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대화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물음

w.j.lee 2025. 2. 1. 01:02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물음

 

오늘 여러분과 함께 저는 "왜 무엇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 을 가지고 이 물음에 답을 줄 수 있는 방식을 몇 가지 생각해 보 겠습니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 오늘 강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이 물음을 묻는 의미에 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세 가지 길, 곧 반실 재론과 자연주의, 그리고 유신론의 입장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기독교 유신론의 입장이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대학에서 하는 학문과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간략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물음

 

우리는 많은 물음을 가지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가운 데는 쉽게 답할 수 있는 물음이 있는가 하면, 답을 찾기 힘든 물음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생긴 물음이 있는가 하면, 수백 수천년간 내려온 질문도 있습니다. 

자연과학과 관련된 질문이 있고 신학과 관련된 질문도 있고 철학과 관련된 질문도 있습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물음도 있습니다.

 

"왜 무엇이 존재하는가?" 좀 더 길게 물어보면 "왜 아무것도 없지 아니하고 무엇이 존재하는가?"

굳이 영어로 물어보자면 "Why is there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

이 물음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 가운데 아마 우리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질문일 것입니다.

가깝다는 것은 묻고 있는 대상이 우리 주변에, 바로 우리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물음을 묻고 있는 우리 자신도 이 물음의 대상 가운데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물음의 대상에서 보면 이 질문은 우리와 매우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먼 질문이라 하는 까닭은 사실상 이 질문을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거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철학자나 신학자만이, 이 가운데도, 매우 드물게 이른바 '형이상학 문제에 관심 있는 철학자나 신학자만이 이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왜 무엇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한 질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왜 무엇이 존재하는가?

왜 아무것도 없지 아니하고 무엇이 존재하는가?

이 물음은 오래전부터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삶의 현실을 깊이 생각한 몇몇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면 서 던진 질문입니다.

 

서양의 첫 철학자들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시작, 존재하는 사물들을 지배하는 원리, 곧 아르케arche 를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철학사 강의에서 만물의 아르케를 탈레스는 '물'이라 하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 하 고 이들보다 한참 뒤에 활동한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겠지요.

존재하는 것들의 시작과 이들을 움직이고 통제하는 원리를 찾고자 하는 노력은 "왜 무엇이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과 함께 시작하였습니다.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에도 이 물음이 없었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세계 를 포함한 모든 사물 세계의 존재를 움직이는 음과 양, 그리고 음과 양을 통합하는 태극의 존재를 동아시아 전통은 이야 기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물었던 물음이 (명시적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왜 무엇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주역』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물음은 형이하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형이상의 영역에 관한 물음, 곧 형이상학의 물음이었습니다.

 

왜 물음을 묻습니까?

왜 물음을 던지게 되는가요?

무엇을 알고자 할 때 우리는 물음을 던집니다.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짐을 받기 위해서 묻기도 하지만 물음을 던지는 목적은 앎과 연관되어 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음을 통해 얻은 앎은 (1) 단순한 정보를 얻는 데 그칠 수 있고 (2) 행 동으로 이어질 수 있고 (3) 사람의 성품을 빚어내는 데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이래요?" 라는 물음에 "그 사람은 정치하는 사람이래요."라는 답을 얻었다면

"아, 그 사람은 정치에 관여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정보는 다른 정보와 이어질 수 있고 어떤 행동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몇 시인가요?"

"부산 가는 기차는 몇 시에 떠나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정확한 정보 를 얻어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앎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몇 시인지, 기차가 몇 시에 떠나는지 알게 되면 그다음에는 행동을 취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에 대한 앎이 나우리 자신에 대한 앎은 단순한 정보를 얻어 내고 행동을 촉 발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성품을 빚어내고 우리 자신의 형성으로 이어집니다.

 

그렇지만 "왜 무엇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이런 종류의 물음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질문,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물음은 정보를 얻기 위한 동기에서 비롯되 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놀라움에서 비롯된 물음이라 해야 하겠지요.

자연의 아름다움과 광대함을 볼 때, 들에 핀 작은 꽃들을 볼 때, 귀여운 아이를 볼 때 우리는 "이들은 어떻게 존재하며 왜 존재할까?"라며 놀라움을 표시합니다.

