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길/나사렛 예수

예수는 현대에 어떠한 의미를 가질까요?

w.j.lee 2015. 12. 12. 13:44


예수는 현대에 어떠한 의미를 가질까요?


많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종교적으로 되기를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우리 삶의 모든 즐거움을 가져갔고 지키기가 불가능한 규율들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과거의 예수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거리낌이 없지만, 오늘날 우리의 삶에는 중요성이 없다고 합니다.

조쉬 맥다월은 예수가 단순히 종교 지도자들 중 한 명이며 지킬 수 없는 규율을 만들었다고 생각한 대학생이었습니다. 조쉬는 예수가 자신의 삶과 전혀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쉬는 학생회관의 점심 식사 자리에서 미소가 밝고 활기찬 젊은 여학생 옆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흥미를 느낀 조쉬는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녀가 바로 말한 답은 이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잖아요!” 

예수 그리스도? 조쉬는 발끈해서 쏘아붙였습니다.

“그런 이상한 말 좀 하지 마세요. 종교는 지겨워요. 교회도 지겨워요. 성경도 아주 질렸어요. 종교에 대한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하지만 이 여학생은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미안하지만 종교라고는 안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지요.”

조쉬는 크게 놀랐습니다. 예수를 종교적인 인물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조쉬는 종교적 위선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기독교인 여성은 즐거움에 차서 예수에 대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준 분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존재에 대한 심도 깊은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찌됐든 우리 모두는 인생이 무엇인지 한 번쯤은 궁금해합니다. 어두컴컴한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바라보고 누가 그 별들을 하늘에 두었는지 궁금해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삶에 대해 가장 큰 질문들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곳에 있는가?” 

  “나는 죽은 후 어디로 가는가?”

여러 철학자와 종교 지도자들이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을 내놓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외에 죽음에서 부활함으로써 스스로의 자격을 입증한 경우는 없습니다. 조쉬와 같은 회의론자들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 비웃었지만 후일 부활이 사실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삶에 실제적인 의미를 제시합니다. 예수는 삶이란 돈을 버는 것, 재미있게 지내는 것, 성공을 거두는 것, 그리고 죽음으로 향하는 것 이상으로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명성과 성공에 의미를 두고 있으며, 심지어 최고의 슈퍼스타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마돈나는 슈퍼스타가 됨으로써 “나는 왜 이 곳에 있는가?”에 대한 답을 내리려 했으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명성, 부, 대중의 인정 등을 통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들을 다 얻은 후에도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죠. 진정하고 영원한 행복의 의미와 어떻게 이를 찾을 수 있는 지 알고 싶었습니다.”

의미를 찾다가 포기한 경우도 있습니다. 시애틀의 그런지 록 그룹인 너바나의 리드 싱어 커트 코베인은 27살이라는 나이에 절망을 느끼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재즈 시대의 만화가인 랄프 바톤 역시 삶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습니다. “살아오면서 어려운 점도 별로 없었고 친구도 많았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결혼도 여러 번 하고 집도 여러 번 바꾸었으며 세계 곳곳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하루 24시간을 보낼 방법을 생각하기가 너무 지겹습니다.”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인 파스칼의 경우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내면의 공허함을 하나님 외에는 채울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 형태의 빈 자리가 있으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채울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옳다면 우리는 예수가 우리의 정체성과 이번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죽은 후의 삶에 대한 희망도 줄 수 있다고 기대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의미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런 말을 남긴 버트런드 러셀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면 삶의 목적에 대한 질문도 무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이 결국 무덤에서 “썩어질 것”이라고 체념했습니다. 러셀은 자신의 저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유(Why I am not a Christian)”에서 삶의 의미에 대해 예수의 모든 발언과 자신의 영생에 대한 약속까지도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증인들이 말한 것처럼 예수가 실제로 죽음을 물리쳤다면 오직 예수만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말해줄 수 있으며, “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에 대해 답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말, 삶과 죽음이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시켜주고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준다는 점을 이해하려면 예수가 하나님과 우리,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해 한 말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에 대해 어떤 말을 했을까요?

