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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 성서에서의 창조 1 [창세기]

w.j.lee 2024. 7. 26. 09:23

 

 

3장 : 성서에서의 창조 1 [창세기]

 

첫 번째 창세기 창조 설명 : 창세기 1:1~2:4a (P문서)

 

제사장 문서

창세기 첫 부분에 두 개의 구별되는 창조 설명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문서설'의 핵심중 하나다(1장 참조). 비록 베닿우젠이 체계화한 후 많은 비판과 개정이 있었지만, 문서설의 기본 사상은 성서 연구에 빠르게 침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의 핵심 첫 몇 장을 볼 때, 본문의 기저에 있는 역사적 표현에 너무 지붕하지 않은 채, '아훼'문서와  '제사장' 문서 같은 용어를 계속 사용할 것이다.

 

편의상 우리는 창세기 1~2장의 창조 이야기를 P문서로, 창세기 2~3의 창조 이야기를 J문서로 언급할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적어도 두 개의 구별되는 창조 전승을 다룬다고 해서, 어떤 특정한 문서설을 정설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수되어 온 정경(Canon)에서, 이 두 창조 이야기가 함께 논의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 두 이야기는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예를 들면, 한 창조 이야기(아마 P문서)는 어느 정도 다른 창조 이야기의 서론이자 부연 설명으로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벨하우젠은 P문서가 바빌론 포로기에 대한 신학적 응답의 일환으로, 기원전 6~5세기에 구성되었다고 본다. 

성서의 첫 부분에 등장하며 문학 작품을 암시하듯 반복적이고 리듬 있는 형태(P문서로 분류되는 이유 중 하나)를 지니는 창조는, '혼돈하고 공허한상태에서 시작하여 규칙적인 단계로 묘사된다.

마침내 인류의 창조에서 정점에 이르는데,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된 유일한 피조물이다(창 1:26~27).

창조는 저녁과 아침을 하루로 계산하여 총 6일 동안 진행되고, 7일째 날에 하나님은 안식한다.

 

P문서가 이전의 창조 이야기, 즉 아마도 바빌론 같은 다른 고대 근동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의 여부는 종종 논란이 된다.

이를 지지하듯, 유사한 내용이 바빌론 창조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에 등장한다.

그러나 《에누마 엘리쉬》와는 너무나 큰 차이들(특히 신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이 있기 때문에, 우주관과 세계관의 유사성조차 직접적으로 차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이유로 P문서가 바빌론 창조 신화를 반박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학자들은 또한 창세기 1장과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한 화려한 찬송시인 시편 104편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에 주목했다. 

둘 중 하나가 다른 본문에 의존하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둘 사이의 유사성에 의해 결정된다.

시편 104편이 이집트 창조 자료와 일부 유사할 뿐만 아니라 보다 공공연하게 신화적인 속성을 포함하기 때문에 (6~9절의 물의 인격화 같은), 창세기 1장은 이집트 신화에 영향을 받은 시편 104편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라고 주장되었다.

물론 이 논제는 창세기 1장이 바빌론 창조 신화를 반박하기 위해 쓰였다는 주장만큼이나 입증하기 어렵다.

이 두 주장 모두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간에, 창세기 1장이 다른 고대 근동 창조 자료들과 밀접한 유사성을 보이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비록 신화적 주제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 는다고 해도, 본문의 배경에는 신화적 주제들이 존재한다. 

이 내용은 이어지는 논의와 다음 장에서 심도 있게 다룰 것이다.

 

창조 행위에서 질서, 행복, 내적 만족이 P문서에 분명히 드러난다. 

이와 관 련해서 학자들은 이 본문의 기저가 되는 보다 심오한 문학적 대칭이 있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 있으라”, “그대로 되니라"와 같 이 어구가 자주 반복되는 것과 이 본문의 체계적인 전개를 보면, 이 본문이 세심하게 구성되었다고 충분히 추론할 만하다.

문학적 패턴에 근거한 몇몇 주장들이 있었는데, 6일은 이등분(1~3일과 4~6일)되어 1~3일은 4~6일에 주제상 각각 연결될 수 있다고 종종 주장되었다.

 

1일과 4일은 빛의 창조와 빛들(해, 달, 별)의 창조로 연결되고, 2일과 5일은 하늘의 창조와 새들의 창조로 연결된다.

3일과 6일은 육지의 창조와 육지에 사는 동물과 인간의 창조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것이 본문에서 드러나는 유일한 패턴은 아니다.

어떤 패턴도 이 단락의 '최종적인' 체계를 확실히 제공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아마 그것들 중 어떤 것도 너무 대단하게 여기면 안 된다.

그러나 이 패턴들은 상당히 중요한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세계의 창조주가 창조 행위를 기뻐하는, 질서와 규칙의 하나님으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과 하나님
우리가 창세기 1장에 대해 무엇을 말하든, 그것은 창조하고, 감독하고, 구성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님은 거의 모든 문장에서 능동적으로 묘사된 반면, 세계는 전적으로 수동적, 즉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두) 명령에 따 라 변한다.

이 본문이 리듬 있고 반복적인 특성이 있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단계적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질서 짓는 것은, 하나님을 잘한 일을 자랑스러워하는 숙련된 건축가로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은 매 창조 단계를 보기 "좋았 다"(히브리어 tov는 '아름다운'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평가하고, 모든 창조의 마지
막에는 "심히 좋았다" (창 1:31)고 평가한다. 

숙련된 건축가가 하는 것처럼, 창조 행위는 주의 깊게 평가되었고, 적절하게 진술되었다.

 

해밀턴에 의하면, “창조 설명은 말하고, 평가하고, 의도하고, 형성하며, 활기를 부여하고, 규제하는 하나님을 묘사한다."

그리고 창조 행위를 평가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즉 '좋았다'는 가치 판단의 반복에는 순전히 사실적이거나 과학적인 한계를 넘어 미적인 판단이 작용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미적 판단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찬양할(욥38:4~7) 수밖에 없도록 한다.

 

P문서의 하나님을 다른 은유로도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숙련된 건축가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의 설계자나 감독자로, 그리고 연설가, 평가자, 상담가, 승리자, 왕과 같은 다른 그럴 듯한 역할에 동등하게 비교 할 수 있다.

사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우주를 만들었다기보다 우주가 생성되도록 독려한 것에 주목하면,

우리는 심지어 배우들이 하나님이 정해준 범위 내에서 스스로의 창조성을 통해 자신들의 역할을 해석하고 잠재력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독려하는 영화 감독으로서의 하나님을 생각해볼 수 있다.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은 많은 속성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어떤 하나의 인간 비유로는 하나님의 속성 모두를 완벽히 드러낼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의 돌봄과 헌신은 인간 세계와 친숙할 수도 있지만, 그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피조물 전체는 계속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인 돌봄과 관심 속에서 창조되었다.

마치 하나님이 우주의 청사진과 세세하게 계획된 일정에 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은 질서정연하게 창조되었고, 전개되 었다.

물리학자의 신은 주의 깊게 우주 법칙과 질서를 설정하고 이후에 그 질서에 따르는 신일 뿐만 아니라, 인류를 마지막 최고의 단계에서 신의 형상(창1:26~27)대로 창조해서 신처럼 피조물을 지배할 수도 있게 하는 인간 중심적인 신으로 간주되기 쉽다.

 

그러나 인류는 창조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한 일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안식이다.

성서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창조를 마친 후 숙련된 건축가가 그러하듯 안식을 취했다.

하나님의 안식이 갖는 특별한 의미는 분명하게 묘사된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 게 하셨다"(창 2:3).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이 "심히 좋았다" (131) 선포했고, 인류에게 복을 베풀었다(1:28).

