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창조의 본성(本性)

10장 : 결론

w.j.lee 2024. 7. 26. 06:55

 

 

10장 : 결론

 

과학과 창조의 벅잡한 관계

 

 창조는 성서에서 많은 다양한 의미의 층을 가진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지만, 우리는 현대 과학이 여기에 너무 피상적인 수준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성서 본문에서 고대 과학관의 자취를 정확히 묘사할 수 있다.

현대 세계관으로 인해 성서의 지위는 의문시되고 있지만, 성서에 묘사된 고대 과학관은 여전히 타당하고 폭넓은 신학적 목적을 제공한다. 다시 말하면, 성서의 창조 본문들이 과학적 견지에서 상당히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사실이,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에 대한 성서 본문의 다양한 묘사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사실 현대 과학은 이 관계에 대해 거의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성서는 과학의 환원주의적 경향과는 반대로 상당히 포괄적인 접근을 필요로 한다.

성서 창조 본문들은 거의 하나의 의미, 하나의 해석, 또는 하나의 설명으로 명확하게 정의될 수 없고, 분명 물리적 실재에 관해서만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서로 공존하는 수많은 유형의 창조 본문들을 묘사했 다는 사실(예를 들면, 일부 유형은 신화적 언어로 창조를 말했고, 다른 유형은 신적 지혜 를 말했다)은 성서가 기본적으로 '다문화주의'임을 나타낸다.

 

반면에 현대 과학은 일부 오래된 창조 해석들이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성서 해석에 도움을 주었다. 

적절한 예는 창세기 2~3장을 타락 이야기로 보는 전통적인 서양 기독교의 이해 방식이다(7장 참조). 

진화 생물학은 이런 이해 방식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동시에 성서 본문의 난 해한 부분들을 더 잘 평가하게 이끄는, 창조와 구속에 대한 참신한 현대 신학을 고취시켰다.

 

또한 현대 우주론과 생물학이 우주의 진화 관점을 강조한다 는 사실은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일치된 신학적 관점에 대한 보완으로서 계속적 창조 사상을 새롭게 평가하도록 이끌었다(6장 참조).

유사한 방법으로, 우주의 먼 미래에 대한 과학적 예측은 성서의 묵시적 본문과 새로운 창조 사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이것을 세 번째 범주인 오랜 것으로부터의 창조로 해석했다(9장 참조).

 

비록 과학이 성서의 창조 사상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과학이 성서의 창조 사상을 새롭게 평가함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감당한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결국 성서의 창조 본문들은 세계의 물리적 구성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지만 하나님과 세계의 창조적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누구인가?

 

단일성과 다양성

 

무로부터의 창조, 계속적 창조, 오랜 것으로부터의 창조 사이에 흥미로운 일관성이 있다. 

이 세 창조 범주들은 성서의 창조 주제와 공명을 이루고 있고, 과학적 '설명'에도 잘 맞지만, 물리적 설명의 범위를 넘어서는 신학적 깊이가 있다. 

뿐만 아니라 각각의 범주가 표면적으로는 어떻게 창조가 발생하는지를 묘사하지만 실제로 각 범주는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를 묘사한다.

 

•무로부터의 창조 :

빅뱅 모델과 연결되지만 우리는 이 범주가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진술로 가장 잘 표현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것이 우리가 이 범주를 성서의 창조 신학에 연결할 수 있었던 중요한 증거였다.

그렇지 않으면 창조 신학이 창조가 '무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상에 대한 명백한 인식을 보여주지 못하게 된다.

성서의 창조 신학은 종종 하나님이 세상과 초월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표현하는 데, 창세기 1장이 이에 대한 좋은 예다.

 

•계속적 창조: 

우주론적·생물학적 진화와 상당히 잘 연결되고, '돌연변이'에 대 한 과학 사상과도 잘 연결된다. 

그러나 이 범주는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표현으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을 인간, 그리고 동물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분으로 묘사하는 성서 본문들이 이 관점을 가장 잘 설명한다.

