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신학자의 과학 산책

제1부 : 02. 종교와 과학의 관계유형

w.j.lee 2024. 5. 31. 10:09

제1부 신앙에 대한 과학의 도전

 

02. 종교와 과학의 관계유형

 

종교와 과학의 어원

 

종교와 과학은 각각 인간의 고유한 본성을 나타내는 특질이다.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는 인간의 본질을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로 정의하였다.

인간은 거룩한 실재(신)와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실재와의 만남이 그 어떤 경험보다도 가장 강렬하고 본질적인 것으로서 인간에게 삶의 의미와 역동성을 부여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는 「성스러움의 의미」에서 종교현상의 본질을 '초월적인 성스러 움에 대한 경험이라고 기술하였다.

먼저 종교의 어원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종교(religion)라는 말은 라틴어 '렐리기오'(religio)에서기원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가인 키케로(Cicero, BCE 106-BCE43)는 이를 '다시 읽는다'(relegere)는 의미라고 풀이했는데, 종교의례 때 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는 데서 종교란 말이 생겼다는 해석이다.

초기 교회 교부인 락탄티우스(Lactantius, 250-325)는 종교를 '다시 묶는다' 혹은 '재결합시키다' religio는 뜻으로 설명했다.

인간의 죄로 인해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다시 결속된다는 의 미로 해석한 것이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이를 '다시 뽑는다're-cligere는 뜻이라고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선택했으나 보편적인 인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모인 모든 백성들을 선민으로 다시 뽑았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을 종합해보면 라틴어 'religio'에 담긴 뜻은 "선택 받은 믿음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경전을 되풀이하여 읽는 행위"라고 정리할 수 있다.

 

한편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어 '종교'는 '마루 종'과 '가르 칠교'의 결합이다.

곧 '높은 마루에 걸려 있는 가르침' 또는 '모든 사람이 보고 따를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본시 불교에서 사용하던 용어인데, 일본 학자들이 서양 학문을 수용할 당시 '릴리 전' religion 이란 단어에 상응되는 한자어가 없어서 불교 용어인 '종교' 라고 번역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한자어 '종교'에는 라틴어에 포함 된 '반복', '재결합', '재선택' 등의 핵심적인 의미가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체험과 교훈을 회중들이 모여서 다시 배우고, 기념하고, 결단한다는 본래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 다. 

이는 교회를 중심으로 공동체적 기념 행위를 강조하는 기독교와 개별 존재의 해탈에 관심을 두었던 불교 간의 차이를 말해준다. 

어쨌 든 종교적 경험의 의미 범주는 동서양 종교의 특성 모두를 포함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과학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사이언스'Science 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스키엔티아' scientia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말의 뜻은 '지식' 혹은 '앎'을 의미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사이언스는 '안다'know는 뜻의 동사 '스키오'scio와 관련이 있으며,

이는 또다시 '분별하다' 혹은 '구분하다'라는 뜻의 인도-유럽 어근에서 유래 했다.

이 단어는 '잘라낸다'cuts off'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치야티'chyati, '찢다'to split 라는 뜻과 관계가 있다.

이러한 어원을 살펴볼 때에, 과학 이란 "사물 속에 감추어져 있는 참모습을 발견하고 진리를 자각하는 일"이란 뜻이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을 지시하며, 넓게는 '학', 좁은 의미로는 자연과학을 가리킨다.

 

한자어 과학'이란 말은 '종교'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일본 학자들이 서구 문물을 접할 때,

영어의 '사이언스'에 해당하는 한자어가 없자 고심하다가 '과목과', '배울 학자를 결합하여 만들어 낸 신조어라고 전해진다.

한편 중세에서 계몽주의 시대까지, 사이언스란 말은 모든 종류의 체계적이거나 정확하게 기록된 지식을 가리켰으며,

따라서 그 무렵에는 과학이 '철학'philosophy 이라는 단어의 넓은 의미로부터 구별되지 않았다. 

예컨대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다룬 저서의 제목은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z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프린키피아)로서 자연철학이라는 용어가 과학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 유형

 

과학과 신앙 혹은 종교의 관계를 무조건 적대적인 것으로만 보 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시각이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보다 심층 적으로 연구한 이안 바버(Ian Barbour)는 양자의 관계를 갈등, 독립, 대화, 통합의 관계로 나누었다.

 

갈 등 (conflict)
과학과 종교의 갈등 관계는 양 진영의 극단적인 입장이 서로 충돌함으로써 형성된다. 

과학 진영에서는 물질적 환원주의 또는 과학만능주의가 있고, 종교 진영에는 성서 문자주의나 종교근본주의가 있다.