그러나 마지막 창조인 일곱째 날은 이제 복될 뿐만 아니라 “신성시"(hallowed, 즉 거룩하고 돋보이게) 된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이를 채울 물리 세계를 창조한 후, 그 한주(週)와 특히 안식일을 거룩하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창세기 1장에서 논란이 되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도 아니 고, 일곱째 날의 지위에 대한 묘사도 아니다. 

현대 과학의 영향으로 우리는 이 본문의 중심 주제가 하나님이라는 것, 그리고 이 본문에 대한 주장이 논란의 여지 없이 과학적이 아닌 신학적이라는 것을 거의 잊어버린 듯하다. 

우리에게 주목을 받는 것은 바로 과학이다.

 

창세기 1장과 현대 과학
현대 과학은 세계가 수십억 년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반면, 

창세기 1장은 표면적으로 물질 세계의 창조가 6일 (6×24시간)에 걸쳐 일어났다는 것 을 말한다는 사실을 당분간 보류해두고, 

창조 이야기와 현대 빅뱅 우주론, 진화생물학 사이에서 수많은 유사성을 먼저 생각해보자.

 

예를 들면, "혼돈과 공허" (창 1:2)는 플랑크 시대의 초기 양자 상태를 상기시키고, 빅뱅의 초기 거대한 에너지 섬광은 하나님의 처음 창조 행위인 "빛이 있으라"(창 1:3)에 연결된다. 

실제로 일부 유명한 과학자들은 빅뱅 모델의 초기에 절대적인 시간의 시작이 있었다는 추론이 창세기와 너무 밀접하다고 생각했다.

우주가 과학의 영역에서 홀로 절대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최근 몇 십 년간 과학적으로 지지되기 전까지, 창세기 창조 설명은 어쨌든 우주의 신학적 기원을 옳게 설명 하는 듯 보였고, 그래서 로버트 재스트로의 다음 말은 깊이 공감할 만하다.

 

이성의 힘을 믿으며 살아온 과학자에게 이 이야기는 악몽처럼 끝난다. 그 과학자는 무지의 산에 올랐고, 정상을 점령하고자 한다. 그가 최정상 마지막 바위에 도달 했을 때, 수백 년간 그곳에 앉아 있었던 한 무리의 신학자들이 그를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창세기 창조 묘사와 과학의 유사성은 창세기 1장에 계속해서 등장한다. 

바다와 육지가 먼저 드러난 후, 식물, 바다 생물, 육지 동물, 마침내 인류로 이어지는 창조 순서는 현대 생물학적 진화 이론에 의해 묘사되는 패턴과 전반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이 주목받았다.

그러나 땅의 창조(10절)와 심지어 낮과 밤의 창조(5절) 이후에 해와 별이 등장(16절)하는 것은 P문서와 현대 우주론 사 이에 거대한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 기독교(또한 유대교) 공동체에서 P문서와 과학 사이의 유사성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열띤 토론이 계속되었고, 여기에서 수많은 복잡한 질문들이 제기된다.

이 유사성이 현대 우주론자들이 등장하기 오래전에, P문서 저자가 세계의 기원에 대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증거인가?

그렇지 않으면 P문서 저자는 주변 문화의 창조 신화에 영향을 받아 일련의 과학적 추론을 했는데, 이 중 일부는 현대 과학의 발견과 우연히 일치했고 다른 추론들(예, 6일 창조)은 저자에게 정보가 부족했다는 것을 드러낸단 말인가? 

이것도 아니면, 저자가 말한 '하루'가 문자적 24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이해하면 모순이 해결되는가? 

만약 그렇다면, 하루를 지질 시대처럼 상당히 긴 시간의 한 부분을 비유적으로 말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가?

혹은 '6일'이 지구의 시간 척도와 다른, 하나님의 시간 척도를 가리킨단 말인가?

혹은 우리가 이 본문과 과학을 연결해 유사성을 발견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그 본문을 단지 우화로서 읽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고, 이 질문들에 대답하는 방식에 따라 우리의 신학적 입장('진실'이 있다고 생각하는 곳)이 드러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1~3장은 우리 성서 이해의 꽤 흥미로운 시금석이 될 것이다.

이 과학적 질문들에 대한 두 가지 보편적 대답은 다음과 같다.

 

1. 많은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창세기 1~3장의 내용을 글자 그대로의 진실 이라고 '강하게' 믿고,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6일'은 가장 곤란한 부분이다.

일부 학자들은 6일이 과학과 일관성을 갖게 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한다. 

반면 다른 학자들은 주류 과학을 완전히 거부하고, 세계는 글자 그대로 6×24시간 동안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고백이라고 믿는다.

휘트콤과 모리스는 고전 창조론을 다룬 《창세기 홍 수》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 창조가 6'일'에 걸친 것으로 묘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본문을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할 아무런 정황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적이며 합리적인 행위이다.

 

2. 이 본문의 문자적 진실성에 대해 강한 신학적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이 본문이 과학뿐만 아니라 과학이 묘사하는 물리적 실재와 얼마나 잘 연결되는지에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적다. 

이 경우, 6일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이런 해석은 이 본문이 독자에게 과학적 묘사로 받아들여지도록 의도되 지 않았고, 창조 개념에 대한 은유 또는 심지어 '시'로써 오늘날 가장 잘 이해 된다고 주장하며, 이 본문의 상징적 · 신학적, 그리고 심지어 예전적 차원을 강조한다.

 

어느 정도 개략적으로 묘사했지만 이 두 해석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 대표적 논쟁이다.

비록 이 두 해석이 거의 상호 배타적이지만, 현대 과학에 대한 태도를 해석의 열쇠로써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연결된다.

 

첫 번째 해석이 창조 본문을 현대 과학의 주장(비록 이 주장들이 주류 과학이라기보다 '창조 과학'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과 연결하려 하는 반면, 두 번째 해석은 창조 본문을 과학의 주장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두 해석 모두 고대 과학, 그리고 고대에 작용했고 존재했던 범주들에 의해 알려진, 그 본문 자체가 제기하는 주장에는 관계되지 않는다.

사실상 그 본문은 처음 구성된 대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기준에 의해 판단되고 있다. 

 

만약 첫 번째 해석이 너무 문자적이라면 두 번째 해석은 문자적으로 불충분하다.

문자적 해석은 (1) 창조 본문이 단지 물리적인 것보다 본질적인 것을 말하는 다양한 의미들을 분명하게 포함한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않는다.

반면 은유적 해석은 (2) 그런 본질적인 것들이 무엇일지에 대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본문이 무엇에 대한 은유인지를 주의 깊게 설명하지 않고 본문을 은유로써 언급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은유는 아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는 구체적 용어로 구성된 모델이자 이미지다.

만약 우리가 그 모델에 사용된 용어들의 실재를 확인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예, 창세기 1장의 고대 과학), 은유는 더 이상 은유가 아니라 비유 혹은 우화가 된다. 

 

우리는 은유를 우화와 매우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한 의미론적 차이가 아니다. 

은유는 이미지와 이미지가 지시하는 대상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진술인 반면, 비유는 기껏해야 직유이고, 때때로 심지어 그 보다 더 제약이 없다.

 

우리는 예수의 비유에서 이것을 볼 수 있다.

가장 간결한 비유 중 하나는 겨자씨 비유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 13:31).

만약 이 본문이 비유보다 은유로써 표현된다면, 우리는 "하늘나라는 겨자씨다”라고 읽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비유가 의도하거나 정당화하는 것보다 하늘나라와 겨자씨라는 실재 사이의 보다 밀접한 유사점들을 찾고자 할 것이다.

