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창조의 본성(本性)

1장 : 서론

w.j.lee 2024. 7. 26. 09:30

 

 

서  론

 

과학과 종교는 대립하는가? 아니면 서로 관심이 없는가?

현대 과학과 종교 신념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우리 시대의 가장 활발한 논의 중 하나가 되었다.

누구라도 이에 대한 논의들 중 하나는 지지할 것이다.

과학이 종교 신념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고, 반대로 신앙이 아직도 건재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와 동시에 종교와 과학을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려는 시도가 학문 분야 에서 활발해졌다. 

'과학과 종교' 또는 '신학과 과학'이라 불리는 이 분야는, 어 떻게 과학과 종교가 과거에 서로 관계를 맺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논의에 집중 해왔다. 

 

또한 과학과 종교가 어떻게 현재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연구에 집중해왔다. 

여기에서 역사와 철학은 과학과 종교 사이의 중재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는 과학과 종교의 대화가 기저에 있는 기본 자료와 핵심 관찰에서 한 발 물러나 '메타(meta)' 수준에서 행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논의는 대부분 핵심 자료와 그 자료의 해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고차원의 과학적이고 종교적인 해석들을 서로 연결시키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과학-종교 대화의 대부분은 '종교'가 기독교와 동일시되는 서양에서 발생했다. 

이 경우, 핵심 자료 대부분이 성서에 한정된다. 

특히 과학과 종교의 대화에 일반적으로 관련이 적어 다루기 힘든 책이 바로 이 성서다.

 

하지만 성서를 이렇게 상대적으로 등한시한 이유 중 하나는 모순적이게도 창조론(Creationism)에서 기인한다. 

창조론은 과학-종교 대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성서의 창조 본문이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조론 중 가장 엄격한 '젊은 지구 창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구가 수천 년 전에 글자 그대로 6일 동안 창조되었다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현대과학의 거대한 물결을 거부한다.

그 결과, 과학-종교 대화는 성서의 해석보다는 과학적 자료와 이론에 초점을 둔 과학의 영역에서 논의되는 경향이 있었다.

 

젊은 지구 창조론은 창세기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우주, 지구, 그리고 모든 생명체가 6,000~1만 년 전 최초의 6일 동안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종교적 신념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성서가 '오류가 없고 모든 과학과 역사 연구를 초월한다고 보는 근본주의자들의 확신이 간과되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종교 대화가 논쟁이 되는 성서의 주요 부분들은 피하는 반면, 주류 학자들이 실제적 관심 을 보이는 철학적인 단계에서 창조를 논의해왔던 것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특 히 북아메리카에서) 있었다.

이것은 성서 비평에서 드러난 많은 미묘하고 복잡한 것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또는 이 미묘하고 복잡한 것들이 '아담과 하와가 실제로 존재했는지'와 같은 질문에 대한 끊임 없는 논의에 의해 모호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7장 참조).

 

이 책의 목적은 과학-종교 대화에 있어서 성서가 등한시되었다는 것을 지 적하면서, 과학과 종교 사이의 대립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성서 학자들의 최근 연구가 이런 논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구약의 창조 신학을 우리가 더 잘 이 해하게 되었고, 구약의 창조 본문이 현대 과학의 세계관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논의가 계속되었다.

 

이 책은 두 가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첫째, 과학의 영향을 고려하여 성서 전체를 비평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창조에서 그리스도의 역할과 같은, 과학-종교 분야의 중요한 논의들이 드러나게 한다.

둘째, 이 책은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관점, 즉 삼위일체 신관이 궁극적으로 비평적 성서 연구와 과학 사이의 연결 고리를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과학을 언급하는 것이 아닌, 성서 연구와 기독교 신학의 측면에서 다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연구에서 우리는 특히 성서 해석에 있어서 까다로운 주제들을 간략히 언급할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미 존재하는 연구를 요약해서 제공하려는 목적보다는 새로운 연구를 위한 범위를 설정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연구가 과학과 종교가 서로 전쟁 중이라는 보편적 인식을 홀로 변화시 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 연구는 창조론자들의 논쟁도 해결 하지 못할 것이다. 