 

•오랜 것으로부터의 창조: 

물리 우주론, 특히 우주의 종말에 대한 논의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 범주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구속적 창조 사역을 묘사하는 용어이고, 이것은 이 범주가 어떻게 예수의 부활에, 즉 기독교 신앙에서 최고의 구속적 행위에 가장 잘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새로운 창조' 범주에 관계된 수많은 성서 본문들(특히, 히브리 예언서들)이 있는데, 이 본문들은 사회적·정치적 실재들을 위한 일종의 '오랜 것으로부터의' 창조를 묘사한다고 일컬어질 수도 있지만, 반드시 현 물리 세계의 문자적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범주들은 편리하기는 하지만 성서에 등장하는 하나님에 대한 매우 미묘하고 복잡한 묘사를 단순화시킨다.

이 범주들이 또한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초월'과 '내재'와 같은 중요한 신적 속성들도 마찬가지 로 그렇게 보일 수 있다.

이 범주들과 용어들은 다양한 성서 본문과 연결될 수 있지만, 성서는 이에 상응하는 편리한 용어 자체를 갖지 않는다. 

성서는 하나님을 일관성 있게 말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묘사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대 한 묘사는 정교하고 다양하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은 우리가 창조 언어를 이해 하는 방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성서에서 단일한 창조 신학을 말하는 것이 부적절하고, 대신에 성 서의 창조 신학들, 성서의 창조 관점들로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에 주목 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또 다른 역설적 표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서의 창조 이야기가 하나님의 본성을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는 것을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성서가 하나님의 초월적 창조 사역을 말할 수 있 다면, 동일하게 하나님의 내재적 창조 사역을 이어서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의 구속 사역 또한 말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보통 다양성을 단순화하여, 즉 복잡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단순화된 모델을 이용하여 설명하려 한다는 것 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 역설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서의 하나님 묘사는 과학적 설명에 저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단순성에도 상당히 저항한다.

성서의 하나님은 단일할 수도 있지만, 성서의 증거를 무시하거나 잘못 전하지 않고는 손쉽게 통합되거나 단순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서의 창조 이야기가 단일하면서 동시에 다양하게 간주되는 것처럼 성서의 하나님도 단일하면서 동시에 다양하다.

 

이 말은 창조의 세 범주가 하나님이 행한 서로 다른 유형의 창조 사역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서에서 묘사된 하나님은 단 하나의 행위를 하지만, 역설 적이게도 이것은 다른 차원으로 받아들여지거나, 상당히 다르게, 즉 우리 생각과 양립할 수 없게 분리되는 듯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무로부터의 창조, 계속적 창조, 오랜 것으로부터의 창조 사역은 서로 다른 사역이 아니라 하나의 창조 사역이다.

동시에 이것들은 단일한 하나님의 다양성을 나타낸다. 

 

이것이 삼위일체 신관(한 분 안에 세 위격이, 세 위격 안에 한 분이)을 생각 나게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인식되고 구별되었던 것은 바로 창조와 구속의 무대에서 행해진 하나님의 다양한 사역 의 관찰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 사역에 대한 세 범주가 삼위일 체의 세 위격과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삼위일체 사상의 발전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구별이다.

현대 신학은 모든 신학 사상의 고향이 삼위일체 교리이며, 모든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다양한 적용이라고 주장하면서, 삼위일체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삼위의 구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주장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삼위일체 신관을 통해 우리가 창조, 과학, 성서에 대해 말했던 것 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삼위일체, 과학, 창조

 

4장의 “창조와 삼위일체 신관의 시작"에서 우리는, 시대착오적이라는 문제가 제기됨에도 불구하고, 성서 창조 자료의 삼위일체적 이해를 발전시키는 것이 긍정적인 해석학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삼위일체적 이해는 성서 본문이 기독교의 근본적 근거로 간주되는 정경의 맥락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신적 초월성과 내재성의 역설적 균형을 지닌다.

그러므로 창조 자료의 삼위일체적 이해는 우리가 현대 세계에 만연한 이신론에 반대하여 성서의 유신론적 입장을 유지하게 도와준다.

 

삼위일체 창조관에는 두 가지 이점이 있다.

 

첫째, 삼위일체 창조관은 성자의 창조적·구속적 역할을 동시에 강조하고 (골 1:14~15), 그래서 창조는 창조의 완성, 완전함과 떨어져 이해될 수 없다. 

신정론의 문제는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고통이 없을 것"(계 21:4)을 말하며 종말론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둘째,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눈에 보이게 되었고 육체를 갖게 되었다. 

