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歲寒圖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다.
김정희는 조선후기 집권세력이었던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희생되어 오랜동안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언제 사약을 받을지도 모르고 평소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조차 그를 외면하였지만 제자였던 우선藕船 이상적은 김정희와의 접촉으로 자신에게 화가 미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책을 중국에서 구해다 김정희에게 전하였고 김정희는 그에 대한 감사와 답례로 이 그림, 세한도를 그렸던 것이다.
세한도의 '세 歲'는 해를 뜻하여 세밑, 세월, 세시, 몇 세 등으로 쓰이는 글자와 동일하다.
그리고 새해가 시작되는 설날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파생된 단어인 '세한'은 설을 전후 한, 매우 심한 한겨울 추위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김정희가 그림의 제목으로 설정한 세한이라는 말은 단순히 기후적인 추위만이 아니고, 사색당파로 얼룩진 조정의 정권에서 밀려, 귀양가고 핍박 받으며 인고의 생활을 하는 서러운 선비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그러니 세한도는 말 그대로 추사의 가장 추운 시절을 그린 그림이다.
누구에게나 잘 나갈 때와 어렵고 곤궁할 때가 있다.
배부를 때 누가 먹을 것 을 주면 그리 반갑지 않지만 춥고 배고플 때 살펴주면 조그만 온정에도 마음 깊이 감사하게 되는데, 그의 제자 이상적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자신을 한결 같은 마음으로 대해 주는 것에 감격하여 답례한 대표적인 문인화이다.
그림을 보면 허름한 집 한 채를 중심에 두고 양쪽으로 두 그루씩의 나무를 배치했다.
주변은 여백으로 처리하였다.
전체적으로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 여주고 있는데 여백이 많은 쓸쓸한 화면엔 겨울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 저절로 든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허름한 집 한 채와 나무뿐이지만 그는 이 집에서 스스로를 다스리며, 중국에서도 이루지 못한 천하의 추사체를 완성하게 된다.
오른쪽 위 여백에 쓴 세한도라는 제목의 글씨는 정성 가득한 형태의 예서체로 화면 위쪽에 바짝 붙여 놓아 아래 화면의 여백은 더욱 휑해 보인다.
그 옆에 우선시상 藕船是賞(우선을 기림) 이라 쓰고 '완당'이라는 관서款署를 쓴 후, 낙관을 하였다.
그림은 단색조의 수묵과 마른 붓질의 필획만으로 그려졌으며, 소재와 구도도 지극히 간략하게 다루어졌다.
이와 같이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화면은 바라만 보아도 찬바람을 느끼게 하며, 굳이 화제를 '세한도'라 표시하지 않았어도 누구나 세한의 추위를 느끼게 될 것 같다.
'세한삼우'란 추운겨울철에 벗 삼을 수 있는 세 가지 나무를 말하는데, 소나 무, 대나무, 매화이고 이 그림에서는 소나무를 등장시켰다.
소나무는 우리민족의 코드와 잘 맞아떨어지는 감성의 나무로, 수차례의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나지만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나무를 자세히 보면 맨 오른 쪽에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 한 그루는 분명히 소나무지만, 그 외에 곧게 서 있는 나무는 모양이 달라 해석이 분분하다.
이 그림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선 곧게 뻗은 나무 세 그루에 대해 깊이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잣나무, 측백나무, 곰솔 등 각종 추측이 많다.
우선 이 그림에서 인용된 논어에 나오는 원문 글씨 중 '송백 松柏'의 松은 소나무가 분명하지만, 柏자는 한자사전에선 "측백과 편백扁柏의 총칭으로, 柏 (측백나무백)의 俗字"라고만 설명하고 있다.
'송백松柏(소나무와 잣나무)같은 절개' 라는 말의 어원이 될 '청송벽백'도 중국어 사전에 '靑松碧柏qingsong bi bai' 라고만 되어 있고, 영어사전에도 'the pine and the nut pine'이라 고 간략히 설명되어 있다.
아울러 한자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뜻과 의미가 변하여 왔으니, 무려 2,500여 년 전 논어에 쓰인 '柏'자가 가리키는 나무를 글씨나 단어를 갖고는 더 확인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우리나라식 음훈에 의한 한자대로 '잣나무 柏 '자라고 생각해보아도 추사가 귀양살이를 하던 그곳은 아열대지방이라서 잣나무가 살지 못한다 하여, 추사가 귀양을 살던 그 근처에 자생하고 있는 곰솔을 모델로 그렸을 거라는 추론도 있다.
필자의 지인 중 조경학을 전공한 수석감리사에게 문의하였으나 나무를 직접 보고 사실대로 그린 진경그림이 아니고, 머릿속 생각을 통해 그린 그림이다보니 그림을 갖고서는 확실히 답을 할 수 없고, 다만 기후 등 지정학적 여건을 감안할 때 곰솔일 것이라는 추론에 동의한다고 하였다.
세한도의 그림 오른쪽, 굽은 형상의 큰 소나무는 그동안의 온갖 세파에 시달려 늙고 거칠게 휘어진 모습이지만 다른 나무들은 줄기가 곧고 가지들도 하나같이 위쪽으로 팔을 쳐들고 있는데, 김정희는 늙고 굽어진 노송을 자신에, 그리고 나머지 곧게 서있는 나무들은 제자 이상적에 비유해, 변함없는 송백을 표현하고 있다.