바라는 것은 이 접근이 과학과 종교가 창조에 대한 시각을 통해 무엇을 공유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종교와 과학이 다르고, 달라야 하는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차원을 논의하면서, 논의 기저에 있는 더 깊은 수준의 통찰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실재(Reality)에 대한 질문

 

과학과 종교 사이의 대립 중 상당수는 실재를 구성한다고 알려진 것에 대 한 상반된 주장에서 비롯된다. 

전통적으로 성서 비평은 방법론적 측면에서 그 자체로 '과학적'이라고 여겨지는데, 이는 성서 비평이 반드시 생생한 종교적 주장에만 몰입하지 않고, 성서 본문 기저에 있는 역사적 실재를 밝히려 하기 때문이다.

대신 이런 주장은 신적 실재들과 창조에서 신적 실재들의 역할을 알아내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보다 직접적으로 자연 과학을 침해하는 신학적 작업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 연구가 회피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학은 성서 본문의 근원을 이루는 역사적 실재들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실재들이 초기 신앙 공동체에 대해 증언한 정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서의 한 부분인 이 증언들이 성화되었다고 믿는데, 바로 이 증언들이 신적 계시의 매개체다.

이 증언들은 근본적이며 권위가 있는데, 그것들은 무엇보다 기독교 신학이 알아내고 이해하고자 하는 유일한 실재를 가리킨다.

 

월터 브루그만은 이것을 강하게 표현했다.

“성서의 하나님은 '어딘가 다른 곳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고, 오직 성서 안에, 성서와 함께, 성서의 기저에 존재하는 분이다."

이 말이 성서 밖에는 어떤 신적 실재도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며, 성서가 '성사'라는 말도 아니다.

또한 이 말은 구원에 대한 지식이 오직 성서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종교개혁 원리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인' 접근은 교회 전통에 근거해서 성서를 해석하고 재해석하는 해석 학적 과정, 즉 신학적 해석을 통하게 되어 있다.

회의론자는 이것이 하나님을 심리학적 혹은 수사학적 언어로 만들어버린다고 이해할 수도 있으나, 종교적 주장은 본성상 항상 그런 환원주의의 공격을 받게 된다.

 

이것은 단지 학문적으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영역으로서, 창조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 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 반대도 당연히 성립한다.

기독교에서 성서는 항상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접근 원리 중 하나였다.

우리는 다양한 성서 창조 본문들을 연구하면서 '창조'란 단어를 쓰는 것이 곧 창조주를 암시하는 것이며, 또한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를 말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또한 우리는 성서 본문들이 창조주-피조물의 관계에 대해 다른 많은 관점들을 제시한다는 것을 살펴볼 것이다.

 

 

기독교 창조 교리

 

현대 과학의 발전 이전, 서양 기독교 문화는 오랜 기간 대체로 성서의 창조 본문에 근거해서 자연 세계를 바라보았다.

하나님은 자연 세계의 중심으로서, 자연 세계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유지시킨다고 여겨졌다.

창조에 대한 일치된 교리는 아래의 간단한 진술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님은 세계를 무(無)로부터 창조했다. 

즉 하나님은 세계를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창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계에 의존하지 않을뿐더러, 반드시 세계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반면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존재나 사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계의 최초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보존자다.

- 하나님은 세계를 좋게 창조했다. 이는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본성을 반영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 악이 들어왔다.

-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고 보존하면서, 또한 세상의 종말을 위한 준비를 했는 데, 종말의 때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이다.

- 종말의 때까지 하나님은 창조 세계의 생명을 '섭리'를 통해, 즉 역사 속에서 행해지는 특별한 신적 인도함과 기적들을 통해 지원하고 보살핀다.

 

이 간단한 요약은 지난 몇 세기까지 대체로 지지받아온 자연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기독교의 관점이다. 

그러나 그 이후, 근대 이전을 특징지었던 문화적, 미학적, 지적 가치들의 상당수가 의문시되었고 계속해서 약화되었다.

더 중요한 점은 자연 세계를 상당히 과학적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한 때 최고 자 리에 군림했던 신학이 꾸준히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것이다.

신에 의해서만 설명이 가능했던 많은 세계의 특징들이 이제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졌다.

