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한국의 說話

아홉명의 목숨 앗아간 까막골 구미호

w.j.lee 2017. 4. 18. 15:07


아홉명의 목숨 앗아간 까막골 구미호 


순천시 낙안면 금산(金山) 마을이 생기기 전 이곳에는 까막골 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순천시 낙안면 금산마을 맞은편 골짜기.

숯을 굽고 질그릇을 굽던 가마가 많이 있어서 ‘가마골’이라고 부르던 것이 ‘까막골’로 된 것이지만

과부가 많아 과부골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옛날 까막골에 초희라는 새색시가 시집을 왔다.

그러나 팔자가 기구하였는지 시집온 지 한 해를 채우지 못하고 남편이 죽고 말았다.

시골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절세가인인데다 남편마저 죽고 홀로 지내자

마을 남정네들은 서로가 말이나 한 번 붙여보려고 안달이 났다.



초희에게 아이가 생긴 것은 남편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과부가 임신을 하였으니 계명워리(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자)네 뭐네 말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남정네 가운데 송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영문 없이 죽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명이 죽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느닷없이 밤중에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초희를 의심하게 된 것은 동네 남정네들이 일곱 명이나 죽어나갈 때쯤이었다.

초희가 들어온 이후 이러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기 때문이다.

벌써 초희를 포함하여 마을에 젊은 과부가 여덟 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증거도 없이 초희를 어찌하기는 힘들었다.

사실 초희는 첫 남정네가 죽어나갈 때부터 불안하였다 천성적으로 음기가 셌던 초희가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받아들인 남정네마다 급사를 하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지만

막상 또 다른 남정네가 찾아오면 자신도 몰래 몸을 허락하고 말았다.

그러면 다음날 어김없이 그 사람이 죽고 말았다.


정안수를 떠놓고 빌고 또 비는 초희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

초희가 전생에 구미호였다며 아홉 명이 죽고서야 업보가 풀릴 것이라 하였다.

그랬다. 초희는 전생에 구미호였다.

구미호였을 때 초희는 사람을 숱하게 죽였다.

미호의 악행이 널리 퍼지자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미호를 물리치기 위해 찾아왔지만 모두 구미호에게 당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얼핏 보기에도 도력이 대단할 것 같은 도사가 나타나

술법으로 구미호를 꼼짝 못 하게 하고는 지팡이로 구미호의 목숨을 거두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죽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초희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마음먹었지만 모진 것이 목숨이라고 죽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더구나 벌써 다섯 살이 된 아들이 눈에 밟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결국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누운 초희는 하루가 다르게 여위었고,

런 초희 곁을 지키는 어린 아들만 불쌍한 처지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초희네 집 앞을 지나던 나그네가 하룻밤 묵고 가기를 청하자

어린 아들이 나그네에게 엄마를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마침 그 나그네는 의과(醫科)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가던 의원이었다.

하여 그냥 뿌리치지 못하고 초희를 치료해 주었다.

처음에는 단지 곤경에 처한 환자라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초희를 치료하던 나그네는

차츰 기력을 회복하면서 살아나는 초희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버렸다.

그래서 나그네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눌러 지냈다.


처음에는 밀어내던 초희도 어쩔 수 없이 나그네를 받아들여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비록 부부의 연을 맺기는 하였지만 초희는 잠자리만은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는 별 탈 없겠지 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그만 나그네 역시 다음날 죽고 말았다.

더 이상 사람들이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초희는 결국 목을 매 죽고 말았다.

아홉 명이 죽고서야 업보가 풀릴 것이라는 예언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초희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역시 없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여덟 과부가 살았다는 곳에 가면

옛날에 숯을 굽던 터와 질그릇을 굽던 가마의 흔적이 남아 있다.


까막골 터에는 옹기 파편들이 많이 남아 옛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출처 : 설화 그 원석을 깨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