우리 앞에 있는 마이크나 탁자,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강당, 이것들은 사람이 만든 것들입니다. 

이것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놀라움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자연을 보고 표현하는 놀라움이나 아이를 보고 표현하는 놀라움은 다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 the givens 입니다.

뜻 없이, 이유 없이 주어진 것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들' given as gifts 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가 방긋방긋 웃을 때, "얘야, 어디서 왔니?"라고 물어보는 경험을 해보지 않았습니까?

아이를 볼 때 찾아오는 놀라움, 경이, 감사하는 마음,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존재하는 것들과 더불어 사는 우리의 삶이 그저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임을 알고, 우리는 받은 선물을 누리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물음을 던지는 존재입니다. 

묻지 않고서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는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묻기 전에, 질문하기 전에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 존재하는 것들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허공의 상태, 무의 상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있다면 질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물을 것도, 묻는 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우리 주변에 수많은 존재가 이미 있고, 그 가운데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들을 두고 물음을 던지게 될 뿐 아니라, 사실은 물음을 던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존재가 우리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은 왜 없지 않고 그렇게 있는가 하는 물음이 우 리 속에서 스스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물음의 중심에 서게 되 는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묻는 존재이면서 물음의 대상이 되는 존재입니다.

왜 우리는 여기 있는가?

이 물음은 존재의 시작, 존재의 기원, 존재의 목적과 관련된 물음이지만 우리는 존재의 시작과 존재의 끝의 사이, 존재의 한 중간, 존재 의 한가운데 서서 이 물음을 던집니다.

 

홀로 긴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해 봅시다. 

깊은 산속을 통과 하다가 발길을 잘못 들여놓는 바람에 미끄러졌다고 합시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깨어나 눈을 떴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 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여행 장비가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지금 여기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삶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 고 있는가?

 

이 물음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블레즈 파스칼 Blaise Pascal, 1623-1662 을 떠올리게 됩니다. 

파스칼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한 그의 말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생각하는 갈대'라는 표제가 붙은 단편 글에서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나의 존엄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결코 공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생각을 조절함으로써다.

내가 더 많은 땅을 소유한다고 해서 더 우월한 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공간에 의해서 우주는 나를 포함한다.

그리고 나를 하나의 점인 것처럼 삼켜 버린다.

그러나 나는 사고에 의해서 우주를 포함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파스칼의 관찰은 놀랍습니다. 

인간은 공간과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거의 무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공간과 시간 속에 인간은 거의 '삼켜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통 하여 인간은 광대한 우주를 자신 속에 담을 수 있는 존재입니 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생각을 통해 온 우주를 담 을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독극물 한 방울 로도 죽일 수 있고, 몇십초 숨을 쉬지 못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죽일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광대한 시간과 공간의 우주를 생각 가운데 품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동시에 자신의 비참함도 아는 존재입니다.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인간은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런 상황, 이런 조건에 대한 인식에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이 공존합니다.

그 런데 바로 이 가운데서 인간은 물음을 던지는 존재입니다. 

파스 칼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의 앞뒤에 놓인 영원한 시간 속에 나의 짧은 생애가 흡수되어 버리는 것을 생각할 때, 

내가 차지하고 있고 또 내가 직접 보고 있는 이 작은 공간이, 

내가 알지 못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는 저 무한하고 광대한 공간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무서움을 느낀다. 

그리고 저곳이 아니라 오히려 이곳에 있는 나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란다.

왜냐하면 그때가 아닌 지금, 저 곳이 아닌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여기에 놓아두었을까? 

그 누구의 질서와 조종으로 이 장소, 이 시간이 나에게 운명지어졌을까?

 

엄청나게 긴 시간과 거의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광대한 공간 속에서 인간은 생각을 하는 존재이고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은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나를 여기에 놓아두었는가?

이 장소, 이 시간에 내가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인간은 또한 이 질문을 회피하는 존재입니다.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스칼은 이 현실을 직시하였습니다.

물음을 던질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 에서 인간은 위대한 존재이지만, 자신의 현실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은 비참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현실을 직면하기보다 회피하는 길을 찾습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곧 방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줄 모르는 데서 온다..