 

 

과학의 발전과 종교의 쇠퇴

 

지적인 관점의 변화는 보통 17세기, 그리고 18세기 계몽주의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실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성적 사고의 힘과 과학적 절차에 새로운 신뢰가 점차 생겨난 때를 '근대'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혁명을 데카르트와 칸트 같은 사상가들과 연결시킬 수도 있지만, 이런 전반적인 철학 특징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 실험 과학자들에 의해 세워진 토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가 발견한 천문학 이론은 당시에는 거의 무시되거나 억압되었지만, 그들의 발견은 점차 중요해졌고, 지구가 (즉 인류가) 우주의 중심이고 하늘은 신에게로 향하는 계단이라는 일반적 논리에 의문이 확산되었다.

 

뉴턴에서 시작된 과학적 발견은 특히 종교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과학적 발견이 점차 논의되고 문화에 동화되면서, 과학적 발견은 신이 피조물과 관계 맺는 방법을 변화시켰다. 

비록 뉴턴이 자신의 연구가 신학과 완전히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지 만, 그의 이론 체계의 완성도는 상당히 높아서 신을 가장자리로 내몰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만약 자연 세계가 이성적으로 신의 개입 없이 설명될 수 있다면, 아마도 신은 결국 세계에 밀접하게 관련될 수 없다. 

분명 뉴턴 이후 100년이 지난 라플라스 시대까지, 자연 세계는 신을 원인으로 언급하지 않고도 설명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발전은 세계와 신의 관계가 어떻게 이해되는지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리에도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나사렛 예수 안에 전적인 인간성과 전적인 신성이 함께 존재한다는 성육신 교리는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존재한다는 삼위일체 교리와 마찬가지로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유니테리언(Unitarianism, 오직 성부만이 전적으로 신성하다고 믿음)은 이신론 (deism, 신이 창조 이후 세계에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계시 혹은 기적을 믿는 것보다 이성이 신앙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처럼 인정받는 하나의 종교적 형태로 등 장했다.

이신론은 우주가 물리 '법칙'에 의해 지배받고 결정된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던 17~18세기 영국에서 등장했다.

비록 이신론은 18세기 이래 역사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이신론 기저에 있는 사상은 현대 종교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이 내용을 이 책에서는 앞으로 여러번 다룰 것이다.

 

이런 종교 사상의 변화로 말미암아 신이 세계에 참여한다는 것에 의심이 들 뿐만 아니라, 신의 근본적 존재 자체도 의심받게 되었다. 

그래서 무신론이 20세기에는 지적·도덕적으로 비난받는 이론이었지만, 현재에는 특히 '새로 운 무신론'이란 말로 가장하여 널리 관심을 끌 뿐만 아니라 잘 받아들여진다.

 

서양에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연 재해, 기근, 질병 등으로 인해 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이 말은 모순적이게도 신이 직접적으로 세계에 구원을 베푸는 분으로 믿어지기 위해서는 강하 게 개입하는 전통적 유대-기독교 유형의 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오랜 기간 신의 심판의 징조로 해석되었던 재난과 고통의 발생은, 최근 들어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의 증거로 여겨진다.

이런 경우에 무신론이 명백히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듯 보이는 한편, 전통적 유신론은 신앙을 지키려 애써야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항상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창조주의 존재 증거로서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주장을 '설계 논증'이라 고 한다.

특히 물리학자들은 우주를 구성하는 듯 보이는 엄밀한 법칙의 균형과 우아함에 강하게 호소한다.

물리학자 존 배로는 한 인터 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의] 법칙은 상당히 정확하지만, 매우 신비롭습니다. 당신은 자연법칙을 보거나 만질 수 없습니다. 우주에는 신비로운 대칭들이 존재합니다.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생물학자들은 자연의 혼란스러운 복잡성을 다루기 때문에, 종교와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에 대해 매우 불편해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 다. 생물학자와 물리학자 사이에는 실제로 문화적 차이가 있습니다.

 

배로는 물리학과 생물학 간의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 견해 차이를 말한다. 

과학은 결코 종교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일치되지 않으며, 종종 생물학자가 물리학자보다 더 회의적이라고 일컬어진다.