하나님은 관계적입니다.

많은 이들은 하나님을 우리가 알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이라기 보다 하나의 힘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언급하는 하나님은 스타워즈에 나오는 인간 외적인 힘(Force)과 같이 그 선함이 전압 단위로 측정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은 하늘에 존재하며 우리의 삶을 불쌍하게 만드는 것을 즐기는 인정 없는 귀신도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관계를 중시하는 존재이며, 우리보다 더 중시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도 생각을 하고, 소리를 듣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말하고 보여주었습니다. 예수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친밀하고 개인적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우리에 대해 생각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병자를 치유하고 상처받은 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매력이나 행동에 기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의 사랑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전적으로 희생적이며 사심이 없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벽한 아버지의 사랑에 비유했습니다. 좋은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것만을 주고 싶어하며 아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원하는 것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엄하게 대하기도 합니다.

예수는 인생과 삶에서 중요한 것에 대한 아버지의 충고를 거부한 반항적인 아들에 대한 이야기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합니다. 건방지고 고집스러운 아들은 일을 그만두고 신나게 살고 싶어합니다. 아버지가 유산을 물려줄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미리 달라고 고집부리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요청을 들어줍니다. 하지만 아들은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방탕하게 살면서 유산을 써버린 반항적인 아들은 돼지 농장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배가 고파진 나머지 돼지 죽조차 맛있게 보였습니다. 낙담한 아들은 아버지가 받아줄 지 확신할 수 없음에도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는 아버지가 아들을 반갑게 맞이했을 뿐 아니라 집에서 달려나와 반겨줬다고 말합니다. 너무나 기뻐했으며 아들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잔치까지 성대하게 열어주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그렇게 사랑했음에도 처음에 떠났을 때 쫓아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이 고통을 겪고 반항적인 선택의 결과로 어려움에 처하게 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우리에게 최상의 것을 빼앗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할 때 그 결과를 짊어지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품은 우리 깊숙한 내면에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근간이 되는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깊숙한 내면은 어떨까요?

하나님은 거룩합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약 6천번 가까이 하나님에 대해 “거룩하다”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도덕적으로 순수하며 완벽함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한 점의 흠도 없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순수하지 않거나 도덕적이지 않은 생각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함은 악과 함께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도 됩니다. 악함은 하나님의 천성에 반대이며, 하나님은 악함을 싫어합니다. 그 분에게 더러운 무엇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성스럽고 악함을 증오한다면 왜 우리의 성품도 자신의 성품과 비슷하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왜 아동 학대자, 살인자, 성폭력범, 변태 등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도덕적 선택을 할 때 고뇌할까요? 그 의미를 찾기 위한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예수는 인간에 대해 어떤 말을 했을까요?


예수는 인간에 대해 어떤 말을 했을까요?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신약을 읽다 보면 예수는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여기며 그 분의 자녀로 창조되었다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일랜드의 록그룹 U2의 리더 보노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 함께 할 사람이 필요했고 진정한 관계를 맺고 싶어했다는 점은 아주 놀라운 개념입니다…” [5] 즉, 우주를 만들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는 뜻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엄청난 유산을 준비했습니다. 예수가 말한 아버지의 마음처럼 하나님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축복과 특권을 아낌없이 주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우리 인간은 특별한 존재인 것입니다.

선택의 자유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Stepford Wives)”에서 거짓말을 일삼고 탐욕스러우며 살인적인 남성들은 순종적이고 말을 잘 듣는 로봇을 만들어 자유의 몸이 되고 이제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 아내들을 대체하려 합니다. 남자는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이들은 장난감과 다름없는 로봇과 아내를 바꾸어 순종을 강제하려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제작된 로봇같은 사람들로 만들어 숭배하는 마음을 마치 화면보호기처럼 프로그래밍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강제적으로 받는 사랑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게 자신을 사랑하기를 바랬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관계 속에서 상대방이 강요가 아닌 우리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해주기를 바라며, 얼굴도 모르는 신부가 아니라 진정한 소울메이트를 더 바랍니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딜레마를 다음 이야기 속에서 요약했습니다.

