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창조의 본성(本性)

2장 : 현대 과학에서의 창조

w.j.lee 2024. 7. 2. 13:01

 

 

2장 : 현대 과학에서의 창조

 

과학적 구조

 

공간, 시간, 물질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은 몸에 깊이 배어 있어서, 우리는 거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우리의 일상 대화 속에 어떤 단어도 '시간'보다 더 친숙하거나 더 쉽게 이해되는 단어는 없다고 지적한 것은 유명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스스로에게 '시간'이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곧 당황하게 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만약 아무도 제게 묻지 않는다면, 저는 시간이 무엇인지 충분히 잘 압니다(《고백록》 11권 14장).”

그리고 그는 시간을 정의하려 할 때, 자신과 관계된 사건의 측면에서 정의한다.

"저는 다음의 것을 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았다면, 과거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다면, 현재는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이 중요한 이유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마도 뉴턴에 의해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개념인 보편적 실체로서의 절대적 시간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뉴턴에게 있어서 시간과 공간은 어떤 좁은 준거 틀로부터 독립된 절대적 개념이었다. 

시간과 공간은 보편적이었고, 이러한 점에서 뉴턴은 운동을 변치 않는 준거 틀에 관계된 물체의 움직임, 즉 시간과 공간의 움직임으로 정의할 수 있었다.

시간과 공간은 모든 사건들과 생명체가 존재하고, 움직이며, 작용하는 것이 드러날 수 있는 변치 않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뉴턴은 시간과 공간을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독립체인 '시공간 (spacetime)'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개념은 후대 아인슈타인에게서 나오 는데,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vity)은 시간과 공간의 물리학에 대변혁을 일으켰다.

 

그러나 뉴턴에게 있어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대단히 중요한 보편적 준거 틀은 거의 신의 속성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뉴턴 당대에 살았던 버클리 주교는 뉴턴이 공간을 변함없고, 무한하며, 영원하다고 생각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버클리는 뉴턴에게 질문했다.

"그럼 공간이 신이 되는 것을 무엇이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신이 낮아져 공간이 되든지, 공간이 높아져 신이 된다."

 

뉴턴은 이에 대해 공간이 소위 말하는 그런 사물이 아니며, 혼자 존재하지도 않고, 신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발산하는 신의 결과물이라고 대답했다.

존재하는 것은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신이 세계 어디에서나 항상 존재한다고 말해진다면, 영원한 공간이 세계 어디에나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뉴턴의 사고에서 시간과 공간이 보편적으로 언급되는 그런 사물(things) - 창조된 사물이거나 사물과 함께 존 재하는 신성 - 이라기보다는 효과, 즉 신 존재의 유출이라는 것을 의미 한다.

여기에 뉴턴의 신 이해가 중요하게 함축되어 있는데, 뉴턴에게 신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신의 존재로 인해 모든 존재와 운동이 가능하다.

 

실제로 뉴턴은 자신의 유명한 중력 법칙을 신성한 힘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즉 사물들이 자신들의 타고난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의지에 의해서 서로에게 끌린다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뉴턴은 시간과 공간이 직선으로 되어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시간과 공간은 꾸준하고, 계속적이며, 규칙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항상 그렇게 발전할 것이며, 도약 · 뒤쳐짐 · 순환 · 부분적 불규칙성은 없다는 것이다.

이 세계관에는 불변하고 보편적인 '자연법칙'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반면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완전히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새로운 절대적 기준이 바로 빛의 속도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측정은 측정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결코 측정이 보편적으로 비슷한 결과를 가 져오지도 않는다.

게다가 시간과 공간은 '시공간'이라 불리는 4차원의 독립체에서 서로 관계를 맺지만, 물질 그 자체와도 관계를 맺는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은 거의 독립된 준거 틀이 될 수 없다.

또한 시간과 공간은 직선으로 되어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물질은 시공간을 굽게 만들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물체의 궤도가 곡선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이 중력을 자신의 일반상대성 이론에 통합시킨 이유다.

중력은 더 이상 별개의 힘이 아니고, 시공간에서 물질과 에너지가 확산됨에 따라 시공간이 구부러지면서 발생한다.

더욱이 시공간은 구부러질 뿐만 아니라, 특정한 조건하에서 특이하게 되는데,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빅뱅 같은 초기 특이성이 그 예다.

시공간은 분명 더 이상 뉴턴 때와는 달리 불변하거나 절대적이지 않다.

 

상대성 이론은 단지 시간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상식'에 많은 도전을 제기한다. 

특히 지구에서 인간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지금(now)'이라는 중요한 개념은 세계를 설명하는 확실한 과학적 속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찰자의 준거 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우리의 현재 경험은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환상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 에서, '블록 타임'이란 개념이 보다 유용한 시각을 제공하는데, 이것 은 태초부터 종말까지의 모든 시간이 '한번에'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만약 과거, 현재, 미래를 구별하는 우리와 같은 사고방식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단일한 독립체로 존재하는 4차원의 시공간 우주가 되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시간이 흐른다(Howing time)'라는 개념, 즉 우리가 열린 미래로 이동 할 때 과거가 직선적으로 계속해서 늘어난다는 개념은 우리 인간 의식의 주관적인 착각이다.

 

이 모두는 신학적으로 타당하다. 우주에서 신 경험은 모두 동시에 인지되는, 본질적으로 '통합(block)' 개념이라고 논의되었다.

이러한 접근은 신과 시간에 대한 논의에서 발생하는 역설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5장 참조).

 

상대주의적 물리학뿐만 아니라 20세기 초, 실재의 보편적 개념을 뒤흔들 었던 또 다른 새로운 과학적 패러다임이 발전했는데, 이것이 바로 양자 역학이다.

세계에 대한 양자(量子) 관점은 지금까지의 실험에 근거해, 전자(電子)와 광자(光子) 같은 원자와 아원자(亞原子) 단계에 있는 기본적인 물리적 독립체들이 아주 정확히 파동 또는 입자로 묘사될 수 있다는 인식 에서 출발했다.

 

예를 들면, 좁은 항구 어귀를 통과하는 파도가 퍼져서 전 항구에 분산될 때처럼, 전자는 매우 넓게 분산될 수 있다.

그러나 전자는 또한 당구공처럼 서로 튕기며 흩어질 수도 있다.

이것은 모두 관찰자의 측정 방법에 따라 결정된다.

만약 관찰자가 전자를 파동으로 간주하고 보면, 파동의 속성들을 볼 것이지만, 관찰자가 전자를 입자로 간주하고 보면, 입자의 속성들을 볼 것이다.

 

그러나 뉴턴과 그의 계승자들의 고전 물리학에 따르면, 파동과 입자는 서로 배타적이어야 한다.

물질이 가장 기초적 단계에서 관행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인식은 세계에 대한 양자 관점의 발전을 이끌었다. 

이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 만약 우리가 양자 물체(전자 같은)의 특정한 속성을 더 정확히 측정하고자 한다면, 우 리는 다른 속성들이 더 불확실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 로 간단히 요 약된다.

 

결국 전자는 기존의 용어로 정확하게 묘사될 수 없다.