생화학자인 아서 피콕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생물학자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직업적으로 상당히 바람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좀 더 복잡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물리학자가 종교를 대하는 방식이 있고, 생물학자가 종교를 대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첫째 로, 많은 물리학자들은 과학이 창조주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자연 세계를 성공적으로 설명해왔다고 생각하며, 설계 논증과 정반대로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설명하는 이론을 받아들인다.

이 입장은 스티븐 호킹의 베스트셀러인 《시간의 역사》에 기고한 칼 세이건의 서문에서 잘 나타난다.

 

이 책은 또한 신 ...... 혹은 아마도 신의 부재에 대한 책이다. 신이란 단어가 이 책 에 가득하다. 호킹은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질문인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어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지'에 대해 답하기 위한 탐험을 시작한다. 스스로 명백히 밝힌 것처럼, 호킹은 신의 정신을 이해하려 시도하고 있다. 이 시도는 공간상으로는 무한한 우주를, 시간상으로는 시작과 끝이 없는 우주와 창조주가 할 일이 없는 우주 개념을 탄생시키며, 오히려 연구의 결론을 적어도 현재로서는 더욱 예측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급진적인 진술은 과학이 종교를 대체했거나 혹은 기껏해야 종교와 상충된다는 (이미 널리 퍼진) 인식을 강화하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이며, 실제로 과학과 신학의 관계는 더욱 복잡하다고 주장해왔다.

즉 과학과 신학의 관계를 설명하는 많은 타당한 방법들이 있기 때문에 과학과 신학이 반드시 대립한다고 볼 수 는 없다는 것이다.

 

이안 바버는 네 가지 모델을 제시했 는데, 각 모델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보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본다.

첫째 는 갈등 모델로, 과학과 종교가 서로 대립한다는 보편적 개념을 말한다. 

둘째는 독립 모델로, 과학과 종교가 전적으로 독립하여 작용한 다고 본다. 

즉 과학과 종교는 다른 종류의 실재를 말하기 위해 대조되는 방법과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셋째는 대화 모델로, 과학과 종교가 서로 대화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과학과 종교는 서로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통해 서로에게 유익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넷째는 통합 모델로, 아마 과학과 종교의 상호 유익을 위해 이 둘의 통합 가능성을 암시하며, 과학과 종교의 보다 긍정적인 관계를 추구한다.

테야르 드 샤르댕의 총체적 연구가 통합 모델에 속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부활한 예수를 생물학적 진화의 목표로 간주하기 때문이다(8장 참조).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가 바버의 네 가지 모델보다 상당히 더 복잡하게 세분되며, 네 가지 모델 중의 어떤 하나를 정답으로 구분할 수 없다고 본다.

(우선 한 가지 이유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가 과학적 질문들과 종교적 질문들에 상당히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역사를 통해 급격히 변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심지어 각 학자들 사이의 일치를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다.

 


성서와 역사

 

성서는 역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계몽주의와 19세기 지질학, 진화 생물학의 놀라운 발전 이전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앙의 진실로서의 성서의 지위는 역사적 진실에 대한 신뢰할 만한 자료로 인정받았다.

1648년 제임스 어셔가 제기한 창조와 홍수의 날짜는 종종 이런 사고방식의 전형적인 예로서 인용된다.

어셔는 성서에 나오는 다양한 족보들과 날짜들을 비교하고, 또한 그것들을 다른 고대 근동 자료와 비교하면서, 창조가 기원전 4004년 10월 22일 토요일 저녁에 발생했고, 대홍수는 기원전 2349년 12월 7일 일요일에 발생했다고 계산했다. 

 

어셔가 성서 기록의 정확성을 확신하는 것이 (비록 그의 날짜 계산은 많은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에 의해 여전히 지지를 받지만) 요즈음에는 황당해 보인다.

그러나 어셔의 연구는 성서를 정확한 역사적 자료로써 이해하며 성서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는 당대의 전형적 모습이었다.

어셔 이전의 학자들은 그와 유사하게 성서적 자료를 근거로 세계의 연대를 계산했다.

