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에 답하는 세 가지 방식 : 반실재론, 자연주의, 유신론
앞에서 이야기한 우리의 인식 기능의 작동으로 되돌아 가 보십시다.
우리가 유신론자라면 우리의 인식 기능이 바르게 작동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 유신론자는 인간이 하나님의 설계와 계획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설계하셔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신체와 영혼이 하나님의 설계를 따라 제대로 기능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능력이, 지적 능력뿐만 아니라 감정과 의지의 능력, 언어 능력, 타인과 관계할 수 있는 능력이, 설계 계획을 따라 제대 로 기능한다면 그에 따라 무엇을 알게 되고, 판단하고, 느끼고, 선택하고, 결단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 앞에 놓인 탁자나 마이크, 강당, 그리고 이 강당이 들어서 있는 건물도 같습니다.
제작자의 설계 계획대로 제대로, 올바르게 기능할 때 이것들의 존재 의미가 충족 되듯이 인간과 자연도 창조주의 설계 계획을 따라 올바르게 기능할 때 존재 의미가 충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적 자연 주의에는 설계나 계획, 의도, '올바른 기능의 개념이 들어갈 자 리가 없습니다.
만일 자연주의가 참이라면 설계나 의도와 같은 '올바른 기능' 개념뿐만 아니라 건강이나 질병, 정신건강과 같 은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정상적이 며 무엇이 비정상적인지, 어떤 상태가 제대로 돌아가는 상태이 며 어떤 상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태인지를 분별할 수 있 는 기준이 들어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플랜팅가는 만일 자연주의가 참이라면 이와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는 어떤 것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알려면 설계 계획에 따라 우리의 지적 능력이 적합한 환경 가운데서 제대로 기능하여 참된 믿음을 성공적으로 산출할 수 있어야 하지만 자연주의 조건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유신론이 "왜 무엇이 존재 하는가?"라는 물음에 합리적 대 안이 될 수 있는지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유신론Theism에 따르면 "인격적인" 하나님이 존재 합니다.
우리가 인격이란 말을 쓸 때는 주변에 대해서 의식하고 누구를 사랑하고 미워하며 무엇을 원하거나 욕망하고 무엇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두고 말합니다.
인격적 존재에게는 의식과 감정과 믿음뿐만 아니라 목적과 의도, 행동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한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무엇보다 "인격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님은 신체가 없는 인격입니다.
우리의 경우 무엇을 인식하거나 원할 경우, 신체를 통하여 인식하고 신체 동작을 통 해서 행동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오직 마음먹는 것으로, 다시 말해 의욕함willing을 통해서 행동합니다.
이 하나님은 전능하며, 전지하고, 완전하게 선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만드시고 섭리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별과 항성과 갤럭시와 블랙홀과 쿼크와 글루온과 전자 등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식물과 동물과 인간을 포함하여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통치하시고 선한 것들로 채워 주십니다.
유신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으로 창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을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 전통이 있지만 가장 손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알 수 있 고, 사랑할 수 있고, 아름다운 것, 선한 것을 추구할 수 있고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 간이 지음받았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을 알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이 지은 세계를 알고자 하고 알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은 참된 것, 곧 진리를 갈구하고 진리를 찾아 나서는 지적 노력과 추구가 가능한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러한 능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이 세계를 규칙(법칙)에 따라 존 재하고 돌아가는 세계로 창조하였습니다.
이처럼 우주에 드러나 는 규칙 때문에 과학과 과학 기술이 가능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지금도 붙들고 계시지 않으시면 이 세계는 마치 바람 앞의 등불처럼 쉽게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 나님은 이 세계를 일정한 규칙과 항상성으로 붙드시고 통치하시며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모습은 이 세계, 이 우주 어느 곳에나 빠짐없이 드러납니다.
다시 반복하자면 이 때문에 과학과 과학기술이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유신론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설계하고 창조한 세계는 일종의 거대한 유기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 유기체는 매우 복잡하고 거대하지만 어떤 경우든 질서와 규칙성, 일정한 구조 를 지닌 세계입니다.
