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길/나사렛 예수

예수는 신이라고 주장했을까요?

w.j.lee 2015. 12. 12. 13:44


예수는 신이라고 주장했을까요?


2,000여년 전,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남성이 이 땅에 발을 디뎠습니다. 이후 우리의 세계는 이전과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꾼 이는 누구였을까요?” 예수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 급진적인 주장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온유하며, 겸손한 종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려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왔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본 이들에게 예수는 미스테리였습니다. 대중들에게는 장님, 귀머거리, 절름발이를 치료한 위대한 의사였습니다. 하층민과 버림받은 이들에게는 소망을 주었습니다. 적들에게는 사기꾼이었습니다. 추종자들에게는 약속된 메시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기독교인들이 믿는 것처럼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했을까요?

기독교의 핵심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이 땅에 왔다는 믿음에 있습니다. 예수를 보고 그의 말을 들은 이들은 예수를 우주의 창조주라고 불렀습니다. 여러 신을 숭배하는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란 라비 재커라이어스(Ravi Zacharias)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온전한 인간이자 온전한 하나님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그는 나사렛 출신의 한 남자였으며, 자신이 하늘에서 왔으며 자신의 아버지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육체적 관계나 영성체로 인해 태어나지 않은 아들로, 육체를 가진 하나님의 완벽한 표현이며 아버지와 영원한 영성을 가진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J. I. 패커(Packer)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복음에서는 우리의 창조주가 우리의 구세주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확신이 기독교의 핵심 주제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은 기독교적 메시지의 중심에 칼을 꽂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정말로 자신이 하나님이었다고 주장했을까요? 아니면 그러한 가르침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뀐 것일까요? 예수가 히브리어의 방언인 아람어를 사용했으므로 아람어를 말하는 이들에게 그의 주장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람어 사용자들은 그의 주장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에 푹 빠져있었으므로 이들이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바탕으로 예수의 주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유일신이라고 가르쳤을까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우주의 유일한 창조주라고 밝힙니다. 하나님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동시에 인격적이고 의로우신 분이자, 사랑을 베풀고 성스러운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들었으며, 자신이 기뻐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신과 영원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1,500년 전 모세에게 불꽃이 나는데도 타지 않는 가시덤불에 대해 말했을 때 자신만이 존재하는 유일한 신임을 재확인시켜주었습니다. 모세에게 자신의이름이 야훼(Yahweh)라고도 말했습니다(‘나는 존재한다(I AM)’라는 뜻). (우리 대부분은 영문으로 번역된 여호와(Jehovah) 또는 주님이라는 이름에 더 익숙합니다) 당시 이후 유대교의 근간이 되는 성전인 셰마(Shema)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신명기 6:4)

예수가 등장하여 전도를 하고 복음을 들은 모두를 놀라게 하는 메시지를 전한 시점은 이러한 유일신적 믿음이 지배적인 시대였습니다. 레이 스테드만(Ray Stedman)에 따르면 예수는 유대교 성전의 중심을 차지한 주제였습니다.

여기 살아있고 숨을 쉬는 인간의 형상으로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의 모든 징표와 예언을 만족시키고 완성한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면, 나사렛의 예수라는 한 사람이 구약과 신약 모두의 중심임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예수가 하나님이고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했다고 믿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을 모세에게 말을 한 진정한 유일신인 야훼와 동일시했을까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예수가 자신을 지칭한 이름들과, 그 이름들이 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누구임을 주장했다고 생각했을까요?

예수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이름를 사용했을까요?

예수가 사역을 시작할 당시 그의 기적과 급진적인 가르침은 즉시 수많은 군중들을 끌어 모았고, 그 장소는 흥분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예수의 명성이 대중 속으로 스며들게 되자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등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를 위협으로 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이들은 예수를 감옥에 가둘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바리새인들과 교회에서 토론을 하던 예수는 자신이 “세상의 빛(Light of the world)”이라고 했습니다. 갈릴리의 미천한 땅에서 온 목수가 이 종교 전문가들에게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훼가 세상의 빛이라고 믿었던 바리새인들은 화가 나서 물었습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다”(요한복음 8:13 NLT).