이것은 물리학자들로 하여금 때때로 '퍼지'에 대해, 그리고 양자 세계의 부정확한 본성에 대해 논의하게 했다.

 

퍼지 : 1964년에 미국 버클리 대학의 수학자 자데 교수가 제안한 이론이다. 인간의 사고, 판단, 측 정 등에 본질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애매모호함을 수학적으로 다룬다.

 

양자 세계가 정확히 잘 묘사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 하면, 이런 용어 사용이 정확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양자 세계를 일상 세계에 대한 간단한 고전 물리학 개념(예, 파동이냐 입자냐, 둘 다일 수 는 없다)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이 문제는 실재의 본성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실재를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에 대해 많은 철학적 토론과 미해결된 질문들을 야기했다.

 

심지어 양자 역학이 시작된 이래 한 세 기가 지난 지금도 전자와 같은 양자 독립체들을 생각해볼 때, 여전히 우리가 그런 사물을 '객관적 실재'로 말할 수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대답 중 하나인 '코펜하겐 해석'은 양자 단계에서 관찰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관찰자의 역할을 강조했고, 심지어 우리가 소위 말하는 그런 독립된 실재를 말하지도 못하게 했다.

 

원자 사건에 대한 실험에서, 우리는 일상생활의 현상만큼이나 실제적인 현상인 사물과 사실에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원자와 기본 입자 자체는 실제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사물 혹은 사실의 세계를 형성하기보다는 잠재성 또는 가능성의 세계를 형성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양자 세계 관점에서 관찰과 측정을 하고, 측정 자료를 해석하지만, 우리가 소위 말하는 그런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물(things)'을 갖고 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코펜하겐 해석 외에 양자 역학에 대한 다른 해석들이 있다. 

아마 가장 잘 알려진 해석은 다중 세계 해석이다.

다중 세계 해석은 양자 실재의 기저가 되는 것을 규정하기 어렵다거나 심지어 소위 말하는 그런 정확한 객관적 '실재'도 아니라고 주장하기보다는 많은 세계의 존재를 상정하며 그 난해한 문제를 풀고자 하는데, 이는 평행 우주 이론과 다소 유사하다.

양자 사건이 발생할 때, 전자는 파동처럼 움직이는 것으로 관찰되는데, 이때 전자가 입자처럼 움직이는 또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

양자 역학을 이렇게 해석하면, 각 양자가 드러날 때, 우주의 수는 빠르게 증가하게 된다.

이런 생각에 관련된 지나친 추측을 언급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이 양자 세계를 이해하려 할 때, 기꺼이 이런 생각을 지지하는 것은 좀 이상하다.

만약 코펜하겐 해석이 실재, 인과 관계, 결정론과 같은 기본적 과학 개념에 의심을 제기한다면,

비록 다중 우주 형태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것들을 소개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다중 세계 해석과 이와 비슷한 이론들은 그 기본적 과학 개념들을 지 지할 수 있다.

정말로 이 다중 세계 해석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현대 우주론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해석적 기능을 수행한다.

여기에서 다른 우주들이 우리 우주 옆에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되는데, 이것은 '다중 우주'로 알려진 장대 한 앙상블이다.

 

이런 생각이 신학에서처럼 모두 사색적이며 실험적으로 증명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신학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심지어 어떻게 이것들이 소위 말하는 그런 과학적 문제로 간주될 수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이것들은 상당한 믿음을 요구한다.

현대 물리학과 신학은 우리가 인지하는 것보다 더 많은 공통점이 있다.

 

다중 우주 사상은 또한 소위 '인류 원리'가 제기한 도전에 대한 주요 대답 중 하나였다.

우주의 진화를 생각할 때, 다음의 결론에 이른다.

만약 빛의 속도나 전자의 전하 같은 근본적 물리 상수가 약간이라도 달랐다면, 우리가 존재하는 지구 같은 행성(비옥하고 살기에 적합한)이 있는 우주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리 상수는 우리가 존재하기에 딱 맞게 '잘 조절된 듯 보인다.

유신론자들에게 있어서 '인류 원리'는 물리 상수를 조절해서 지금 같은 행성과 생명체가 정확히 만들어질 수 있도록 조율 한 창조주의 존재를 암시한다.

 

이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신적 창조주가 개입하지 않는 다른 설명을 발견해야 한다.

주요한 대체 설명은 물리 상수가 다른 많은 우주들이 있고, 우리가 단지 생명체가 살기 적합한 곳에 우연히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류 원리와 다중 우주 이론에 대한 많은 토 론이 계속되었고, 여전히 활발히 논의 중인데, 그 이유는 특히 이런 주제들이 물리적 · 신학적 실재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인간 이성이 실재를 인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성서 해석에 필요한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면, 그것은 적어도 현대 우주론 연구가 수행해온 추측에 근거한 진술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우주론 연구는 일반적으로 창세기 1장과 성서의 다른 창조 본문들을 현대적으로 읽는다고 평가받는 우주론 연구인데, 이 우주론 연구는 현대적 해석을 종종 비판하기도 하고 지지하기도 하지만, 기저에 있는 심오한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거의 집중하지 않는다.

 

자연법칙
17세기 자연 과학의 탄생의 결과 중 하나는 우주가 과학 연구에 의해 드러날 수도 있는 수학적 혹은 개념적 원리들, 즉 '자연법칙'을 따른다는 강한 믿음이 생겨난 것이다.

처음에는 이 생각이 창조주를 이해하는 더 심오한 개념으로서 지지를 받았다.

즉 신은 신적 본성이 드러나는 세계를 만들었고, 따라서 세계는 이해될 수 있고 신뢰할 만하며 한결같다는 말이다.

모순적이게도 바로 이 법칙들의 상당한 일관성이 신을 점차 과학과 무관하게 만들었다.

비록 과학이 일상 업무를 하는 데 있어서 더 이상 근본적 신학 기반에 의지하지 않지만, 신적 법칙의 언어는 과학적 세계 이해 속에 상당수 넌지시 남아 있다.

 

많은 과학자들, 특히 물리학자들에게 있어서, '법칙'은 지구상의 생명에 대해 관측된 규칙들을 통계적으로 관찰하는 것일 수 있지만, 법칙이 반드시 더 넓은 우주에 대한 심오한 진리를 포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많은 물리학자들에게 있어서, '법칙'에 대한 논의는 단지 세계의 규칙에 전체적으로 접근하는 정도가 아닌, 어떻게 우주가 움직여야만 하는지를 관할하는,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체계와 보다 유사하다.

이런 경우, 법칙에 대한 논의는 보다 심오한 원리, 즉 세계가 지금의 모습으로 규정된 핵심적 이유를 가리키기 시작한다.

 

우리가 “어쨌든 왜 법칙이 존재하는가?",

"왜 법칙 들은 종종 수학적 형태를 지닐까?",

"왜 그것들은 보편적이고 예외가 없어야 하는가?",

"왜 다른 법칙이 아닌 이 법칙이어야 하는가?"

등의 질문을 제기할 때 우리는 과학의 한계점,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 혹은 신학이 차지해야 하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자연법칙 만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연법칙의 지위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신학적인(과학적이 아닌) 주장을 한다.