과학은 이러한 세계가 지닌 놀라운 구조를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지적 노력이고 공동체적인 노력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세계는 하나님이 설계하고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습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탐구 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에 관해서 이해할 수 없는 단 한 가지는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The only incomprehensible thing about the universe is that it's comprehensible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이며, 하나님이 질서와 구조, 규칙성을 부여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세계임을 (아인슈타인 자신의 신념과는 별개로) 어떤 말보다 더 웅변적으로 말해 줍니다.
기독교 신앙은 과학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 아니라 훨씬 더 적극적이며 우호적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창조 신앙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우리가 (모든 면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주신 지적, 이성적 능력 으로 창조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을 포함한 모든 지적 노력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닮은 모습의 한 면을 드러내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들의 참된 모습을 지적으로 탐구하는 모든 노력에 유신론은 방해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적 자연주의와 심지어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줄 수 없는 지적 동기를 부여해 주고 지적 지평을 열어 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유신론자가 지적 탐구의 어느 부분이나 지점에서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택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지적 탐구 과정에서 심지어 방법론적 자연주의 입장을 반드시 취해야 하는지, 이것이 일종의 지적 게으름은 아닌지, 우리는 물어볼 수가 있겠습니다.
저는 유신론의 입장을 취한다 하더 라도 지적 탐구에 어떤 왜곡이 발생하거나 독단이 개입될 여지 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16-17세기 과학자 갈릴레이 Galileo Galilei. 1564-1642와 케플러, Johannes Kepler. 1571-1630 17세기 과학자 파스칼 Blaise Pascal, 1623-1662과 보일, Robert Boyle. 1627-1691 17-18세기 과학자 뉴턴, Isaac Newton. 1643-1727 19세기 과학자 패러데이 Michael Faraday. 1791-1867와 맥스웰 James Maxwell. 1831-1879 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 유신론의 관점으로 그들의 지적 탐구를 이어 갔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철학적 자연주의뿐만 아니라 이른바 '방법론적 자연주의'도 오늘날 한편으로는 과학 공동체로부터 부과된 강요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자 자신들의 지적 게으름과 연관된 것이라 볼 여지가 전혀 없지는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유신론 전통, 특히 이 가운데 기독교 전통에서 이해한 창조는 우주와 생명체의 기원 문제에 국한되지 않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조를 20세기 초중반부터 교회 내에서나 학계에 서 "창조인가, 진화인가?"라는 물음 가운데 양자택일의 문제로 제한해 버린 경향이 없지 않았습니다.
마치 진화를 수용하면 창조를 부인해야 하고 창조를 수용하면 진화를 부인해야 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상황이 꽤 오랜 세월 지속되었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 양자택일의 선택지가 아직도 강하게 강요되는 분위기가 있음을 아마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현대 과학이 반신앙적이고 무신론적인 것처럼 교회 안에 잘못 된 인식을 심을 뿐 아니라 교회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기독교를 반과학 집단처럼 보이게 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일부 대안학교 가운데는 공교육에서 사용하는 생물학 교과서를 쓰지 않고 다른 교재를 만들어 이른바 '창 조과학'을 가르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이뿐 아니라 창조를 "창조인가, 진화인가?"라는 물음의 틀에 가두어 보기 때문에 우리가 눈으로 보는 우주뿐만 아니라
예컨대 우리의 몸과 건강과 먹을거리들과 우리 삶의 환경이며 터전인 이른바 '자연' 을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가정과 학교와 사회와 국가, 우리의 법률과 경제 행위와 지적 추구, 예술 행위, 모든 일상이,
하나님의 창조 결과이며 창조의 터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고 즐기고 누리며 감사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창조는 '창조, 진화냐' 양 자택일에 집어넣기에는 너무나 포괄적이고 너무나 깊고 넓은 하나님의 계획과 계획의 실행과 통치와 섭리를 포괄하는 영역이고 그런 영역의 존재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없이는 우리의 지적 능력의 발휘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화와 예술, 예배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창조는 기원이나 시작의 문제일 뿐 아니라 존재하는 것들의 과정과 진행, 목적과 목표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주시는 샬 롬, Shalom 곧 평화의 관점에서 창조를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할 때 구원의 하나님은 이 세상의 통치자들과는 다르게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풀포기와 같다.