어셔의 계산법이 관심을 받은 중요한 이유는 그의 날짜 계산이 18세기 킹 제임스 바이블 판본에 주석으로 표기되어, 사실상 '확실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지질학의 등장으로 어셔의 날짜 계산에 심각한 의심이 발생했고, 지구는 그가 계산한 것보다 훨씬 오래 되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동시에 상당수의 성서 본문에 새로운 종류의 역사적 질문들이 쏟아졌다. 

우리가 관습, 목적, 객관성을 바탕으로 성서를 읽는 전문화된 방법, 즉 '비평적' 방법이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을 예로 든 다면, 필로와 오리겐은 기원후 1세기에 특별한 방법론(알레고리적 해석)을 개척했다.

그러나 과거 수백 년 동안의 많은 성서 학자들에게 있어서, '성서 비평'은 '역사 비평'과 사실상 동의어나 다름 없었다.

역사 비평은 성서 본문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 조사를 가장 적절한 렌즈로 강조하는 철저한 지적 연구 방법이다.

역사 비평 방법은 본문이 특히 우리의 상황과 매우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 기록되었으므로, 해석은 가능하면 이런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며 수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본문의 신학적 의미를 탐구하기 전에, 우리는 우선 본문의 역사적 배경과 저자의 본래 의도를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 성서 연구는 역사적 질문에 몰두했다.

 

가장 중요한 예(특히 이 책과 관련이 있는) 중의 하나는 '문서설'이다.

비터는 1711년에, 아스트룩은 1753년에 각각 모세오경이 여러개의 유사한 자료 들(문서들이 함께 섞인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특히 창세기와 출애굽기 에서 같은 자료가 여러번 반복되고 이중으로 설명되지만, 종종 서로 모순된다.

예를 들면, 창세기 6~9장의 홍수 이야기는 두 개의 자료가 편집된 듯 보 이는데, 여기에 보면 방주 안의 동물들의 수를 포함하여 수많은 세부 내용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이 자료들은 사용하는 용어도 다르다. 아마도 가장 분명한 예는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두 개의 창조 묘사다.

표현 방법과 내용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첫 번째 창조 묘사(창 1~2:4a)에서는 하나님을 말할 때 히브리 이름인 엘로힘(Elohim)만 사용하는 반면, 두 번째 창조 묘사(창2:4b~25)에서는 야훼 엘로힘(YHWH Elohim)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이것을 각각 '제사장' 문서와 '야훼' 문서로 알려진 두 다른 자료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여긴다.

결국 모세오경에서 네 개의 자료가 발견되었 는데, 이것들은 J문서(야훼), E문서(엘로힘), D문서(신명기), P문서(제사장)이다.

이 4문서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역사는 1878년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1844~1918)에 의해 재구성되었고 (비록 끊임 없이 논의되고 개정되었으며, 심지어 일 부 학자들에게는 완전히 거부되고 있지만) 여전히 모세오경에 대한 많은 현대 역사적 연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성서 연구 분야는 벨하우젠 이래 크게 발전했다. 

자료 비평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역사 비평들도 발전했다.

이 비평들은 성서를 구성하는 문학 양식(즉 장르)에, 즉 성서를 만드는 필사자들과 편집자들의 편집 경향과 그 들의 사회적·정치적 상황에 초점을 맞췄다.

 

이런 노력은 성서 본문이 처음 기록되었을 때에 본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내려는 노력인데, 여기에는 본래의 역사적 의미가 가장 진실된 의미라는 전제가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이래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본래의 의미를 탐구하는 데에 대한 환멸, 즉 '객관성의 위기를 초래했다.

대신에 주로 역사적 의도를 갖지 않는 많은 대안적 비평들이 확산되었다.

독자 반응 비평, 수사 비평, 서사 비평 같은 많은 비평들이 문학 이론으로부터 도출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사회적 관심, 특히 페미니스트 관점과 해방 관점에서 자극받은 비평 유형들과 함께, 보다 명료한 신학 유형들이 발전했다 (예, 정경 비평 ).

 

이런 초점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과거에 학자들 이 만든 역사적 방법에 대한 확고한 일부 주장을 완화시킨 반면, 성서 본문에 있는 수많은 풍부함과 새로운 관점이 드러나게 했다.

