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창조의 본성(本性)

7장 : 타락

w.j.lee 2024. 7. 26. 09:22

 

 

7장 : 타락

 

과학적 도전들

 

5~6장에서 성서 창조 본문들의 과학적 .신학적 체계를 탐구하면서. 우리는 J문서(야훼)의 창조 이야기(창 2:4b~3:24)를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윈의 《종의 기원> 이래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서 문서의 창조 이야기는 중요 해졌기 때문에 하나의 장으로 다룰 만하다.

 

성서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종종 '신화' 로서 언급한다. 분명 현대 진화생물학은 첫 인간이 태초에, 심지어 다른 동식물들의 창조 이전에 완벽한 형태로 등장했다는 J문서의 사상을 역사적 이야기로 신뢰하지 않는다.

현대 과학자들은 지구상에 인간이 등장한 것이 상당히 최근의 일로, 수억 년에 걸친 생명의 진화 과정의 결과로 이해한다.

반면에 많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근본적인 역사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즉 "역사적 타락(Fall)은 신앙에서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비타협적인 진술은 서양의 전통적 구속 신학에서 강조하는 타락의 중요성으로부터 발생한다. 

만약 다윈주의가 타락이 역사적으로 확언될 수 없 다는 것을 암시한다면, 이때 두 가지 신학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는 악의 문제다. 

다윈주의는 경쟁, 투쟁, 고통, 죽음이 세상에 항상 필수불가결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신학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첫 창조 행위(그리고 계속되는 창조 행위)로부터 발생함에 틀림없다.

이것들은 '필요악', 즉 세계가 세계로서 존재하게 하는 한 부분이다.

심지어 인간의 죄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로 설명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인간 의 죄가 진화 과정에 주입된 실존 투쟁으로부터 발생하는 이기심의 필수불가 결한 결과라면, 그것은 본래의 창조질서에 내재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 문이다.

아담의 타락에서 기인하지 않고도 인간은 항상 죄를 지었고 '타락'했음에 틀림없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졌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가장 이르고 근본적인 논쟁 하나가 되살아나는데, 바로 영지주의 논쟁이다.

 

기원후 2~3세기에 생긴 영지주의 사상은 창조된 세계를 미덥지 않은 하급신의 악한 산물로서 바라보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지녔다. 

구원은 영적 영역을 얻기 위해 물질 세계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레니우스 같은 신학자들은 첫 창조가 "좋았다"(창1:31)는 것을 지적하며 정통 기독교 창조관을 정립했다.

그들은 태초의 창조가 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추론했고, 세계를 창조한 한 분 하나님의 본성을 연구했다.

 

일신론에서 도출 되는 중요한 필연적 결과는 다음과 같다. 즉, 만약 유일한 하나님만 존재하고 이 하나님이 선하다면 하나님은 악의 근원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창조 또한 선해야 한다.

그래서 이 기본적인 창조의 '좋음(선함)'은 창조 교리의 근본적인 전제 중 하나로서 중요시된다.

창조가 "매우 좋았다"(창 1:31)는 P문서 하나님의 선포는 근본적으로 '목적에 잘 맞았다'는 것을 의미했을지 모른다(3장의 "창세기 1장과 하나님" 참조).

그러나 그러한 후대 영지주의적 비판에 직면해서, '좋음' 은 타락에 의해 유입된 악과 죄의 강력한 반대로서 도덕적인 차원을 띠게 되 었다.

'좋음'은 도덕적으로 좋은 것이 되었다.

 

그러나 다윈주의는 이 모든 것에 도전한다. 

다윈주의]문서의 역사성과 타락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며, 오래된 영지주의 논쟁을 되살아나게 한다.

베리와 노블은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이것을 간결 하게 설명한다.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처럼, 죄와 타락의 교리는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다. 창조주는 죄와 악의 근원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세상에 죄가 존재하는 것은 어떻게든 인류가 '타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 사상가들은, 특히 다윈 이래, '타락 '이라 불리는 어떤 사건을 없앤 채, '타락함'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의 하나의 선택인가?

 

상황이 너무 복잡해서 이 질문에 단순히 '예' 혹은 '아니오'로 대답하는 것 이 불충분하다는 것이 이 장과 다음 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다윈주의에 의해 발생된 두 번째 신학적 문제는 그리스도에 관계된다. 스티븐 로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다윈주의를 기독교와 양립 불가능하게 만든다. 신다원주의를 수용하면 부활에 초점을 맞춘 성서 이야기가 앞뒤가 맞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성서는 영웅적 예수가 부활을 통해 자신의 적을 물리친 이야기(고전 15:26)를 말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여기에서 많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다윈주의에 우려를 표명한다.

즉 다윈주의는 그리스도의 성취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듯 보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과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분명 이런 우려는 오직 그리스도가 역전시킬 무엇인가를 갖는 한에서만 타락의 진정성이 중요하게 된다는, 소위 '본말이 전도된' 태도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사역의 관점에 서 타협할 수 없는 지위이기 때문에, 로이드의 해결책은 다윈주의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이 전체적 논쟁이 아마 예수보다 1천여 년 전에 살았던 문서의 저자에게 전적으로 어색했을 것이라는 점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구속에 대한 기독교 논쟁에 관심을 집중하지 않은 채, 창세기 2~3장에 대한 학문적 문헌과 논의에 접근할 수는 없다. 

