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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론이 학문과 진리, 삶의 의미와 관련해 갖는 의미

w.j.lee 2025. 2. 9. 01:02

 

 

유신론이 학문과 진리, 삶의 의미와 관련해 갖는 의미

우리의 물음은 "왜 무엇이 존재하는가?", "왜 무엇이 없지 않고 존재하는가?"였습니다.

이 물음은 인간 중심의 반실재론과 모든 것을 자연으로 환원하는 자연주의의 틀보다는 오히려 유신론이 훨씬 더 합당한 답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 전개 한 논지였습니다.

이제 만일 유신론이 참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지적 탐구 행위와 진리 개념과 그리고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를 주는지를 결론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무엇보다 유신론적 창조 이념은 우리의 학문에서 경험의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 는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세계, 이 우주를 '자유롭게'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 우리가 보는 우주는 반드시 그렇게 있어야 할 필요가 없었지만 하나님이 현재 움직이는 방식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우주는 가능한 세계 중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세계이 며, 그렇기 때문에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세계라는 것입 니다.

 

이것이 과학을 포함한 우리의 지적 추구 작업에 주는 의미는 적지 않습니다.

만일 이 우주가 현재의 방식으로 '필연적 으로' 존재한다면 과학은 오직 이성으로만 충분하게 연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논리학의 동일률이나 모순율은 우리의 경험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필연적인 진리는 이성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이 우주는 필연적 존 재가 아니라 '우연적, 우발적 존재' 입니다.

반드시 이렇게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있기 때 문에 이 세계에 관한 진리는 논리의 세계와는 달리 필연적 진리가 아니라 우연적 진리, 우발적 진리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통한 추론뿐만 아니라 경험이 요구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유신론을 따르면 이 세계, 이 우주에서 발견되는 질서와 규칙, 구조는 우연적인 것들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있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와 같은 것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된 것들에 대한 참된 것, 곧 진리를 발견하려면 이성을 통하여 아프리오리하게, 선험적으로 접근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경험, 곧 관찰과 실험을 이용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과학은 이성적인 탐구이면서 동시에 경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 이 세계,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과학의 경험적 성격을 뒷받침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무수한 가능 세계 가운데 현재의 세계를 선택했다면 단지 이성만을 사용하지 않고 경험을 사용하여 직접 보고 관찰하고 확인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지식을 얻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레이어 호이카스 Reijer Hooykaas 는 세계를 하나님이 자유로운 의지로 지으셨기 때문에 이성이나 논리가 아니라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탐구해야 한다는 기독교적 경험주의가 근대과학의 출현에 얼마나 중요한 기여를 했는지 잘 보여주 고 있습니다.

 

둘째로, 기독교 창조 이념은 진리 또는 참된 것의 일종의 존재론적 근거가 된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참된 지식, 그리고 지식의 참됨(진리)은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을 요구합니다.

 

첫째 조건은 발견할 수 있는 진리가 우리 바깥에, 우리와 상관없이 존재해야 합니다(진리 실재성의 조건), 

만일 그렇지 않 다면 우리가 진리라 말하는 것들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것들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둘째 조건은 만일 진리가 우리 바깥에 있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진리로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고 파악하고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진리추구와 파악 능력의 조건).

다시 말해 무엇을 진리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셋째 조건은 만일 무엇이 진리라면 그것은 진리 편에서 인 식 가능하도록 주어지고, 추구자 편에서 그것을 추구하며, 상호간의 만남이 일어나야 합니다 (진리의 주어짐과 추구와 만남의 조건). 

만일 진리가 인식 가능한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인식하려 해도 나는 그것을 진리로 인식할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한 자연주의와 포스트모던적인 반실재론은 이 조건을 충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오직 유신론만이, 아니, 철학에서 종종 쓰는 용어를 사용해서 이야기하면, 유신론적 비판적 실재론만이 이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던적인 반실재론을 따르면 주체 바깥에는 실재하는 존재, 실재하는 현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언어나 사회 관습, 인간의 상상력 등을 통해 만들어 낸 인간의 구성 활동의 산물입니다.