하지만 좀 더 주의를 기 울인다면, 역사적 관점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역사적 관점은 성서가 종종 왜곡되거나 목적에 따라 변화되는 세계에서, 성서의 역사적 증거를 보존하는 데 있어서 상당히 가치 있는 역할을 한다.

 

교회는 때때로 성서의 메시지를 색다르게, 즉 신성한 종교적 기대에 의한 익숙함으로 인해 무뎌지지 않고 예리하게 들을 필요가 있다. 교회와 성서의 매일의 대화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역사적 연구는 가치 있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만약 지금까지의 과학-종교 대화가 성서와 거의 관련 없이 진행되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성서의 예리함(히 4:12)에 충분히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책에서 내가 성서의 창조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성서가 현대 과학과 관계되는지를 일관 되게 역사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이유다.

 

 

성서에 등장하는 창조

 

성서의 첫 몇 장(창 1~3)은 특히 주목할 만한데, 여기에서는 세상의 창조 이야기를 시간의 시작에서부터 “태초에 첫 인류와 그들의 타락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공감할 만한 이야기로 설명한다.

우리가 창조와 성서를 말할 때, 변함 없이 떠오르는 구절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러나 성서에 상당히 많은 또 다른 창조 자료들이 있지만, 그 자료들은 대부분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관련이 없다.

예를 들면, 시편과 예언서 일부는 창조를 하나님과 바다의 신화적 전쟁 의 측면에서 말하는 반면, 잠언은 창조를 의인화된 신적 존재인 지혜를 통해 말한다.

 

그러므로 성서 창조 본문을 연구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첫 번째 요점은, 이 연구에 단일한 신학적 이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다양성이 단일하고 조화로운 연합을 이룰 수 있는지는(혹은 이뤄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창세기 1~3장은 전혀 통일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창세기 1~3장은 적어도 두 개의 구별되는 창조 전승이 포함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 전승들은 다른 이스라엘 역사적 상황에서 기록되었고, 다른 신학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

요약하면 성서에는 창조의 여러 이해들이 긴장감을 유지한 채 공존한다.

 

성서의 창조 본문에 대해 두 번째로 주의해야 할 점은 창조 자료가 신학적 이긴 하지만, 그것이 기독교 창조 교리처럼 쉽게 받아들여지는 일련의 형이상학적 전제로서 간주될 수 없다는 점이다(앞의 “기독교 창조 교리” 참조).

오히려 창조 자료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지 않은 서사적, 시적 주제들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일부 창조 주제들은 성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반 면, 그렇지 않은 주제들도 있다.

예상과는 반대로, 창세기에 나오는 잘 알려진 창조 이야기는 성서의 다른 부분에서 반복되지 않는다.

 

세 번째로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가 '창조 주제'로 언급할 (4장의 "창조와 이야기" 참조) 이 다양한 자료들이 성서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 자료들은 구속과 같은 다른 신학적 주제들과 쉽게 분리되지 않으며,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

이는 성서가 하나의 창조 묘사(창 1)에서 시작해서, 구속의 관점에서 봐야 하는 새로운 창조 묘사(계 21~22)로 끝나는 간단한 사실에서 볼 수 있다.

 

기독교 성서 구성의 측면에서 보면, 창조는 처음과 마지막에 대한 신학적 진술이자 신학의 토대다.

창조는 하나님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모든 진술들에 대한 시작과 끝이다.

바로 이 근본적인 창조주로 서의 신 이미지에서 성서의 구속 신학, 윤리학, 종말론이 구성된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창조 자료와 그 자료가 과학적으로 이해되는 방법을 살펴볼 때에, 우리는 창조 자료가 세계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의 측면에서보다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의 측면에서 가장 잘 해석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살펴 볼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창조 본문을 읽는 데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성서 창조 자료가 우리가 과학적 사고(자연의 구조와 메커니즘을 포함하는 우주론)라고 부를 수도 있는 흔적을 제시하지만, 그 자료는 거의 현 시대의 과학적 사고와 동떨어졌다.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현대 과학을 거부하거나, 세계의 기원에 대한 자신들의 시각을 알리기 위해 창세기 1~3장을 문자적으로 읽으며 이 난제를 해결한다.

