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길/가정예배서

2019. 9. 6. 금요일 : 구해도 얻지 못하는 까닭

w.j.lee 2019. 9. 6. 07:24
2019. 9. 6. 금요일

구해도 얻지 못하는 까닭


찬  송: 218장 -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성  경: 야고보서 4:1~3
(약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약 4: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요  절 :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길에서 사람들이 시끄럽게 다투는 모습을 보고, 지나가던 누군가가 그랬다고 합니다.

“여기가 교회인 줄 아나?”

물론 교회를 향한 비웃음이 억울하기도 하지만, 교회에서도 싸우냐며 놀라는 것을 지나 교회는 ‘싸우는 곳’이라고 인식될 정도이니 우리가 너무 잘못 살아왔다 싶습니다.

다투는 이들 중에 내가 잘못했다고 우기며 싸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 하고 싸우기 마련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싸우는 것을 욕심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욕심입니다. 욕심의 원어인 ‘헤도네’는 감각적인 기쁨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감각적인 기쁨을 열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투고 심지어 살인도 저지릅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 본문을 그의 <메시지성경>에서 이렇게 옮깁니다.

“여러분은 그런 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할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가질 권리가 없는 것을 구하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매번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니, 버릇없는 아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감히 하나님께 구할 생각조차 품어서는 안 될 감각적인 기쁨을 열망하는,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고 하는 버릇없는 아이 같은 욕심은 공동체에서 지체들 사이에 다툼을 일으킬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마음에만 관심의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설령 기도한다고 해도 내 뜻이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 이루어지기를 구할 뿐입니다. 그런 기도가 응답될 리 있겠습니까?

다툼이 아닌 화평이 주님의 뜻입니다. 로마서 12장 18절은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나아가 히브리서 12장 14절은 더욱 분명하게 화평해야 할 이유까지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여기서 ‘주님을 본다’(호라오)는 것은 ‘주님과 함께 거한다’, ‘주님을 경험하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가 참 생명을 누리며 사는 유일한 길은 주님과 함께 거하며 주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우리는 마땅히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반드시 화평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께 붙어 생명을 누려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지체와 더불어 화평합니까?



우리 주님을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사랑의 하나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버릇없는 어린아이가 우리 안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어리석은 데서 벗어나
다툼이 아닌 화평으로 오늘을 살아가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광식 목사 - 혜성교회



출처 : 2019년 가정예배서 하늘양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