창세기 2~3장은 대단히 난해한 주제이고, 다윈의 《종의 기원》 출간이래 150년이 넘는 동안 여전히 기독교계의 논쟁거리다.

 

이것은 복음주의 학자들이 최근 출간한 《기독교인들이 진화를 포용해야 하는 가》라는 논문집에서 설명된다.

대답은 전적으로 "아니다!"이다. 비록 일부 대체 방법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저자들은 진화를 거부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다윈에 대한 회의주의는 복음주의 기독교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진화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 있는 진술인 '후마니 제네리스'에서도 상당한 신중함을 보인다.

여기에서 진화는 정죄되지는 않으나 전적으로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후마니 제네리스'는 교황 비오 12세가 1950년 8월 12일에 공포한 교황 회칙(papal encyclical)이다. 주 내용은 가톨릭 교리의 근간을 위협하는 사상들을 경고한 것이다.

 

진화가 과학적 연구에 중요하다고 인정 받기 위해서는 분명 다음과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a) 진화는 오직 인간의 몸 에만 관계되고, 영혼에는 관계되지 않는다(왜냐하면 영혼은 교회의 영역이기 때 문이다).

(b) 진화는 첫 인간으로서의 아담의 근본적 지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여서는 안 되고, 따라서 원죄 교리(즉 아담의 원죄가 세대에 걸쳐 모든 인류에게 전해졌다는 사상)가 지켜져야 한다.

 

이런 태도는 1950년 가톨릭 신학에서 진화에 대한 규제가 상당히 완화되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진화 연구가 활발해짐에 따라, (여전히 최근 《가톨릭 교리문답》에서 드러나는) 역사적 아담에 대한 강조는 이제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어졌다.

요한 바오로 2세 같은 최근 교황들은 '후마니 제네리스'의 권위를 계속해서 존중하는 한편, 진화를 보다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역사적 아담(The Historical Adam)

이런 도전에도 불구하고, 많은 주석가들은 J문서가 참된 인간 역사에 기반한, 은총으로부터의 실제적 인간 타락을 묘사한다는 설명을 계속해서 주장한다.

예를 들면 아담은 창세기 밖의 많은 성서 구절들, 특히 역사 기록으로 이어지는 족보(창 5, 대상 1, 눅 3:38)에서 역사적 개인으로 여겨진다.

수많은 학자들은 우리 모두의 공통 조상인 단일한 개인에 대한 과학적 증거가 있는지를 질 문하며, 인류 진화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려고 노력해왔다.

 

가장 이른 인류 화석은 600만 년 혹은 70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 

보다 진화되고 보다 최근의 다양한 형태들이 발 견되었지만, 그것들은 인류가 아프리카를 건너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이는 180 만년 전경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이후의 화석들이다. 

 

현대 인류(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는 아마도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처음 생겨났고, 점차적으로 이미 퍼져 있었던 호모 에렉투스와 네안데르탈인 들과 교체되며 아프리카로부터 퍼져나갔다.

여기에서 모든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통해 아마도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한 명의 호모 사피엔스 여성에게까지 추적해 올라갈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이 여성은 '아프리카 하와(African Eve)' 혹은 '미토콘드리아 하와(Mitochondrial Eve)'로 불린다.

 

모든 인간 세포는 미토콘드리아를 포함하는 데,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작은 세포 기관으로, 자신의 DNA 일부를 포함한다.

결정적으로 미토콘드리아 DNA는 오직 모계를 통해 서만 전달되기 때문에 생식 과정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고, 따라서 뒤로 추적 해 올라갈 수 있다.

 

이 아프리카/미토콘드리아 하와에 대한 주장이 오해받기 쉽고, 과학자들 이 역사적 하와, 즉 지구의 첫 여성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유전적 증거를 발견 했다고 믿기 쉽다. 

실제로 '아프리카/미토콘드리아 하와'라는 이름이 그런 결론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아프리카/미토콘드리아 하와 처럼 오늘날 살고 있는 많은 자손들의 조상인 많은 다른 여성들이 당대에 살았을 것이다. 이 여성들과 우리 사이의 수천 세대 사이에서 세대의 연결이 남성 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에, 초기 여성들의 미토콘드리아 DNA는 생존하지 못 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예를 들면 한 어머니가 한 남자아이만 갖게 되면, 이 여성의 미토콘드리아 DNA는 그녀의 손주 시대에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프리카/미토콘드리아 하와는 결코 첫 여성은 아니지만, 모계를 통해 현재 살아 있는 모든 인류의 가장 최근 조상이다.

이것은 역사적 하와의 증거가 발견되 었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소 다른 주장이다.

 

비슷한 주장이 모든 현재 남성의 유전형질의 근원으로 여겨졌던 약 10~15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 살았던 남성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이 남성은 아프리카/미토콘드리아 하와때 처럼 많은 사람들이 당대에 살았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조상은 아니다.

그리고 연관된 주장이 진화의 '장애들'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즉, 단지 소수만이 (아마 한 커플 정도) 한 세대에 살았던 글자 그대로 '아담과 하와'의 상황을 거치며, 호모 사피엔스는 초기에 거의 멸종되었다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현대 인류가 궁극적으로 그 당시 지구로 퍼져나갔던 아프리카인들에게서 유래되었 다는 것과 때때로 인구수에 극적인 변동이 있어왔다는 것이 그럴듯해 보이는 반면,

유전적 연구는 아마도 초기 인구가 적어도 수만 명 이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는 역사적 아담과 하와를 초기 인류 가운데에서 찾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반면에 일부 학자들은 역사적 아담을 첫 육체적 호모 사피엔스에서가 아닌, 첫 영적으로 자각하는 호모 사피엔스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일반적으로 역사적 아담을 미토콘드리아 하와 혹은 우리의 아프리카 조상들보다 최근인 약 6,000년 전 신석기 시대로 규정한다.