 

방에 가만히 머물지 못하는 것 자체가 불행의 원인은 아닙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왜 하는지,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같은 삶의 근본 질문을 대면하기보다는 오히려 바깥으로 나가 오락이나 사냥, 전투, 정치등 다른 일에 몰두하면서 자신을 잊고 살아가는 것에 오히려 불행의 근원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비참을 위로해 주는 유일한 것은 오락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들의 비참 중에서도 가장 큰 비참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여 모르는 가운데 죽어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불행에 곧장 대면하는 사람은 불행에서 벗어나기를 바랄진대, 그렇지 못한 사람은 불행 속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물음을 직면하기보다 물음을 피하는 것이 오히려 불행의 근원이 된다고 파스칼은 보았습니다.

불행을 면하려면 우리는 방에 홀로 앉아 자신의 삶을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제 한 걸음 물러서서 물어보십시다.

"왜 무엇이 존재하는가?"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인류가 지금까지 구축해 온 학문이 이 물음에 답을 줄 수 있다고 우리는 당연하게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고와 논리, 글과 말을 통한 인간의 표현, 인간의 욕구와 욕망, 인간의 행위와 행동 등 인간과 관련된 것들, 신체와 관련된 것들, 주변의 자연과 우주와 관련된 것들, 존재하는 물체의 존재와 운동에 관한 것들, 생명이 있는 것들과 생명이 없는 것들에 대한 것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인간의 지적 추구 대상입니다.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구별해서 존재하는 것들을 연구하는 지식을 '분과학문', 줄여서 '과학'이라 이름 붙여 부릅니다.

이러한 학문들은 인문과학, 사 회과학, 자연과학으로 흔히 분류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학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들 없이 우리는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와 진리를 물을 수 없습니다.

존재와 진리 물음에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는 우리의 지적 노력이 개입됩니다.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와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우리의 지각 방식에 견주어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 탁자를 보십시오. 

이 탁자는 강의할 때 사용하는 보조 도구로 이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탁자를 한 자리와 한 시점에서 한꺼번에 볼 수 없습니다.

탁자 바로 앞에 앉아 계신 분들은 탁자의 앞면만을 지금 이 순간 보고 있습니다.

저 오른편에, 저 뒤쪽에 계신 분들은 탁자의 옆면을 보면서 앞면은 비스듬히 보고 있습니다.

저는 당연히 탁자의 앞면과 옆면을 보지 못하고 원고를 둔 탁자 윗면만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탁자 전체를 보려면 시간 가운데 공간을 이동하면서 각 면을 보고 종합할 수밖에 없습니다.

탁자를 지각하는 행위는 공간과 시간 속에 주어진 탁자의 여러 면을 지각하는 주체가 자신이 서 있는 지점에서 바라보는 '지각의 지평' 안에서 여러 감각 자료들을 통합함으로써 가능합니다.

물론 여기에 주어진 감각들을 하나의 대상으로 묶어 내는 '상상력'과 그것을 통합하는 '개념'이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래알같이 작은 하나의 대상도 탁자의 지각과 마찬가지로 한 순간, 한동작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손바닥에 올린 모래알을 볼 때 우리는 마치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모래알 뒷면을 포함하여 모래알 전체를 모두 보는 것처럼 수용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그릇이나 컵, 자동차나 집, 도로, 사람의 신체 등 우리는 모두 사실은 한 면을 보면서 마치 전체를 보는 것처럼 수용하며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실은 보는 대상이 주어진 지각의 지평과, 보는 사람이 서 있는 지점과, 이 가운데서 주어진 것을 보 고 이해하는 주체의 상상력과 지적 능력과, 이해하고 해석하고 상호소통하는 활동이 함께 작용합니다. 

이 속에는 공동의 언어, 공동의 체험, 공동의 세계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과학을 통하여 우리가 현실 reality에 접근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현실은 여러 겹, 여러 면, 여러 층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자연'이라 부르는 세계 는 공간의 측면과 수의 측면, 물리적 측면과 화학적 측면, 그리고 생명과 관련된 측면이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삶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은 여기에만 제한되지 않고 공동의 삶이라든지 언어의 사용이라든지 심적 활동이라든지 경제적 교환 관계라든지 역사를 통한 전통의 형성과 보존이라든지 예배와 같은 신앙 행위라든지 하는 것들도 포함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인간을 포함하여 인간의 삶의 세계를 에워싼 존재하는 것들의 세계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매우 다층적이고 다면적이며 다양하다고 하겠습니다.