신분이 낮은 하녀를 사랑한 왕이 있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이 왕은 다른 왕들과 달랐습니다. 모든 정치가들도 그의 권력 앞에서는 벌벌 떨었지만, 이렇게 강력한 그도 하녀에 대한 사랑 앞에서는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왕은 어떻게 해야 자신의 사랑을 알릴 수 있을 지 고민했습니다. 다소 이상할 정도로 왕은 그의 권위를 세워 자신의 행동을 제한했습니다. 하녀를 왕궁에 데려와 머리에 보석 왕관을 씌워준다면 확실히 저항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누구도 감히 왕에게 저항하지는 못하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하녀가 그를 사랑할까요? 물론 사랑한다고 말은 하겠지만, 왕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 문제인지 아실 것입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남자친구와 어떻게 헤어질 수 있을까요? (“우리 사이에 문제가 있어. 하지만 당신도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하나님은 자유로이 주고받는 사랑을 가능하도록 독특한 능력을 인간에게 부여하셨습니다. 바로 자유 의지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덕률에 대한 반항

C.S. 루이스는 우리 내부적으로는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프로그래밍되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태어난 순간부터 그 욕망에 대해 저항한다고 여겼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동기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통해 자신이 옳고 그름을 본능적으로 판단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루이스는 이러한 선악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얻었는지 알고자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히틀러가 유대인 6백만명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읽거나, 영웅이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야기를 읽을 때 이러한 선악의 감각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속이는 것이 잘못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내부의 도덕률에 프로그래밍된 이러한 인식 덕분에 무신론자였던 사람이 “도덕률을 만드는 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와 성경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켜야 할 도덕률을 만들어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등을 돌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도덕률을 어긴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십계명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예수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 살인을 하지 말라” 등의 십계명을 가지고 우리가 진심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요약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도덕률을 어기는 잘못 뿐 아니라 옳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도 죄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속의 만물을 지배하는 법과 함께 우주를 만들었습니다. 이 법은 위반할 수 없으며, 바꿀 수도 없습니다. E=MC2라는 공식을 찾아낸 아인슈타인은 핵에너지의 의문을 풀었습니다. 적절한 원료를 정확한 조건으로 배합하면 엄청난 힘이 생성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도덕률이 하나님 본인의 성품을 바탕으로 하므로 유효하다고 합니다.

최초의 남자와 여자가 태어난 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도덕률이 우리의 최선을 위한 것임에도 이를 어겨왔습니다.  그리고 옳은 일을 행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최초의 남자인 아담으로부터 유전되어 왔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불복종을 죄악이라고 부르며, 죄악을 일컫는 “Sin”이라는 단어는 궁수가 과녁을 벗어 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악은 하나님이 의도한 우리와의 관계를 깨어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수의 예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표에 대해, 맞추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인류와 환경 간의 단절(소외), 스스로와 단절된 개인(죄책감과 수치심), 타인과 단절된 사람들(전쟁, 살인), 그리고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들(영적 죽음) 등과 같이 죄악은 모든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연쇄 작용이 일어나는 것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첫 번째 연결고리가 끊어지게 되면 가까이 있는 연결고리도 모두 풀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연결고리도 끊어졌습니다. 카니예 웨스트가 랩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난 내 잘못을 되돌릴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두렵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지 못했으니까요…” 이 가사는 죄악으로 인해 우리 삶에 발생하는 단절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러한 단절은 랩 곡의 가사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갖습니다. 죄악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우리의 반항, 즉 죄악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단절된 벽을 만들어냈습니다(이사야 59:2). 성경에서 “단절”이라 함은 영적 죽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영적 죽음은 하나님의 빛과 삶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됨을 말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잠깐만요.”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기 전에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 않았나요?

왜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할 것임을 알지 못하셨나요?” 물론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우리가 반항하고 죄악을 저지를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계획을 그렇게 놀랍게 만든 원인은 바로 우리가 계획을 따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유도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는 자신에 대해 어떤 말을 했을까요?