 

이런 '신석기 아담'은 신석기 시대에 잘 맞는 초기 농업과 목축업 에 종사했던 아담과 그의 직계 자손들에 대한 창세기 2~4장의 설명과 일치한다.

실제로 신석기 아담에 대한 주장이 제기되는 데에 크게 기여한 빅터 피어 스는 아담이 신적 안내를 받으며 농업을 창조하였다고까지 주장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는 별도로 우리는 이 첫 영적으로 자각하는 아담이 누구였는지, 또한 그가 언제 어디에 살았는지를 알 방법이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그 당시 전 지구상에 퍼졌기 때문에 신석기 아담이 모든 현대 인류의 문자적 • 유전적 조상은 아니라는 것뿐이다.

 

오히려 이 주장은 아담이 현대 인류의 영적 조상, 하나님이 불어 넣은 영을 받은 첫 호모 사 피엔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첫 인간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이 아담이 때때로 새로운 형태의 첫 인간인 호모 디비누스로 언급되는 이유다.

그러므로 신석기 아담을 그 시대의 다른 인 간들로부터 특징지을 어떤 과학적 혹은 유전적인 특징이 없다.

즉 이것은 전적으로 신학적인 구별이다.

 

이 신석기 아담 설명은 과학이 접근할 수 없는 영적인 차원으로 아담의 최고 지위를 옮김으로써 역사적 아담에 대한 과학적 어려움들을 피하는 듯 보 이지만, 여기에 신학적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중 첫째는 이 설명이 영지주의와 유사한 이원론적 설명이라는 사실이다.

 

신석기 아담의 조상들과 당대의 사람들(아담과 전적으로 같은 인간이었고, 고고학 자료가 보여주듯이 충분한 종교적 인식을 갖고 있었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이지 않았고, 그러므로 그들은 아담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석기 아담의 조상과 당대의 사람들이 틀림없이 저질렀을 수많은 폭력, 살인, 이기심, 악의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신석기 아담과 같은 '죄'를 범하 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순종한 아담의 행위가 그의 동료들의 불순종 행위보다 상당히 많이 심각한 것이어서, 현대 인류는 그들의 죄가 아닌 신석기 아담의 '원죄'를 유전받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해석은 죄, 고통, 생존 투 쟁이 첫 인간 때문에 편재하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문서에 대한 타당한 해석이 아니다.

그리고 이 해석은 기독교 신학에서 타락의 가장 중요한 특징-고 통, 죽음, 생존 투쟁(즉 자연악)은 하나님이 '좋게' 창조한 세계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죄로 귀결된다-을 실제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가 논의해온 것처럼, 아담의 역사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주의자 들의 소망은 종종 J문서가 사실이기를 바라는 데에 근거한다기보다는 기독교 속죄론, 특히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학에 근거한다.

 

블로처의 설명이 전형적이다.

"어떤 긴장이 있건 간에, 창세기 3장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은 신실한 기독교 신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해석이 아니다.

비역사적 해석은 터놓고 말해서 역사성을 부인하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듯이, 로마서 5장의 바울의 설명과 상충된다. "

 

만약 블로처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것은 바울에게, 그리고 바울이 아담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선 우리가 창세기 3장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는지의 여부에도, 우리가 아담을 역사적 개인으로 받아들이는지의 여부에도, 우리가 타락을 역사적 사건으로 여기는지의 여부에도 성패가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해석상의 문제는 (블로처의 견해에 의하면) 바울이 아담과 타락을 역사적으로 여겼는지의 여부이자, 바울의 속죄 신학이 역사성을 필요로 하는지의 여부다.

우리는 이 문제를 죽음의 문제를 들여다본 후에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J문서와 죽음

바울의 주장에서 아담이 중요하게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세상에 죽음을 가져온 것이 바로 아담의 죄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아담과 같은 죄를 범한 모 든 사람에게 퍼졌으나(롬 5:12), 극적인 반전을 통해 이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모든 사람에게 퍼졌다(롬 5:18, 고전 15:22). 

 

아담은 현재의 모든 사람들을 대표 하고, 그리스도는 부활로 인해 새로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대표한다. 

아담의 죄 된 행위가 죽음을 초래했으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가 생명을 가져 왔다.

이 논리는 J문서 (아마 아담 전승을 위해 바울의 자료가 되었던)가 아담의 죄가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소한 불일치를 제외하면 결함이 없다.

 

J문서를 다시 살펴보자. 

다음이 핵심적인 구절이다.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 2:16~17).

하나님이 분명하게 관계를 설정했기 때문에, 아마 이 구절이 유일하게 바울과 후대 주석가들이 에덴동산에서 불순종한  이야기를 세상에 도래한 죽음에 연결시켰던 구절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이야기의 후반부를 보면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즉 아담과 하와는 죽지 않는다. 

물론 아담과 하와는 뱀에 의해 이명령에 불순종하도록 유혹받는다.

뱀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고, 따라서 그들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창 3:4~5).

두말할 것도 없이 아담과 하와는 뱀의 조언을 따르며 하나님에게 불순종한다.