이 것은 특히 일부 이론가들이 주장한 가설적인 '초끈'의 연구인 '만물 이론'을 탐구하는 이론물리학에서 사용된 수사법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초끈 이론은 소립자 간에 움직이는 근본적인 네 개의 힘(중력, 전자기력 · 약력 · 강력)을 초끈(superstring)에 의해 통일적으로 기술하고자 한 이론이다. 1990년대 초기에는 총 5개의 초끈 이론들이 알려져 있었고, 이들은 10차 원에 존재한다. 1995년에 미국의 에드워드 위튼(Edward Witten, 1951~)은 이 5개의 초끈 이론들을 끈을 포함하지 않고 11차원에 존재하는 'M이론'으로 통합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M이론의 'M'은 magic, mystery, 또 는 membrane을 뜻한다.

 

'만물 이론(모든 것의 이론)'은 자연계의 네 가지 힘인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을 하나로 통합하는 가상의 이론이다. 모든 자연의 법칙을 설명하거나 통합하는 내용을 다루는 이론으로, 이론물리학을 바탕으로 제안된 이 이론에 대한 많은 이론들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실험적으로 입증된 것은 없다.

 

세부 사항은 주장보다 우리의 목적에 덜 중요한데, 묘사하고자 하는 실재보다 법칙 그 자체가 존재론 적 의미에서 사실상 더 '실제적'이 될 위험이 있다.

케이스 워드는 이렇게 적었다.

 

일부 현대 과학의 최고의 모순은 과학이 인간에 의해 경험된, 풍부하고 특별하며 구체적인 세계를 설명하고 이해하려 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현상계(現象界)를 환상으로 보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  이런 오류는 플라톤에서 라이프니츠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철학자들을 덫에 걸리게 했고, 여전히 많은 주요 물리학자들도 덫에 걸리게 하고 있다.


워드는 플라톤주의로 알려진 철학 연구 방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학은 종종 자연의 구조를 잘 보여주고,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 완벽한 자연의 규칙에 길을 제공하는 묘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일컬어 진다.

수학의 성공은 수학이 인간의 발명이라기보다 과학적 발견이라는 의문이 종종 들 정도로, 세계에 심오한 이성적 본질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로저 펜로즈와 폴 데이비스 같은 물리학자들은 수학적 진실이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깊고 절대적이며 세계의 영원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플라톤주의의 연구 방법을 받아들였다. 

이런 관점에서 수학은 일종의 본질적 실재를 형성하는데, 이 본질적 실재는 물리적 대상에 의존하지 않은 채 존재하는, 일종의 세계 밖의 사실이다.

 

이 경우, 수학자들 은 수학적 정리(定理)를 발명한다기보다 발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수학이 과학이 접근할 수 있는 세계보다 더 깊은 세계 기저에 있는 구조적 실재를 나타낸다는 것을 암시한다.

수학에 대한 이런 이해는 신적 정신을 나타냄으 로써 창조주의 생각과 직결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유신론자들에게 매력적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자연의 통일성, 규칙성, 명료함은 법칙을 통해 드러나든, 아니면 수학을 통해 드러나든, 기독교 창조 교리의 중요한 특징 이다. 

 

우리는 이미 생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자연법칙의 지위에 대해 물리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과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넌지시 말했다.

대체로 물리학자들은 우주를 창조주에 관계된 것으로 해석하든 안하든, 아마 자연법칙을 우주에 관한 심오하고 객관적인 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좀더 보고자 할 것이다.

특히 물리학자들은 물리학이 가장 근본적인 과학이고 - 물리학이 가장 기본적 단계에서 물질을 다루고, 가장 근본적 물리 속성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 , 모든 과학은 결국 물리학으로 정리된다는 것을 가정하며, 일종의 문화적 제국주의와 같은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자연법칙들은 복잡하든 단순하든, 생명이 있는 물질이든 없는 물질이든, 결국 물리 법칙으로 환원된다.
수학자들은 때때로 물리학이 궁극적으로 수학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하며 한 발 더 나아간다. 

반면 생물학자들은 그런 환원주의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물리학이 물질을 가장 기본적 단계에서 묘사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우리가 모든 고차원의 독립체들을 위해서 가장 기본적 구성물로 환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제비와 같은 새들의 모든 근본적인 아원자 입자의 속성을 우리는 언젠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우리가 제비의 이주 패턴이나 먹이 섭취 습성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고차원의 과학에서 복잡한 현상들이 고려될 때, 모든 자연이 물리학의 법칙으로 환원된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중요한 구별이 요구되는데, 이 구별은 우리가 진화 생물학과 같은 과학(우연적이고 우발적인 사건들의 중요성을 강조)을 물리학과 같은 과학(규칙적이고 법칙적인 작용을 찾음)에 비교할 때 특히 중요해진다.

간략히 말해서 진화 생물학은 우연에 골몰하고, 물리학은 법칙에 골몰한다.

이런 접근 방법의 차이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진화 생물학이 정말로 궁극적으로는 물리 법칙으로 환원될 수도 있지만, 생명이 발전하는 방향을 이해하는 데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바로 우연한 사건이다.

진화 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력 법칙은 우리에게 왜 사과가 그 순간에 떨어졌는지, 왜 뉴턴이 영감이 떠오를 때 거기에 우연히 앉아 있게 되었는지가 아닌, 어떻게 사과가 떨어 지는지를 말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생물학적 생명은 충돌하는 은하들(물리학에서 크기의 규모를 말하는 한 면)만큼이나 많이, 또는 충돌하는 아원자 입자들(크기의 규모를 말하는 다른 한 면)만큼이나 많이 물리 법칙에 사로잡혀 있는데,

은하와 아원자 입자는 모두 물리학자들의 영원한 관심 주제다.

이제 물리학자들은 은하든 아원자 입자든, 두 충돌 유형에 관련된 과거의 수많은 우연한 사건들을 보고자 하고, 아마도 그런 많은 사건들의 통계적 평균에 의해 일종의 법칙을 발견하 고자한다.

 

그러나 생물학자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개별적인 우연한 사건들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정보와, 어떻게 생명이 환경에 적응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 바로 각각의 우연한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아마 가장 잘 알려진 예는 약 6,500만 년 전 백악기 말기에 공룡이 갑자기 멸종한 사건이다.

매우 큰 운석이 지구와 충돌하면서 급격한 기후 변화가 있었고, 따라서 공룡이 적응할 수 없었다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다.

 

그 결과, 오늘날 파충류가 아니라 포유류가 지구를 차지했다.

운석 충돌은 전적으로 물리 법칙 내에서 설명될 수 있지만, 지구에서 생명의 방향에 전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우연 한 사건이다.

물론 유성이 물리 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생명의 진화는 넓은 의미에서 물리 법칙을 따라야 한다.

우리 행성에서 과거 우연한 사건들을 보기 위해, 그리고 법칙 같은 규칙들을 묘사하기 위해, 우리는 심지어 지난 6,500만 년보다 더 넓은 시기를 연구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생물학자에게 우연한 사건들은 적어도 규칙들만큼 중요하다.

이와 같은 논의들은 일반적이고 확고 부동한 원리들에 대한 연구가 아닌, 우발적이고 예상 밖의 사건들이 가장 큰 관심을 받는 역사 같은 과목에서 훨씬 강하게 언급될 수 있다.