추사는 그림 왼편에 공간을 따로 마련해 정성들여 칸(方眼)을 나누고 작품을 그리게 된 연유를 적어 두었는데, 추사가 쓴 어떤 글씨에서도 이렇게 반듯한 글씨는 본 적이 없다.
해서체로 쓰인 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초입 -
거년이만학대운이서기래
지난해에 만학과 대운 두 책을 부쳐오고
금년우이우경문편기래
금년에는 또 우경문집이라는 책을 부쳐오니,
차개비세지상유
이는 세상에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 아니
- 중간 -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날이 추워진 후(다른 나무가 다 시든 뒤)에야
송백의 시들지 않음(푸르름)을 안다.
송백은 사시를 통해 시들지 않는 것으로,
세한이전일송백야, 세한이후일송백야
세한 이전에도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송백이다
- 말미 -
비부 완당노인서
슬프다, 늙은이 완당 씀
중국과 한국을 서로 오가며 가까이 지내고 있는 중국인 친구가, 몇 년 전에 한국에 왔을 때 가지고 와서 선물해준 논어 죽책을 찾아보았다.
당연히 1편 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로 시작되는 학이편으로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고 적혀있다.
- 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 -
세한도의 핵심어인 이 말은 사서삼경의 하나로 공자의 말씀을 모은 책인 논어의 20편 중 9번째인 자한 편의 후반부에 나오는 문장이다.
'사람이 시련에 처했거나 겪은 후에야 그 사람의 진실된 참모습을 볼 수가 있다.' 라며 이상적을 칭찬하는 문구로 활용하고 있다.
그림의 오른편 아래 구석에는 주문방인朱文方印 유인 遊印이 한 과 찍혀 있다.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 하여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글귀로 2천 년 전 중국 한대의 기와에 보이는 명문銘文이라 하니, 금석학에 밝았던 두 사람이 멀리 떨어져 사제의 정을 나누는 데에 2천 년 전의 이 글씨 내용만큼 적절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상적은 스승으로부터 세한도를 받아보고 곧 다 음과 같은 답장을 올렸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그토록 진실하고 절실하셨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초연히 빠져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에 스스로 하지 않으려야 아니할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하물며 이러한 서책은, 비유컨대 몸을 깨끗이 지니는 선비와 같습니다.
결국 어지러운 권세와는 걸맞지 않는 까닭에 저절로 맑고 시원한 곳을 찾아 돌아간 것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이번 사행使行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 표구 를 해서 옛 지기 분들께 두루 보이고 詩文을 청하고자 합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제가 참으로 속세를 벗어나고 세상의 권세와 이득을 초월한 것처럼 여길 수 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과당하신 말씀 입니다."
이상적은 편지에서 말한 대로 이듬해 역관으로 북경에 갔다.
그리고 청나라의 문인 16인과 같이한 자리에서 스승이 자신에게 그려준 작품을 내보였다.
그들은 그 작품의 고고한 품격과 사제 간에 나누는 깊은 정에 마음 깊이 감동하였다.
그리하여 함께 모였던 문인들은 두 사람을 기리고 칭송하는 송시 頌詩와 찬문贊文을 다투어 썼다.
이상적은 이것을 모아 10미터에 달하는 두루마리로 엮었다고 한다.
이상적은 귀국하는 길로 그림을 곧바로 유배지의 스승에게 다시 보내 뵈었다.
중국명사들의 댓글이 가득 달린 자신의 그림을 다시 보는 추사의 답답했던 마음은, 그나마 큰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에 세한도가 소장되기까지의 그 이동 경로 또한 만만 치 않았다.
애초 제주도에서 그려져 이상적에게 보내졌다가 연경까지 다녀왔던 이 작품은 유배지의 스승에게 다시 보인 후에 이상적이 소장을 하다가,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과, 그의 아들 김준학이 물려받아 2대에 걸쳐 소중하게 보관되었다.
그 후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추사연구자였던 경성대학 교수 후지즈 카린(藤塚隣)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급기야 광복 직전인 1943년 10월 일본으로 건너가고 말았다.
그러나 종전직전에 서화가 소전 손재형선생이 도쿄로 후지즈카를 찾아가, 비 오듯 퍼붓는 폭격기의 공습 위험을 무릅쓰고 석달 동안이나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가까스로 양도받아 다시 조국 땅을 밟게 된다.
몽유도원도가 우리나라의 것이지만 일본의 국보로 일본이 소유권을 갖고 있음을 볼 때, 또한 당시 후지즈카가 소장했던 김정희에 관한 그 밖의 수많은 자료들은 결국 미군의 폭격을 피하지 못하여 대다수가 타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볼 때, 세한도는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우리 곁으로 오게 된 것이다.
애초, 이상적이 중국의 문인들로 부터 찬문을 받기위해 마련한 여백에, 정부 수립과정에서 몇몇 정부요인들이 추가로 댓글을 실었고, 지금도 댓글을 실을 여백이 일 미터 쯤은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댓글을 달 수 있는 자격이 있 는 사람이 나타나 여백 많은 세한도의 댓글 란에 몇 줄이라도 달아야 세한의 한이 좀 따뜻해지는 건 아닐지!
이제 추위가 물러가며 날씨는 점차 풀리겠지만 세한의 세월을 살고 있는, 또 살아가야 할 이들, 어쩌다보니 최고의 선이 돼버린 복지부문에 정부예산 투입이 집중되면서 건설경기가 극히 나빠져 건설기술인들도 세한의 추위를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출처 : 잡설산책 (김연태 지음, 글샘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