 

뱀이 예측한 대로 정확히 그 들은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인식이 상당히 높아진 것을 깨닫는다.

실제로 아담은 여러 해 동안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가 (거의 특별하 게) 930살이라는 상당히 많은 나이까지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창 5:5).

 

이것 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신학적 질문들을 제기한다(3장의 "J문 서와 하나님" 참조).

즉 하나님은 허위로 밝혀질 것으로 아담과 하와를 위협하는 듯 보이고, 반면 뱀은 그들에게 진리를 말함으로써 그들이 계몽에 이르게 한다.

심지어 신구약 중간기에도 이것을 해석하기 위한 기발한 시도들이 발견 되는 것을 보면(예, 희년서 4:29~30), 이것이 초기부터 신학적인 문제로 인지되 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에 대해 세 가지 처벌을 내리는데 (창 3:16~24), 그것들 중 어떤 것도 (만약 우리가 창세기 3장 19절을 죽음의 도래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1) 하나님이 땅을 저주 해서, 아담은 음식을 위해 농작물을 열심히 재배해야 하고,

(2) 하나님은 하와 에게 출산의 고통을 더하며,

(3)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낸다.

 

첫 째와 둘째 처벌이 임의적이지는 않은데, 이것들은 남자와 여자에게 주어지는 전통적인 성 역할, 즉 남자는 '생계를 유지하고, 여자는 가정을 책임지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의 질문에 가장 연관되는 것은 세 번째 처벌이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유는, 만약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남는다면, 그들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 "영원히 살 수 있기"(창 3:22)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미 하나는 죽음에 연관되고 다른 하나는 생명에 연관되는 이 두 나무의 이상하고 신화적인 특징들에 주목했다(3장의 "J문서와 하나님" 참조).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실제로 그들을 하나님처럼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창 3:22).

이것은 인류가 복을 받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창 1:26~27)는 P문서의 설명과 대응 된다.

J문서에서 아담과 하와는 복이라기보다 저주를 받는다.

 

게다가 창세기 3장 22절이 함축하는 바는, 만약 그들이 에덴동산에 남아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면, 그들은 정확히 하나님처럼 되어 결국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며,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전에는 불멸하는 존재였는지를 알지 못하고 죽음이 이 지점에서 인류에게 유입되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대신 이 본문은 아담과 하와가 항상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가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만약 그들이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면, 생명나무는 아무 상관 없는 것이 된다.

 

반면에 다시 기원전 마지막 몇 세기로 거슬러가서, 이 이야기의 일부 초기 해석들은 아담과 하와가 원래 불멸하도록 창조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들을 영원히 살지 못하도록 처벌했고,

이로부터 온 인류가 영원히 살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예, 지혜 1:13, 2:23~24, 집회 25:24, 스 3:7, 에녹서 69:11).

 

이 연구는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 2:17)라는 하나님의 선포를 다소 “네가 먹는 날에 너는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듯하다.

그러나 베스터만은 그러한 구약 해석이 "상당히 불가능" 하다고 주장한다.

정말로 그렇다.

그러나 이 해석은 하나님이 더 이상 거짓말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고, 죽음이 그 특별한 순간에 세상에들어왔다는 바울의 해석과도 일치한다. 

예를 들면 이 해석을 받아들이는 지 혜서의 한 구절은 바울의 중요한 구절 중 하나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악마의 시기를 통해 죽음이 세상에 왔고, 그에게 속한 사람들은 죽음을 경험 한다.
(지혜 2:24)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롬 5:12)

 

우리는 바울의 주장을 간단히 살펴볼 것이지만,

당분간 이 후대 해석들과 는 다르게, 창세기 2~3장이 아담과 하와가 원래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었는지에 대해 그 어떤 진술도 하지 않는 대신,

그들이 항상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였음을 암시한다는 것에 주목할 것이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뒤따르는 이야기(창 4~11장)를 참고 해서 창세기 2~3장을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에덴동산의 사건과 매우 잘 연결 되는 이야기들이 연속적으로 있다. 

이 이야기들은 더 심한 불순종 행위들로 인한 복잡하고 처참한 결과들을 말하고 있는데, 즉 인류 사회에서 살인의 시작(4장), 홍수를 초래하는 인류의 전체적 사악함(6~9장), 바벨탑의 실패(11장)다.

여기에서 인류는 지켜야 할 선을 넘은 것으로 보이고,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처럼 신적 영역을 재확인하고, 인류의 한계를 강조하며 반응한다.

베스터만 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분명 이 이야기는 고통, 노역, 죽음을 통한 인간의 한계와 인간의 죄 사이의 연결을 보여준다. 그러나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일컬어지지는 않는다. 금지를 어긴 대가로 예고된 죽음이라는 처벌은 일어나지 않는다.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생명의 자유를 보장받는다.

 

베스터만은 여기에서 창세기 2~3장에 있는 에덴동산 이야기와 창세기 4~11장에 있는 불순종 행위들에 해당되는 중요한 특징을 지적한다. 

인류는 반복해서 불순종 행위 때마다 처벌받지만, 이것은 단지 통과의례였다.

하나님은 위협하기는 하지만 결코 인류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는다.

즉 여전히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돌보며, 복을 베푼다.

 

창세기 5장 과 11장의 족보는 본래 인간 창조 행위에서 하나님의 복이 세대를 거듭하며 계속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다양한 인간의 허물에 관한 이야기들은 역사상 태초의 단 한번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발생하는 하나님에 대한 허물과 인간 서로간의 허물이 인간 본성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보 여준다.