즉 성육신한 하나님은 결코 만질 수 없으며 비인격적인 힘이 아닐 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철학적 개념도 아니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 즉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단계에서 피조물과 친밀하 게 연결되었다.

 

동방정교회 신학에서 종종 강조되어온 것처럼, 이것은 평범한 물질과 평범한 피조물이 '신격화되거나 '신성화될 수도 있다는, 즉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영화롭고 완전하게 될 수도 있다는 의미에 이른다.

다시 말하 면 우리가 하나님의 실제 존재 안에 받아들여져,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벧후 1:4) 된다.

그리스도의 변용(막 9:1~10, 벧후 1:16~18)과 부활은 우주의 한 부분인 그리스도의 물질적 육체가 이미 종말론적 과정에 참여했다 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삼위일체 관점은 또한 창조된 세계를 보다 정교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서로 역동적인 관계를 지닌 세 신적 위격을 강조하는 '삼위일체의 사회적 교리'는 최근 몇 십 년간 상당한 신학적 흐름을 주도했지만, 이것은 틀림없이 교부(敎父)적 사고방식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의 장점 중 하나는 인간뿐만 아 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 위격의 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창조된 우주의 관계를 강조함으로써(아마 상호의 존적인 관계에까지, 4장의 “창조와 이야기" 참조), 비인간 피조물이 하나님에 대한 스스로의 창조적 책임을 갖는 동시에 스스로의 자유를 갖는다는 사실을 강조하 고 있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전 피조물이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하는 성서 본문(예, 사 55:12)을 지지하고자 한다면, 이런 비인간 피조물에 대한 자유의 강조는 필연적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전 우주가, 단순히 존재하기 때문에, 마치 살아 있는 듯 예배한다고 여긴다. 따라서 전 우주는 더 이상 과학으로 설명되거나 과학 기술에 의해 이용되는 순수 물질 상태로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또 하나의 핵심적인 요점으로 이어진다. 

즉 성서의 창조 본문들은 이 본문들이 찬양과 경배의 범위 밖에 있을 때에는 충분히 이해될 수 없는데, 이 범위는 전 우주를 순수한 지적인 논쟁으로써 취급하는 사람들이 종종 이해하지 못하는 범위다(4장의 "결론" 참조).

 

그러므로 만약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자유로운 피조 물로 창조되었고, 따라서 인간이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이것은 전 우주에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은 우주가 창조된 목적대로 되도록 전 우주에 자유와 자치를 부여했지만, 특히 계속해서 창조하고 새롭게 하면서 우주를 지원한다.

이것은 관계적 용어라서 과학의 언어로는 잘 해석되지 않는다.

사실 아마도 과학의 언어로 잘 해석되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

 

왜냐하면 세상에서의 신적 행위를 과학적 언어로 말하려는 시도는 ‘틈 새의 신' 접근법으로 빠지거나, 특히 우리가 신적 행위를 '개입'으로 말할 때, 난해한 이신론으로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신적 행위의 묘사가 어쨌든 은유적이라는 것을 기억할 때, 과학적 묘사는 관계적 묘사를 할 수 있는 내재된 권위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즉, 이 경우는 그야말로 은유가 가장 성공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다.

분명히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고려될 때, 관계적 은유는 과학적 은유보다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를 더욱 쉽게 묘사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묘사할 때 오직 관계적 용어만 사 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학적 용어를 사용하면 하나님이 신실하고, 변치 않으며, 의존할 만하다는, 즉 '한결같은 사랑으로 가득 차고, 법칙과 질서를 기뻐한다는 오랜 신학 사상(예, 출 34:6~7)을 보충해줄 수 있다. 

하나님의 속성의 한 부분인 법칙과의 친밀함은 성서에 지속적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특히 '모세의 율법'에서뿐 아니라(4장의 “창조와 이야기" 참조) 노아, 아브라함, 다윗과의 언약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보면, 자연 법칙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일컬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

자연법칙은 일부 물리학 분야에서 실제로 신적 지위를 부여받았고(2장의 "자연법칙" 참조), 하나님의 본성을 반영하는 창조가 질서정연하고 '좋다'는 것 을 말하는 기독교 창조 교리로부터 현대 과학의 경험적 방법론이 나왔다고 논의되고 있다.