하나님의 완벽한 해결책

3년간 사역을 하면서 예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고 많은 기적을 행했으며 심지어 죽은 자도 살려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첫 번째 임무는 우리를 죄악에서 구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우리의 죄악을 대신할 약속된 메시아라고 주장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700년 전에 쓴 메시아 관련 글을 통해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메시지는 메시아가 인간인 동시에 신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아이가 태어나고, 아들이 주어지니 그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한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불릴 것이라.” (이사야 9:6)

작가 레이 스테드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에 대해 이러한 글을 썼습니다. “구약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마치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와 같이 희망과 기대가 있었습니다.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희망은 여러 선지자들이 듣는 이를 애태우는 힌트를 하나씩 더욱 커져갔습니다. 누군가 오고 있어!”

고대 선지자들은 메시아가 하나님의 완벽한 죄악에 대한 조공이 되며,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완전한 사람은 우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이사야 53:6)

신약의 저자들에 따르면 예수가 우리들을 위해 죽을 자격을 갖추었다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으로서 도덕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았으며 죄를 지었다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해서 우리의 죄악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셈이 되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법에 비유해 보면 예수가 하나님의 완벽한 사랑과 정의에 대한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큰 문제를 가진 사람이며, 살인 혐의로 법정에 들어서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의자에 다가서는 당신은 판사가 아버지임을 깨닫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함을 알기에 당신은 곧바로 호소를 시작합니다. “아버지! 절 보내지 마세요!”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를 사랑한다 아들아, 하지만 나는 판사다. 보내 줄 수는 없단다.”

아버지의 마음은 찢어질 듯 합니다. 결국 판사는 법봉을 두드리며 유죄를 선고합니다. 정의는 훼손될 수 없으며, 특히 판사에 의해 훼손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판사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판사석에서 내려와 법복을 벗고 대신 벌을 받겠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는 당신을 대신해서 전기의자에 앉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신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인간의 삶 속에 와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위해 전기 의자(십자가)에 앉았습니다. 예수는 곁에서 채찍질로 죄값을 받는 소년도 아니며,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심판하거나, 자신에게 벌을 내리는 것 중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후자를 택했습니다.

U2의 보노는 자신이 신학자라는 말은 하지 않지만 예수의 죽음에 대해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그가 세상의 죄악에 대한 벌을 대신 받았으며 그 덕분에 우리는 죄값을 받지 않았고 우리의 악한 본성으로 인해 받아야 했던 죽음이라는 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 점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잘 해서 천국의 문을 통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바로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다. 나 외에는 아버지에게 갈 수 없다.” (요한복음 14:6)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러한 예수의 주장이 너무 편협하며,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고 합니다. 모든 종교가 동일하다고 믿는 이들은 우리 인간에게 악함이라는 문제가 있음을 부정합니다. 이들은 예수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므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우리 모두를 받아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아마 히틀러는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들 하지만, 그들 자신이나 “괜찮은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점수를 매기고, D 이상을 받는 이들은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죄악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정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고 자신의 아들을 희생할 만큼 사랑한 이에게 상처를 입힌 것입니다. 우리의 반항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선행, 종교, 명상, 카르마(업보) 등 어떤 것이라도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빚을 갚을 수 없습니다.

신학자 R.C. 스프라우트에 따르면 예수만이 이 빚을 갚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대해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마호메트는 칼을 휘두를 수 있었습니다. 부처는 개별적으로 상담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공자는 현명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인간 세계의 죄악에 대한 속죄를 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무한한 섬김과 예배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선물

하나님께서 예수의 희생을 통해 보여준 값 없는 용서에 대해 성경에서 사용한 표현은 은혜(Grace)입니다. 우리가 받아 마땅한 벌에서 구해주는 것은 자비(Mercy)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는 선물을 주었습니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했으나 정작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할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인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자신과의 관계를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 우리는 그러한 관계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를 허락받았습니다.