 

이것은 특히 세계의 기원에 대한 미국의 보편적 접근 방법이다.

데니스 라무뢰에 따르면, 아마 미국 성인의 무려 60퍼센트가 세계가 6일 동안 창조되었으며, 창세기 1장이 '기록된 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글자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믿는다.

물론 많은 다른 기독교인들은 세계의 물리적 기원에 대한 현대 과학의 관점을 선호하며, 창세기 1~3장을 보다 자유롭고 은유적으로 읽는다.

 

그러나 이 민감한 문제는 수많은 기독교인들과 수많은 무신론자들이 창세기 1~3장을 해석하기 위한 중요한 질문이었고, 지금도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다. 

만약 이 문제를 해 결하고자 보수적 기독교 관점에서 특별한 주장을 제기하면 그때 또한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조소 섞인 공격이 이어지는데, 그 이유는 무신론자들은 누군가가 고대 종교 문헌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 자신들의 토대 기반인 현대 과학의 발견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스티븐 바턴과 데이비드 윌킨슨은 이 문제를 잘 강조했다.

 

6일 창조론으로부터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종교의 공적 대화에서 창세기 첫 몇 장은 소박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언급되거나, 동시대의 관심사와 연결 짓는 것이 거부된다.

이런 현상은 다윈의 영향으로 인해 창세기 1장을 지적으로 읽기 어려워졌다는 믿음(myth)에 의해 가속화되고, 이로부터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이 이 본문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

 

정말로 자신감을 잃었다. 

이 논의를 피하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은 보통 창세기 1~3장을 과학적·구체적 용어로 생각하는 것을 피하고, 보다 시적·은 유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은유적 이해가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중요한 점을 간과한다는 사실을 살펴볼 것이다.

다시 말하면, 비록 창조론자들의 논의가 거의 이루어낸 것이 없고 의견만 양극화되었지만, 우리는 이 성서 본문들을 해석하기 위해서 진정으로 현대와 고대 과학 사상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과학의 영역을 곧 넘어서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은 세계의 시작을 단계적으로 묘사하는 듯 보이고, 이는 현대 진화 사상과 비교되었지만, 이 본문은 창조가 어떻게 도덕적· 심미적 용어로 하나님에 의해 질서 지어졌는지를 설명하는 것에 관계된다.

 

하나님은 종종 창조된 것이 '보기 좋았다'고 평가한다(창 1:4, 10, 12, 18, 21, 25, 31). 

이것은 인정과 만족을 나타내고, 과학적 진술이라기보다 가치 판단에 속한다. 

만약 우리가 성서의 창조 이미지를 보다 넓게 본다면, 그 이미지는 우리가 과학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어떤 것을 넘어선, 도덕적 · 심미적 · 영적 가치 를 반복적으로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서의 창조 이미지는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풍부함, 신뢰성, 불변성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유사한 속성들이 세계와 인류의 관계에 부여되었다.

인간은 가장 넓은 환경에 정착하고, 일해야 하며,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님이 정한 방법으로 수확을 거둘 것이고 기쁨을 누릴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듯, 현재 우리가 자연 세계를 지나치게 이용함으로써 자연 세계 재발견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오래 전에, 성서는 이미 인류에게 중요한 생태적 도전을 제기했다.

 

 

'과학'의 관점에서의 '창조'

 

단지 지구뿐만이 아닌 전 우주를 '창조주의 존재를 암시하는 단어인 '창조'로서 언급하는 것은 종교계에서 일반적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종교적 신념이 있더라도, 과학의 영역에서 그런 용어 사용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현대 자연 과학은 정의상 초자연적 존재인 창조주에 대해 어떻게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연 과학은 세계를 설명하는 다른 세상적인 방법이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과학은 크게 성공했고, 이는 새로운 무신론자들에게 신의 존재를 반대하는 근거를 제공했다.

즉 만약 세계가 신을 말하지 않고 설명 될 수 있다면, 이는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암시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주장 은 종종 인정받지 못하고, 심지어 이해되지도 않으며, 논리적으로도 잘못되었다. 

즉 자연 과학은 정의상 초자연적 존재의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을 분별할 수 없고, 분별할 수단을 갖고 있지도 않다. 