그러자 예수는 그들에게 2,000년 전 아브라함이 자신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답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요한복음 오전 8:57, NLT)

그러자 예수는 보통 사람이라면 감히 하지 못할 말로 그들을 더욱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I AM)” (요한복음 오전 8:58, NLT)

종교도 잘 모르는 이 떠돌이 목수가 난데없이 자신이 항상 존재해왔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성스러운 하나님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었는데도 I AM(ego eimi)이라는 말까지 사용했습니다! 이 종교 전문가들은 야훼만이 하나님이라는 구약 내용을 꿰다시피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구약 내용이 이사야의 입을 통해 전해졌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직 나만이 하나님이며, 다른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내가 주님이며, 다른 구세주는 존재하지 않는다.”(이사야서 43:10, 11 NLT)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이라 칭하고 있음을 깨달은 이들의 분노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신성 모독에 대한 벌은 돌에 맞아 죽는 것이므로 화가 난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 돌을 집었습니다. 그 때 예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잠시만! 오해가 있었다. 나는 야훼가 아니다.” 하지만 예수는 목숨을 잃을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습니다.

C. S. 루이스는 이들의 분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는 ‘내가 아브라함 이전에 존재해 온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말했는데, 히브리어로 ‘나는 존재한다(I am)’를 어떻게 말하는 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이었으며 이는 어떤 인간도 입에 대서는 안되는 말이고, 입 밖에 내는 것은 죽음이나 다름없는 이름이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 경우가 특수한 상황이며, 예수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성스러운 이름을 쓸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 외에도 여러 상황에서 “나는 존재한다(I AM)”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지칭했습니다. 예수의 다른 급진적인 주장에 대해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 지 상상해 보십시오.

  •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복음 8:12)
  • “나는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다”(요한복음 14:6)
  • “나는 아버지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요한복음 14:6)
  • “내가 부활이며 삶이다”(요한복음 11:25)
  • “나는 선한 양치기이다”(요한복음 10:11)
  • “나는 문이다”(요한복음 10:9)
  • “나는 살아있는 빵이다”(요한복음 6:51)
  • “나는 진정한 포도나무이다”(요한복음 15:1)
  • “나는 알파이자 오메가이다”(요한계시록 1:7,8)

루이스의 기록처럼 이러한 주장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면 예수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말을 들은 이들에게 신뢰성을 준 것은 예수가 행한 창조적이고 헌신적인 기적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예수의 지혜와 권위있는 가르침에 크게 놀랐습니다.

예수는 여러 차례 자신을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자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라고 칭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의 말을 이해한 당시 상황에 비추어 이러한 이름들이 가진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예수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칭한 상황은 신약에서만 8차례 이상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자신을 칭했으며, 이는 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패커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름이 구세주 왕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가리키며, 이사야 53장의 예언을 충족시킨다고 기록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미래에 올 메시아에 대해 가장 폭넓으며 예언의 성격이 강한 문구로, 예수를 분명히 “고통받는 메시아”로 묘사합니다. 또한 이사야는 9장 6절에서 메시아를 “강력한 하나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자” 등으로 칭했으며 이는 메시아가 인간과 하나님 모두임을 나타냅니다.

상황을 놓고 보면 예수가 “사람의 아들”에 대한 다니엘의 예언을 실현한다는 의미로 자신을 언급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다니엘은 사람의 아들에게 인간에 대한 귄위가 주어지고, 경배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도 예언했습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다니엘 7:13, 14)

예수는 자신이 지구로 돌아올 때 다니엘이 말한 사람의 아들에 대한 예언을 실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누가복음 21:27)

그렇다면 이 “사람의 아들”은 누구이며, 하나님 외에는 경배하면 안되는 시대에 왜 그가 경배를 받을까요? “나는 존재한다(I AM)”는 주장과 자신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모두 자신이 신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이는 예수가 하나님의 생물학적인 아들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또한 인간인 아들이 본질적으로 그의 아버지보다 열등하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DNA를 나누며, 서로 다른 사람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은 인간으로서 평등합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가 원문으로는 “닮음” 또는 “동등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통해 자신이 성스러운 본질, 또는 요즘식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DNA”를 가졌다는 의미를 전하려 했습니다. 피터 크리프(Peter Kreeft) 교수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에서 했을까요? 사람의 아들은 사람입니다. (‘아들’과 ‘사람’은 일반적인 언어로 남성과 여성 모두를 지칭합니다.) 유인원의 자식은 유인원입니다. 개의 새끼는 개입니다. 상어의 새끼는 상어입니다. 그리고 신의 아들은 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성스러운 칭호입니다.”