 

우리는 우연과 법칙의 상호 작용에 대해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과학-신학 대화의 많은 부분에 퍼져 있는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 상호 작용은 '빅뱅 모델'과 '생물학적 진화'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이 두 모델이 과학과 신학 사이의 모든 관계를 독차지해왔다.

 

우리는 성서 해석에 관련이 있는 주제들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이 두 모델을 여기에서 간략히 서술할 것이다.

과학-신학 분야의 일반적 관심 주제들에 대한 좀 더 포 괄적인 내용은 폴킹혼, 돕슨, 호지 슨의 연구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태초에 대한 현대 과학적 설명들

 

빅뱅 모델
지난 세기에 가장 널리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가장 놀라운 관측 천문학의 발견 중의 하나는, 우주가 팽창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주는 놀라운 속도로 팽창하는 듯하다. 

가장 멀리 있는 은하들이 빛의 속도의 1/3 인 100,000km/s 이상의 속도로 우리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 이 발견 또한 우주의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주 놀라운 일이다.

 

이 팽창이 우주의 역사에서 계속되어왔다고 가정한다면, 우주가 대략 140억 년 전에 물질, 에너지, 심지어 한 지점에서 팽창된 공간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이 지점, 즉 '초기 특이점'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유래된 수학적 개념이다.

이것은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엄청나게 밀도가 높고 극히 작은 물질 혹은 에너지 덩어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 모델에서 우주는 이 초기 특이점에서 극도로 강한 폭발(빅뱅)과 함께 시작되었다.

에너지와 가장 핵심적인 입자들은 외부로 튕겨나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냉각되었고, 보다 복잡한 아원자 입자들과 기본적인 원자핵으로 응축 되었다.

 

우주가(또한 우주와 더불어 공간이) 팽창될 때, 중력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물질은 무리를 이루기 시작했고, 별과 은하들이 형성되었으며, 별과 은하들은 차례대로 복잡성이 증가하는 원자들을 발생시키기 시작했고, 마침 내 행성이 탄생되었다.

 

이 설명의 대부분은 우주론자들에게 잘 받아들여지고, 수많은 실험 관측에 의해 입증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발견은 1964년 아노 펜지어스와 로버트 윌슨의 '우주 배경 복사'인데, 이 발견으로 인해 최초의 가장 단순한 원자들이 형성된 빅뱅의 초기 단계부터 전 우주 공간이 상대적으로 낮은 에너지 전자기파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주 배경 복사란 우주 공간의 배경을 이루며 모든 방향에서 같은 강도로 들어오는 전파를 말한다. 0.1m20cm에서 관측되는 마이크로파로, 높은 등방성(等方性, 우주 배경 복사가 우주의 모든 방향에서 같은 세기로 온다는 사실)으로 미루어, 어느 특정한 천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주 공간에 가득한 전파의 배경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 된다. 1964년에 펜지어스와 윌슨이 초단파를 최초로 감지했다. 우주 배경 복사의 발견으로 빅뱅 우주론은 정상 상태 우주론(steady-state cosmology, 우주는 늘 같은 상태를 유지하며 변하지 않는다는 이론)보다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이 배경 복사에서 더 나아간 연구는 최근 수십 년 최고의 실험이었는데, 이것은 특히 하늘 배경 분포에서 조그만 불규칙성을 측정한 것이다. 

이 불규칙성은 빅뱅 이후 초기 우주가 수행해온 변동을 간단히 묘사하며, 빅뱅 모델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시간이 흘러 이 변동은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은하계가 되었다.

 

우주 배경 복사의 등방성을 발견한 후, 우주 배경 복사가 비등방성(우주의 한 부분에서 오는 복사선이 다른 부분에서 오는 복사선과 파장이 약간 다름)을 갖는다는 증거도 찾아야 했다. 왜냐하면 우주가 팽창하기 시작했을 때 완전히 균일했다면, 우주에는 다양한 화학 원소도 없었을 것이고 행성이나 생명체도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빅뱅 우주론자들은 초기 우주가 매우 균일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균일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 한다. 우주 배경 복사 탐사선(Cosmic Microwave Background Explorer)을 이용해 1992년 1/10만 수준에서 변화가 존재함을 관측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공로로 조지 스무트(George Fitzgerald Smoot, 1945~)와 존 매더(John Cromwell Mather, 1946~)는 2006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빅뱅 모델은 초기 몇십 년간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이제는 과학의 영역에서 확고한 지위를 얻은 듯하다. 

빅뱅 모델은 원래 1920 년대에 성직자이자 물리학자인 조르주 르메트르에 의해 제시되었지만, 많은 우주론자들이 이 모델에 회의적이었다.

왜냐하면 이 모델은 너무 '종교적'이고, 시간의 절대적 시작점이 존재한다는 유대-기독교적 창조관과 너무 유사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3장의 "창세기 1장과 현대 과학" 참조).

 

하지만 빅뱅 모델을 지지하는 실험적 증거는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모델은 이제 일부 과학자들(예를 들어 스티븐 호킹이나 로렌스 크라우스에 의해 종교적 창조관에 반대되는 증거로 사용될 정도의 모순적 반전이 있는 것으로 봐서, 소위 말하는 그런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즉 빅뱅 모델은 종교적 주장을 약화시킬 만큼 세계의 기원을 잘 설명하는 듯하다.

 

빅뱅 모델은 현재 널리 받아들여짐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의 세부 내용 상당수가 너무 개략적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우주의 최초 결정적인 순간을 설명할 때 그러하다. 

실제로 우리가 아는 물리 법칙들이 초기 특이점에서는 적용이 안 된다.

한편 '양자 우주론(quantum cosmology)'으로 알려진 연구 분야는 엄청나게 밀도가 높고 극히 작은 우주를 의미하는 엄밀한 의미의 특이점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초기 상태는 굉장히 작고 밀도가 상당히 높으며 뜨거웠을지 모르지만, 소위 플랑크 온도를 초월한 온도에서는 양자 효과가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일반 상대성 물리학은 더 이상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플랑크 온도는 양자 역학에서 이론적인 온도의 최대값이며, 독일의 과학자 막스 플랑크의 이름을 딴 온도의 단위다. 이 이상의 온도에서는 모든 물질이 원자보다 작은 단위로 분해 되어 에너지가 되기 때문에, 이보다 더 뜨거운 것에 대한 추측은 무의미하다고 간주된다.

 

초기 양자 상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상당히 신비적이다. '플랑크 시대'의 물리학은 현재의 지식으로는 실험이 불가능하다.

 

플랑크 시대는 우주의 탄생부터 플랑크 시간(물리적으로 의미가 있는 측정 가능한 최소 시간 단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네 가지 기본 힘(중력, 전자기력 · 약력 · 강력)이 초힘(superforce)이라는 하나의 힘으로 통합되어 있었다고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시공간과 중력에 대한 양자 처리를 초기 우주의 지속 이론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지 불투명하다.

비록 실험적으로 입증이 가능한지, 혹은 어떻게 입증될 수 있을지가 불분명하지만, 초끈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플랑크 시대의 물리학에서 제기되는 흥미로운 생각은 가장 잘 알려진 모델 중 하나인 '하틀과 호킹의 무경계 가설'에서 기인한다.

