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자유게시판

속단

w.j.lee 2025. 2. 2. 01:04

 

속 단

 

나는 요즘, '잘못된 결정보다 하지 않은 결정이 낫다'는 어느 유명인의 말에 공감이 간다.

서둘러 결정을 하고 보면 꼭 뭔가 잘못된 듯 개운치 않은 뒷맛이 따른다.

학창시절, 친구들 간에 유행했었던 사인지(설문지)를 지금도 가끔 들여다보며 혼자 웃을 때가 있다.

그 설문에는 당신이 본 나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묻고 있는데 한 친구가 좋은 점과 나쁜 점에 대해 똑같이 '속단'이라 는 답을 해주어 큰 충격과 더불어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삼국지에 보면 지략가인 조조가 정권을 잡기 전, 초급 장교시절의 얘기가 나 온다. 

어려웠던 초급 장교시절, 길을 지나다가 마침 부친과 가까운 어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무척 반갑게 환대를 하며 편히 쉬었다 가기를 권한다.

피곤해 누워 있던 조조가 가만히 들으니 부엌에서 칼을 갈면서 한 번에 찔러 죽여야 하는데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들은 조조는 자기를 죽이려는 줄 알고 부엌으로 가서 부친의 친구를 죽이고 달아나다 보니, 조조에게 잡아 주기 위해 그 가족이 돼지를 사가지고 돌아오고 있었다.

순간 조조는 자신의 속단을 후회하지만 기왕 벌어진 일이니 후환을 없애기 위해 그 가족마저 모두 죽이고 만다.

 

오래 전(안경을 쓰지 않고도 잘 보였을 때),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옆 자리에 앉은 재일동포가 나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건설 관련 일을 한다고 하니 한국 사람들은 큰 뼈대는 그런대로 하는 것 같은데, 세부적인 마무리가 아주 형편없다며 혹평을 했다.

그 혹평으로 슬그머니 부아가 나던 참에 음료가 제공되었다.

그는 커피를 선택했는데 작은 봉지에 들어있던 설탕을 넣지 않고 후추를 넣었다.

당연히 설탕은 Sugar이며, 후 추는 Pepper 인데 그는 그 영어를 구분 못하는 듯했다.

아니 그 간단한 영어로 되어 있는 설탕과 후추조차 구분하지 못하면서 한국인을 그리 욕하다니 하며 속으로 고소해 했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깨닫고 보니 그것은 나의 '속단'이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그 설탕과 후추를 구분하지 못한다.

언제 부터인가 돋보기를 쓰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설탕과 후추라고 써놓은 그런 작은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

그때 그는 영어를 모르는 것이 아니고 나처럼 돋보기를 써야만 구분이 가능했던 건 아니었을까 되돌아보게 된다.
지금도 그 때의 속단이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하며,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는 그 때의 속단을 다시 되짚어 보게 된다.


출처 : 잡설산책 (김연태 지음, 글샘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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