 

베스터만의 요점은 에덴동산 이야기가 역동적인 하나님과 인간의 관 계를 드러내는데, 이 관계는 태초에 대한 분명한 교리적 진술로서 쉽게 단정 될 수 없고, 계속되는 이야기의 중요한 세부 요소들로 가장 잘 표현된다는 것 이다. 인류는 불가피한 존재의 유한성으로 인해 죄와 죽음에 직면하지만 동 시에 자유와 하나님의 복을 누린다.

 

그러므로 비록 J문서의 에덴동산 이야기가 유일한 결정적 타락과 세상에 도래한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기독교 신학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지만, 이 해석은 특히 창세기 4~11장의 전반적 상황에서 볼 때, 이 본문에 대한 전적으로 타당한 이해는 아니다.

 

 

바울과 죽음

창세기 1~11장을 제외하고, 구약 성서는 아담과 하와에 대해, 그리고 특히 바울에 의해 확고해진 주제, 즉 에덴동산 이야기가 죄와 죽음이 세상에 유입된 중대한 사건을 말한다는 주장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는다.

반면에 기원전 마지막 몇 세기에 기록된 유대 문헌들은 이 주제를 알고 있는 듯하고, 에덴 동산 이야기가 분명한 은혜로부터의 타락임을 말한다.

 

"오 아담이여, 당신은 무엇을 했단 말입니까?

비록 죄를 범한 사람은 당신이었지만, 타락은 당신 혼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자손인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만약 불멸의 시간이 우리에게 약속되었으나 우리가 죽음을 야기하는 행동을 해왔 다면, 그 약속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에스라 4서 7:118~119).

 

기원후 1세기로 추정되며 바울과 거의 동시대인 이 구절은 두 가지 흥미로운 특 징을 드러낸다(에스라 4서 3:21~22 참조).

첫째, (신약 성서에 등장하지 않는 듯한) '타락'이라는 용어를 명백하게 사용한다.

둘째, 이 본문에 아담의 역사성에 대한 모호함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질문의 첫 부분에서는 아담이 마치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인 것처럼 진술된다("오 아담이여").

 

그러나 세 번째 문장에서 아담은 인류, 즉 '죽음을 야기하는 행동을 한 우리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유사하게 두 번째 문장에 의하면, 비록 죄를 지은 사람은 '아담'이지만, '타락'은 그의 자손들에게도 해당된다.

다시 말하면, 이 구절은 원죄의 개념을 아는 듯 보이 지 않고, '아담'이 죄인이 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도 자신들의 행위로 인해 죄인이 됨을 암시한다.

 

서양 구속 신학의 근본인 원죄 개념은 대체로 기원후 5세기 초에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를 비판하며 시작되었다.

펠라기우스는 죄가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쳤다.

죄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하지만, 고의적이며 의도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누군가 는 아담의 불순종한 본보기를 따르기로 선택할 수 있고, 혹은 누군가는 예수의 본보기를 따르기로 선택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원칙적으로 죄가 없는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죄가 확산되는 것이 보편적인 상태는 아니다.

반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긍정적인 평가에 동의할 수 없었는데, 그는 인간이 죄 없이 살 수 없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 총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고 믿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인간이 똑같 이 아담의 첫 불순종으로 인해 원죄를 갖게 되었고, 원죄가 인류 개개인의 잘 못이 아니라 단지 아담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전 인류를 타락시켰다고 주장했다.

결정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5장 12절을, 오역된 라틴어 번역본으로 이해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부분을 "아담 안에서(in whom) 모두가 죄를 범했다”라고, 즉 원죄는 세대에 통해 어떻게든 유전되기 때문에 모든 인류는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는다고 읽은 반면, 그리스어 본문에서 이 구절은 “모두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그리스어 본문에서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아담처럼 우리 모두도 죄를 범하기 때문에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죄가 우리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어떻게든 유전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란이 되는 사상을 주장하는 듯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여전히 우리의 죄와 죽음의 인과 관계를 주장한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모든 현대의 생물학적 설명, 즉 죽음은 전적으로 생명의 자연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결과라는 설명에 위배된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표면적으로 죽음은 본래 인간이 영원하지 못함, 즉 우리 모두가 글자 그대로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 을 말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바울의 '죽음' 담론을 영적인 죽음으로 해석함으로써 과학의 도전을 피하고자 했다.

죄는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것, 즉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신 학적 범주인 것처럼, 이 이해에 의하면 '죽음' 또한 육체적 죽음과 상관없는 신 학적 범주가 된다. 

 

즉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분리를 의미하며, 아담 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을 때 상징적으로 경험한 분리에 관련된다. 

비슷하게 핀레이(Graeme Finlay)와 패트모어(Stephen Pattemore)는 '죽음'과 '생명’이 대조적으로 묘사되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생명이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생명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에, 실제로 신학적 범주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이 육체적 죽음이 아닌 신학적 죽음 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결론 내린다. 

알렉산더는 이것을 신 석기 아담 모델에 연결시킨다.

즉 이 역사적 아담이 첫 영적으로 자각하는 인 간으로 간주된다면(비록 그가 결코 첫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고, 육체적으로 죽은 첫사 람이 아니더라도), 이때 아담의 타락은 첫 영적인 죽음으로 묘사될 수 있다.

