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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에 답하는 세 가지 방식: 반실재론,

w.j.lee 2025. 2. 3. 01:02

 

 

물음에 답하는 세 가지 방식 : 반실재론, 자연주의, 유신론

 

다시 물음을 원점으로 돌려 봅시다.

왜 무엇이 존재할까요?

존재하는 것들은, 우리가 그것들의 존재를 묻기 전에, 우리 앞에 이미 존재합니다.

물음의 대상뿐만 아니라 묻고 있는 우리 자신도 물음을 묻기 전에 이미 앞서 존재합니다.

우리는 여러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고 생각하고 질문하며 아름다움을 지각하고 인지하며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결국, 존재 하는 것들과 존재하는 것들을 두고 물음을 던지는 우리 자신의 존재 또한 설명을 요구합니다.

가능한 설명방식 가운데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대학과 사회 속에서 주도적 모델로 열거해 볼 수 있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반실재론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주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신론입니다.

 

반실재론은 우리 인간 자신이 세계의 존재와 구조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세계가 보여주는 구조와 성질은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자신이 만들어 내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만일 우리가 관찰하고 이해하는 세계에 대한 명제 속에 진리가 담겨 있다면 그 진리는 존재하는 것들 속에 내재하는 속성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입장, 이러한 태도는 실재를 부인한다는 의미에서 '반실재론' anti-realism 이라 부르거나, 이른바 '실재' reality는 인간의 구성 활동의 산물이란 뜻에서 '구성 주의' constructivism 라 부르거나, 인간의 관점, 인간을 중심으로 본다는 점에서 '인간주의' humanism 라 부를 수 있습니다(물론 여기서 '인간주의'라 번역한 말은 고전 중심의 인문학을 중시한 르네상스 휴머니즘과는 구별되는 용어입니다).

멀리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 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 485-415BC로부 터, 가깝게는 순수이성비판의 저자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상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의 개념적 사고의 틀인 범주를 사용하여 구성하고 만들어 낸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칸트는 공간과 시간을 벗어나 '사물 자체' Ding an sich 의 세계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대상이 되는 사물은 시공간의 감성 형식과 지성의 개념 활동을 통해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 안 에 등장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우리가 알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은 사물 자체의 현상들입니다.

이 현상을 객관적 지식으로 만드는 주체는 칸트에 따르면 일종의 보편 의식인 '의식 일반'Bewusstscin überhaupt 입니다.

만일 우리 앞에 있는 개를 보고 우리가 '개'라는 개념을 적용한다면 이때 나의 의식은 단지 나 홀로 자각하는 개인의식이 아니라 지성을 지닌 사람이면 모두 공유하는 보편 의식에 참여하는 셈이 됩니다.

 

칸트는 '사물 자체'와 '의식 일반' 개념을 통하여 진리가 상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방식은 분명 초월하지만, 존재하는 세계의 진리는 인간의식을 벗어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의식의 판단 작용에 자리 잡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현상계와 관 련된 '진리의 처소', '진리의 자리'locus veritatis 는 (우리를 에워싼 바 깥 현실이 아니라 '판단'이라고 칸트는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

반실재론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실재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우리 인간의 사고와 정신의 창조 능력의 산물이라 보는 것입니다.

 

반실재론의 입장을 가지고 이제 "왜 무엇이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을 대한다고 하십시다.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 그리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진리'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강당 안에만 해도 존재하는 것들이 숱하게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탁자, 마이크, 스크린, 의자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필요를 따라 구상과 설계, 제작과 구입 과정을 통해 이 자리에 배 치되어 있습니다.

욕구와 필요, 목적과 의도, 이해와 능력 등이 여기에 개입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여기 함께 있는 우리는 그냥 모여든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한 베리타스 포럼에 참석하느라 모였습니다.

이 가운데는 어떤 주제를 다루어야 할지, 누가 말하고 누가 들어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 어야 할지를 통제하고 규제하는 규칙과 이해가 존재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당연히 우리 자신이 의논하고 협의하여 만들어 낸 것 들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을 계속 이어가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대학, 대학과 연관되어 있는 경제와 정치, 이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활동은 모두 인간의 산물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감각과 상상력, 지성 활동, 나아가 신체 활동과 인간 간의 상호교환 작용을 통해 기획되고 설계되고 생산된 것들입니다.

이 속에 통용되는 규칙들도 암묵적으로 약속되고 승인되고 때로는 필요에 따라 수정되거나 폐기되기도 합니다.

인간은 창조적인 능력을 통해 자연 세계와 인간이 몸담고 있는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인간의 상상력과 지성, 인간 정신의 산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신마저도 인간 정신의 산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와 존재하는 것들과 관련된 진리를 이야기할 때 반실재론이 근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정신 또는 의식을 지닌 존재이며 이 능력을 통하여 사물을 인식 하며 주어진 사물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과, 도덕적 질서와 사회적 질서, 예술과 여러 관습을 만 들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은 단지 한 개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種으로서의 인간입니다. 