 

창세기 1장을 현대 과학의 관점에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이 점을 간과한다. 

그들은 사실상 은유에 담긴 실재의 층을 고려하지 않고, 창조 본문을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은유, 그리고 세계 물질의 근원에 대한 은유로서 읽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다음은 창세기 1장 을 현대 과학의 측면에서 다시 쓴 좋은 예다.

 

태초에 하나님이 “~이 있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완벽히 균형을 이루고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연합된 물리학의 에너지를 만들었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자유 결정에 의해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입자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나도록 했는데, 이 체계로부터 지극히 작고, 어마어마하게 뜨겁고, 고요하면서 펄펄 끓는 천체가 생겨났다. 창조의 첫 단계 진화와 돌연변이가 있었다. 순식간에 폭발이 발생했고, 에너지의 완벽한 균형이 깨졌다. 점차 온도가 떨어지게 되었고, 오늘날의 자연 에너지가 생겨났다 창조의 두 번째 단계에 진화와 돌연변이가 있었다. 


P문서와 상당히 일치하는 듯 보이는 테드 버지의 이 말은 태초를 매력적인 현대적 방법으로 설명할지 모르지만, 이는 창세기 1장을 거의 혹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학적 세계관을 개입시키는 것에 주의가 필요하다.

즉 우리는 현대 과학 사상을 적용하기 전에, 이 본문이 지적하는 다른 단계의 실재를, 가능하다면 그 본문의 언어로 주의 깊게 탐구해야 한다.

이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본문을 우리의 산물로 만들기 전에, 그 본문을 당대의 산물로 바라보면서 역사적 상황에서 그 본문과 주의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우리는 창세기 1장과 세계의 기원에 대한 현대 과학 사상 사이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1장과 주변 문화의 우주론적 · 신화적 사상을 포함하는 고대 과학 사상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는 보다 자신 있게 그 본문의 장르를 표명하기 전에 그것이 역사인지, 과학인지, 은유인지, 우화 혹은 신화인지, 또는 실제로 이런 분류가 의미가 있는 지에 대해 탐구할 필요가 있다.

 

우주론
종종 성서는 3층 우주론, 즉 세 층으로 된 세계를 제시한다고 일컬어진다. 

첫째는 우리가 거주하는 땅, 둘째는 땅 위의 하늘, 셋째는 땅 아래의 지하세계다.

5장에서 우리는 좀 더 자세히 이 우주론적 모델을 논의할 것이고, 그것이 실제로 고대 히브리 사상에서 실재를 문자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졌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학자들이 3층 히브리 우주론으로 묘사한 것이 하나님의 초월, 그리고 확실히 구별되는 존재의 세 영역(살아 있는 것, 하나님, 죽은 것)을 묘사하기 위한 은유적 장치였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어쨌든 P문서는 우주를 3층 모델보다 더 복잡하고 모호하게 묘사한다.

 

세계는 처음에 물이 있는 일종의 황무지였던 듯하다(창 1:2). 

창세기 1장 3~10절의 내용은 하나님이 이미 존재했던 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을 묘사한다(이 본문이 현대 과학적 설명을 예시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무로부터의창조가 아니다). 

이런 우주론적 시각에서 중요한 점은 히브리 사상에서 혼돈의 상징인 초기의 물이 경계에 의해 질서 지어지고, 제한되며, 이 경계가 피조물이 머물 수 있는 대부분의 체계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과 밤낮을 만든 후, 물을 아래위로 구분하는 단단한 표면을 만들었다(창 1:6~7).

표면을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인 raqia는 쫙 펴진 종이 혹은 두들겨 평평해진 금속 덩어리를 의미한다.

주요 성서 역본들은 이것을 '둥근 모양(dorm, NRSV)', '둥근 천장(vault, NJB)', 혹은 '하늘(firmament, KJB)'로 번역했다.

우리는 표면이 이후에 해와 달이 움직이는 곳으로 언급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둥근 모양인지 혹은 반구형 모양인지에 대해 이 본문이 실제 로 말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당분간 '창공(dorm, 궁창)'을 사용할 것이다.

 

아무튼 창세기 1장은 표면이 하늘이라고 말하고, 하늘은 NRSV 역본에서 'Sky'로 번역된다.

표면 아래 있는 물은 한 지점으로 모이고, 마른 땅이 드러나서 (1:9), 식물들은 이 땅에서 번성할 수 있다.

해와 달은 창공에 위치한다(1:14~18).

동물들은 바다에서 떼지어 다니고, 공중에서 날며, 지상에 늘어나기 시작한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1:26~27), 지구를 정복하며, 피조물 위에 '군림'한다(1:28).

 

여기에서 3층으로 추정되는 하늘을 증명하기는 무척 어렵다. 

지표면·수면이 하나의 층으로 고려될 수도 있지만, 창공 아래 '한 곳에 모인 물이 바다 인지, 혹은 이 물이 마른 땅 아래와 주변으로, 심지어 마른 땅 위로 뻗어가는지는 불분명하다.

어떤 경우든 아래에 있는 층인 지하 세계에 대한 언급이 없다. 창공 그 자체가 하나의 층으로 고려될 수도 있지만, 창공은 실제로 물을 나누 고, 해와 달이 이동하기 위한 일종의 고정된 표면으로 사용되는 방수 기능이 있는 경계다. 

상부층(하나님이 이 층 위에 거할 수도 있다)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가장 바깥쪽의 경계인 상층 물을 넘어 또 다른 경계를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 하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문자적으로 읽을 수 없다면, 이때 현대의 3층 우주론 연구가 정확히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물어야 한다(5장 참조).

 

이 모두는 우리가 창조 본문을 면밀히 바라볼 때, 이 본문이 3층 하늘을 거의 묘사하지 않 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물론 3층 하늘 묘사가 성서 어디에서도 입증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론이 아마 다른 어느 부분보다 더 욱 주의 깊고 체계적으로 시작되는 창세기 1장에서는 3층 우주론이 결코 분 명하지 않다는 말이다. 심지어 3층 하늘 묘사는 비교적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창세기 1장의 우주론을 보다 느슨한, 즉 상당히 은유적인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스탠리 재키가 한 예인데, 그는 우리가 지금까지 '창공'이라고 부른 것이 실제로 천막의 표면으로 가장 잘 이해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세계는 피조물과 인류가 거주하는 공간을 에워싸는 경계를 가진 층이라기보다는, 땅과 하늘이 있는 친밀한 고대의 거주지로 여겨진다.

 

우리는 곧 P문서에 대한 은유적 해석을 살펴볼 것이지만, 당분간 P문서 안 에 있는 물리적 요소들을 문자적으로 볼 것이고, 이 요소들이 어떻게 '고대 과학'을 묘사할 수 있는지를 볼 것이다.

중요한 부분은 창공 위에 있는 물과 창공 그 자체인데, 이 둘은 모두 현대 과학적 세계관과 어떤 연관도 없다.

창공 위의 물은 비를 만드는 것으로 보이며, 대홍수를 묘사하는 본문에는 "바로 그 날에 땅속 깊은 곳에서 큰 샘들이 모두 터지고, 하늘에서는 홍수 문들이 열려서" (창 7:11)라고 기록되었다.

이 묘사는 단단한 창공에 비가 내릴 수 있는 '문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땅속 깊은 곳에서 큰 샘들"을 주목해야 한다.

이 것은 창세기 1장 9절에서 말하는 창공 아래 물을 암시하고 이 물은 바다물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땅 아래로 스며들 것이다.

 

분명 이런 생각은 우리의 세계 이해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심지어 창조 론자들도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읽지 않는다는 것이 흥미롭다. 

