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에 답하는 세 가지 방식 : 반실재론, 자연주의, 유신론
존재하는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두 번째 대안은 자연주의 naturalism 입니다.
자연주의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동양적 자연주의나 서양의 초월주의에서 볼 수 있는 자연주의가 있는가 하면 기독교 신앙을 가진 과학자들이 과학연구를 할 때 취하는 '방법론적 자연주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주 의는 이것들과 구별해서 '철학적 자연주의' 또는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의 자연주의를 따르면 신과 같은 존재는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오직 자연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의 희망이나 열망, 인간의 필요나 욕망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거대한 우주의 지극히 미미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연주의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Epicurus. 341-270BC 그리고 루크레티우스Lucretius, 99- 55 BC에까지 소급되는 사상입니다.
오늘 유행하는 철학 가운데 유럽철학은 대체로 앞에서 말한 반실재론에 기울어 있고, 영미 철학은 철학적 자연주의에 기울어 있습니다.
이 둘의 적당한 조합 속에서 철학을 하거나 학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주의는 오늘날 지식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식, 언어와 의 미, 심지어 수와 보편자 같은 추상적 대상과 도덕과 윤리, 미와 종교를 이해하는 데까지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무엇이 없지 않고 있는가?", "왜 무가 아니라 무엇 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일정한 방식으로 답하려는 자연주 의는 과학을 유일한 지식의 원천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여기서 자연주의는 과학주의 scientism와 유물론, materialism 나아가서 물리 주의 physicalism 와 거의 비슷한 뜻을 지니게 됩니다.
오늘 유행하 는 무신론적 진화론도 자연주의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연주의의 전형을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1872-1970 에게서 단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러셀은 "한 자유인의 예배" a Free Man's Worship 란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원인들의 산물이라든지,
사람의 출생과 성장, 그가 가지고 있는 희망과 두려움, 사랑과 믿음은 단지 원자들의 우연한 배열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든지,
어 떠한 정열도, 어떠한 용맹도, 어떠한 강렬한 사유와 감정도 내 세에서는 개인의 삶을 보존할 수 없다든지,
모든 세대의 수고와 헌신과 영감과 번쩍이는 천재성도 태양계의 종말이 오면 소멸 할 수밖에 없다든지,
인류의 업적을 자랑하는 전당도 이 우주가 파멸하면 어쩔 수 없는 분토가 되어 버리고 만다든지 하는 말들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확실해서 어느 철학도 그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영혼의 거처는 차후에 이러 한진리들을 발판으로 할 때만, 돌이킬 수 없는 절망에 기초할 때만 안전하게 세워질 수 있다.
러셀의 주장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원인들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2. 사람의 출생, 성장, 사람이 가지고 있는 희망과 두려움, 사랑과 믿음은 원자들의 우연 한 배열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3. 어떠한 정열도, 어떠한 용맹도, 어떠한 강렬한 사유와 감정도 내세에서는 개인의 삶을 보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세대의 사고와 헌신과 영감과 번쩍이는 천재성도 태양계의 종말이 오면 소멸할 수밖에 없다.
4. 인간의 업적을 자랑하는 전당도 우주의 파멸과 함께 분토가 되어 버릴 것이다.
5. 따라서 이러한 진리에 근거해서, 다시 말해, 절망에 기초해서만이 인간 영혼의 거처가 안전하게 세워질 수 있다.
요컨대 인간의 삶에는 자연 바깥에서 주어진 어떤 근거 나 목적, 어떤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삶의 근거가 되는 토대, 목적, 의미, 목표가 없다는 생각을 일컬어 '아무것도 없다 wihil. nothing 는 주의', 곧 '허무주의' nihilism 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러셀 의 자연주의는 이런 의미의 허무주의에 귀결합니다.
좀 더 단순화하여 자연주의 관점에서 우리의 물음을 접근 해 본다고 합시다.
자연주의를 따르면 존재하는 것들은 물질적이고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 자연밖에 없습니다.