예수는 계속해서 자신의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는 아버지가 “참된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시작하기 전에 아버지가 자신과 공유한 영광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예수와 그의 아버지가 같은 신성한 본질을 공유하지 않았다면 예수가 영원히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패커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으로 뜻한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그의 분명한 개인적 신성함을 주장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가 사용한”나는 존재한다(I AM)”, “사람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들은 모두 예수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함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를 그렇게 이해했다는 점은 확실한 듯 합니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예수의 주장이 진심이었다면, 다른 방법으로도 주장했을까요? 이를 확인하려면 3년간의 공생애 사역 중 예수의 행동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고 행동했을까요? 아니면 모세나 다른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대변자 역할만 했을까요?

예수님은 어떻게 죄를 사할 수 있었을까요?

유대교에서 죄를 사한다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죄의 사함은 항상 죄인 자신에 대한 것이며, 죄를 지은 사람 외에는 다른 이가 용서를 받을 수도 없고, 특히 그 죄를 지은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죄지은 자들을 사해주었습니다. 입이 떡 벌어질 그러한 행동과 주장은 이전의 어떤 예언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예수가 중풍에 걸린 한 남자의 죄를 사하는 모습을 본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분노했습니다.

마가는 이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서기관들은 신성모독이라 했다! 하나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없다!” (마가복음 2:7)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 죄의 사함에 있어서 그 누구도 하나님을 대변할 권리나 권위를 갖지 못합니다. 루이스는 예수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이들의 반응을 이렇게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 때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그 곳에 있던 유대인 중에서 갑자기 자신이 신인 것처럼 말하고 다니는 한 남성이 나타났습니다. 자신이 죄를 사한다고 했으며 항상 그 곳에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종말의 때가 되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점은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인디언과 같은 다신교자라면 자신이 신의 일부거나, 신과 함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유대인이었으므로 그런 의미로 신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의 언어에서 신이란 이 세상 밖의 존재이며 세상을 다른 어떤 것보다 무한히 다르게 만든 존재입니다. 그 개념을 이해하게 되면 예수가 말한 의미가, 간단하게 보자면, 인간의 입술 밖으로 나온 말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예수의 말을 들은 이들은 그의 도덕적인 완벽함을 보았으며 그가 기적을 행하는 모습도 보고난 후 예수야말로 오래 전 약속된 메시아가 아닐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마침내 예수를 반대하는 이들이 교회에서 그를 둘러싸고 질문했습니다.

“우리를 언제까지 기다리게 만들 겁니까? 당신이 메시아라면 그렇다고 말해 주십시오.”

이에 예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증거는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행동이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 대해 이런 말을 통해 한 무리의 양에 비교했습니다. “나는 이들에게 영생을 주었으며, 이들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다”는 말을 반대자들에게 하고, 자신의 행동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라고도 말했습니다. 예수의 겸손함은 반대자들의 긴장을 풀리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예수는 이 폭탄같은 말을 던졌습니다.(요한복음 10:25-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일부에서는 이 말이 예수가 하나님과 뜻을 같이한다는 의미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만약 단지 그런 의미였다면 왜 유대인들은 그 말을 듣고 돌을 들어 예수를 죽이려 했을까요?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는 예수의 주장을 유대인들이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다음 대화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예수는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는가?”

유대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한 일 때문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한복음 10:33)

예수는 하나님의 형상이었을까요?

예수가 곧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고 떠가게 되는 상황에 대해 제자들에게 준비시키는 와중에, 도마는 그가 어디로 떠나는지, 그리고 그 곳으로 가는 길에 대해 궁금해했습니다. 예수는 도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다. 그 누구도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에게 갈 수 없다. 네가 만약 나를 알고 있었다면,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알 것이다. 이제부터 너는 내 아버지를 알게 되었으며 그를 본 것이다.” (요한복음14:5-9)

제자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때 빌립이 예수에게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이 충격적인 답변을 던집니다.

“빌립이여, 그렇게 오래 나와 함께 했음에도 내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가? 나를 본 이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사실상 이런 말을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빌립, 내 아버지를 보고 싶다면 나를 보아라”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는 아버지와 하나됨이 “세상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영원한 과거에도 있었음을 밝힙니다. 예수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광과 본질을 함께 하지 않았던 시간은 없었던 셈입니다

이 말에 완전히 놀란 것은 예수의 적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예수의 친구들과 적들은 그의 말과 행동에 몇 번이고 크게 놀랐습니다. 여느 사람들처럼 길을 걷다가도 몸을 돌려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 이전에 내가 있었노라’ 또는, ‘나를 보았다면, 내 아버지를 본 것과 다름없다’ 아니면,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받은 후에는 매우 침착하게 이런 말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사람의 자식은 이 땅에서 죄를 사할 권세가 있다’ 죽은 자에게는 이 두 마디만 던졌다고 합니다. ‘앞으로 나오라’ 또는 ‘일어나라’ 그렇게 말하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바다에 폭뭉이 불면 ‘조용히 있거라’라고 했으며 빵 덩어리를 향해 ‘수 천명이 먹을 식사가 되어라’라고 했습니다. 말하는 대로 즉시 이루어졌습니다.”

