진실', 다른 말로, 거리와 위치로 상징되는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 를 표현하는 상징적 방법이다. 

마스칼도 17세기 과학혁명을 통해 생겨난 '문자주의의 실제적 · 치명적 시기'에 대해 말하며 비슷한 주장을 했다.

하나님을 지구로부터 공간적으로 분리시키는 성서 언어는, 항상 피조물과 창조주의 차이로써 본질적으로 이해되었는데, 이제는 문자적으로 읽히고, 따라서 수많은 문제들이 생겨났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에 의해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서 밀려난 것과,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에 의해 지상계와 천상계가 한층 더 통 합된 것은, 서로 다른 공간들 사이의 모든 질적 차이를 없앴다. 

 

이제 성서 본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는 하나님과 세계의 질적 차이를 말하는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본문들이 마치 실제 물리 공간의 본성에 대한 과학적 진술인 것처럼, 그것들을 가상적인 3층 우주론의 측면에서 읽는 학자들을 보게 된다.

성서의 우주론적 진술의 상당수가 과학적이라기보다 상징적 진술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 타당하다.

즉 하나님이 하늘에 존재한다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이 완전히 닿을 수 없고, 세계와 상당히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 점은 하나님의 위치에 대해 상당히 다양한 공간적 진술을 하는 시편 57편 같 은 예를 통해 더 잘 표현될 수 있다.

시편 기자가 “하늘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실을 보내시어,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시 57:3)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보듯,

하나님은 하늘에 존재하는 듯하다.

그러나 하늘과 하나님의 덕을 설명하는 공간과 위치에 대한 다른 이미지들은 언어가 항상 은유적 목적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 하늘 위로 높임을 받으시고,
주님의 영광을 온 땅 위에 떨치십시오.
주님의 한결같은 그 사랑, 너무 높아서 하늘에 이르고,
주님의 진실하심, 구름에까지 닿습니다.
(시 57:5, 10)

 

이 구절에 사용된 전치사들을 특히 주목해볼 만하다. 

하나님은 하늘 위로 높임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은 온 땅 위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진실함이 하늘만큼 높고, 구름에까지 닿기 때문이다.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우선 하늘 위에 존재하는데, 땅 위이지만 구름보다 더 높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분명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읽도록 의도되지 않았다.

시편 57편은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성과 우주적 진실함을 강조하기 위해 공간의 은유를 사용한 일련의 시적 표현이다.

 

비슷한 은유가 하늘에 대응되는 부분, 즉 땅 아래 있는 지하 세계(구약 성서 에서 종종 스올이라 불리는)에도 사용되는 듯하다. 

지하 세계가 땅 표면 아래의 물리적 층에 대한 문자적 묘사로 간주될 필요가 없고, 온전히 은유적으로, 즉 죽은 사람들의 상징적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죽은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완전히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고, 죽은 사람들 스스로 하나님에게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지하 세계는 살아 있는 사람들로부터 분리되는 은유이자(예, 욥 7:9), 아마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은유다(예, 시 88:4, 사 38:10~18).

 

하늘이 초월에 대한 공간적 은유로 사용된 더 분명한 예는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 봉헌 기도에 등장한다(왕상 8).

솔로몬은 야훼가 "주님께서 계시는 곳인 하늘에서 "(30절) 그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기를 애원한다.

동시에 이 본문은 하나님이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에 더 이상 거하지 않고, 문자적 의미의 하늘에 거할 것이라는 인식을 드러낸다.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께서 땅 위에 계시기를, 우리가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성전이야 더 말하여 무엇하겠습니까?" (왕상8:27).

이 구절은 구약에서 하늘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언급하는 주된 기능이 하나님의 완전한 세계 초월을 은유적으로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암시하는 부분 중 하나다.

 

 

신현(神顯, Theophany)

 

우리가 지금까지 제안한 관점은 물리 공간에 대한 성서 묘사의 상당수가  창조주/피조물 관계에 대한 은유라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현존이 단지 sky/heaven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물리적 장소에 관계된다는 사실로 인해 분명해진다.

야훼의 현현은 현저하게 산에서(예, 시내 산, 출 19) 이루어지고, 시온산(미 4), 집회의 산(사 14:13~14)과 예수 이야기에서 여러 중요한 산(마 5:1, 15:29~31, 28:16~20, 막 9:1~9)에서처럼, 신적 현존은 산에서 초월적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나무(예, 창 18:1, 출 3:1~6), 개울(예, 창 32:22~32), 강(예, 시 36:8~10, 46, 겔 1:1, 막 1:9~11)에서처럼, 다른 자연 풍경 또한 신현의 장소로써 중요하다.