헤르만 도이여베이르트 Herman Dooyeweerd, 1894-1977 의 말을 빌려 표현해 보자면, 우리가 대학에서 교육하고 연구하는 분과학문들은 현실의 여러 양상들' modalities을 각각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수학은 실재하는 현실 세계의 수적 측면을 다루고 기하학은 공간의 측면, 물리학은 물리적 측면, 화학은 화학적 측면, 생물학은 생명의 측면, 심리학은 심적 측면을 다룹니다. 

 

생화학이나 물리화학, 생물사회학 등 복합학문이 가능하지만 어떤 학문이라도 현실의 하나 또는 둘, 많아야 세 측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과학이든 실재하는 현실의 한 측면을 다루는 분과학문일 뿐 존재하는 세계 전체를 다루는 분과과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부터 현대의 학문 세계에는 예컨대 심리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 보려 한다거나 역사를 통해서 모든 것을 설명해 보려고 한다거나 사회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 보려 하는 경향이 등장하였습니다.

인간의 종교, 문화, 사회 등을 이해할 때 이러한 이런 방식으로 이해해 보려는 태도입니다.

이를 일컬어 '심리학주의', '역사주의',  '사회학주의란 말을 붙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물학이나 물리학으로 모든 학문을 궁극적으로 설명해 보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있었습니다.

이런 경향들을 일컬어 '생물학주의', biologism '물 리주의' physicalism 라고 부릅니다.

 

어떤 분과과학을 하든지 자신이 하는 분과과학을 통하여 현실 전체를 설명해 보려 하는 경향 이 있어 왔고,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습니 다.

이러한 경향을 한마디로 이름 붙여 부른다면 아마도 환원 주의' reductionism 이란 말이 가장 적합하리라 생각합니다.

여러 겹, 여러 층, 여러 면의 현실을 결국 하나의 측면으로 모두 설명해 보려는 경향이라 하겠습니다.

탁자의 비유를 다시 끌어들여 이야기하면 탁자 옆면을 보고 탁자 전체를 보았다고 하는 것과 비 슷합니다.

 

우리는 도이여베이르트를 따라 어떤 과학이라도 그 과학이 탐구하는 고유 대상 영역에 관련해서 고유의 영역 주권'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 영역과 연관해서는 생물학이, 물리 영역과 연관해서는 물리학이, 언어 영역과 관련 해서는 언어학이 가장 분명하게 그 영역과 관련된 현상을 잘 그려 내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현상도 다른 현상과 완전히 별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물에 주목해 봅시다. 

물은 일정한 화학적 구성요소를 가지며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기본 요소입니다.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 때 집례자가 세례를 받는 사람의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경우를 예로 들어 봅시다.

물을 뿌리는 행위는 죄의 씻음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죄 씻음이 물로 인하여 물리적으로 발생한 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화학적 속성이 나 물리적 속성을 지닌 것이 아니므로 물로써 실제로 죄가 씻긴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일 물이 씻음을 상징 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지지 않는다면 씻음을 상징하는 표시로 물을 세례 예식에 사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편, 다른 관점에서 보면 물은 또한 경제적 재화이기도 하고, 치수는 정치적 으로도 매우 중요한 정책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분과학 문이 이 모든 측면, 이 모든 양상을 자신의 학문에서 고려하지 는 않습니다.

화학자의 연구가 생물학자나 경제학자, 정치학자의 연구에 중요한 토대가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물질 세계를 이루는 요소를 통해서 물질계 전체를 설명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과학문들은 각각의 대상이 되는 영역이 어떤 존재 인지, 그리고 이것이 다른 영역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하자면 일종의 개별 영역의 존재론과 영역 상호 간의 통합 존재론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앞에서 잠시 이름을 언급했던 도이여베이르트의 작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러한 존재 론을 구축해 보는 일이었습니다.

"왜 무엇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엄밀한 의미에서 어떤 한 측면을 다루는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 다.