휘트콤과 모리스는 이 이야기를 '전적인 문자적 진실'로, 신성하게 영감을 받은 오류 없는 창조 기록이라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그들은 창공을 땅 위 공중의 '넓게 트인 곳(expanse)', 즉 당연히 고체가 아닌, 저층 대기와 동일시한다.

 

이처럼 그들은 창공 위의 물이 본래 액체가 아니라, 결국 노아의 홍수 동안 폭우로 땅에 쏟아져 "땅속 깊은 곳의 큰 샘들"과 합쳐질 거대한 수증기였다고 믿는다.

현재의 구름은 사실상 전 지구적 홍수가 될 만한 충분한 물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이 수증기 덩어리가 현재의 구름과 비교해서 매우 컸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지표면이 잠긴 동안 거대한 지질학적 변화가 발생했고, 그래서 마른 땅이 적절한 때에 결국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다 유역은 깊어졌고, 산은 더 높아졌으며, 따라서 한때 수증기 덩어리였던 물은 우리가 아는 바다의 대부분을 구성했다.

 

다시 말해, 휘트콤과 모리스에 따르면, 지구는 홍수 기간 거대한 지질학적 · 기상학적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성서 본문은 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사실 새로운 특징에 대한 유일한 암시는 무지개다(창 9:13).

그러나 창세기 8장 2절에 보면, 땅 아래의 물과 하늘에 있는 고체인 창공은 홍수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듯하다.

 

휘트콤과 모리스는 자신들의 생각이 추측에 기반한다는 것을 종종 인정 하지만, 그들이 성서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그들은 분명 창세기 우주론과 창세기 6~9장의 홍수 이야기를 전통적인 현대 지질학과 기상학의 용어를 차용해서 그들 자신의 과학 유형에 연결시키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도가 성서 본문을 공정하게 다루는지의 여부는 다른 문제다.

 

기원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 랍비들이 창조 이야기에 대한 해석을 상당히 많이 남겼는데, 그들은 일반적으로 창공이 하늘의 물로부터 땅을 지키기 위해 존재했던 매우 단단한 벽이었다고 이해한 듯하다.

예를 들면,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이 플레이아데스(Pleiades) 성단으로부터 별 두 개를 제거했기 때문에 발생했고, 그래서 물은 창공에 만들어진 두 개의 구멍을 통해 쏟아졌으며, 땅을 완전히 에워쌌다고 생각했다.

 

창공과 하늘 물에 대한 우주론적 요소들이 원래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간단하다.

만약 물이 하늘에서 (비의 형태로) 내리고, 또한 땅 속 에서 (샘과 강의 형태로) 샘솟는 것으로 보인다면, 하늘과 땅 속에 물의 저장소 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에서 드러나는 '고대 과학'은 관찰과 가정에 의해 결론에 도달했다.

 

이것은 현대 과학에 사용된 방법론과 동일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상당히 시대에 뒤떨어지긴 하지만, 고대 과학은 관찰과 설명에 기반한 세계의 작용 모델을 제시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우월감이 들려 할 때, 우리는 현재의 우주론이 미래 세대 과학에 의해 점차 시대에 상당히 뒤떨어질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과학의 역사는 우리의 과학적 패러다임에서 절대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아무튼 우주론을 구상하고자 할 때, 우리는 분명 창세기 1장에서 이런 요소들을 다소 문자적으로 읽게 된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렇게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 암시들이 있다.

창세기 1장 6~7절에서 물의 분리는 일종의 과학적 가정이라기보다는 바다를 정복한 신을 말하는 고대 신화적 주제와 잘 어울릴 수 있고(4장 참조), 이것은 아마 잠언 8장 28~29절이 암시하는 것과 유사하다.

 

게다가 고대 히브리인들도 우리처럼 비가 구름으로부터 내리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많은 성서 구절들이 곳곳에 있다(예, 잠 16:15, 사 5:6, 렘 10:13). 

한 흥미로운 구절은 심지어 영구적인 물의 순환(땅에서 물이 증발 하여 구름의 형성되고 이어서 비가 오는)을 암시한다(욥36:27~29). 

만약 성서 저자들이 우리가 창세기 1장에서 도출하는 추정상의 우주론보다 자연 세계에 더욱 정교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분명 창세기 1 장을 너무 문자적으로 읽어, 어떤 경우에도 변치 않는 물리 우주론을 구상하게 되는 범주 오인에 빠지게 된다.

요약하 면, 창세기 1장은 우리가 '과학'이란 용어를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의미에서, 즉 세계의 물리 형태에 대한 물질적 설명을 나타내는 의미에서의 '고대 과학'은 아닐 것이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존재하는데, 우리는 이를 살펴볼 것이다.

 

시간
창세기 1장에서 공간과 물질을 묘사하는 물리 우주론을 보면, 우리는 그때 우리가 앞에서 논하기를 연기했던 시간의 묘사, 특히 모든 것이 창조된 기간인 6'일'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비록 6일 창조론자들은 이것을 문자적인 6일(6×24시간)로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과학적 세계관을 여기에 맞게 변화시키지만, 중도적인 학자들은 6일을 현대 과학에서 드러난 지구의 오랜 나이에 조화시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이런 조화는 우선 19세기 새로운 지질학에 반응하여 시작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 시도되고 있다.

가장 분명한(그리고 부자연스러움을 최소화한) 조화 방법은 '하루'를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 단계의 상징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가 원하는 한, 우리는 아마도 각각의 날들을 지구 역사에 있었던 지질학적 단계의 측면에서 개략적으로 받아들 수 있다.

사실 이것은 보수적인 학자들 에게 비교적 보편적인 방법이다.

 

창세기의 6일을 과학에 연결시키는 데 있어서 제럴드 슈뢰더는 탁월한 시도를 했다. 

그는 시간이 다른 준거 틀에서는 다른 비율로 흐른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적용했다.

만약 하나님이 지구와 다르게 거의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상대적 틀에 거한다 면, 하나님의 준거 틀에서 24시간씩 6일은 지구에서는 수십억 년에 해당될 수 도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은 우리의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다.

슈뢰더는 6일 “전 우주를 포함하는” 준거 틀에서 측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제외하면, 하나님이 왜 하나의 준거 틀에 거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의 상대론적 준거 틀이 전 우주를 포함한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리용어로 분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거의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이 준거틀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신학적으로 분명하지 않다.

안타깝게도 슈뢰더는 이런 질문들을 제기하지 않을뿐더러, 여전히 거의 대답하지 않는다.

 

성서 이야기에 대한 많은 과학적 해석을 어렵게 하는 여러 문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즉 과학적 개념은 성서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적용되지만, 신학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제안을 하게 되면서 더 많 은 문제들이 미해결된 채로 남게 되었다.

 

게다가 창세기 1장에서 문자적 6일을 온전히 지키려는 슈뢰더의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연구한 전부는 6일을 수십억 년의 지구 나이와 연결해서 효과적으로 재정의한 것뿐이다.

6일을 과학에 연결시키려는 다른 시도들처럼, 그는 6일이 지닌 압도적인 상징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6일은 하나님이 일 한 한 주가 정확하게 인간이 일하는 한 주와 같다는 것을 말한다.

6일을 지질학적 기간으로 또는 상대론적 물리학으로 재정의하는 것은, 6일이 지구에서 경험되는 것과 같은 문자적인 인간의 날로 보인다는 점을 놓친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이 반복적으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몇 번 째 날이다”라 는 구절을 사용하기 때문이다(창 1:5, 8, 13, 19, 23, 31). 

이 이야기는 일하는 한 주에 맞게 분명하게 배열되었는데, 여기에서 일곱째 날(즉 안식일)은 하나님과 인간에 의해 높게 평가된 한주의 절정이다.