언어를 사용 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하고 유머를 만들어 내고 예술과 철학을 하고 역사를 이해하고 도덕 규칙을 지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들조차도 모두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속하고 자연 세계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철학적 또는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자연뿐이며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를 부인하는 점에서 '무신론'이며
인간을 포함한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이 물질적인 대상이라 보는 점에서 대부분 '유물론'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의도나 목적, 어떤 설계나 기획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러셀이 말하는 것처럼 물질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조차도 원자들의 우연한 배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의 기원뿐만 아니라 삶의 목적과 의미를 묻는 것 조차 무의미한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만일 자연주의가 참이라면 삶의 의미와 목적뿐만 아니라 ("무엇이 왜 존 재하는가?"라는 물음을 포함해서) 물음을 묻고 지적으로 탐구해 가는 지적 행위, 지적 추구가 과연 가능한가하는 물음이 생깁니다.
우리의 지적 작업은 앨빈 플랜팅가가 오랜 노력을 통해 보여주었듯이 우리의 인식 기능이 올바르게 작동할 때 가능합니 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눈과 생각 할 수 있는 능력이 제대로 기능할 때 가능합니다.
제대로 기능한다는 것은 우리의 눈과 뇌가 사물을 보고 판단할 때 원래 설계 한 계획대로 작동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의식적이고 목적을 가진 지적 행위자 없이 올바른 기능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올 바른 기능은 지적 설계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자연주의자라고 해보십시오.
올바른 기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 겠습니까?
만일 자연주의가 정말 참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소설을 쓰고 유머를 만들어 내고 철학을 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신체를 통해 자연의 한 부분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정신 작용, 창조적 활동도 신체를 통하여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활동도 자연의 일부라고 해야 할까요?"
반실재론이 실재하는 세계를 담아내지 못하는 대신 인간의 창조 능력을 극대화한 반면,
자연주의는 실재하는 세계는 이미 그곳에 있는 세계로 수용하지만 인간의 정신 활동과 창조 활동이 가능한 근거를 적합하게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자연주의를 따르면 정신 활동은 물질적인 것의 기능, 다시 말해, 뇌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뇌가 어떻게 우리가 이해하는 인간의 정신 활동을 산출할 수 있는지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여기서 반드시 덧붙일 말이 있습니다.
자연주의가 존재하는 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좋은 설명 모형이 될 수 없다는 말은 오늘의 과학이 그렇 게 할 수 없다는 말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비록 많은 과학자가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입장에서 과학을 탐구한다고 해도 이러한 태도는 철학적 자연주의나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와는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과학은 뇌 연구라든지 인간의 사고와 행동 연구를 통하여 우리의 정신 활동, 곧 우리의 의식 현 상과 의식의 활동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해명해 줍니다.
예컨 대 과학은 뇌가 어떻게 진화했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을 할 수 있지만 왜 뇌가 있는지,
뇌가 무슨 이유로 진화했는지,
뇌가 왜 제대로 기능하는지 등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 니다.
과학에는 한계가 있고, 과학의 힘은 그 한계 안에서 발휘 되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재하는 현실은 오직 자연뿐이고 자연은 오직 과학만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과학적 설명을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유일한 설명으로 못박을 때 철학적 자연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과학을 하는 분들이 철학적 자연주의자가 될 가능성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높아 보입니다.
그러나 철학적 자연주의를 기초로 해야 과학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과학을 하는 분들이 반드시 자연주의자가 되거나 자연주의를 지지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논의할 수 없지만 잠시 언급만 해두자면 앞에서 거명한 플랜팅가 같은 철학자는 과학자들이 대부분 수용하는 진화 현상은 철학적 자연주의보다 오히려 유신론으로 더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유신론은 깊은 차원에서 심지어 진화생물학을 포함하여 과학과 갈등이 없다고 플랜팅가는 주장합니다.
출처 : 대화(저자 강영안, 우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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