그러면 이 물음을 누가, 어떤 지적 노력의 방식으로 다루어 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이 대상이 되는 지적 추구의 분야가 있 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이 물음은 철학의 물음이고 이 물음은 철학자가 다루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철학 가운 데서도 '형이상학'이 자신의 고유한 물음으로 삼는 물음이 바로 이 물음입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 의 유명한 강의 형이상학 입문에서 "왜 무엇이 없지 아니하 고 있는가?" 라는 물음을 다릅니다.

하이데거는 이 물음이 그 지위를 따라 “모든 물 음 가운데 으뜸 되는 물음" 이고, 가장 넓은 물음 이고 근원적인 물음이라고 단정합니다.

왜냐하면 "왜 무엇이 없지 아니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모든 것이 의미를 잃고 사라 지는 절망의 순간이나 가슴 뛰는 벅찬 순간에 던지는 물음이며, 아무것도 없는 상태, 곧 무와 맞닿아 그 경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끌어안는 물음이며 모든 것의 근원에 이르는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질문을 물리학을 뛰어넘는 형이상학의 질문으로 처음으로 구성한 철학자는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입니다.

라이프니츠는 "이성에 기초한 자연과 은총의 원리들" 1714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단순히 물리학자로서만 얘기해 왔다. 

이제는 비록 일반적으로 별로 적용되지 않기는 하지만 커다란 원리인, 충분 한 근거가 없이는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원리, 즉 사물을 충분히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왜 그것이 그렇게 발생하고 달리 발생하지 않는가를 결정하기에 충분한 근거를 진술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원리를 사용함으로써 형이상학으로 고양되어야 한다.

이 원리가 정해지면 당연히 제기할 수 있는 첫 번째 질문은 왜 무가 아니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될 것이다.

 

"왜 무엇이 있는가?", "왜 무엇이 없지 않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하여 하이데거는 "하나님이 창조했기 때문에"라는 답변을 거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이데거와는 달리 라이프니츠 는 이 물음을 통해 사물의 존재 원인인 하나님의 존재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갑니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오늘의 용어로 말 하자면 '과학'의 한계를 설정하고 형이상학으로의 이행을 요청 합니다.

라이프니츠가 이렇게 할 때 그가 택한 출발점은 존재하는 것들에는 그렇게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충분한 이 유가 있다는 원리였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근거 없이, 이유 없이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원리입니다.

이것을 원리로 삼아 라이프니츠는 우리의 물음, "왜 무엇이 있는가?"를 묻습니 다.

차라리 무의 상태가 훨씬 더 단순하고 쉬울 터인데 왜 무엇 이 존재하는가?

무엇이 단지 존재할 뿐 아니라 존재해야 한다 면 왜 그렇게 존재해야 하고 달리 존재해서는 안 되는가?

이 이 유를 라이프니츠는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물음에 관해 라이프니츠가 답을 찾는 과정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먼저 라이프니츠는 우연한 사물들의 계열 가운데에서 우주가 존재하는 충분한 이유를 찾을 수 있는지를 숙고합니 다.

두 가지 근거로 그는 이 가능성을 부인합니다.

 

첫째 근거는 물질 자체는 운동을 하거나 정지해 있거나 어느 상태나 가능하기 때문에 물질 안에서 운동에 대한 이유나 근거를 찾을 수 없 다는 것입니다.

둘째 근거는 만일 물질에 일어나는 현재 운동이 그것에 앞선, 곧 선행 운동에서 나온다고 하더라도 무한소급 만 일어날 뿐 운동의 이유를 설명해 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라이프니츠는 우주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는

(1) 우발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의 계열 바깥에 존재해야 하고

(2) 이 계열들의 원인이며 동시에 자신의 존재 이유를 필 연적으로 자신 속에 가지는 실체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추론 합니다.

그리고 이 두 조건을 충족시키는 존재, 곧 사물의 최종 근거는 '신'Dieu 이라 불린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라이프니츠의 논리 전개 방식은 '우주론적 논변'이라고 통칭되는 방식의 일종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우발적인 존재의 존재 원인과 운동 원인을 필연적 존재로부터 찾아내는 논증 방식입 니다.

"왜 무엇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여기서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모든 존재하는 것이 유래했다는 답을 얻 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함축할 수 있는지는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 제안될 수 있는 설명방식을 논의하면서 좀 더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 대화(저자 강영안, 우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