플랑크 시대에서 시간은 공간의 속성을 띤다.

이것은 우주가 시간 혹은 공간에서 초기 경계가 없다(창조'의 순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한 시작 시간을 말하는 것은 남극이 지구의 공간적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보통 이런 설명은 창조주의 필요성을 없앤다고 여겨졌지만, 이런 설명은 주장의 근거가 되는 양자물리학의 궁극적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적어도 하나의 기본적 우발성이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고, 따라서 무로부터의 창조(6장 참조)라는 신학 사상은 세계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훨씬 근본적인 설명으로서 거의 손상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우주의 맨 처음 역사는 단지 어설픈 추측에 불과하고, 여전히 많은 의문들이 남아 있다. 

일단 물리학자들이 자연의 네 가지 힘 모두를 하나의 일관된 이론에 통합하는 방법을 충분히 알게 되고, 그들의 실험 기법이 상당히 발전한다면, 상황은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반면 다른 보다 흥미로운 가능성들이 생겨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빅뱅 모델은 우주의 물리적 진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주론자들 사이의 합의 사항이 되었다.

 

다윈과 생물학적 진화
다윈이 제기한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 모델은 단언컨대 빅뱅 모델보다 상당히 더 획기적이다.

다윈의 업적은 상당히 오랫동안 대중 의식을 선도해왔고,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끊임 없이 충돌을 일으켰다.

생명이 수백만 년 동안 가장 단순한 단세포 형태로부터 단순한 식물과 연골어류를 지나, 첫 육지 식물과 곤충, 경골어류, 양서류, 육지동물, 큰 공룡을 거쳐, 현대의 조류, 어류, 포유류로 발전(진화)했다는 다윈의 사상은 널리 알려졌다.

이 모델에서 복잡성과 다양성이 계속해서 증가한다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진화적 사고는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계를 설명함에 있어 과학이 종교를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종(種)들이 기적적 으로 완성된 형태로 생겨났다는 시각은 거의 지지받기 힘들게 되었고, 그래서 진화적 관점이 거의 유일한 선택이 되었다.

새로운 지질학은 18세기 허턴의 연구에서부터 19세기 라이엘의 유명한 저서 《지질학의 원리》에 이르기까지 이런 사상을 이미 발전시켜왔다.

이들은 주로 균일설(지구는 역사를 통해 오늘 날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같이 느리고 점진적인 지질 작용으로 구성되었다)로 알려진 사상에 기여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윈과 같은 점진적이고 진화적인 관점이 생물학에서 발생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동일과정설'로도 불리며, 지질의 변화는 부단히 균일적으로 작용하는 힘에 의한 것이라는 학설이다. 반대되는 설 명으로 '격변설'이 있다.

 

다윈은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적응하는 것을 보며, 어떻게 그 동물들이 주요 특징들 - 다윈 스스로 '적응에 의한 변이'라 부름 - 을 소유하게 되었는지를 살펴 보며, 1859년에 핵심적 저작인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을 저술했다.

다윈은 그때 더 넓은 자연 세계를 보았고, 유사한 표현인 '자연에 의한 변이(variation under nature)'로 묘사했다.

이것으로부터 다윈은 자신의 중심 사상인 '생존을 위한 투쟁'과 '자연 선택'을 이끌어냈다.

종이 다양하고 때로는 가혹한 환경에서, 또한 서로 경쟁하면서 생존하기 위해 투쟁을 할 때, 생존 경쟁에서 이긴 종은 자신의 역경을 극복할 생물학적 장점을 소유한 종이고, 특수한 상황에 가장 잘 적응한, 사실상 선택받은 종이다.

세계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오늘날 지질학적 기록에 존재하는 종들도 너무나 다양하다.

 

다윈의 사상은 우연과 필연의 상호작용으로 종종 일컬어진다.

우연은 종들 사이의 고도의 다양성을 유발하지만, 이들 중 오직 일부만이 생존을 위한 필연적 특성을 갖추게 된다.

이것이 지구에 존재했던 전체 종들 중, 약 99.9퍼센트가 현재 멸종한 이유다.

그러므로 강렬한 경쟁 속에서 생존하는 능력은 대단히 중요한데, 여기에서 자연 선택 개념이 발생한다.

 

이런 관점에서 자연선택은 자연법칙의 본질의 일부다.

 진화에 있어서 우연과 필연의 상호 작용은 앞에서 다루었던 우연과 법칙에 관한 논의에 관계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생명 진화의 전체 구도를 지배하는 일반 법칙이 있지만, 각 생명체의 개별 접촉과 이로 인한 결과는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듯 보인다.

 

우연과 필연의 상호 작용은 예측 불허의 환경에서 생존의 문제에 풍부한 해결책을 계속 제공하는 진화를 가능하게 하며, "혼돈의 끝에서" 매우 정교 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만약 우연 쪽으로 균형이 기울게 되면, 안정적으로 새로움이 등장하게 하기 위한 너무나 많은 무계획적 해결책이 난무할 것이다.

반대로 필연 쪽으로 균형이 기울게 되면, 핵심 규칙들이 새로운 난관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창조성을 억압할 것이다.

 

빅뱅 모델도 우주의 발전과 성과를 묘사하기 때문에 진화적 개념이다. 

또 한 빅뱅 모델은 우연과 법칙의 상호 작용을 포함한다. 

그러나 빅뱅 모델과 생물학적 진화 모델은 서로 반대되는 신학 방향에서 사용되어 왔다.

빅뱅 모델은 종종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와 비교되었다.

 

그리고 기초 물리학 면에서 빅뱅 모델의 성공으로 인해 우주는 내재적 아름다움으로 가득 찼으며 이해 가능하다고 여겨졌다.

특히 인류 발생 원리와 결합될 때, 이것은 일부 학자들에게 설계(즉 신적 창조주)를 지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생물학적 진화 모델은, 특히 창세기 2~3장에서 하나님에게 불복종하고 세상에 죄를 가져온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와 함께 묘사될 때, 종종 기독교 창조관을 훼손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특별한 성서 이야기는 과학의 진화 사상과 일관성 있게 묘사될 수 있지만, 이것은 약간의 상상을 가미한 해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7 장 참조).

 

생물학은 근대 이전의 인간 중심 사상이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사상이 어느 정도 인류를 전 우주적 존재의 정점에 자리잡게 하는 듯 보이는 전통적 기독교 창조관과 성육신에 의해 발전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며, 어떤 다른 사상보다 더욱 인류에게 스스로의 위치를 깨닫게 했다.

 

한편, 진화는 지구 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코페르니쿠스 혁명과 같이 사상의 대전환을 초래했다.

그리고 다윈이 묘사한 투쟁과 경쟁의 구도가 사랑의 신이 의도한 목적과 조화를 이루기는 상당히 어렵다.

적자생존의 원리가 그러하듯 신적 섭리, 평화, 자비가 아닌 우연, 폭력, 고통, 죽음이 정확히 존재의 중심에 위치한다.