• 우리의 죄악과 하나님 및 도덕률에 대한 반항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단절된 벽을 만들어냈습니다.

• 우리는 영원한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은 예수가 우리를 대신하여 목숨을 잃게 하여 빚을 모두 갚은 한편 하나님과의 영생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보노는 은혜에 대해 이러한 관점을 말한 바 있습니다.

“은혜는 이성과 논리를 거부합니다. 우리가 원한다면 사랑은 우리의 행동으로 인한 결과에 방해가 되며, 저에게는 이는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너무나 많은 바보같은 짓을 저질렀으니까요. 마지막에 카르마로 저를 심판한다면 굉장히 곤란해질 것입니다. 은혜가 비록 제 실수를 용서해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는 은혜을 원하며 기다리는 중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내 죄를 십자가로 가져가시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 자신을 알고 그래서 저의 종교적 독실함에 의존할 필요가 없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시대에 대한 계획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요소가 빠졌습니다. 예수와 신약의 저자들에 따르면 우리 각자는 반드시 예수가 준 값 없는 선물에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 선물을 받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결말

우리는 지속적으로 입는 것, 먹는 것, 직업, 결혼 상대자 등에 대한 선택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라비 재커리어스라는 작가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예수의 메시지에서는 우리 각자가 태어날 때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배를 개인의 삶에 허락하는  의식적인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간혹 타인의 영향을 받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잘못된 조언을 듣기도 합니다. 2001년 9월 11일, 600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잘못된 조언을 믿고 순진하게 그 결과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세계무역센터 남쪽 타워의 92층에 있던 한 남성이 북쪽 타워로 비행기가 충돌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폭발음에 놀란 그는 경찰에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해야 할지 문의했습니다. “나가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폭발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급하게 말했습니다.

반대편의 목소리는 나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시 연락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라고 남자는 말했습니다. “가만히 계세요” 그리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오전 9시가 조금 지나, 또 한 대의 비행기가 남쪽 타워 80층에 충돌했습니다. 남쪽 타워의 고층에 있던 600여명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건물에서 나가지 못한 것은 이 날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600명의 생명은 도와주려고 했으나 잘못된 정보에 의존했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600명의 희생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더라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우리의 의식적인 선택은 잘못된 정보를 제공받은 911의 희생자들이 내려야 했던 선택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영원한 삶이 걸려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세 가지 중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무시하거나, 예수를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를 무시하는 쪽으로 선택하는 이유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느라 너무 바빠서입니다. 척 콜슨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콜슨은 39세에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 옆에 사무실을 갖게 되었습니다. 닉슨 대통령 재임 중에 “터프 가이”로 불리던 그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궂은 일을 도맡던 “도끼남(Hatchet Man)”이었습니다. 하지만 1972년에 워터게이트가 터지면서 콜슨의 명성과 삶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후일 그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내 자신만 신경쓰며 살아왔습니다. 이런 저런 일에 도전해서 성취도 했고 성공도 거두었습니다만 거기에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셨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으며 제게 주신 선물에 대해 한 번도 감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보다 “무한히 우월한” 존재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으며, 단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전능한 힘에 대해 생각해 보았더라도, 하나님과 나 자신을 연관지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콜슨과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바쁜 삶 속에서 치이다 보면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거의 전혀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서에 대한 제안을 무시한다는 것은 대놓고 거절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우리의 죄악에 대한 빚도 그대로 남아있게 됩니다.


