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과거 대통령을 지낸 두 김 씨 중 한 사람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고 했고, 또 한 사람은 '제비 몇 마리가 날아왔다 해서 봄이 온건 아니다.' 라고 했다.
그들이 말하던 새벽이나 봄은 '서울의 봄'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춘래 불사춘(봄은 왔는데 봄이 아니다)'이라는 말과 함께 자주 회자되었다.
춘래불사춘이라는 고사성어의 배경은 중국의 4대 미인이라 불리던 왕소군이 실크로드 변방 어딘가에서 품었던 깊은 한 때문이다.
'왕소군'은 우리가 잘아는 '서시', '초선', '양귀비'와 함께 중국의 4대 미인이다.
허풍이 센 중국인들이 만든 말로, 월나라의 서시는 '침어(沈魚)'라 하여 서시가 물가에서 세수를 하자 그 얼굴을 본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멈추고 물속에 가라앉았다고 했고,
삼국지에 수양 부자지간으로 나오는 동탁과 여포의 이간질에 이용되었 던 초선의 미모는 '閉月'이라 하여 그가 고개를 들어 달을 보자 달도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고 한다.
또 양귀비의 미모는 '수화(羞花)'라 하여, 그녀가 꽃의 앞을 지나가자 꽃이 잎으로 가리며 부끄러워했단다.
한나라 때의 왕소군은 '낙안(落雁)이라 하여 그녀가 거문고 타는 모습에 반한 기러기가 날갯짓을 멈춰 땅에 떨어졌다고도 전해진다.
그 거짓말들에 대해 크게 반감이 일지 않는 것은, 기왕이면 그들의 미모가 그러했기를 은근히 기대했기 때문 일지도 모르겠다.
미인박명이라서 일까?
이들 4대 미인은 팔자가 기구했다.
자살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오랑캐에 선물로 제공되기도 했다.
그중 왕소군은 한나라의 원제가, 자꾸만 괴롭히는 흉노족을 달래기 위해 흉노 왕에게 주는 미인계의 제물로 쓰이게 된다.
백제의 의자왕도 삼천궁녀라는 많은 궁녀를 두었었다고 세간에 전하고 있으니 중국의 황제에겐 얼마나 많은 여인이 있었겠는가!
서양의 왕들도 오늘 밤은 어느 여인에게 가야할까를 망설였을 텐데, 그래서인지 미리 약속하길 여인이 거처하는 방의 창밖에 깃발을 걸어, '오늘 컨디션도 좋고, 왕을 고대합니다.'라는 표시를 하게 해서 그 중에 깃발이 걸린 처소를 찾아가곤 했다고 한다.
한나라의 원제도 궁녀가 너무 많다보니 고르기도 지쳐, 양들이 끄는 마차를 타고 그 마차가 닿는 곳에 있는 궁녀를 찾는 별별 방법을 다 썼다.
그마저도 싫증이 났는지 나중엔 궁녀의 초상화를 그린 그림책을 만들어 놓고는 생각 날 때마다 그 리스트를 훑어보고 그날의 궁녀를 찾았다고 한다.
왕소군의 비극이 시작된 건, 이 그림책을 만드는 방법 때문이었다.
그 당시 모든 황실 궁녀들은 자신의 얼굴이 예쁘게 그려져 황제의 눈에 들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자니 궁정화가인 모연수를 찾아가 큰 뇌물을 바쳐가며 '포토샵'을 부탁해야 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왕소군만이 모연수를 찾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의 미모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왕소군은 모연수에게 괘씸죄로 찍혀, 그림책에서 가장 못나게 그려지고 말았다.
마침 방문했던 흉노족의 왕인 선우가 돌아갈 때,
원제는 선우에게 주려고 궁녀들을 그린 초상화 그림 책을 가져오게 했다.
그림책을 쭉 훑어보는데, 그 많은 궁녀가 있음에도 막상 남 주기는 아까운 지라 그 중에서 가장 못생긴 왕소군을 찍어 흉노의 왕 앞으로 대령시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김지미 같기도 하고 윤정희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김태희 같기도 한 너무나도 아름다운 궁녀가 불려 나온 게 아닌가!
아뿔싸 때는 이미 늦었으나 황제의 체면에 물릴 수도 없고 태연한 척, 미소를 지으며 왕소군을 보내고 나서 바로 궁중화가 모연수를 불러 바로 목을 쳤다.
왕소군이 오랑캐의 땅으로 출발할 때의 가련함과 슬픔, 변방에 끌려가 외로움과 고향에 대한 애끓는 마음에 시들어 갈 왕소군의 모습을 수백 년이 넘는 동안 중국의 많은 시인들은 시로 묘사했다.
唐代시인 동방규(東方虬)의 소군원(昭君怨)삼수(三首)
漢道初全盛(한도초전성) 한(漢)나라 국운 처음에는 융성했으니
朝廷足武臣(조정족무신) 조정에는 무신도 넉넉했다네
何須薄命妾(하수박명첩) 어찌 꼭 박명한 여인이
辛苦遠和親(신고원화친) 괴로움을 겪으며 먼 곳까지 화친하러 가야 했던가
掩涕辭丹鳳(엄체사단봉) 흐르는 눈물 가리고 단봉성을 떠나
銜悲向白龍(함비향백룡) 슬픔을 삼키며 백룡대로 향하네
單于浪驚喜(단우랑경희) 선우(單于)는 놀라 기뻐했으나
無復舊時容(무부구시용) 더 이상 옛날의 그 얼굴 아니었다네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어)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옷에 맨 허리끈이 저절로 느슨해지니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가느다란 허리 몸매를 위함은 아니라오
출처 : 잡설산책 (김연태 지음, 글샘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