 

다윈의 발견은 아마도 신의 사랑을 말하는 전통적 관점에 비슷한 도전을 제기한 20세기 유대인 대학살 같은 인간의 잔악한 행위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기독교 신학에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최근 수 십 년간 새로운 무신론은 전통 신앙에 도전하면서 진화 논제들을 공공연하게 사용했다.

 

이 모든 논의는 다윈의 《종의 기원》 출판 이래 150년 이상, 생물학적 진화가 여전히 일부 기독교계에서 상당히 논쟁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논쟁은 빅뱅에 대한 논쟁보다 훨씬 더 격렬하다.

이런 논쟁은 대부분 창조론자들 이 생물학적 진화에 대해 여러 형태로 저항하면서 생겨난다.

그러나 이 저항은 진화의 과학적 신뢰성보다는 하나님의 신성한 말씀인 성서의 진실성을 파괴하는 듯 보이는 부분에 더 집중하고 있다.

 

다윈 이후 생물학에서 중요한 발전이 있었는데, 이 발전에서는 다윈의 진화 관점의 핵심이 기본적으로 옳았음을 상당히 강조했다.

하지만 다윈의 특유한 자연 선택 모델은 여전히 활발한 토론 주제다.

또한 진화를 야기하는 부가적인(혹은 대안적인 힘의 중요성 이 제기되었는데, 이것은 특히 자율 형성과 전적으 로 우발적인 우연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다윈주의에 근거한 진화 사상의 새로운 종합을 받아들인다(종종 '신다윈주의'로 언급된다).

 

이 신다윈주의는 다른 사상과 결합되면서 다윈 사상의 상당 부분을 굳건하게 했다. 

현대 유전 과학은 유전자의 돌연변이를 통해 종이 변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중요했다.

다윈은 이것을 기대 할 수 없었고, 그는 DNA의 존재뿐만 아니라 DNA의 이중 나선 구조의 발견이 생화학 과정(생명에 대한 타당한 기원을 말하며 진화에서 우연과 필연의 기저를 이룸)의 이해에 가져온 거대한 혁명도 짐작하지 못했다.

 

현대 생물학은 거의 우연과 필연의 두 원리를 통해, 지구에서 생명이 단순한 형태에서 보다 복잡한 형태로 진화했다는 다윈의 일반적 생각을 지지하는 획기적인 증거 체계를 구축했다.

이 진화 과정의 정점이 우리 인류라고 믿을 근거는 없다.

우리는 명백히 태초에 단 한 번의 창조 산물이 아니고, 다소 생명의 긴 사슬에서 하나의 고리다.

이 고리는 오직 생명의 역사에서 아주 최근에 등장했고, 우리 이전 수많은 다른 진화 발전들의 결과다.

빅뱅 모델도 신학에 도전을 제기하지만, 생물학 연구가 제기하는 도전이 더 시급하다.

 

우연과 법칙, 우발성과 돌연변이
여기에서 우발성 개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우발성은 우리가 우연과 법칙에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철학적 · 신학적 창조관에서도 중요한 보편 개념이다.

간단히 정의하면, 한 사건이 만약 확실성 또는 필요성이라기보다 가능성이면, 또한 그 사건이 하나의 특정한 방식으로 나타날 필요가 없다면 그 사건은 우발적이다.

 

기독교 창조 교리에도 기본적 신학 형태로서의 우발성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창조 교리는 세계의 존재가 창조의 첫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완전히 하나님에게 의존적이지만, 하나님은 우발적이지 않고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 홀로 변치 않는 확실한 중심이다.

 

세계가 우발적으로 보일 수 있는 다른 과학적 방법이 있는데, 그중 하나 는 우리가 방금 살펴본 진화 모델로부터 나온다. 

만약 세계가 계속해서 만들 어지는('진화'란 단어의 본질)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세계의 정확한 형태는 매 순간 비결정적이고 우발적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우연과 필연(법칙)의 상호 작용을 강조했고, 생물학적 진화에서 우연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진화는 지구에 있는 생명이 상당한 우발적 특징을 지녔음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그러나 우연이 빅뱅 모델에 어느 정도까지 존재하는가?

또한 보편적 척도로서 중요한 이런 종류의 우발성은 빅뱅 모델에 어느 정도까지 존재하는가?

 

이것을 주의 깊게 생각해보자. 빅뱅 모델은 종종 진화적이라고 여겨지지만, 만약 빅뱅이 우주의 진화를 매 단계마다 정확하게 정의된 법칙과 원리 측면에서 묘사한다면, 우주는 거의 우발적 방식으로 진화한다고 간주될 수 없다.

이때 우주는 그야말로 미리 정해진 고정된 계획대로 발전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경우라면 그 법칙이 충분히 알려지는 한, 우주 초기 상태의 정보는 이어지는 매 단계에 전수될 것이다.

이것은 뉴턴 역학의 발전을 따르는 고전 물리학의 지배적인 우주관이다.

이는 왜 이신론이 뉴턴 시대 직후 신을 믿는 믿음의 중요한 형태가 되었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즉 일단 신이 세계를 창조하고 나면, 세계의 발전과 역사에서 신의 개입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이런 우주는 결정론적인(deterministic)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것은 모든 물리 과정과 사건이 이전에 발생했던 사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이다.

 

비록 뉴턴 물리학이 여전히 매우 가치 있고, 이신론적 경향이 현대 기독교 신앙에 남아 있지만, 우주에 대한 이 '시계장치' 관점은 이제 상당히 의문시된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20세기에 과학의 많은 분야에서 놀라운 혁명이 있었고, 이것은 결정론의 결함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상대성, 양자 역학, 카오스 이론의 발전은 21세기에 세계를 더 이상 결정론적 방법으로 보지 못하도록 했다.

이 혁명의 결과, 자연 과학은 때때로 정확한 예측을 어긴 새로운 자연의 가능성에 대해 이전보다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비록 우리가 빅뱅 이후에 지배적인, 가장 기본적인 물리 법칙들을 충분히 이해한다 할지라도, 많은 과학자들은 아마 개략적인 용어가 아니고는 세계가 어떻게 진화할지에 대해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고 보는데, 이것이 핵심이다.

만약 우리가 물리 법칙들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면 통계 결과가 산출될 수도 있기 때문에 우주의 진화를 전체적 규모에서 묘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더 작은 규모의 별과 행성에 초점을 맞추게 될 때 우리는 우연과 비결정성의 역할이 보다 중요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우리가 물리 법칙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 남는다.

이런 관점에서 괴델은 어떤 완벽한 수학 체계(추정상 완벽한 물리 법칙 같은)도 그 체계 자체의 정합성(整合性)을 포함할 수는 없다는 것을 논증했다.

이것은 입증될 수도 없고 안 될 수도 없는, 당연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체계에는 항상 전제가 있다는 말이다.

만약 이런 사고방식이 정확하다면(그리고 논의된다면), '만물이론'은 용어 자체가 모순이며, 어떻게 세계가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는지를 결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아무튼 이안 바버의 다음 말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옳다.

"우주는 독특하고 되돌릴 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우주에 대해 설명하려면 법칙에만 의존하기보다는 역사적 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체스 게임에 빗대어 설명하면 이렇다. 