 

이런 난해함이 대부분의 성서 비평 학자들로 하여금 창조 이야기를 현대 과학과 조화시키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하는 이유다. 

창조 본문에 현대 과 학 사상의 증거가 있지만, 우리가 살펴본 대로 그것이 문자적 물리 우주론을 말하도록 의도되었는지를 전혀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6일의 기간과 하루의 안식은 인간이 일하는 한 주를 생각나게 한다는 사실, 또한 하나님을 창조 이야기에서 이미 함축된 대로 숙련된 건축가로 묘사한다는 사실은, 어떤 경우이든 우리가 우주, 물질, 시간의 체계를 보다 상징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신화
우리가 창세기 1장에서 물리 우주론을 연구하기 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또 다른 것은 동일한 우주론적 요소들이 발견되는 수메르, 바빌론, 이집트와 같은 고대 근동 우주론이다.

사실 세계가 물로부터 시작되어 위의 하늘과 아래의 땅을 형성하기 위해 갈라졌다는 생각은 매우 일반적이다.

하늘에 실체적인 창공이 존재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학자들이 창세기 1장보다 훨씬 더 암시적인 종교적 신화적 본문들로부터 이런 우주론을 재구성했을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학자들은 수월함을 이유로 도처에서 발견되는 3층 우주론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였다.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상황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창세기 1장과 다른 문화의 창조 신화들 사이의 연관성은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의 우주론적 요소들이 '고대 과학' 대신 '신화'로 명명하는 것이 옳을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사실 창세기의 우주론적 요소들은 세계를 반드시 문자적으로만 보지는 않는 바빌론 신화와 우주론을 P문서가 격렬하게 비판하는 부분일 수도 있다.

 

학자들이 '신화'를 '신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정의했던 시대가 있었다.

창세기 1장은 절대적으로 일신론적이고,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신화의 단계 위에 존재한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P문서가 다른 창조 신화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창조의 신과 바다 사이의 대립 주제처럼 비평 학자들에 의해 널리 받아 들여진다(4장 참조).

 

더군다나 '신화'는 의미가 수시로 변하는 용어일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다. 

예를 들면, '신화'에 대한 일부 정의는 세계를 설명 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과학'이라는 용어와 공통 부분이 있다. 

마찬가지로 현대 과학은 실재를 표상하는 상상의 모델을 널리 사용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신화에 관계된 창조적 유추를 활용한다.

 

현대 과학과 신화의 차이는 과학이 실험적 방법에 의존하기 때문에 과학의 창조적 모델과 이야기는 실험에 의해 원칙적으로 수정이 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일부 중요한 과학 사상이 적어도 현재에는 검증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가장 잘 맞는 주제는 다중 우주 이론이다(2장의 “공간, 시간, 물질" 참조).

이 이론은 현대 과학, 고대 과학, 신화 사이의 차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항상 뚜렷 하지는 않다는 것과 현대 과학, 고대 과학, 신화가 각각 실재를 어느 정도 잘 설명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비록 우리가 창세기 1장에 묘사된 물리 요소들로부터 우주론을 구상하고자 시도했지만, 그 물리 요소들이 세계에 대한 포괄적이고 문자적인 묘사로서 이해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어려움의 일부는 우리가 '신화'와 '고대 과학을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 있 을 뿐만 아니라, 고대 히브리 문화에서 신앙에 근거한 것과 질문, 실험, 개정의 여지가 있는 것을 확실히 구별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우주 신전(The cosmic temple)
창세기 1장과 신화의 관련성은 좀 더 논의될 수 있다. 

최근 창세기 1장에 대한 역사 비평적 방법들은 이 본문이 물질 세계에 대한 고대 과학관이라기 보다, 정복자 신의 즉위식을 위해 우주 신전의 건축을 묘사하는 《에누마 엘리 쉬》나 《바알 신화집 과 같은 고대 근동의 신화적 설명과 같이, 하나님이 세계를 우주 신전으로 신성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창세기 1장과 다른 신화들의 차이는 창세기에서는 갈등 부분이 경시되거나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인데, 이는 아마 다른 신화들을 의도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바빌론 창세 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쉬)는 앗수르바니팔(Asshurbanipal, BC 668~630) 왕의 궁중 도서관에서 발견된 일곱 개의 토판 문서로, 바빌론 주신인 마르둑(Marduk)이 최고신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신이 천지를 창조한 후 휴식을 취했다는 점과 창조의 순서가 빛에서 시작해서 인간으로 끝나는 점 등이 창세기와의 유사성으로 지적된다.

 

우가릿(Ugaritic) 지역에서 1920년대에 발견된, 가나안 신 바알과 사랑의 여신 아낫에 대한 이야기 토판들을 일컬어 <바알 신화집>이라 부른다. 이 신화집의 주제는 우가릿 만신전의 변두리에 처해 있던 바알(비, 폭풍, 풍요의 신) 이 혼돈의 세력들인 얌(Yam, 바다), 나하르(Nahar, 강), 모트(Mot, 죽음) 등을 패배시킴으로써 신들의 왕으로 부상하는 것이다.

 

존 월턴은 창세기 1장이 태초에 대한 물리적(material) 관점이 아닌 기능적(functional) 관점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무로부터 물질을 만드는 분으로 묘사되기보다는 이미 거기에 존재했던 것을 질서 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분으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창세기 1장의 6일을 문자적으로 24시간씩 6일로 해석해도 무방하게 된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보통 일하는 한 주 동안 (이미 존재한) 세계에 기능을 부여해서, 세계는 우주 신전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월턴은 고대 근동에서 신전이 신이 지구에 있을 때 휴식하는 공간으로서, 세계와 비슷한 이미지로 만들어진 세계의 축소판으로 종종 여겨졌다는 것을 지적한다.

따라서 창세기 1 장에서 일곱째 날은 하나님의 신성한 휴식의 날로서 중요하게 되었다.

 

마거릿 바커도 월턴과 유사한 주장을 한다.

바커에 의하면, 창세기 1장은 고대 과학이라기보다 예루살렘 신전의 실재에 의해 영감을 받은 세계에 대한 거룩한 비전이다.

월턴과 같이 바커는 예루살렘 신전(왕상 6~7)과 사막에서 모세의 장막(출 25~27)의 설계가 창조의 패턴을 반영한 것 이라고 본다.

같은 방식으로, 그곳에서의 예배는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의 관계를 표현하고, 특히 피조물과 인류 사회의 행복을 표현하도록 구성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피조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할 뿐만 아 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향한 경외감과 책임감을 회복 할 필요성을 분명하게 느끼게 한다.

 

또한 윌리엄 브라운은 창세기 1장을 예루살렘 신전의 건축학적 구조와 유사하게 본다.

6일은 예루살렘 신전의 거룩한 공간을 잘 보여주는 도식 배열에 들어맞는다.

비록 신전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묘사하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인간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선 포되었다.

일곱째 날은 신전의 중심에서 최고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가장 거룩한 날이다. 

 

이 세 연구는 모두 창세기 1장을 물리적 기원에 대한 설명으로 보는 보편적 이해를 거부하고, 이 본문이 사회 질서와 세계의 관계 형성을 묘사한다고 보며 상징적으로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역사 비평적 접근에 근거를 두고 있 으며, 원저자가 의도했을지 모르는 무엇인가를 제안하고자 한다.

또한 이 설명은 창세기 1장에 대한 사회적 · 생태적 관심을 강조함으로써 환경 문제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잘 맞기 때문에, 우리 시대를 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실재의 층(Layers of reality)
우주 신전 연구는 가장 현대적인 사고방식이지만, 창조 본문에 물리적 기 원보다 더 많은 잠재적 의미의 층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앞의 "창세기 1장 과 현대 과학" 참조). 