종으로서 지닌 인간의 언어 능력, 남들과 교류하며 함께 살 수 있는 능력, 역사를 통한 전통의 전승 능력 등이 인간을 에워싼 자연 세계와 문화 세계를 만들어 낸 바탕이 된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물음이 등장합니다. 

"존재하는 것들은 과연 인간 상상력과 지성, 인간 정신의 산물인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개념을 사용하고 서로 소통하는 우리의 세계는 분명 인간을 떠나 따로 존재할 수 없는 세계입니 다.

그럼에도 우리는 두 가지 근본 현실, 곧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바깥에 있는 세계와, 우리 자신의 능력이, 과연 우리 자신의 산물인가 하는 물음을 물을 수 있습니다.

여기 앞에 놓인 탁자, 그리고 지금 제가 사용하고 있는 마이크,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와 이것들이 위치한 강당은 분명히 이것들을 만든 사람 없이 실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들의 존재는 이것들을 만든 사람과 그의 의도와 목적에 종속됩니다.

그렇다고 이것들을 일컬어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재료뿐만 아니라 의도와 목적도 사실은 실재해야 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서는 이것들이 의도한 대로 제대로 기능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능력은 우리 자신들이 향상시킬 수 있지만 그 능력 자체가 우리의 산물이라 부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우 리의 언어 능력이나 문화를 창출해 내는 능력 자체를 만들어 내는 데에 기여한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무도 이런 능력을 소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 리가 창조적 능력을 발휘해서 그것들로부터 무엇을 만들어 내는 능력은 반실재론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이것들 은 여전히 설명을 요구하는 것들이라 하겠습니다.

 

반실재론에는 오늘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서 또 다른 난점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극단적인 반실재론자라고 해보십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과 소통하는 옆에 분들과 사실상 의미 있는 소통이 가능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각 우리 자신이며, 우리 자신으로 타인과 분리된 채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가 지각하는 방식과 지각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타인과 어떻게 공통의 잣대를 가지고 소통할 수 있을까요?

 

칸트의 경우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반실재론으로 발전 될 수 있는 사상을 제공하기는 하였지만, 극단적 반실재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장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사물 자체' 개념과 '의식 일반' 개념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각하는 현상 세계 배후에 우리의 표상을 가능하게 하는 '사물 자체' 와 우리 각각의 개별적 의식을 뛰어넘어 하나의 의식으로 통합하는 '의식 일반'을 칸트의 존 재론은 소유합니다.

그러나 칸트의 주체 개념에서 '의식 일반'을, 그리고 대상 개념에서 사물 자체를 (칸트 자신의 철학과는 상관없이) 제거해 버리면 개별 의식 주체와 현상 세계만 남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각자는 동일한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이 만든 세계 속에 살게 됩니다.

트럼프는 트럼프대로 자신의 관점과 자신의 세계를 가지게 될 것이고, 김정은은 김정은대로 자신의 관점과 자 신의 세계를 가지게 될 것이며, 스티븐 호킹과 마더 테레사 역시 각자의 관점과 세계를 가지고 살 것입니다.

어떤 세계가 참 된 세계이며 참된 것이 무엇인지 한 개인을 넘어 객관적으로 판단할 가능성은 사라집니다.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은 만물의 척 도다"라는 말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나는 인간이다. 따라서 나는 만물의 척도다."

만일 이러한 추론이 옳다면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진리라고 생각하고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 진리이고, 네가 진리라고 생각하고 진리라고 말하는 것도 진리다. 

나의 진리와 너의 진리가 같은 진리인지 다른 진리인지 판단할 수 있는 '공통의 잣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이지요.. 

 

어떤 것이 진리인지 진리가 아닌지 가늠할 수 있는 공통의 잣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봅시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진리의 존재는 부인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진리가 지닐 수 있는 보편성은 상실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에게 진리인 것이 나에게는 진리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진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가 실제로 어떻게 존재 하는가 하는 것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물론 여기서 '경험 독립적인' 아프리오리 a priori한 지식과 관련된 진리는 괄호 안에 넣어두고 이야기하십시다).

 

"지금 바깥에 비가 오지 않는다"라고 진술한 다고 해보십시다.

이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지금 바깥에 실제로 비가 오거나 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실과 연결됩니 다.

여러분, 지금 창밖을 내다보십시오.