자연주의를 따르면 설계 계획을 따라 올바르게 기능하여 참된 믿음, 참된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인간에게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신론적 비판적 실재론을 따르면 이 세계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지적 으로 파악될 수 있는 구조와 질서를 통하여 설계하고 창조하셨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에 함께 지음받은 세계를 탐구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계를 탐구하고 이해할 가능성, 그 가운데서 참된 것들을 발견하고 이해할 가능성이 인간에게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알기를 원하고 참된 것을 발견 하고자 합니다.

지식의 욕구가 자신의 이익과 지배력을 키우기 위한 방식으로 오용되고 왜곡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욕구가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C. S. 루 이스는 "전시의 학문" 이란 강연에서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웅변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인들은 신전뿐만 아니라 추도연설도 남겼습니다. 

이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곤충들은 다른 길을 택하였습니다. 

녀석들은 물질적 부와 안전한 보금자리를 먼저 추구했고, 그 보상을 받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포위된 도시에서도 수학 공리를 내놓고, 사형수 감방에서 형이상학적 논증을 펴고 교수대를 두고 농담하고, 퀘벡 성채로 진군하면서 새로 지은 시를 토론하고, 테르모필레에서도 머리를 빚었습니다.

이것은 허세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본성 입니다.

곤충들과 다른 길을 선택한 인간의 지적 탐구에는 참된 것, 선 한 것,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과 상상력, 이성을 사용한 탐구, 미적 감식력,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의 노력뿐만 아니라 마이클 폴라니가 '공동의 삶'이라 부 른-인간의 공동체적이고 주체적인 노력이 개입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재된 질서와 구조, 규칙성을 탐구하는 이성 앞에 보여주는 대상 세계의 '열어 줌'이 있습니다.

이 두 주체와 대상의 만남, 이 두 현실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 고자 하는 세계의 진실된 구조가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 탐구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노력, 예술적 창작 행위,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모두 실재하는 현실과 주체적 인간의 인격적 만남이고 인격적 행위라 하겠습니다.

 

셋째로, 유신론은 비록 그 전체를 우리가 이야기할 수 없었 지만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뿐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삶에도 의미와 목적을 제공해 줍니다.

만일 자연주의를 따르거나 반실재론을 따른다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자연주의에는 이 세계의 목적이나 의도, 의미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의미와 의도, 목적을 이야기할 자리가 사실 없으며, 반실재론에는 그런 자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자의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유신론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어떤 세계를 지향하며 살아가야 할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왜 무엇이 없지 않고 오히려 존재하는가?"

이 물음은 단지 존재의 기원뿐만 아니라 존재의 목적, 존재의 의미와 연관된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기독 교 유신론의 답변은 삼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바라는 삶의 목적과 삶의 방식이 있기 때문 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요일 4:8, 16)라고 쓰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 전통은 사랑이신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죄로 인해 왜곡되고 훼손된 세계를 사랑이신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하시고 회복하시는 이야기를 이어 왔습니다.

 

'창조'가 사랑이신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라면 '죄'는 부름에 대한 반역이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인간이 실패한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응답의 삶을 성령 안에서 회복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습니다. 

이 현실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은 죄로 인해 훼손된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악과 고통이 있는 세계를 회복하고 새롭게 하는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이야기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들려주었고 우리를 이 사건으로 초대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불순종과 성령 안에서의 그리스도를 통한 창조의 회복은

하나님의 창조가 단지 기원의 문제, 과학의 문제,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계의 시초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기원에서 목표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것들의 의미와 삶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이 방향이 가리키는 목표를 굳이 말로 표현해 보라 하면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 또는 진리와 진실, 정의와 공의, 화평과 평화라고 이름 붙 여 보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 대화(저자 강영안, 우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