현대 과학은 제한된 해석학(물리적 실재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 었는지에 한정)을 고무시켰지만, 우리는 창세기 1장을 포괄적인 시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창세기 1장이 고대 신화적·종교적 주제뿐만 아니라 고대 과학과 연관되어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본문이 언뜻 보기에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 1장을 창조의 '은유(혹은 심지어 '시)'로서 분류하는 것은 순전히 혼동을 야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본문이 무엇에 대한 은유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복잡성은 가려지고, 독자들은 단지 그 본문의 다양한 의미 중에서 빙산의 일각만 접하게 된다.

창세기 1장이 단순히 '우주론', 심지어 고대 우주론으로 명명된다면, 이것도 빙산의 일각만 접하는 것이다.

보다 세심한 고려를 통해, 창세기 1장을 태초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 창조, 인류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풍부한 설명으로 간주해야 한다.

 

우리의 논의 대부분은 창세기 1장의 장르와, 어떻게 이 본문을 고대와 현대의 과학관과 연결시킬 수 있을지에 관계된다.

우리는 장르에 대한 대답이 얼마나 다층적이 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장르는 아마도 사용하기에 유익한 용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연히 정확한 범주를 생각해내야만, 그 본문이 적절하게 범주화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이 그 본문을 오독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즉 창세기 1장은 범주화되기 어렵다. 

 

그러나 꼭 설명을 해야 한다면, 다른 설명에 앞서 창세기 1장이 신학적으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묘사하는 본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언급했던 많은 주제들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데 이것이 결코 완전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의 포괄적인 연구에 있어서 이 본문이 실재와 의미의 여러 단계들에 잠재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과, 이 본문을 읽는 방법에 대한 유일하고 반박의 여지가 없는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을 먼저 인정할 필요가 있다.

 

세계를 '매우 좋게' 만들고 질서 지은 초월적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본성은 모든 필요조건들을 훌륭히 만족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이것은 가치가 창조 이야기의 한 중요한 면임을 말한다. 물리적 기원에 대한 냉정한(과학적인) 설명과 달리,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미적 즐거움의 행위로, 그리고 피조물을 소중히 여겨야 할 도덕적 완벽과 근본적 아름다움을 지닌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우주론적·물리적 시작은 특히 '고대 과학'의 측면에 서 출발하는데, 이것은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다.
ᆞ다른 고대 근동 문화에 있는 신화적 요소들과 결합하고 상호작용한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설정한다.
하나님의 우주 신전으로서 공간을 신성화한다.

안식일의 제정을 통해 시간을 신성화한다.
ᆞ우주와 생물을 구성하는 기능과 관계의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류가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인류는 피조물을 향한 특별한 책임을 갖는다.

 

분명 이 주제들은 현대 과학과 거의 관계가 없고, 창세기 1장을 과학적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창세기 1장은 실로 광범위하다.

이 주제들은 성서 첫 장의 깊이를 인식하게 하고, 계속해서 하나님과 창조를 연구하도록 자극하는 첫걸음일 뿐이다.

 

 

두 번째 창세기 창조 설명 : 창세기 2:4b~3:24 (J문서)

'야훼' 문서
'야훼' 문서의 창조 설명은 벨하우젠에 의해 두 창조 설명 중 상당히 이른 것으로 여겨졌다(아마 기원전 10세기). 

우리는 야훼 문서를 편의상 J문서, 혹은 더 이른 문서로 언급할 것인데, 이것이 어떤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한 문서설을 따른다는 말은 아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J문서가 하나님의 이름[YHWH Elohim]을 문서에서 사용된 것[Elohim]과 다르게 사용하고, 하늘과 땅의 창 조를 묘사하지 않고 단지 지구상의 생물 창조만 묘사한다는 것이다.

 

형식 또한 상당히 다르다. J문서는 P문서에 있는 장엄한 반복 어구가 없고, 대신 모세 오경과 '야훼' 문서의 많은 다른 이야기와 어울리는 산문 서사시 형식을 취한다.

창조가 질서 있고 복잡하게 계획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진행된다는 인식이 J문서에는 덜 부각된다.

대신에 J문서에서 두 중요한 단계(동물의 창조와 여자의 창조)가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 2:18)는 사실을 해결하자고 행해진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즉흥적인 요소가 있다.

 

남자의 결함이 해결되고 창조가 완성된 것은 전적으로 여자의 창조로 인해서다.

하나님이 창조를 마친 후 "매우 좋았다" (창 1:31 의 P문서처럼)고 선포하는 대신,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를 평가하게 되고, 아담은 하와를 완벽한 찬사로 평가한다.

"내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 2:23).

 

사실 창조의 '좋음'이라는 주제가 문서와 J문서에서 나타나는 방식의 차이는 우리가 이 장을 시작하며 제기했던 요점, 즉 P문서와 J문서가 뚜렷이 구별되지만 어떤 점에서는 상호보완적인 창조 설명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 두 창조 설명 사이의 관계는 복잡하다.

이 설명들이 각각 독립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지나치고, 반대로 이것들을 하나로 보는 것도 상당히 불충분 하다.

 

J문서는 특히 하나님을 인간처럼 묘사한다고 일컬어진다. 

만약 P문서가 하나님을 숙련된 건축가(비록 우주적 차원이지만)의 역할에 비유한다면, J문서는 하나님을 동산을 일구는 일(창2:8)과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에 "(3:8) 동산을 거니는 일과 같은, 보다 일상적 인간의 일들을 하는 분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만약 문서가 다소 우주론적 규모로 서술한다면, J문서는 보다 인류학적 서술을 하는데, 특히 아담, 지리적 환경, 아담과 다른 피조물의 관계, 그리고 아담과 이후에 창조된 하와의 관계에 집중한다.

여기에서 J문서는 생물의 창조를 P문서와 상당히 다른 순서로 묘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아담은 지 구상에서 어떤 다른 생명체보다 먼저 창조되었고, 이어서 식물, 동물, 마침내 하와가 창조되었다.

 

하나님과 인류가 문서와 J문서 모두에서 중심 역할을 한다는 것은, 비록 당대의 과학적 사고의 흔적을 포함하긴 하지만, 두 본문 모두 우선적으로 신학적 목적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두 본문은 모두 인간이 하나님 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P문서가 한 분 하나님(엄격한 일신론)의 전적인 초월성에 대해 신학적으로 숙고하고, 안식일 준수와 같은 다른 종교적·문화적 주제들을 설명하는 반면, J문서는 죄, 죽음, 고난의 원인을 설명한다.

 

사실 여기에서 J문서 이야기가 창세기 3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는 태초의 긴 이야기(창411)에 문서보다 더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J문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그리고 갈등) 속에서 존재하는 인류의 초 기 상황을 묘사한다. 

만약 인류가 이 중 하나의 관계에서 실패하면, 다른 관계 에서도 실패하게 된다. 

 

J문서는 P문서와 형태와 내용면에서 매우 다를지 모르지만, 문학 형식은 창세기 1장에서와 같이 파악 가능하다.

예를 들면, 베스터만은 J문서 이야기를 아치형 구조로 시각화했는데, 

이 이야기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창 2:16~17)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첫째 명령으로 시작해서, 아담과 하와가 명령에 불복종하는 부분에서 정점에 도달하고, 이어 발견, 재판, 처벌로 결론 난다.

하나님이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는 마지막 부분은 대칭 구조를 형성하며, 태초의 시작에 대응된다. 