 

물질적 환원주의는 모든 존재와 현상이 궁극적으로 물질로 환원 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정신도 그 근원을 따져보면 근본적으로는 물질이 만들어내는 현상이라고 본다.

또한 진리를 탐구하는 유일하고 유효한 방법은 환원적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즉 겉으로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현상일지라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와 같이

가장 근원적인 단일한 존재를 찾아 그것이 운동하는 원리를 밝혀내면 

마침내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과학만능주의는 모든 문제의 해결은 결국 과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입장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과학주의의 관점에서는 신, 정신, 영적 존재란 단지 인간의 뇌 속에서 뉴런과 시냅스,

그리고 신경화학물질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만들어내는 물질의 부수적 현상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정의한다.

종교란 과학시대 이전의 구시대적 유물이며,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그저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허구라고 치부한다.

 

이에 맞서 갈등을 일으키는 종교 진영의 대표선수가 바로 성서 문자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 입장은 "성서의 모든 내용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문자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라는 것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제아무리 과학이 잘났다 해도 그 내용이 성서에 부합되는 한도 내에서만 진리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 이다.

예컨대 1600년 무렵 아일랜드 교회의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1581-1656) 대주교는 구약성서의 문자적 기록을 근거로 삼아 천지창조의 연도와 날짜를 계산했다.

그는 바빌로니아 제국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해인 기원전 586년을 기준으로 잡고, 그 이전에 나오는 인물들이 생존한 햇수를 더해서, "천지창조는 기원전 4004년 10월 22일 오 후 8시에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어셔 주교의 연대기 계산법은 성서 문자주의의 가장 전형적인 경우를 보여주는데, 오늘날 들으면 다소 어이없는 내용이지만 이러한 시도가 결코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현대에도 이러한 성서 문자주의가 상당한 인기를 끌며 등장했다.

오늘날 성서 문자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창조과학이다.

'창 조과학'은 20세기 미국에서 점증하는 사회와 대학의 세속화 현상에 위기의식을 느낀 몇몇 열렬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은 헨리 모리스(Henry M. Morris, 1918-2006)다.

그는 서재 창틈에서 정교하기 짝이 없는 벌의 날개와 구조를 관찰하면서

"이렇게 훌륭하게 잘 만들어진 생명체가 결코 우연(돌연변이)과 자연선택이 지배하는 진화의 산물일 리가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모든 생명은 창세기에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의 결과라고 주장 했다.

또한 노아의 홍수를 비롯해 많은 이야기들 역시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임을 설파하였다.

 

이처럼 물질만이 유일한 존재의 근원이라는 물질적 환원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이 유일한 진리의 원천이라는 성서 문자주의가 만날 때 과학과 종교는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에서도 이러한 갈등 관계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양자의 입장이 충돌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새로운 과학적 발견 기사나 기독교 관련 기사 아래에는 거의 예외 없이 과학만 능주의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비난과 독설이 이어진다.

이러한 배경에는 과학에 배타적이고 반지성적인 한국 기독교 일부 교단과 성직자에 대한 짙은 반감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과 더불어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창조과학회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는 나라이다.

최근에도 중고교 과학교과서를 개정해 진화론을 삭제하거나 창조론을 소개하려 시도한 것이 뒤늦게 알려져, 

교육계와 과학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왔으며, 이 소식은 외신으로도 알려져 전 세계의 과학계로부터 조롱 섞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과학에 대한 인식은, '과학은 국력'이라는 구호가 말해주듯이 주로 빠른 산업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도구적 기능으로서 받아들여졌다.

이런 인식 속에 진리탐구라는 과학의 본질은 가려지게 되었고,

우주와 물질, 생명의 기원과 신비를 밝혀내는 연구는 돈벌이가 되지 않아 도외시되고,

오직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과학을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우리나라에서 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인데,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정부나 연구재단의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이과의 우수한 학생들 거의 대부분이 자연과학 분야보다는 의대로만 쏠리는 현상이 심화되었다.

국내에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재능 있는 과학도들이 적지 않지만 과학에 대한 지원과 인프라가 너무 열악하기 때문에 한국 과학의 미래를 낙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분 리 (independence)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분리하는 것은 과학과 종교의 영역이 서로 다르다고 보는 입장이다.

스포츠로 비유하자면, 갈등 관계가 럭비나 축구처럼 한 운동장에서 서로 부딪히는 것이라면, 분리는 배구나 테니스 경기처럼 각자의 영역을 정해놓고 서로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두고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CGould, 1911 2002)라는 생물학자 는

'겹치지 않는 교도권'Non-Overlapping Magisterium 이란 용어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교도권이란 교황에게 주어진 진리에 대한 유권해석의 권한을 뜻한다.