심기가 무섭게, 씨를 뿌리기가 무섭게, 뿌리를 내리기가 무섭게, 하나님께서 입김을 부셔서 말려 버리시니, 마치 강풍에 날리는 검불과 같다.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너희가 나를 누구와 견주겠으며,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너희는 고개를 들어서, 저 위를 바라보아라. 누가 이 모든 별을 창조하였느냐?
바로 그분께서 천체를 수효를 세어 불러내신다.
그는 능력이 많으시고 힘이 세셔서,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나오게 하시니,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불평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불만을 토로하느냐?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 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 시다.
(이사야 40:24-28, 새번역)
구원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의 하나님이 되고 그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 곧 진실과 인애,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전망을 보여 줍니다.
창조는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과의 언약을 떠나 생각할 수 없고 하나님의 구원과 언약은 결국 자연과 이웃과 나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함께 누리는 샬롬의 현실과 연관됩니다.
앞에서 이야기했습니다만 성경에서 보여주는 창조는 어떤 필연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의 선택으로 시행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자유 로운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와 삶도 마찬가지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창조 세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 한 것처럼 영원 전부터 존재한 것도 아니고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신의 본성으로부터 자연적으로 유출된 결과도 아닙니다.
따라서 창조 세계가 자동적으로 신적 본성에 참여 하는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나왔다는 것은 또한 창조 세계가 하나님께 의존함과 연관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계를 창조했을 뿐 아니라 지금부터 세상 끝까지 만물을 붙드시고 계 십니다(히 1:3).
이 세계는 시간 안에 있고 시간과 함께 지속되며, 따라서 영원한 하나님과는 달리 시간적이고,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속된 존재입니다.
이 점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거룩하고 신적이며 하나님의 창조 행위로 존재하고 존속하는 피 조 세계는 속된 존재입니다.
피조 세계, 곧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의존합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특별히 하나님의 모습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자신의 삶을 기획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독립성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러한 의지는 루터가 강조 했듯이 자유의지이기보다 노예의지로 작동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과 책임을 주신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자유로운 의지로 이 세계를 지으셨 는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얻을 수 있 는 가장 명확한 답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인정한 대로 "하나님께 서 원하셨기 때문이다"라는 답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빙크가 말하듯이 "왜 하나님이 원하셨는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남습니다.
"하나님이 외로우셔서" 또는 "하나님에게 이 세계가 필 요해서" 등의 답은 쉽게 배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계와 그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지으시고 보존하고 붙 들고 계신 이유는 외로움이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분 안에서 자족하신 분이며 스스로 지복의 삶에 머무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이 세계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지으신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으신 만물을 통하여 창조주로, 구속주로, 만물을 새롭게 회복하는 분으로 영광을 받으십 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렇게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이 세계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지은 이유를 캐묻는다면 결국은 사랑 때문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기쁨을 자신의 피조물과 함께 즐기고 누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존재하는 것들의 목적은 이렇게 보면 존재하는 것들 이 각각 존재의 기쁨을 누리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유신론의 창조 사상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선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보시기에 좋은 세계(창 1장)로 창조하였 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로 존재하게 된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이런 의미에서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 나님의 선물인 창조 세계는 비록 그 가운데 삶을 위협하는 요소 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변함없이 신실하게 운행하고 있고 우리는 이 안에, 이 세계를 근거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우리의 실존적 경험은 이 세계 안에 있는 것들과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물임에도 오용되고 뒤틀어지고 왜곡 되었음을 증언해 줍니다.
그러나 죄의 힘은 하나님이 창조한 좋은 세계를 완전히 악한 세계나 무의미한 세계로 만들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과 종말에 이루어질 악에 대한 승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죄는 하나님이 지으신 좋은 세계, 선한 세계에 침투한 일종의 바이러스이며 기생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생충이나 바이러스는 그 자신의 힘보다는 숙주의 존재와 힘 을 따라 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기생하는 숙주의 존재에 풍성한 의미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존재하는 죄와 악의 힘, 그와 연관된 고통과 절망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계를 구원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승리에서 보면 일종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희망 을 우리는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과 사역은 이 미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일과 앞으로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일 사이의 긴장과 희망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제 이러한 관점에서 마지막으로 우리의 학문과 관련해서 잠시 들여다 보겠습니다.
출처 : 대화(저자 강영안, 우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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