만약 문서가 창조론자들과 좀 더 진보적인 해석자들 사이의 이념적인 전쟁터라면, J문서는 심지어 더 심하다.

수백 년간 기독교에서는 J문서를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때문에 인간 상태가 근본적으로 강등당한 '타락'의 측면에서 해석했다.

타락은 종종 세상 죽음의 근원으로 일컬어졌다.

뿐만 아니라 타락은 부패, 쇠퇴, 고통, 포식, 질병, 자연 재해,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 세계의 현재 상태를 원래의 '좋은' 창조와는 거리가 멀게 하는 모든 종류의 '타락'과 같은 '자연악'의 근원으로 일컬어졌다.

 

실제로 창조가 반복적으로 '좋았다'고 말해지는 P문서 이후에 바로 J문서를 배열한 것은 J 문서를 창조의 '좋음'에 대한 반전, 그리고 '타락'의 시작으로서 읽히도록 자극 한다는 점에서 중요함에 틀림없다.

그러나 J문서(혹은 성서의 나머지 부분)가 실제로 그것을 의도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J문서를 둘러싼 많은 논쟁들, 그리고 그 본문과 현대 과학과의 관계가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제기된다 는 것을 7장에서 살펴볼 것이다.

 

J문서와 과학
우리는 P문서와 현대 과학의 태초 설명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는 것 에 주목했지만, J문서는 완벽히 현대 과학, 특히 생물학에 위배된다. 

이것은 J 문서가 창조를 한 명의 성숙한 남자(성인)에게서 시작하여, 식물, 동물, 마침내 여자(또한 성인)의 순으로 묘사하는 것을 볼 때 명백해진다. 

게다가 어떻게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 하나에서 생길 수 있는지(창2.21~22), 어떻게 나무가 인류에게 영원한 저주를 초래하는 과일을 생산할 수 있는지(2:17), 그리고 어떻게 뱀이 말을 할 수 있는지(3:1)를 설명해야 하는 상당이 많은 어려움이 있다.

 

종종 이 이야기를 과학적으로 읽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남자가 “땅 의 흙"(창 2:7)으로 창조된 것이 좋은 예인데, 히브리 단어인 '남자(adam)'와 '땅 (adamah)'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아마 토기장이가 점토를 빚듯이 아담의 몸을 만들고, 코에 생명을 불어넣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암시된다. 

'흙먼지'는 생물학적으로 단백질과 아미노산 같은 중요한 분자들이 지구 역사 초기에 점토 입자의 표면에서 자연스럽게 합성되어 생명의 원료를 형성했을 수도 있다는 현대 과학 사상에 연결된다. 

 

이것이 비록 J문서 저자가 이해한 방식은 아니겠지만, 생각해볼 수 있는 재미있는 유사성이다.

J문서의 너무나 많은 다른 부분들이 일반 과학으로 이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왜 가장 열정적인 근본주의자들만이 이 부분을 과학적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읽고자 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J문서의 한 특정한 면을 역사적 진실로서, 즉 역사적 첫 인간 부부의 존재를 주장하려는 수많은 노력이 있었다. 

이것을 둘러싼 신학적이고 과학적인 주제들은 대단히 복잡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7장 전체에서 다룰 것이다.

 

장르, 역사, 신화
창세기 1장과 마찬가지로 J문서를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의 상당수는 어떻게 J문서의 장르를 정의하느냐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창세기 1장처럼 J문서는 고대의 과학적이고 신화적인 사고를 포함한다.

아마도 P문서와 J문서에서 함께 드러나는 '고대 과학'에 기여한 가장 분명한 사상은 생물이 땅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이다(창 1:11~12, 1:24, 2:9, 2:19).

 

이것은 J문서에서 땅(점토?)의 먼지로 만들어진 아담의 창조 설명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또한 다른 고대 근동 신화들, 특히 첫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기록된 일부 이집트와 바빌론 태초 신화들과 보다 두드러진 유사성을 보인다.

또한 J문서에서 다른 고대 근동 신화의 주제들도 발견된다.

예를 들면, 신들이 사는 목이 우거진 정원의 존재, 또는 불멸하게하는 음식과 인간이 그것을 먹도록 속이는 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비록 J문서가 수많은 고대 근동 신화들과 비슷한 특징을 가졌지만, J문서도 P문서처럼 그것들을 직접 차용한 증거가 없고, 다소 미묘한 영향을 받았다.

일부 학자들은 P문서와 마찬가지로 J문서를 주변 문화의 보편적인 일부 신화들에 도전하기 위해 의도를 갖고 신학적으로 접근한 '반신화'로 간주한다.47

 

창세기 2~3장을 다른 신화들과 비교하는 것은 이 본문이 일종의 역사적 이야기를 제공하려 한다는 사실을 감추게 된다. 

모세 오경의 맥락에서(그리고 심지어 성서 전체의 맥락에서), 창세기 2~3장은 태초를 명확하게 기록하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좀 더 특별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보편적이고 태고적인 언어 로 분위기를 조성한다.

창세기 대부분은 족장인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 이야기이고, 아담은 족보상으로 노아를 거쳐 아브라함으로 이어진다(창 5, 11). 

이런 이유로 학자들은 거의 J문서를 '역사적으로(마치 J문서가 관찰되고, 보고되며, 판정된 일종의 역사적 실제 사건인 것처럼) 언급하기를 꺼림에도 불구하고, J문서는 보통 '원사학적으로',

 

또는 '태초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는 듯하다.

J문서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반항과 처벌, 땅에 대한 약속, 공동체와 가족의 중요성에 대한 주제들이 창세기 2~3장에 처음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베스터만은 창세기 2~3장이 모세 오경에서 J문서 전체의 '서곡'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2~3장은 이어지는 J문서의 기록들과 쉽게 분리되지 않는데, 창조 이야기에 이어지는 J문서 기록들 대부분은 형태적 측면에서 역사 기술로서 거의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학자들은 또한 창세기 2~3장을 '전형적인(paradigmatic)', '원인론적인 (aetiological)' 같은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말한다.50 전형적인 이야기는 역사적 서술이라기보다 우화나 비유 같은 것이다.

반면 원인론은 오늘날에 영향을 주는 과거의 추정 사건을 이야기 식으로 제시한다.

비록 이론상 전형적인 본문과 원인론적인 본문을 구별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창세기 2~3장이 어디에 속하는지, 혹은 아마 둘 다에 해당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창세기 2~3장에 대한 많은 현대적 연구 방법은 이런 미묘한 것들을 고려 하지 않고, 창세기 1장처럼 2~3장도 역사적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은유적이라고 가정해버리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연구 방법 기저에는 현대 신학적 전제 들이 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처럼, 2~3장도 더욱 복잡하고 다층적이어서 쉽게 유형화되거나 묘사되지 않는다.

 

게다가 창세기 2~3장은 이어지는 자료들, 즉 역사적 기록으로 보이는 12~50장의 자료와도 잘 어울린다.

이것이 창세기 2~3장을 과도하게 한 장르에 속하는 독립적 문학으로 보는 것이 현명하지 않은 이유다.

결국 이 본문을 '타락'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았던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한 장르로 규정해온 이런 시각이 서양 기독교에서 지배적이었다. 

 

더 넓은 맥락에서 보면, 창세기 2~3장은 인류가 하나님에 의해 부여된 경계를 어기는 여러 방식들과,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과 복으로 응답하는지에 대한 긴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서 봐야 한다(7장 참조).

창세기 1장과 같이, 창세기 2~3장도 하나님에 대한 묘사다.

 

J문서와 하나님
만약 문서가 하나님을 복잡한 계획을 단계적으로 따르는 숙련된 건축가나 설계자로 묘사한다면, J문서는 하나님을 특히 '의인화'하여 묘사하긴 하지만, P문서와 완벽히 다르게 묘사한다.