단지 소수의 규칙이 존재하지만,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보다도 많은 체스 게임이 가능하다.

규칙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각 게임을 위한 틀을 제공하지만, 어떻게 명인이 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을뿐더러, 각 게임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일반적인 용어를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다.

특정한 게임 방법이 다른 방법보다 더 선호되기도 하고, 명인은 특정 방법을 이용하거나 재창조할 수 있지만, 이것은 기본 규칙의 인식을 초월한 경험의 단계로 이동한 것이다.

두 명의 명인이 게임을 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결코 분명하게 예측할 수 없다.

요약하면 체스 게임 에서 우리는 게임의 규칙이 암시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것이 발생하는 비결 정적(즉 비예측적) 실재를 본다.

 

우주의 진화도 의심의 여지 없이 이와 같다.

비록 '만물 이론'이 그럴 듯하게 판명된다고 해도, 이 이론이 세계의 형태를 충분히 예측하거나 설명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환원은 설명과는 다르다.

 

게다가 '만물 이론'은 생명 과학과 많은 관련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생물 학적 생명은 보다 기본적인 물리학과 화학의 원리들로 쉽게 환원되지 않는 자연의 복잡한 속성들로부터 발생한다. 

가장 기본적인 단계(아원자 입자 같은) 에서의 사물의 인식이 반드시 실재의 더 높은 단계(생물 같은)에 대한 완벽한 이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현대 과학 연구에서 상당히 중요한 과학원리, 즉 '돌연변이(emergence, 창발)'로 연결된다.

돌연변이 사상은 과학 연구에 있어서 많은 이전의 분산된 사상 분야들을 일관적인 체계로 연결시키며, 과학 연구에서 하나의 신생 분야가 되었다.

돌연변이는 정확히 환원주의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한다.

돌연변이는 단순한 법칙과 원리로 쉽게 예측될 수 없는 복잡한 속성의 출현을 강조한다.

 

비록 독립체들이 잘 알려진 법칙에 따라 각각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새로운 속성들은 결과가 각 독립체의 속성만으로는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는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는 많은 독립체들과 관계가 있다.

낮은 단계의 과학적 지식에서는 전적으로 분명해지지 않을지 모르는 것이 높은 단계의 체계에서는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결과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크다'.

 

다시 말해서, 각 독립체는 어느 지점까지, 심지어 독립체들의 관계와 상호 작용의 속성까지는 상당히 잘 이해될 수 있지만, 이들의 행위가 결합되면 무척 새롭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근본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새로운 것들이 발생한다.

자연 세계와 인간 세계에 돌연변이의 예가 상당히 많다.

토성의 고리, 하늘의 구름 모양, 지구 환경의 구조, 물고기와 새가 떼지어 다닐 때 협력하는 행동 등 이것들은 모두 자체의 개별 요소로 쉽게 설명될(혹은 환원될) 수 없다.

 

생물학적 생명에 대한 이 간단한 사실이 돌연변이를 상당히 잘 설명해준다.

생명은 무생물로부터 발생했지만, 비교적 간단한 단세포 생명체도 너무나 복잡해서 무생물의 많은 속성과 특징을 잘 묘사할 수도 있는 물리학과 화학 법칙만으로는 제대로 설명될 수 없다.

그러나 단세포 생명체는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조직된 독립체로 작용하며, 따라서 물리학과 화학보다 '더 높은' 단계에서 작용하는 생물학의 영역이다.

 

돌연변이를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설명하는 것은 또한 하나의 생물학적 주제인 인간의 몸에서 잘 드러날 수 있다. 몸에서 각 세포는 생물학적 용어로 묘사되고, 분류되며, 이해될 수 있 지만, 이것이 전 인류의 행동이 필연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특히 심리학과 다른 고차원 학문 분야들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은 각 세포의 행동을 초월해 작용하는 새로 생겨나는 행동의 예다.

인간 세계로 눈을 돌리면, 더욱 많은 예들을 발견하게 된다.

 

경제학 분야의 경우, 근본적인 돈의 원리를 이해한다고 해서 국제 주식 시장(특히 대폭 락 기간)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주식 시장은 쉽게 저차원 원리에 관계되지 않는 고차원의 상호 작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상당히 새롭고 일관된 조직의 구조와 형태가 어떻게 기본 법칙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나타날 수 있는지에 대한 예들이다.

이것들은 세계가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과정 중이라는 증거다. 

세계는 정말로 진화하고 있다.

 

진화 생물학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과학 분야에서도 우발적인 속성들이 언급되고 있고, 세계에 기본적인 과학적 우발성이 존재한다는 것(기저에 있는 상당히 기본적인 신학적 우발성에도 불구하고)이 지적된다. 

이것은 세계가 지금의 방식으로 드러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과학적 모델의 범위 내에서, 그리고 우주의 물리 상수와 자연법칙 내에서 어느 정도 다른 형태의 세계가 가능했 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나 다른 형태의 세계인가? 특히 진화 생물학에서 우연법칙의 균형과 우발성-필연성의 균형에 대한 세세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또한 이 논의에 대한 종교적 차원이 있다.

설계 논증의 현대적 형태로서 인류 원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우연보다는 법칙을 지지하곤 한다.

따라서 지적 생명은 항상 신의 목적(그리스어로 telos)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주장을 피할 수 없었다.

 

잠시 종교적 차원은 접어두자. 

진화 생물학에서 우연을 법칙에 견주어 보는 논의는 두 명의 진화 고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와 사이먼 콘웨이 모리스 사이의 잘 알려진 불일치에서 드러난다.

이 두 과학자는 버지스 셰일에 대해 광범위하게 연구하며 저술을 남겼다.

버지스 셰일은 캐나다 로키 산맥에서 발견된 특이한 진화 형태를 보여 주는 매우 독특한 화석들이 풍부한 퇴적암이다. 이 화석들은 캄브리아기(5억 7,000만 년 전) 초반에 생명 형태가 전례 없이 급증했고, 이들 상당수는 결코 후대에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버지스 셰일은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의 버지스 산에서 발견된 캄브리아기의 화석들(특히 이판암shale)을 말한다. 1907~1927년에 스미소니언(Smithsonian) 박물관의 관장으로 일했던 고생물학자 찰스 월콧(Charles Doolittle Walcott, 1850~1927)에 의해 1909년 8월 30일 발견되었다.

 

굴드와 모리스는 이것을 해석 하면서 동일한 경험 자료에 접근하지만, 서로 너무나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굴드는 진화 과정이 전적으로 무작위적이라고 결론 내렸다. 

자연 환경 속에서 버지스 화석들은 거의 도박처럼 무작위로 많은 다양한 특성들을 지니게 되었고, 그 화석들의 생존 여부는 단지 환경의 우연성에 관계가 있었다. 

이화 석들의 상당수가 생존에 실패했다. 

그리고 굴드에 따르면, 진화 과정이 “궁극적으로 예측 불가능하고 절대 반복될 수 없다"는 것이 진화의 매 단계에서 어 느 정도 사실이다.

굴드의 다음 말은 유명하다.

“버지스 셰일의 시대까지 생물의 테이프를 되감아라.

그리고 다시 동일한 시작 지점에서 작동시켜라.