중세에는 서구에서 교황의 교도권이 실질적인 지배 권력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과학과 종교가 각각 서로 겹치지 않는 교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 과학은 과학의 영역에서, 종교는 종교의 영역에서 고유한 진리해석의 권위를 지닌다는 뜻이다.

과학의 영역은 전통적으로 물질과 생물이었는데, 최근에는 심리학과 신경과학을 통해 뇌와 정신 현상에까지 탐구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다른 한편 종교가 교도권을 행사하는 영역은 마음이나 영혼이 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에 따라 점점 그 영역은 축소되고 있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Philosophia ancilla theologiae) 라는 유명한 말이 있듯이 근대 이전까지 과학은 종교의 권위 아래 있었다.

그런데 독자적 영역을 갖지 못하던 과학이 자신의 고유한 교도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은 근대에 서양에서 발훙한 계몽주의 때문이었다.

 

과학과 종교의 분리는 계몽주의와 함께 진행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계몽주의 (Enlightenment)란 말의 의미는 '불을 밝히는 것'이다.

즉 무지의 어둠 속에 지식의 불빛을 환히 밝혀 사물의 본모습, 즉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계몽주의다.

계몽사상가들은 모든 사물에 대해 객관적이고 정확한 지식의 목록을 작성하여 백과사전을 만들고,

지구의 둘레를 재서 미터법을 만들고, 그것을 기준으로 전 세계가 공통으로 사용 할 수 있는 도량형을 제정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미터법은 계몽주의 시대의 학자들이 지구의 둘레를 4만등분하고 그 길이를 1킬 로미터로, 

다시 그 1,000분의 1을 1미터로 결정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러한 기획에서 우리는 인간의 확실한 합리성과 지식으로 세계를 재구성하고자 한 계몽주의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대표적인 계몽주의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합리성과 이성을 통해 새롭게 밝혀내는 지식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과 서로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닫고서

이를 방지하 고자 진리의 성격을 '순수이성'(Reine Vernunfi)과 실천이성(Praktische Vernunft)으로 나누었다.

 

수학이나 과학 같은 순수한 이성과 엄밀한 논증을 통해 밝혀내는 진리와 사랑과 희생 혹은 영적 감화를 통해 체득하는 진리는 근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리는 전통적인 교회의 권위와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한 지식인 계급과의 충돌을 막아보려는 꽤 괜찮아 보이는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결국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진리란 궁극적으로 서로 다르거나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한 영역에서만 통하는 진리는 궁극적 진리가 될 수 없으며,

과학과 종교의 영역에 금을 긋는 분리의 관계는 한편으로 양자의 직접적인 충돌을 막는다 는 면에서는 어느 정도 유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해서 얻어진 진리는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통용되는 진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 사조들도 바로 이러한 분리의 입장을 취했다.

또한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 역시 대체적으로 신앙을 과학과 분리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이 입장 은 위에서 지적했듯이 과학의 질문과 도전에 대해 침묵하거나 외면 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대화와 통합의 관계가 제안되었다.

 

대 화 (dialogue)
과학과 종교의 세 번째 관계 방식은 대화다. 

과학과 종교는 상호 충돌하거나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대화함으로써 보다 궁극적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성이론을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이러한 대화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그는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고,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라 며 과학과 종교의 상호 보완성을 설파했다.

여기서 장님이란 맹목적 믿음을, 절름발이란 일방적 관점에 치우친 편견을 지칭한다.

그는 온전한 진리란 가설과 실험을 통해 자연법칙을 탐구하는 과학적 사고와 더불어 사랑을 바탕으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로 안내하는 종교적 영성을 갖출 때에 비로소 그 감추어진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과학적 합리성과 종교적 영성의 상호 보완성을 강조한 아인슈타인의 태도는 한편으로는 근대 계몽주의 이후에 합리주의라는 명분 아래 형성된 오만한 과학만능주의를 경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적 상식과 합리성을 거부하는 맹목적인 종교근본주의를 거절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자신에게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은 이 우주가 이해 가능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이 간결하고 우아한 방정식으로 표현되며, 

또한 우주 안에서 티끌보다도 작은 존재인 인간이 지성을 사용하여 이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의 표현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볼 때에 물질로 이루어진 우주가 고도로 추상적이고 관념적 언어인 수학을 통해 기술될 수 있다는 점은, 그저 당연한 일이 아니라 간과할 수 없는 불가해한 현상이었다.