창조는 여러 단계들을 거쳐 진행되지만, 이 단계들이 주의 깊게 계획되었거나 고려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적어도 중요한 두 단계에서(동물의 창조와 하와의 창조), 하나님은 이전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창조하는 듯하다.

 

하나님은 아담이 동반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고 동물을 창조한다(창 2:18~19).

동물이 동반자 임무를 잘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하나님은 하와를 만들었고 (2:20~22), 이때 창조 이야기는 완성된다.

각각의 경우, 먼저 창조된 것을 적응 시키기 위해 새로운 창조가 이어진다.

 

P문서와 J문서 모두 하나님이 첫 인류에게 임무를 부여하지만, 그 내용은 매우 다르다. 

P문서의 하나님은 인류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 고, 땅을 다스려라”(창 1:28) 라고 말하고, 인류는 땅에 있는 어떤 열매도 먹어도 된다(1:29). 

 

반면 J문서의 하나님은 아담이 땅을 다니며, 땅에 충만하도록 격려하는 대신, 동산을 돌보게 하기 위해 그를 동산에 둔다.

이것은 아마 아담을 감금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돌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왜냐하면 동산 외의 땅은 상대적으로 황무지였기 때문이다.

사실 J문서의 하나님은 아담의 적당한 동반자를 창조하기 위해 약간의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이 아담의 음식뿐만 아니라 복지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J문서의 하나님은 아담에게 오직 한 가지를 명령한다.

즉 아담이 동산의 모든 열매를 먹어도 좋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 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창 2:16~17).

물론 선악과의 본성은 베일에 쌓여 있고, 선악과는 다른 신화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창세기 2~3장 외의 성서 어느 부분과도 유사성이 없어 보인다.

 

또한 '생명 나무'(2:9)가 존재하는데,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자들은 불멸하는 듯하다(3:22~24).

비록 생명 나무가 창조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지만, 이 나무는 성서의 다른 곳에서 등장하는 듯하고(예, 잠 3:18, 계 22:2), 바빌론 신화들과도 유사하다.

이 두 나무가 무엇을 말하는지, “선과 악에 대한 지 식"이 무엇인지, 왜 이 지식이 생기게 되는지가 상당히 불확실하지만, 이 나무들이 서로 대응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한 나무는 생명을, 다른 나무는 죽음을 가져온다.

이 나무들을 둘러싼 많은 질문들이 있지만, 이 질문들이 이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다.

 

예를 들면, 바르는 J문서에서 하나님의 예측이 얼마나 부정확한지 설명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실제로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대가로 상당히 관대한 처벌(동산에서의 추방과 수고와 고통의 증가)을 받는다.

하나님의 예측은 부정확한 반면 뱀의 예측은 정확하다(3:4~5).

바르는 이렇게 설명한다.

"만약 누군가가 실제 사건에 근거해 저울로 발언을 평가한다면, 하나님의 발언의 무게는 그다지 높지 않고, 뱀의 발언의 무게는 최대한으로 높다. "

 

하나님의 본성을 둘러싼 이런 모순은]문서에서 하나님을 의인화하기 위 한 요소로 보일 수 있다. 

이런 모순은 이어지는 모세 오경에도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은 상당히 인간처럼 태도를 바꾸고, 불확실하며, 부정확한 듯 보인다. 

심판이 임박한 경우에 하나님은 이전의 결정에 대해 후회하기도 하고(창 6:6), 변경하기도 하며(창 18:22~33), 또는 심정의 변화를 보이기도 한다(출 32:11~14).

이런 변화는 무작위로 일어나거나 변덕스럽지 않고, 항상 인간 상황에 대한 합리적인 반응이며, 항상 예상되는 것보다 더 적절하고 더 자비롭다.

 

J문서의 요점은 하나님이 정적이거나 획일적이지 않고, 역동적이며 인격적이 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대화 상대자이거나, 적어도 호의적인 응답을 위해 기 도하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분이다.
물론 J문서는 P문서보다 하나님을 상당히 많이 정교하고 자세하게 묘사 한다. 

J문서는 인간 조건의 상당히 중요한 부분인 도덕적 인과관계를 소개한다.

안식일의 원인이 되는 P문서처럼 J문서는 당대의 인간에게 경계를 설정하는 듯하지는 않지만, 도덕적 심판과 이로 인한 결과의 모호성, 불순종으로 기우는 인간의 경향성, 그리고 이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낸다.

 

P문서는 모든 창조가 "매우 좋았다"(창 1:31)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마무리 되지만, J문서는 반대로 끝난다.

즉 인류에게서 복은 달아나고, 그들은 정원에서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추방당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이 우리가 알듯이 어렵고, 고통스러우며, 죽음에 이를 것이라고 선언한다(3:15~19).

 

이것은 도덕적으로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문제들을 양산하는데, 이것이 바로 창세기 12 장에서 다시 한 선택된 가족(아브라함 가족)에 초점을 맞추기 전에 창세기 4~11 장이 지구상에서 인류가 증가하는 것을 다루면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개념은 불순종에 대한 처벌이 뒤따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돕는 관계에 근거하는데, 이것은 모세 오경과 성서 곳곳에서 발전한 언약신학의 바탕이 된다.

P문서가 비교적 독립적인 반면, J문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결론
창세기 1장(문서)의 창조 설명과 과학적으로 거의 명확하지 않은 창세기 2~3장(문서)의 설명 사이의 관계는 복잡하다.

두 본문을 서로 조화시키려는 시도, 혹은 두 본문을 현대 과학 설명에 조화시키려는 시도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일단 우리가 다른 역사적 · 신학적 상황을 어느 정도 고려해서 이 두 본문의 특징을 보면, 우리는 그 본문들이 상당히 심오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두 창조 설명은 분명 성서에서 거의 반복되지 않지만, 이 부분이 모세오경의 처음, 즉 성서의 처음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이 본문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J문서의 설명은 창세기 3장 이후에 성서에서 거의 반복되지는 않는 듯하지만, 이 문서는 성서에서 계속 반복되는 죄, 순종, 심판과 같은 수많은 관심사와 주제들에 대한 상황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이것은 왜 "어떤 적절 한 신학도 이 본문과 씨름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다.

 

창조 본문은 우리 시대에 논란을 야기할 수 있지만, 성서 세계관의 기본 특징을 말하기 때문에 성서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창조 본문의 장르에 대해 상당히 자세하게 논의했지만, 어떤 확실한 결론에 이 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 본문이 전체적 세계관과 연결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광범위해서 어느 하나로 규정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이 부 분을 간과하고 우리 자신의 세계관을 창조 본문에 경솔하게 부여한다면, 우리는 우주론, (고대) 과학, 인간 조건, 인간과 창조주의 관계,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의 관계와 같은 중요한 세계관적 주제들에 대한 창조 본문의 요지를 곧 오해하게 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인식 없이는 우리가 창조 본문에 대해 거 의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번 장에서 우리는 방대한 연구 분야를 매우 선택적이고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런 노력은 창세기 창조 이야기를 과학에 관련해서 해석하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결코 성서 창조 주제의 마지막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는 다음 장에서 관련된 추가 자료를 다룰 것이다.

 

이 추가 자료가 거의 과학자들에 의해 고려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번 장보다 더 간결하게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간결하게 살펴본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창세기 설명은 현대 과학과의 단순한 비교가 제안 하는 것보다 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창조 주제의 다른 면들을 살펴볼 때 더욱 다양해진다.


출처 : 성서의 본성(마크 해리스 지음, 장재호 옮김, 도서출판 두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