 

요약하면, 현대 과학의 전제와 유대교/기독교의 신적 입법자는 아주 많이 비슷하다.

자연법칙이 반드시 신을 제외하고 창조된 이론일 필요는 없을뿐더러, 자연법칙은 신의 본성 자체가 현현한 것일 수도 있다.

 

 

우연, 법칙, 우발성의 재고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연법칙'이라는 포괄적 용어에는 수많은 중요한 세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통계적(즉 확률적)으로 접근해보면 법칙 같은 행위로 간주될 수도 있는 임의 사건의 중요성도 포함 된다.

현대 과학은 자연 세계에 우연과 필연의 복잡한 상호작용이 있다고 간주하고, 각각의 과학 분야들은 우연과 필연의 중요성을 다르게 분석한다.

 

이것은 신관을 설명할 때 상당히 중요하다. 

우리가 세계 구성에 있어서 우연보다 법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면 우리는 초월적 입법자, 그리고 심지어 이신론의 신 부재와 신학적으로 유사한 결정론적 세계관을 강조하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법칙보다 우연과 우발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면 우리는 창조의 중심에 있는 참신함과 새로움을 강조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의 신관 은 변하게 된다.

그러나 우연을 강조하는 관점은 신학계에서 잘 받아들여지 지 않았다.

또한 진화를 다소 목적론적 용어로 해석하며, 진화 생물학에서 말하는 우연의 중요한 역할이 경시되는 것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창조에서 우연이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 모델과 성령의 내재적 사역에 비교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우려는 아마 잘못된 것이다. 

창조된 세계가 근본적인 창조적 자유를 부여받았다고 여겨질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결정론적 관점이 지배했을 것이다.

인간과 피조물들이 자유 의지를 소유하는 것은 더 이상 (결정된 우주에서 제기되는) 철학적 난제가 아니라, 세계가 자유로이 열매를 맺도록 창조하고 지원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시다.

 

이 두 관점이 양립 불가능하다고 여길 필요는 없다. 

이 관점들은 세계가 주어진 법칙의 범위 내에서 우연에 의해 진화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양립할 수 있다.

이런 세계는 '통제'되지 않은 채 전적인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다.

이것은 창조주-피조물의 관계에 의해 가능한데, 이 관계는 성서에서 종종 사용되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예, 사 66:13, 눅 11:11~13)와 다르지 않다.

 

스스로 진화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든 하나님은 자녀가 자유롭고 창조적인 놀이를 통해 배우고 성숙하도록 하는 부모와 비슷하다.

경계가 있지만 경계는 창의성을 제안한다기보다 고무시킨다.

즉 경계는 적응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정리해보면 단도직입적으로 삼위일체 신관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런 다양한 신관을 동시에 명심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우연이 창조 신학에 통합되는 것이 어렵다는 보편적인 시각과는 달리, 우연은 창조 과정의 우발성을 강하게 고무시키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우리는 2장에서 우발성의 두 유형을 강조했는데, 하나는 우선 신학적으 로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하고, 다른 하나는 과학적으로 우주가 계속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한다.

6장에서 우리는 계속적 창조 를 탐구했고, 비록 이 범주가 과학적(진화적) 우발성과 닮았지만, 신학적 범주 이므로 다른 종류의 진술을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비록 신학적 우발성과 진화적 우발성이 서로 유사하게 연결될 수 있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이 창조 신학과 우연을 결합시키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는 이유는 이 두 우발성의 형태가 쉽게 혼동되기 때문이다.

유사한 혼동이 진화 과정 의 '목적'과 목적론을 찾고자 하는 신학자들에서도 발생한다.

이런 목적을 찾고자 하면서 신학자들은 과학을 오해하게 되는데, 과학은 체계적인 근거가 없을 때, 이런 위로부터의 신학적 설명을 적용하는 것에 상당히 저항한다.

 

생물학적 진화를 발생시키는 우연의 지배적 힘을 거론하고, 따라서 진화에 어떤 의도적인 방향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많은 과학자들 에게 목적론은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비록 진화가 더 큰 복잡성과 다양성을 지닌 생명 형태로의 발전을 드러낸다고 종종 일컬어지지만 이것조차도 논란이 된다.