형사 사건의 경우 완전 사면을 거부할 이는 거의 없습니다. 1915년 뉴욕 트리뷴 지의 시정 뉴스 편집자인 조지 버딕은 취재원 공개를 거부했고 법을 위반했습니다.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은 버딕이 “범했거나, 범했을 수도 있는” 모든 범죄 행위에 대해 완전 사면을 제시했습니다. 버딕의 사건이 역사적이 된 이유는 그가 이 사면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으며 법원에서는 대통령 사면을 강제할 수 없다는 판결과 함께 버딕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예수의 완전 사면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많은 이들은 증거가 충분치 않다고 하지만 버트런드 러셀을 비롯한 회의론자들은 조사해야 할 만큼 관심을 실제로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의 경우 자신들이 아는 위선적인 기독교인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이들의 사랑이 없으며 일관성 없는 행동을 핑계로 댑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겪은 끔찍한 경험을 하나님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예수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백개의 대학교에서 지식인들과 토론을 가진 재커리어스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진짜 이유는 도덕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유는 지적인 요구 때문이거나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진짜 이유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필요성을 거부하는 도덕적 저항심 때문입니다.”

C.S. 루이스는 도덕적인 자유로움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며 대학 시절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진실을 추구하던 중에 하나님을 믿게 된 그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단순히 사실과의 지적 일치 이상의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쓰러진 인간은 단지 발전해야 하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닙니다. 그는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란군입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한 후 사과를 하여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음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입니다.”

회개라 함은 사고의 방식이 완전히 바뀜을 뜻합니다. “도끼남”인 척 콜슨에게도 일어난 일입니다. 워터게이트가 터진 후 콜슨은 삶을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목적의식이 부족하다는 점을 깨달은 그는 친구에게 선물받은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변호사로 교육받은 콜슨은 노란색 메모지에 루이스의 주장을 정리했습니다. 콜슨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게도 때가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저도 주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님으로 영접할 운명일까요? 눈 앞에 문이 있는 느낌입니다. 문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거나, 문 밖에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시간이 더 필요해’라는 생각은 나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내면의 고뇌를 겪은 이 전직 미국 대통령 보좌관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모든 충성을 받을 가치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어느 금요일 이른 아침, 좋아하는 바다를 홀로 바라보던 중, 확실히 이해하거나 말할 수 없었던 말들이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예수 주님이시여,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겠습니다. 제 인생으로 들어오십시오. 제 인생을 주님께 바칩니다.”

콜슨은 자신도 질문했던 적이 있는 “나는 누구인가”를 발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나는 왜 이 곳에 있는가?”와 “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등의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살아가는 목적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라고 썼습니다. (에베소서 1:11)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게 되면 예수는 우리 내면의 공허함을 채우고 평화를 주며 의미와 희망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줍니다. 더 이상 욕구 충족을 위해 일시적인 자극에 의존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게 되면 진정하고 영속적인 사랑과 안정감에 대한 가장 깊은 갈망과 필요성도 채워줍니다.

놀라운 점은 하나님 자신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의 빚을 갚아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의 댓가도 더 이상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 글에서 골로새인들에게 이 점을 분명히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그의 적이었으며, 사악한 생각과 행동으로 그와 멀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여러분을 친구로 다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함으로써 이를 해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여러분의 안으로 보냈으며 여러분도 어떤 잘못도 없이 성스럽고 결백한 모습으로 그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21-22 NLT)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할 수 없었던 일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죄악에서 자유를 찾았습니다. 대량 학살범이 판사 앞에 서서 완전 사면을 받는 셈입니다. 이 범인은 사면을 받을 가치가 없으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생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은 전혀 돈이 들지 않으며, 누구나 가져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면을 받았다 해도 실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하나님의 값 없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은 때에 있습니까?

마돈나, 보노, 루이스, 콜슨처럼 여러분도 공허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무엇을 해도 내면의 공허함이 채워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 공허함을 채워주시고 한 순간에 여러분을 변화시켜 드립니다. 하나님은 의미와 목적이 가득한 인생을 살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목적은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또는 여러분이 잘 지내고 있지만 마음이 불안하고 평화롭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덕률을 위반했으며 그의 사랑과 용서에서 멀어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선물을 남겨주노라. 마음과 영혼의 평강이다. 내가 주는 평강은 세상에서 얻는 평강과 다르노라.”

그러므로 공허한 욕구로 가득한 삶에 지치거나 창조주와의 평화롭지 못한 관계가 고민이라면 그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악을 모두, 과거의 죄, 현재의 죄,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 사해주시고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거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께 사랑하는 자녀로서 이 땅에서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주시며,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12)라고 합니다.