우리는 이 장소들을 3층 모델에서 말하는 세 물리적 총 사이의 '다리'로서 이해할 수도 있다.

반면에 만약 우리가 좀 더 비유적으로 접근한다면, 이 다양한 신현의 자연 장소들은 우주 영역들 사이의 차이가 '충'이란 단어가 암시하는 것보다 실제로 훨씬 더 유동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장소들은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담론에 따라 변하고, 유동적이며, 조정이 가능할 수 있다.

요약하면 신현의 장소들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은유이자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에 대한 은유다.

유사한 방법으로, 존 레벤슨은 '세속적 예루살렘'과 '천상의 예루살렘'에 대한 구약 본문들이, 서로에 개방되어 있는 두 층으로 구성된 세계를 가리키고, 시온 산에서 서로 관통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층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으며, 우리 세계에 하나님의 현존과 거룩함이 더욱 분명하 게 드러나는 특정한 장소들이 있다는 말이다.

이 장소들은 또한 어느 정도 하 늘의 은유와 같이, 신적 초월을 의미하거나 상징하는 물리적 장소들이다.

 

산과 샘 같은 지리적 장소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또한 자연 현상에도 나타난다고 일컬어진다.

주로 천둥(예, 출 15:1~18, 사 5:4~5,욥 37:2~38:1), 불(예, 창 15:12~21, 출 3:1~6), 지진(예, 삼하 22:8)에 나타나고, 심지어 인간의 건축물(예루살렘 성전과 종교적 예전, 왕상 8)에도 나타난다.

만약 현대인들이 우주에 하나님이 거할 문자적 의미의 안식처가 존재한다고 거의 믿지 않는다면, 성서 저자들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현존은 다른 장소와 다른 현상에 각각 다른 방법으로 관계하면서, 세계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사역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나타낸다.

서로 다른 이미지들과 주제들이 이스라엘의 과거 다른 신화적 양상에 근간을 두었다는 말은 전적으로 타당하지만,

그것들이 상당수의 본문에서 거의 균일하게 결합되었고 모두 함께 성서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은,

어떤 한 이미지도 완전하거나 역사적으로 권위 있게 받아들여 질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전체 구도를 구성하는데, 이 구도는 여러 양상을 띄고 있어서, 쉽게 단일한 개념 체계로 전락할 수 없다.

신현의 언어에 대한 마지막 요점은, 프레트하임이 인지한대로, 신현의 언어가 하나님을 향한 피조물의 찬양의 언어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4장의 결론 참조),

산, 지진, 폭우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방법과 상당히 유사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자연스럽지만 강한 계시적 방법으로 산, 지진, 폭우가 운데 자신을 드러낸다.

 

그런 본문들은 단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찬양을 표현하는 화려한 은유라기보다, 모든 비인간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현존과 밀접한 관계임을 드러내는 나름대로의 신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묘사한다.

만약 신현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표현한다면, 그때 자연의 찬양은 하나님 의 내재성을 표현한다.

 

 

내재(內在, Immanence)

하나님이 세계와 매우 친밀하다고 일컬어지는 많은 다른 방법들이 있는데, 이 방법들은 신적 현존의 내재적 관점을 말한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계속적 창조의 근거를 성서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를 논의할 때, 이 방법들 중 일부를 언급할 것이다.

이 외에도 하나님의 친밀함(시 145:18)에 대한 다른 은유적 묘사들이 발견되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로(시 23), 우리의 피난처로 (시 91), 지키는 분과 그늘로(시 121) 묘사되는 일부 시편 구절들이 그렇다. 

비슷한 친밀함이 하나님의 언약 갱신의 표현과 백성을 향한 사랑의 표현에서도 발 견된다(예, 출 29:45~46, 사42:6, 43:1~2, 렘 31:33~34,32:37~40, 겔 37:26~28, 호 11).

 

하지만 하나님의 내재성은 하나님의 초월성만큼이나 구약 성서에서 명백 하게 언급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대략 기원전 8세기에 예언서 기록의 시작과 함께, 하나님의 계시가 지혜, 예언, 음성, 신탁, 즉 인간 발화의 형태 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주제들은 시내(호렙산의 엘리야 이야기(왕상 19:11~12)에 설명된 것처럼, 신적 내재를 강하게 말한다.

일부 학자들(예, 크로스, 레벤슨)은 이 이야기를 예언에 대한 이스라엘의 태도 변화를 묘사하는 중요한 발전으로 본다.