제가 방금 한 "지금 바깥에 비가 오지 않는다"라는 진술은 만일 지금 바깥에 비가 오지 않을 경우, 그 경우에 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바깥이 어디까지 적용되는가 하는 물음이 가능합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내다볼 수 있는 강의실 바깥을 두고 말하는지, 아니면 고려대 캠퍼스 전체를 말하는지, 아니면 서울시 전체를 말하는지, 범위를 정확하게 구획 짓기가 쉽지 않지만 이러한 진술을 할 때 적용되는 범위는 지금 우리가 있는 주변을 한정해서 이야기한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의 진술과 관련된 사실이 실제로 주어져 있는가,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주변에 지금 비가 온다면 나의 진술은 거짓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술의 참과 거짓, 진술의 진리값은 진술 자체보다 진술이 지칭하는 현실 곧 실재와 연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실재는 나홀로 경험하는 실재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 확인하고 경험할 수 있는 실재요 현실입니다.

만일 이러한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함께 공통의 잣대로 적용할 수 없다면 우리는 가장 단순한 일상의 삶과 관련해서조차도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반실재론자는 '존재하는 것이나 진리'라는 말을 아예 쓰지 않을까요?

반실재론자 가운데도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환상이고 착각이며, 진리라는 것도 허상에 불과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전통 사상 가운데는 인도 사상이나 불교사상에서 이런 주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실재한다고 생각 하거나 진리라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일뿐 사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반실재론자들 가운데 오늘날 볼 수 있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어떨까요? 

예컨대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 나 리처드 로티 Richard Rorty. 1931-2007 역시 '진리'란 말을 여전히 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들은 이것이 어떤 객관적 실재와 연관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푸코는 1970년 12월 꼴레쥬 드 프랑스 교수취임 강연에서 우리의 '진리에 대한 의지'는 다름 아니라 '권력에 대한 의지'라고 말합니다.

진리에 관한 담론은 언어와 제도 속에서 작동하며 이 가운데는 언제나 포함과 배제의 기제, 곧 권력이 작동한다고 푸코는 보았습니다.

로티는 진리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어휘, 관용구, 사물을 보는 방식에 매여 있는 것일 뿐 사실은 어떤 실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 하자면 로티는 진리란 "우리 동료들이 우리가 하는 말에 동의해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로티는 『철학과 자연의 거울』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 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치섬과 버그만과 같은 철학자들은 상식적인 실재론을 유지하 려면 그와 같은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 같이 설명하는 목적은 진리가 듀이가 말한 "보증된 주장 가능성" 이상이 되게, 다시 말해, 우리 동료들이 우리가 하는 말에 동의하는 것 이상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진리를 보는 데는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 1932-가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두 가지 문제 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것이 만일 "우리 동료들이 믿어 주어서 참이 되고 믿어 주지 않아서 거짓이 된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주장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암을 보십시오.

암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 봅시다.

만일 암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가 주장할 때 나의 동료들,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믿어 주어서 그것이 참이 된다면 암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까요?

그렇다면 지구상에는 암과 같은 질병뿐만 아니라 만일 우리 동료들이 믿어 주기만 한다면 가난이나 불의, 불평등, 전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식을 지니고 일상을 살아가는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길이 있고 집이 있고 숲이 있는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만일 길을 걸어간다면 일정한 곳에 도착할 것이고, 숲에 떨어지는 불똥을 막지 못한 다면 숲은 타고 말 것입니다.

우리 동료들의 동의 여부와는 별개 로 우리는 실재하는 세계에서, 실재하는 타인들과 살아갑니다.

 

둘째로 무엇이 실제로 참인지 거짓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말을 참이든 거짓이든 사람들이 믿어 주는 것으 로 거짓도 만일 참이 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도둑질을 하고도 도둑질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할 때 만일 나의 동료들이 믿어 주기만 한다면 나는 도둑질을 한 적이 없을 것이고, 내가 한 말도 거짓말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이런 세계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을 것이고 우리의 삶에는 '도덕적 세계가 들어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이라면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았던 나치의 유대인 학살도 학살이 아니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 곧 존재하는 것 모두를 이런 방식으로 만일 부정할 수 있다면 "왜 무엇이 없지 않고 오히려 있는가"라는 물음은 헛되이 던지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자연주의로 넘어가기 전에 포스트모던적인 반실재론에 대해서 잠시 한마디 덧붙이겠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순한 하나의 학파나 사조가 아닙니다.

물론 이 가운데는 상반된 여러 사상가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제가 잠시 언급한 반실재론자 들 또한 모두 포스트모더니스트인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언급한 포스트모던적인 반실재론은 존재하는 세계와 관련해서 인간의 의식과 언어, 사회 제도를 떠나 존재하는 현실을 부인하는 20세기 후반의 여러 사상가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이들의 반실재론이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와 진리를 일관성 있고 현실에 부합하게 설명하는 모델로서 부족하다고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여를 통째로 부인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계를 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의 역할이라든지, '언어'와 '제도'의 중요성이라든지, 동일성과 대비되는 '차이'라든지, 동일성을 넘어선 '타자'의 중요성이라든지, 학계를 포함한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권력 관계'를 드러냄의 중요성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결코 무시될 수 있는 것들은 아닙니다.


출처 : 대화(저자 강영안, 우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