 

이런 '영적인 죽음' 이해는 현대 생물학의 도전을 적절하게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기에 신학적인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이해는 신석기 아담 모델과 유사한 이원론, 즉 바울과 상당히 다르며 고전적 영지주의와 매우 유사한 이원론을 초래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는 우리의 일상적 물질 영역에서 발생하는 죽음이 아닌, 오직 영적인 각성과 영적인 죽음이 구속의 측면에서 중요하게 고려된다.

다시 말하면, 자연악과 우리 물질 세계의 고통은 구속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핵심인 새로운 창조는 전체적으로 영적인 영역(순수한 영지주의)이거나, 아니면 이 세상의 물리적 고통과 진화적 투쟁이 억제되지 않고 계속되는 영역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바울이 이런 이원론적 시각을 가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로마서 8장의 설명에서 바울이 새로운 창조를 단지 인간 영혼만이 아닌, 전 물리 우주의 구속으로 보았다는 것이 분명하다(롬 8:19~21).

바울은 분명 '죽음'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분리의 상징으로 사용할 수 있었고, 이 상징은 신약 성서의 여러 곳에 등장한다(예, 눅 15:32, 롬 6:2~11, 엡 2:1, 2.5, 골 2:13).

그러나 문맥상 '죽음'이 상징으로써 언급되는 때는 항상 분명하며, 로마서 5장의 경우는 결코 상징이 아닌데,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문자적 죽음을 언급하며 '죽음'을 말하기 때문이다(8~10절).

 

마찬가지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죽음'을 신학적 생명(즉 부활)과 병렬하는 듯 보이지만, 이 구절의 전체적 논리는 예수가 부활하기 전에 육체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바울이 여기에서 영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더라도, 이때 이 죽음은 동시에 육체적 죽음을 의미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은 현세 생활의 마지막이자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미하는데, 구약 성서에서 종종 스올(Sheol)과 '무덤(Pit)'으로 언급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예, 시 143:7), 죽음을 하나님과의 분리로 이해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런 사고에 근거하면 영적·육체적 죽음은 모두 오직 예수의 부활에 의해서만 벗어날 수 있다.

예수의 부활은 비록 신비에 싸여 있지만, 영적·육체 적 변화를 의미한다(고전 15:35~51).

 

그러므로 바울에 대한 '영적인 죽음' 해석은 과학에 의해 제기되는 어려움 들을 피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신학적 문제들을 발생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 5장 12절에서 죽음을 말할 때, 그가 실제로 죄로 인해 육체적 죽음이 야기된다고 생각했다고 결론 내려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아담으로부터 세대를 통해 유전된 '원죄'를 믿지 않는 듯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바울의 요점은 온 인류가 아담과 같은 방식으로 죄를 범하고, 따라서 온 인류는 아담과 같은 방식으로 죽는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이 이해가 J문서를 다소 세밀하지 않게 이해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실 바울이 우리에게 문서를 ‘설명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바울은 아담을 세밀하지 않은, 즉 비유적인 방식으로 언급한다. 

다시 말하면 아담은 전 인류 세대에서 그리스도 가속량했고 역전시킨 모든 것의 대표적 상징이다.


이제 아담의 역사성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스티븐 로이드 같은 보수적인 학자들은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바울의 핵심 논의에 역사적 아담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바울의 요점을 오해하는 것이다.

바울이 아담을 역사적 인물로 믿었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만, 바울의 논점은 아담의 대표적 중요성에 있다.

 

아담은 예수가 보여준 순종과 생명에 대조적으로,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죄와 죽음을 대표한다(롬 5:17~19).

이런 원형으로서의 아담 이해는 최근 연구에서 두드러졌다.

심지어 역사적 아담과 하와를 강력이 주장한 콜린스(C. John Collins, 1954~) 같은 전통주의 학자들도, 아담과 하와가 실제로 첫 인류였는지의 여부 같은 역사적 세부 사항들을 넘어, 인류를 위한 그들의 대표적 상징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모델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비록 많은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아담의 역사성에 대한 바울의 생 각을 중요한 문제로 여기고 있지만, 이것은 실제로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아니다.

요약하면 역사적 아담과 하와를 논의하는 것은 바울의 요점을 파악 하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아담을 명백하게 상징 (모형, 롬 5:14)'으로써 언급한다는 것이다.

당대의 다른 유대적 해석과 마찬 가지로, 바울은 아담을 '모든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하는데(우리 각자는 우리 자 신의 아담이 되었다 - 바룩2서 54:19) 

 

따라서 우리 모두는 똑같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필요로 한다.

분명 바울은 아담을 죄와 죽음의 원조로 보지만(롬 5:12), 모 든 세대는 예외 없이 전부 자신들의 행동으로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담을 특정한 인물로 역사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담을 그리스도에 대조되는 모형으로서 간주하면서, 그리스도의 중요성을 보편적으로 이끌어내려 하 는 것이다.

 

제임스 던이 지적한 것처럼, 고대 필사가들은 우리가 그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정교하고 예리하게 고대의 상징들과 신화들을 이해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고대 사고방식, 5장 참조)'으로, 즉 모든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했다고 너무 쉽게 규정하곤 한다.

 

만약 바울의 속죄 신학에서 대체로 아담이 예수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상 징으로서 사용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면 이 논의의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해서,

우리는 J문서의 역사성에 매이지 않고 성서 전통을 존중하는 진화 신학을 발 전시킬 수 있다.