 

왜 예수는 자신에 대한 예배를 받아들였을까요?

구약에서 가장 기본은 오직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10계명 중에서 첫 번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 외에는 어떠한 신도 섬기지 말라”(출애굽기 20:3 NLT).

유대인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죄악은 다른 피조물을 신으로 숭배하거나, 자신이 예배를 받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예배를 받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 도마의 말이 매우 중요한 이유입니다.

예수가 부활한 후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 살아난 모습을 보았다고 도마에게 말합니다(요한복음 20:24-29). 의심많은 도마는 그 말을 비웃고, 자신의 손가락을 못박혔던 예수의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에 난 상처에 대기 전까지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8일 후 한 골방에 제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예수가 홀연히 모습을 나타냅니다. 예수는 도마를 바라보고 “네 손가락을 이곳에 대고, 내 손을 보거라. 네 손을 내 옆구리의 상처에 대어 보아라.”

도마에게는 더없이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즉시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었고, 예수에게 외칩니다.

“내 주님이시고, 내 하나님이시여!”

단순히 “주님”이라는 호칭만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마는 “하나님”이라고까지 부르고 경배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바로 그 곳에서 도마를 꾸중했을 것입니다. 그 대신 예수는 이런 말로 도마를 칭찬합니다.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나를 믿는다. 나를 보지 않고도 나를 믿는 자들은 축복을 받은 자들이다.”

예수는 이 외에 9차례나 예배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유대인의 종교에서 예수가 이렇게 예배를 받아들이는 자세는 신성함에 대한 예수의 주장을 확실히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제대로 이해한 것은 예수가 천국으로 승천한 후였습니다. 예수는 떠나기 전에 “새로운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행하라”고 했으며,(마태복음 28:19), 성령과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한 선상에 놓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알파이자 오메가였을까요?

사도 요한이 밧모섬(Island of Patmos)으로 추방당했을 당시 예수는 요한에게 최후의 날에 벌어질 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믿을 수 없는 광경들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보라! 그가 천국의 구름과 함께 온다. 그리고 그를 찌른 이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그를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알파이자 오메가이며, 시작과 끝이다’라고 주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현재 존재하고 과거에도 항상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니, 전지전능한 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알파와 오메가”, “주 하나님”, “전지전능한 자”라고 칭해지는 이는 누구일까요? 그는 못에 “찔렸다”고들 합니다. 예수야말로 십자가에서 못에 찔린 자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가 왕좌에 앉아 모든 나라의 사람들을 심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거대한 흰색 왕좌를 보았으며, 거기 앉아있는 분도 보았다. . . . 왕좌에 앉은 이가 말하기를 . . ‘나는 알파이자 오메가이며, 시작과 끝이다’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20:11; 21:6)

이 거대한 흰색 왕좌에서 심판을 내린 이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이미 제자들에게 자신이 인간을 마지막으로 심판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인지 여부에 대한 모든 의심을 풀어줍니다.

“승리하는 자는 모두 이 축복을 받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자녀가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7)

그렇다면,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일까요? 예수는 나는 존재한다(I AM)라는 표현으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칭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는 죄를 사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는 예배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바로 이 요한계시록에서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라는 말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C. S. 루이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정체가 하나님이자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창조되지 않았으며, 영원하며, 스스로 존재하고, 자신이 창조한 세계로 내려와서, 다시 승천한 것입니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렇다면 질문은 “왜?”가 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로 내려와 우리 중에 거했을까요?” 요한복음 3:16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보냄으로써 자신을 믿는 모든 이들이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리도록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고 인간이 되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 덕분에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예수의 부활은 우리가 그와 영생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창조주가 우리와 영원히 지속될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나타냅니다.

루이스는 예수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모든 꿈을 초월하는 목적과 의미, 그리고 즐거움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모두가 각자 내려야 하는 결정입니다. 루이스는 자신의 선택을 절대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결심하셨는가요?

몇몇 사람은 기독교인이 되면 일련의 규율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이 되면 교회에 꼭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과 그 자신, 그리고 우리에 대해 어떤 말을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