 

아무튼 진화 과정의 발전 또는 '목적'을 말하는 것은 그 나름의 신학적 어려움을 야기하는데, 이것은 목적이 진화 과정 기저에 있는 신적 안내를 암시하고, 이신론적 담론에서 나오는 신적 '개입'에 대 한 문제들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아무튼 왜 자연의 일부가 다른 부분보다 더 많은 안내를 받는 것처럼 간주되어야 하는가?

왜 진화가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다른 우연적인 물리 과정보다 더 많은 규제를 받는 것처럼 간주 되어야 하는가?

 

보다 신중한 유신론적 관점은 우연을 피해야 할 문제라기보다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이 세상에 준 선물인 자유의 표현으로 보며, 진화의 우발성과 진화에서 우연의 역할을 받아들인다.

진화 과정의 핵심인 우연은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결정하는 바로 그 우연이다.

이 두 우연은 과학적인 의미에서 우발적인 과정이고, 모든 창조 과정이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달렸다는 의미에서, 신학적으로 우발적이다.

 

다시 말하면 진화적 우연은 나뭇잎이 떨어지 는 것을 결정하는 우연보다 신학적으로 더 '창조적이지는 않다.

반면에 계속적 창조 관점에서 제기되는 신학적 우발성은 매우 다르게 말한다.

즉 계속적 창조에서의 우발성은 창조에서 신적 행위의 새로움과 참신함을 암시하며, 유비에 의해서만 과학적 우연 개념에 연결된다.

요약하면 계속적 창조가 진화 와 같지는 않다.

 

 

로고스와 물리 법칙

 

우리가 특히 성육신을 통해 연결 고리를 제공하는 그리스도를 고려한다면 삼위일체 관점은 과학적 우발성과 신적 우발성을 서로 보충하는 방법을 한걸음 더 나아가게 만들 수 있다.

 

구약의 창조 주제의 핵심 요소인 신적 지혜는 신약에 흡수되었고, 특히 나사렛 예수를 통해 표현되었다(4장의 "창조와 그리스도" 참조).

이것은 요한의 로고스란 표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의 범죄자로서 죽은 한 사람이, 또한 "태초에”(요 1:1) 세계를 창조했다는 모순적인 주장을 접하 게 된다.

 

구속자는 또한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지혜의 연합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가 성서(즉 토라)에 기록된 체계와 법칙에 대한 신적 원리들을 형상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마태복음의 예수는 바로 이점을 지적한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 5:17).

예수가 율법(그리고 예언자 들의 말)을 형상화한다고 말하는 것과, 예수가 과학에 의해 자연 세계에서 포착되어온 것을 포함하는 모든 신적 지혜를 형상화한다고 말하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구약의 창조 주제 표현들이 법칙(토라)과 창조(자연법칙)를 총체적 공생 관계로 여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4장의 “창조와 이 야기" 참조).

그리고 중세로 거슬러가면 자연 세계가 성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드러내는 '책'을 구성한다고 보았던 주목할 만한 전통이 있다.

 

로고스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와 과학 사이에서도 비슷한 연결이 가능한데,

우리가 스토아 사상을 통해 요한복음에서 로고스 개념을 추적하든지,

아니면 지혜 문학 전승에서 로고스 개념을 추적하든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로고스 개념은 여전히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요 1:3)는 사상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그러므로 창조에서 그리스도는 로고스이자 신적 지혜의 화신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골 2:3, 골 1:15~20, 히 1.3 참조)를 소유하는 분으로 확언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가 과학자들이 발견한 자연법칙들, 즉 예측 가능하고 수학적으로 규칙적인 법칙들뿐만 아니라, 복잡하고 우발적인 속성을 초래하는 법칙들도 포함한다는 말이다.

요약하면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는 우연과 필연을, 즉 우주의 모든 창조 과정 기저에 있는 원리를 형상화함에 틀림없다.

 

만약 그렇다 면 성령은 세상의 피조물에게 이런 원리들을 전달해주는 신적 중재자, 즉 모든 창조 과정에 생기를 불어넣는 신적 스파크로 서 보일 수 있다.