대신 이 부분은 과거에 '과학의 여왕'으로 불렸던 신학의 영역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베스터만은 중요한 신학 비평을 수행했는데, 그는 종교 개혁 때 신학이 창조 본문을 부적절하게 이해했기 때문에 과학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부적절 하게 이해한 이유는 논쟁 중인 중요한 신학적 이슈들이 창조보다는 구원에 관련되었기 때문이며, 이는 과학이 신학의 영역을 꾸준히 침범할 여지를 남겼다.

신학은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구원 관계에 집착하면서, 창조주와 모든 피조물의 관계를 말하는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친 근본적 성서 본문들을 무시해왔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죄의 용서 혹은 의인화에 국한되어 세계를 근시안적으로 대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세계를 대하는 그 상황에서만 그런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구에 사는 벌레나 혹은 은하계에서 새로운 별이 등장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의 우선적 목적은 현대 과학과도 맞물리는 더 넓은 관점에서 성서 창조 본문을 신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어느 정도 환경과 생태적 문제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현대 창조 신학을 발전시키는 현대의 다양한 신학 흐름의 일부다.

이 노력이 베스터만의 수많은 지적을 다 바로잡 을 수는 없지만, 이 책이 성취할 것을 기대해볼 수는 있다.

분명 창조주를 믿기 어렵게 만드는 것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유 중 하나는 성서의 창조 이야기들이 과학에 의해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젊은 지구 창조론은 심지어 신학과 과학 사이의 간극을 더 깊게 만든다.

이처럼 창조 본문들이 현대 과학과 어울린다고 이해하는 정도보다 더 깊은 단계로 이 본문들을 보는 시도는 그 간극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사실 이 노력은 그 이상의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비록 '과학'이 통일된 독립 체로, 또한 신학을 앞지른 것으로 일반적으로 말해지지만, 현대 과학은 너무 전문화되었고 세분화되어서 어떤 과학자도 피상적인 단계를 넘어 세계 전체 의 과학적 실재를 이해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과학의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는 있어도, 결코 과학 전체를 통달할 수는 없다. 

따라서 '과학' 이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지적 체계가 된다면, 이때 과학은 더욱 혼란스럽 고 이해하기 어려운 체계가 된다. 

 

그러나 이것을 생각해보자. 

만약 고대 성서 저자들의 경우, '창조'의 종교적 개념이 혼란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실재를 이해하도록 도왔다면, 이는 또한 창조의 종교적 개념이 그 실재를 이해함에 있어서 파악하기 쉽고, 대단히 중요하며, 통일된 체계를 제공한 경우였다. 

베스터만의 요점은 '창조'의 종교적 개념이 다시 자연 과학의 광대한 복잡성을 정렬하는 가장 적절한 체계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의 창조 본문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과학의 신학을 향해 나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이 책이 적절한 출발점을 제공할 것이다(10장 참조).

 

이 연구는 근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어떤 형태로든 다시 신학을 과학의 여왕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성서의 창조 자료가 시계를 되돌려 다시 중심 위치를 차지할 수는 없다.

대신 창조는 현대 과학과 현대 성서 학자들의 통찰을 통해 해석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해석되어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과학과 성서 연구는 살아있는 하나님이 우리의 중요하고 현대적인 체계와 관계를 맺게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관련된 과학적 개념들을 간략히 살펴본 후에(2장), 창세기 창조 본문과 성서의 창조 주제에 내재된 여러 요소들을 살펴볼 것이다(4 장).

우리는 고대와 현대의 사고방식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강조하며, 창조자료를 이해하기 위해 과학적 체계를 세울 것이다(5장). 

이 체계는 어떻게 성서의 창조 주제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설정하는지를 탐구하는 데에 사용 될 것이다(6장).

이어서 우리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일부 분야들을 성서적 관점에서 연구할 것인데, 그 분야들은 특히 진화(7장), 악의 문제(8장), 먼 미래(9장)이다.

10장에서는 창조의 본성을 위한 성서적 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다양한 주장들을 함께 논할 것이다.


출처 : 성서의 본성(마크 해리스 지음, 장재호 옮김, 도서출판 두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