죄악에 대한 용서, 삶의 목적, 영원한 생명이 모두 요청하는 대로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지금 바로 기도를 통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삶에 초대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알고 있으며 그 마음의 자세를 중시 여기므로 여러분의 말에 신경쓰시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읽어 보십시오.

“사랑하는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습니다. 주 예수님, 저의 죄악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심에 감사합니다. 저는 제 삶의 문을 열고 하나님을 저의 구세주이자 주님으로 영접합니다. 제 삶을 주장하시고 저를 변화시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이 기도가 여러분의 마음의 갈망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위의 기도를 여러분의 모국어로 직접 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할 때는 그가 여러분의 삶에 들어가고 여러분의 인도자, 상담자, 위로자,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시련과 유혹을 극복할 힘을 주시며, 의미와 목적, 능력으로 가득한 새로운 삶을 경험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풀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거둬들이시기 위해 지불한 비싼 대가를 이해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새로운 성도가 된 후에도 여러분은 유혹을 받게 되며 의심과 실패의 순간이 닥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절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시며, 여러분의 삶에 예수님을 영접하시게 되면 그 분의 신실함과 그 분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새로운 삶을 살아가실 준비가 되셨다면 다음의 약속과 성장의 원칙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개인적인 구세주와 주인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셨다면 여러분은 영원히 그 분의 자녀가 됩니다. 그 분의 자녀로서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멋진 약속을 비롯한 유산을 받게 됩니다:

  1.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들어오시며, 절대 떠나시지 않습니다.
  2. 예수님은 여러분의 죄악을 모두 용서하십니다.
  3. 예수님은 여러분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4. 예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듣고 답을 주십니다.
  5. 예수님은 자신을 따를 수 있는 힘을 여러분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 지내시고 영원한 여러분의 친구이자 주인이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2] 예수님의 사랑은 여러분의 선함 또는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경험할 수 있는 감정적인 기쁨은 항상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예수님은 항상 계십니다.

젊은이들의 리더격인 사만사 티드볼은 자신이 10대였을 때 수많은 남자를 만났지만 게속해서 몇 주만 지나면 지루함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만사는 남자들이 쫓아오는 모습에 감정적인 기쁨을 경험했으며, 물론 이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기쁨이 하나님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느낀 것과 비슷한 감정이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밀려오는 감정이 지나고 나면 내면이 공허함을 느끼고 또 다시 다른 곳에서 남자를 찾아 나서곤 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함을 알고 있었지만 항상 그 사랑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사만사는 블로그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내가 강제로 감정을 느낄 수 없음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아는 것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는 점을 믿습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4:9-1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그 의미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와 함께 영생을 살 수 있도록 단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내려보냄으로써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점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나와 여러분을 위해 돌아가셨다면 이는 우리의 자존감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요한복음 15:13)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은 가장 큰 사랑의 행동인 우리를 위해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더 좋은 삶을 살거나 더 깊은 생각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지금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사만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들의 사랑을 혼동하지 마세요. 사람들의 사랑은 행동 등의 요소로 강해질 수 있으며, 실수를 통해 약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곳에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을 위한 의미 있는 삶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하신 행동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도 그 분께 의미가 있는 삶으로 만들고 싶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모두를 위해 죽었기 때문에 모두가 죽었다는 점을 확신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두를 위해 죽었으며, 살아가는 자들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아가지 않고, 자신을 위해 죽은 후 살아나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원래 계획하신 사람의 모습으로 여러분을 변화시킵니다. 하지만 결과가 바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100미터 달리기보다는 마라톤에 가깝습니다. 가장 우수한 주자는 항상 오래 훈련을 하는 이들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훈련은 다음의 5개 분야가 수반됩니다.

  • 하나님의 말씀과 시간을 보낼 것.
  •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시간을 보낼 것.
  •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복종하는 법을 배울 것.
  • 다른 이들과 함께 하나님을 공경할 것.
  •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말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