 

이 이야기에서 엘리야는 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리지만, 하나님은 산을 강타한 거대한 바람으로도, 지진으로도, 불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즉 전통적인 신현의 표시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뒤따른다. 모세와 그 이전 이스라엘인들이 그 산에서 하나님의 엄청나고 경외할 만한 광경을 증언할 특권을 부여받았는데,

하나님의 엄청나고 경외할 만한 광경이 엘리야의 내적 자각의 목소리로 대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신현은 내면화되었고, 예언자적 목소리를 통해 표현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구약 시대에 율법(예, 시 1, 119)과 지혜 문학에 대한 숙고를 포함해, 8세기부터 줄곧 예언서에서 발전한 초점을 설명하는 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신적 내재는 공동체와 개인의 내적 신앙의 측면에서 표현된다.

 

심지어 신적 내재에 대한 보다 친밀한 표현은 신약 성서에서 발견될 수 있다.

바울의 성령 신학에서 신적 내재 논의는 새로운 신학적 절정에 도달한다.

만약 예수의 부활이 하나님의 힘(성령)에 의해 가능했다면, 동일한 성령이 옛 창조가 아닌 '새로운 창조'(고후 5:17)로서 신자들(롬 8:11)의 일상생활에도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아마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신령한 은사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바울의 논의가 가장 좋은 예다.

여기에 보면, 신자들 안에서의 하나님의 내재적 (또한 종말론적) 행위 덕분에 신자들에게 "성령이 나타나게"(고전 12:7) 되었다.

지혜와 지식의 말씀, 병 고치고 예언하는 은사 같은 신령한 은사들을 드러냄으로써, 신자들은 스스로 신현의 장소가 되었다.

이보다 더 포괄적인 신적 내 재에 대한 상징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하나님과 창조 세계의 관계에 대한 어떤 묘사도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잘 알려진 상징(예, 창 1)을 포함해,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상징도 당연히 고려해야 한다.

 

 

결론

 

우리는 분명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성서적 개념을 논의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다.

이것은 우주와 우주의 구조를 묘사하는 듯한 성서 진술의 상당수가 실제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대한 상징적 언급이기 때문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공간은 하나님의 본성과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묘사 하는 데 사용된 중요한 상징적 장치 가운데 하나였다.

이것은 널리 퍼진 3층 우주론의 학문적 재현이 기껏해야 대강의 근사치로만 사용되어야 하고, 고대 히브리인들이 물리 세계에 대해 믿었던 것에 대한 엄밀한 묘사로 여겨져서는 안 되는 이유다.

 

3층 우주론이 무언가 진리를 담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근거한 본문들은 전적으로 구별되는 존재의 세 영역, (1) 하나님 (2) 살아 있는 것 (3) 죽은 것에 관한 신적 초월성을 설명하는 은유적인 장치로 더 잘 이해된다.

여기에서 형이상학적 경계들에 대한 한 체계가 대두되는데, 이 체계는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묘사하는 구약의 법과 의례 자료에서 발견된 경계들에 관련될 수도 있다. 

구약의 어떤 체계도 현대 과학적 우주관에 관계되지 않고, 오히려 우주를 사회적·의례적 · 신학적 용어로 본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성서에서 신학적 사고에 의해 어떻게든 영향을 받지 않은 시간관을 도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우주의 시작과 끝 사이의 역사적 시간뿐만 아니라 우주의 시작과 끝에 대한 성서 관점들을 논의했고, 이 관점들이 모두 하나님이 세계에서 일하는 다양한 방법에 대한 상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보통의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생각에 포함시킬 필요 없이, 시간과 공간을 매일의 일상으로 생각할 수 있 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보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결코 그들의 일상에서 전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던 듯하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의 과학을 논의했고, 현대 과학에 관계된 인과론적 시각이 틀림 없이 존재했으며, 초기 과학 기술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서 본문에서 종종 인과론적 시각은 상당히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된다.

 

우리는 분명히 초기 이스라엘인들, 혹은 적어도 성서가 기록된 시대에 살 았던 사람들보다 현대 과학적 세계관에 의해 훨씬 많이 이신론적 사고의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기꺼이 우리 세계, 시간과 공간, 경계와 구조에 대한 큰 그림을 하나님의 활동을 배제하고 보는 반면, 초기 이스라엘인들은 이런 큰 그림을 인지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어려웠을 듯하다.

그들에게 큰 그림이 어려운 이유는 하나님의 활동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거의 그렇지 않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가 성서뿐만 아니라 보다 동시대적 신학 용어로 이해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며 논의를 이어갈 것이다.


출처 : 성서의 본성(마크 해리스 지음, 장재호 옮김, 도서출판 두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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