 

반면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 모델은 역사적 아담을 필요로 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아담의 역사성을 유지하기 바라는 보수적인 학자들이 로마서 5장을 바울 전통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에서 이해한다는 것 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중요한 연구는 역사적 타락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 논의를 상당히 약화시킨다.

그렇지만 이 연구가 결코 모든 난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죄와 육체적 죽음을 결부시키는 바울의 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 사상만큼 상당히 다윈주의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어떻게 악과 죄가 하나님의 '좋은' 세계의 한 부분이 되었는지를 신학적으로 설명할 필요 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 개념을 보다 철저히 탐구해야 한다.

 

 

역사적 타락?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이야기는 기독교 신학에서 죄와 악의 역사적 근원으로서 중요할 수도 있지만, 구약 성서는 이에 관심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악의 근원에 대한 문제는 그리스도가 이것을 해결할 때까지는 거의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구약 성서는 죄와 악이 사탄 그리고/또는 인간에 의해 하나님의 '좋은' 창조 안으로 유입된 일종의 우주적 감염(타락함)이라는 (타락에 대한 기독교 논의에 넓게 퍼진) 사상을 포함하지 않는 듯하다.

 

초자연 적인 악한 세력들은 구약 성서에 매우 자주 등장하지만, 그것들은 종종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것들이다(예, 왕상 22:21~23의 '거짓말하는 영' 혹은 삼상 16:15~16 의 사울을 괴롭히는 악령).

 

신약 성서는 악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색을 위한 보다 풍부한 근거를 제공 한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 거의 거론되지 않는 묵시적 분위기가 주입된 공관 복음서에서, 예수는 종종 사탄과 악령들과 싸운다. 

 

마찬가지로 바울 서신과 신약의 다른 부분들(특히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에 반대되고(예, 엡 6:12)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예, 갈 4:3, 골 2:8) 영적인 세력들에게 경고한다. 

죄는 그 자체가 노예로 만들고 지배하는 우주적 힘으로 일컬어진다(롬 6:12~23, 히 3:13). 

 

두 영적인 영역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선악의 이원론(한편에는 하나님, 다른 편에는 악 한 세력)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사실상 악한 세력의 영역에서 일상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역으로 옮겨지는데,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는 위험 가운데 있다(예, 고전 6:9~20, 엡 2:1~3, 골 1:13).

 

이런 묵시적 이원론은 분명 기독교적이지 않으며, 이에 관련된 사상은 사해 문서와 유대 묵시 문헌에 등장한다.

이 묵시적 이원론은 역사적 타락을 고수하고자 하는 현대 보수적 흐름과 맥을 같이하는데, 이 세계관의 흥미로운 특징은 악을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천사들의 초자연적 타락의 결과'로 여기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에녹서 6~36장은 홍수 이야기 도입 부분의 난해한 구절 (창 6:1~4)을 '파수꾼들', 즉 인간 여성들과 결혼하여 악한 거인들을 낳은 타락한 천사들에 대한 전설로 발전시킨다.

 

기독교 전통은 한때 하나님을 예배하는 좋은 천사였던 사탄이 다른 악한 천사들과 함께 신적 권위를 찬탈 하고자 시도했다가 내쫓긴 '루시퍼의 타락'(사 14:12~15)의 면에서 이런 초자연적인 타락을 보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신약에서 미가엘과 하 늘의 용 사이의 전쟁을 가장해서 등장한다.

즉 미가엘은 승리하고, 용과 용을 따르는 천사들은 땅에 내팽개쳐진다(유 6, 9, 계 12:3~4, 7~9).

물론 이런 초자연적 타락 이야기들은 역사적 타락과 정확히 같은 신학적 목적, 즉 하나님의 선성(goodness)을 보존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역사적 타락은 하나님이 역사적 악 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 천사들의 타락은 하나님이 초자연적 악 의 근원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악과 죄를 형이상학적 실재로 보는 신약 성서의 보편적 관점에 비춰보면, 악과 죄를 역사적 실재, 즉 역사적 타락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보고자 하는 현대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바람을 성찰해보는 것은 흥미롭다.

형이상학적 범주와 역사적 범주가 서로 배타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범주들은 서로를 보충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고, 둘 다 세상의 악의 근원을 하나님으로부터 구별함으로써 신적 거룩함을 유지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다소 과도하게 악과 죄를 역사적 실재로 만드는 경향이 있지만, 로마서 5장의 난해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신약 성서에서 이것이 거의 드러나지 않거나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타락 개념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상대적 무관심은 기독교 신학이 실제로 그것을 그렇게 강하게 주장할 필요가 있는지를 우리에게 물을 수도 있다. 

이 질문을 직접적으로 제기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 문제를 감안해 역사적 타락 모델을 수정하고자 하는 두 가지 시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타락에 대한 과학적 문제들을 피하려고 시도하는 방법이자, 죄와 악에 대한 형이상학적이고 역사적인 접근을 보완하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타락을 결국 모든 기독교 신학이 추구하는 시간적 영역인 종말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토머스 노블은 끝, 즉 종말의 시간과 상태는 세속적 과학 탐구의 관점으로 알 수 없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과학이 정의상 당대에만 관련되기 때문이다.

 

과학은 정의상 다음 세대를 들여다볼 수 없다. 대신 새로운 창조는 계시에 의해 알려짐에 틀림없다.