인간 지성과 같은 무엇인가가 재생될 우연은 매우 적을 것이다."


반면 콘웨이 모리스는 상당히 반대되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신이 원할 때 마다 생물의 테이프를 되감아라. 그러면 최후 결과는 상당히 같아질 것이다."

모리스에게 있어서 진화는 우연에 의해 진행될지 모르지만, 분명한 길을 따르게 되어 있다.

이것은 '진화적 수렴'의 원리인데, 여기에 생물의 문제들에 대한 수많은 적절한 해결책이 있고, 생물은 진화를 통해 이 해결책을 반복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 해결책은 다른 방향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할 수 있고, 이것이 모리스가 예를 든 것처럼, 카메라 눈이 다양한 동물들(인간과 같은 척추동물에게서 뿐만 아니라 오징어, 달팽이, 해파리, 심지어 거미에게서도)에게서 매우 다른 시기에 독립적으로 진화한 이유다.

 

카메라 눈 : 동물의 눈 중 가장 발달한 형태로, 눈의 밑부분에 있는 망막에 외계의 영상이 비침으로써 물체의 모양을 알 수 있 으므로 상시안(像視眼)이라고 하며, 와안이나 안점의 경우는 빛의 세기와 방향을 알 수 있으므로 방향시안(方向視眼)이라고도 한다.

 

모리스는 카메라 눈이 활동적인 육식 동물에게 선호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카메라 눈은 그런 생활 방식을 고려해보면 시야 확보를 위해 공통적으로 발생(수렴)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수렴의 예는 많다. 콘웨이 모리스는 지성을 포함하여 일부 특징이 진화에 내재한다는 것을 충분히 확신 한다. 

그는 인간의 등장이 지구에서 진화 과정의 필연적 결과였다고 믿는다.

 

따라서 굴드는 우연의 역할을 강조하는 반면, 모리스는 필연을 강조함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신학의 논제에 대해 독립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고, 전적으로 과학적 증거에 근거해서 추리하려 한다(모리스는 스스로 신학적 결 론을 도출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연구 방법을 평가하면서 고차원의 철학 사상이 작동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우주가 궁극적으로 결정론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과 유사하다.

심지어 '결정론(혹은 비결정론)'이라고 불리는 것은 과학의 영역을 넘는, 철학적 혹은 심지어 신학적 주장이라는 것이 지적되어왔다.

 

예를 들면, '우연'의 개념에서 발생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 

우리는 우연을 마치 잘 이해되는 분명한 과학 개념인 것처럼 생각해왔다.

그러나 우연이 과학적 문제들만큼이나 많이 철학적 문제들에 의존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다.

생물학적 진화에서 '우연'을 말할 때, 우리는 소위 주사위 놀이에서처럼 깨끗하고 순전한 우연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우연이 기후, 음식, 환경처럼 우리가 정확하게 찾아낼 수 없는 많은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를 일컫는 단지 편리한 포괄적 용어인가?

 

순전한 우연은 양자 역학에 서 작용하는데, 순전한 우연이 어떻게든 자연 선택 단계에도 해당될 수도 있다고 종종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한다.

가장 근본 적으로 우리는 심지어 양자 역학이 순전한 우연을 수반하는지, 아니면 ‘우연’ 이 우리가 주로 현재 이해하지 못하는 결정론적 결과를 위해 편의상 사용하는 용어인지를 알 수 없다.

기본적인 과학적 관찰이 이 질문에 똑같이 대답하는 것과는 반대로, 양자 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다중세계 해석에 반대)은 그 질문에 완벽히 다른 철학적 · 신학적 대답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현재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우연'의 탓으로 돌리기는 너무 쉽다.

 

질문이 갑자기 증가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더 복잡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철학적 · 신학적으로 생각해보기 전에, 우연과 법칙 같은 주제에 대해 과학적으로 좀 더 심도 있게 나아갈 수 있음을 논증하고자하는 것이다.

 

'우연'은 신학계에서 골칫거리가 되어왔다.

많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세계가 무작위로 진화되었다는 사상은 법과 질서의 신을 말하기 위해 세계의 규칙성과 조화를 강조하는 가장 오래 지속된 설계 논증 일부를 위협한다.

일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인간 생명의 출현이 우연적이었다는 주장은 중대한 신학적 문제들을 발생시킨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 신자들, 심지어 신학자들도 우연의 역할을 최상위에 위치시키는 굴드와 같은 진화적 관점을 거부하 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들은 이런 관점을 단지 우연이 설계 논증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들에게는 세계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는 목적론적 믿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늘 인간 중심적이어서 인간 세계에 대한 궁극적 목적(특히 신에 의해 부여 된 목적)을 부인하는 어떤 이념도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예를 들면, 라무뢰는 우연을 '무목적론적 진화, (즉 어떤 목적도 갖지 않고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지배된 진화)'라고 부를 정 도까지 반대를 하고, 우연을 무신론과 동일시하며, 반기독교적이고, 비민주적 이며, '교활한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우연이 여러 신학 영역에서 세계를 인도하는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메시지에 대체로 적대적인 듯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9장에서 우리는 성서적 종말론과 목적, 그리고 특히 새로운 창조 사상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이 성서 자료는 비록 과학적 세계관을 잠재적으로 함축하고 있지만, 전적으로 문자적 방법으로 읽히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논의될 것이다.

그 자료는 과학적이기보다 상당히 도덕적이고 영적이며, 아마 우리가 생 각하는 것보다 더욱 암시적이고, 상징적이며, 제약이 없다는 것이 논의될 것이다.

 

아무튼 우연의 과학적 개념을 긍정적인 신학 관점으로 보는 것이 가능 하다는 말이다.

진화에 대한 콘웨이 모리스의 목적론적 이해에 어울리는 신학적 연구들이 있는 것처럼, 생물학적 진화에서 굴드가 강조하는 우연과 어울리는 신학적 연구들이 있다.

굴드의 경우, 우연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자연 안에서 창조적으로 일하고, 현재에 계속적으로 자연을 창조하며, 항상 과학이 미리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자연을 이끄는 기독교 신관에 비유 될 수 있다.

 

이것은 소위 세계와 신의 관계에 대한 내재론적 관점이다.

콘웨이 모리스의 경우 보다 직접적이고 법칙 같은 진화 관점은 태초부터 창조를 신이 초월적으로 이끈다는 전통적인 관점과 어울릴 수 있다.

이 두 관 점은 소위 말하는 그런 반기독교적 관점이 아니라, 신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다른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성서가 창조에 대해 무엇을 말 하는지, 그리고 성서가 어떻게 과학의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에 대해 살 펴볼 때, 반복해서 논의할 주제다.

 

지금까지 우리는 빅뱅 모델과 다윈주의의 진화적 속성으로부터 나오는 우발성을 상당히 강조했다. 

이 우발성은 창조 교리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신학적 유비, 즉 우주의 끊임없는 참신함과 새로움 기저에 있는 창조적이고 더 높은 생각을 제시한다. 

이 생각은 우리가 성서의 여러 창조 본문에서 발견 하는 바로 그 생각이다.


출처 : 성서의 본성(마크 해리스 지음, 장재호 옮김, 도서출판 두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