이것은 성령을 물리학의 전기장, 자기장, 중력장에 대한 유비에 의해 신적 창조 영역으로 본 판넨베르크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물론 이것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신적 존재인 성령을 자연법칙의 중재자로 말하는 한 방법이지만(특히 성령이 물리 분야에 비유될 수 있다면), 이것은 우리와 같은 물리적 존재로 성육신한 그리스도를 자연법칙이 형상화한 것으로 말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사실이 될 수 있는가?

 

비록 '성육신'이란 용어는 신약 성서보다 늦게 생겨났지만, 신약 성서는 그리스도가 "살과 뼈" (예, 눅 24:39, 요 1:14, 요일 4:2, 요이 1:7)를 지닌, 정확히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자연법칙을 형상화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든지 간에 성육신 교리는 인간 예수의 살과 뼈를 통해 주장되어야만 한다.

 

이것을 이해하는 한 방법은 물리 상수와 물리 법칙이 우리와 같은 지적인 인간 생명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세하게 조정되어왔다'는 인류 원리 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런 법칙들은 살과 뼈를 지닌 그리 스도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이 법칙들을 형상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히 논란이 되는 주장이고, 철학자들 또는 신학자들은(과학자들은 고사하고 거의 이 인류 원리에 많은 비중을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테야르 드 샤르댕처럼 그리스도를 과학의 궁극 적 목적(telos)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자연법칙을 형상화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 기 위한 또 다른 가능성은 한 중요한 성서 본문에 암시된다. 

"하나님이 말씀 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창 1:26). 

이 본문이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는지는 끊임없이 논쟁 중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은 한 중요한 해석은 인간 이성에 기반한 '하나 님의 형상(image of God)', 즉 인간에게 부여된 신성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성 육신한 그리스도가 정말로 신적 지혜의 형상화라면, 그리스도의 인간 본성은 그리스도가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고 여기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형상과 인간 본성을 함께 지니는 인간들도 합리적인 연구를 통해 신적 지혜의 깊이를 탐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과학의 신학을 정립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했다(맥그라스의 《과학 신학scientific theology》 참조).

왜 일반적으로 과학이, 그리고 특히 수학이 물리 세계를 묘사하는 데에 적절한지에 대해 철학적으로 관심이 있는 과학자들이 종종 의문을 제기했다.

인간의 입장에서 말 하자면 과학의 성공은 신비한 무엇인가를 남겼다.

만약 세계 기저에 깊은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고전 2:16) 있지 않다면, 세계는 우리의 이성에 너무 잘 맞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성서의 창조 본문은 우리에게 현대 과학의 기적, 즉 물리 세계를 이해하는 데 에 있어서 과학의 엄청난 성공을 설명해준다.

이것은 과학이 전 물리 세계를 만든 정신에 직접적으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성서와 과학

 

이 책에서 우리는 과학-종교 대화에서 성서가 지속적인 관심을 받게 하는 방법을 논증하려고 시도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개의 충돌하는 바위 사이에서(하나는 성서 문자주의적 측면에서 표현된 창조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성서 창조 본문의 형태와 타당성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 입장) 진로를 모색해왔다.

우리는 만들어진 것이지만 신성한 성서의 본성을 중심에 두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연구가 삼위일체 신학의 맥락 안에서 현대 성서 비평학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과 조화될 때 가장 큰 효과 를 발휘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살아 있는 신앙이 성서의 창조 신학을 발전시키는 수단을 발견하게 할 뿐만 아니라 건설적으로 과 학과 조화를 이루는 수단을 발견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에 우리는 과학이 성서 창조 본문에 연결되는 많은 방법들을 탐구 했다. 

대체로 성서 본문이 과학의 제국주의적인 경향에 상당히 잘 대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성서 본문은 현대 과학에 의해 드러난 것을 넘어서는 실재를 나타내며, 또한 과학의 발견으로 제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과학의 발견에 의해 여러모로 더 풍부하게 되는 창조 신앙을 일관되게 드러냈다.

이것은 과학이 성서가 틀렸음을 입증한다는 보편적인 인식과 분명히 맞지 않는다.

하지만 창조의 본성에 관한 한, 과학은 틀림없이 어느 정도까지만 우리에게 영향을 줄수 있다.






 


성서의 본성(마크 해리스 지음, 장재호 옮김, 도서출판 두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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