노블은 이것이 타락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속 과학적·역사적 탐구는 오직 사물들이 항상 있어 왔고, 항상 있게 될 것을 가정하며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 를 예상하는데, 사물들은 “이 악한 세대"(갈 1:4)에 존재한다.

 

이것은 과학과 역사가 방법론적으로 미래의 종말을 예측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타락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과학과 역사는 악한 세력에 복종하는 현재 상태가 일반적이라는 것을 넌지시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블에 따르면 타락은 오직 종말의 관점에서 역사적 실재로써 명백해질 것이고, 현재로서는 타락이 오직 계시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아무리 많은 보수적인 신자들이 타락을 역사적 사실로 주장할지라도 타락은 신앙에 의해 확언되어야 한다. 

그 러나 타락에 대한 과학적·역사적 어려움들을 피하는 이 기발한 방법의 가치는 인정되어야 한다. 

 

만약 신석기 아담과 '영적인 죽음' 설명이 난제들을 과학이 다룰 수 없는 영적인 영역으로 이동시켰다면, 타락에 대한 노블의 종말론적 설 명은 난제들을 과학이 도달할 수 없는 시간적인 영역으로 이동시킨다. 또한 이 해석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타락의 개념을 보존하는 것보다 어떤 해석상 의 가치를 실제로 제공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결국 우리가 계시에 의존하는 한, 이 해석은 타락이 어떻게든 일어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 외에, 타락 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혹은 타락이 언제 발생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것을 말하지 못한다.

온 인류가 창조된 이래 죄를 범해왔다고 말하는 것이 더 단순해 보 이지 않는가?

이 경우에 또 다른 가능성이 제기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타락이 인류 의식(특히 양심)의 시작을 말하는 신학적 명칭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이 진화된 원숭이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증거가 있지만, 우리는 양심과 연결되는 고차원의 죄의식과 수치심을 가진 존재가 오직 인류(hominids, 아마 오직 인간)뿐이라고 가정한다.

의식은 인간 진화 과정 중 역사의 한 순간에 발생했음에 틀림없다.

생물학은 양심의 기원을 정확히 보여줄 수 없을지 모르지 만, 우리는 양심이 수천 년 동안 인간 상태에 있어서 심리학적인(말하자면 영적 인) 실재였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인간 양심의 기원을 말하는 것으로 꽤 단순하게 정리될 수 있는데,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상징적으로 먹은 때가 깨달음의 순간이 된다.

비록 인류(혹은 인류 초기 조상들)는 이기적인 행동과 폭력을 이전부터 행했음에 틀림없 지만, 타락은 그들이 처음으로 자신들의 행동에 죄의식과 수치심을 경험하기 시작한, 즉 양심의 불꽃이 발생한 때에 진화의 무대에 등장했다는 말이다.

 

솔직히 이 타락 모델은 진화 생물학과 충돌하지 않는 유익이 있을지 모르나, 여전히 수많은 문제들이 있다.

 

첫째, 타락이 전적으로 인간의 문제로 보인다는 사실은 인간의 구속이 '타락의 문제, 즉 동물과 인간 세계의 자연악과 고 통의 문제를 거의 완화시키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악은 그리스도에 의해 역전될 수 있지만, 자연악은 그럴 수 없다.

 

둘째, 우주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은 '객관적' 타락이 아니라 '주관적' 타락(개인적 양심의 각성)이다.

 

셋째, 이 타락 모델은 첫 인간의 불순종을, 오직 그리스도를 보낸 하나님의 결단에 의해서만 구속될 수 있는 중대하고 치명적인 실수로 보는 전통적 해석에 반대된다.

그러나 이 모델에서 타락은 앞으로 향하는 긍정적인 진화의 단계, 즉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역전되어야 하는 엄청난 실수 가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인식과 지적 능력의 중대한 발전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래쪽으로의 타락이라기보다 '위쪽으로의 타락'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타락에 대한 이 진화 모델은 전통적인 묘사에서 제기되는 과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반면, 그리스도를 다소 불필요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요약

역사적 타락의 교리는 많은 분야(특히 진화 과학)에서 논란이 되지만, 특히 그리스도의 중요성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기독교 전통주의자들에 의해 핵심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저자들이, 비록 죄와 실패가 인간의 보편적 특징이라는 것을 확신했지만, 역사적 타락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거나)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사실 타락에 대한 대부 분의 논의는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이 서양 신학을 지배하면서 시작되었고, 특히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에 반대하며) 원죄로 타락한 존재를 주장한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특히 진화 생물학의 도전에 직면해서,

타락에 대한 아우 구스티누스적 관점이 불충분하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타락의 개념을 재평가하려 시도하는데,

이는 특히 우리의 구약과 신약 고찰로 인해 성서에서 타락의 개념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타락의 중요성은 고통, 악, 죽음의 역사적 시작과 함께 인간의 자유의지 에 연결된다. 

이것은 로마서 5장이 너무 중요한 이유인데, 특히 로마서 5장은 구속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 인과관계의 어떤 재평가도 관련된 과학적 난제들을 명백히 설명해야 하지만,

20세기 역사가 모두 너무 잘 보여준 것처럼, 결코 잔인한 악을 범하는 인간 자유 의지의 기능을 덮어두어서는 안 된다.

 

일 부 해결책들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들은 인간악과 함께 자연악의 문제를 씨름하는 수평적인 접근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장을 통해 이 논의를 이어갈 것이다.


출처 : 성서의 본성(마크 해리스 지음, 장재호 옮김, 도서출판 두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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