실로 20세기 동안에 현대 물리학자들은 우아한 방정식이 우주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안내하는 일을 종종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실증적인 경험들은 현대 천문학자들로 하여금 '우아한 우주'(Elegant Universe) 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도록 이끌었다.

대표적인 예로 브라이언 그린(Brian Greene)이 지은 The Elegant Universe1999라는 책을 들 수 있다.

 

이안 바버Ian Barbour는 대화의 필요성을 '경계질문'boundary questions 과 '방법론적 평'(methodological parallels) 이라는 용어를 들어 설명했다.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용어이지만 경계질문을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과학의 진리 탐구를 위한 질문은 결국 과학으로 답할 수 있는 경계를 넘어서게 되는데,

이럴 때 과학과 종교는 서로 대화의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방법론적 평행은 과학과 종교가 각자 이론과 교리를 수립하는 방법론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경계질문은 "왜 근대과학이 세계 여러 문화권 중에서 하필 유대-기독교 문화권인 유럽에서 출현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설 명될 수도 있는데,

하나의 가능한 설명은 유대-기독교의 창조 교리가 과학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과학과 종교를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설명이 언뜻 이해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오늘날 과학역사가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기독교의 창조 교리는 그리스 철학과 구약성서에 근거하고 있는데, 두 가지 모두 이 세계가 이해 가능하며 질서가 있는 (Eintelligible and orderly)곳이라고 간주한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연의 질서정연한 순환을 보면서 이 세계 속에 어떤 수학적 법칙 내지는 합리적 질서가 필연적으로 존재하며, 이러한 법칙과 질서는 단 하나의 궁극적 원리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 히브리 성서에 기반한 창조 신앙은 이 세계가 하나님의 선한 의지를 따라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고백한다.

히브리 창조 신앙에 따르면 이 세계는 바빌로니아 창조설화나 다른 여러 고대 자연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들이 하늘에서 벌인 전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겨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자연세계는 신들의 몸으로서 신성이 깃든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던 때에 날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외친 것처럼 하나님께서 선한 의지로 창조하시고 인간을 위해 축복하신 장소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고대세계에서 자연종교의 여러 신상과 우상은 고대 제국의 왕권 및 지배권력과 신정일치체제 로 결합되어 민중들을 억압하고 순치하는 기능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연세계가 더 이상 신성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히브리 성서의 기록은 고대 자연종교 및 지배권력과 대척점에서는 매우 신학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선언이라는 점이다.

 

히브리 성서에 나타난 창조신앙은 자연의 비신성화 과정을 통해 범신론으로부터 인류의 해방을 가져왔으며,

나아가 보이는 세계 너머에 이를 만드신 창조주와 그가 부여하신 질서가 존재한다고 간주함으로써 세계가 과학적 탐구 대상으로 여겨질 수 있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대-기독교의 자연관이 결국 유럽에서 근대과학을 태동시켰다 는 것이다.

 

근대과학의 정신적 원천인 그리스의 자연철학과 유대-기독교 의 창조사상은, 

그 모티브는 각각 다르지만 이 세계의 근본적 원리에 대한 경계질문을 통해 서로 대화의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히브리 창조 신앙과 환경 및 생태계 위기와의 관련성 문제다.

린 화이트(Lynn White, 1907-1987)는 서구인들이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창세기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자연과 생태계를 마구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생태계 파괴의 근본적인 뿌리는 유대-기독교의 인간중심주의라고 지적하였다.

이런 지적을 고려할 때에 히브리 창조신앙은 한편으로는 고대 자연종교의 구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아마도 기록 당시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수 천 년이 지난 현대에 이르러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과도한 착취와 파괴를 초래한 부정적인 기능도 지니고 있다.

 

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요청하는 또 다른 요인은 '방법론적 평행'이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과학과 종교가 대중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방법론적으로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한때 과학은 객관적이고 종교는 주관적이라는 순박한 이분법이 옳다고 믿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과학철학의 연구 결과는 과학탐구 행위가 결코 가치중립적인 객관적 작업이 아니라, 

개인과 시대적 상황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토마스 쿤(Thomas Samuel Kuhn, 1922-1996)은 자신의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기념비적인 연구를 통해 과학이 결코 순수하게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여기서 패러다임은 과학 공동체의 탐구행위를 규율하는 개념 적. 형이상학적 방법론적 전제들의 집합이다.

새로운 과학적 관측 데이터 등이 당대의 지배적인 과학 공동체가 공유하는 이론적 틀에 영향을 받아 해석이나 검열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더욱이 양자 역학(Quantum Mechanics)의 발전과 함께 직접적인 관찰이나 묘사가 불가능한 미시세계를 탐구하면서 모델과 해석의 중요성이 커졌다.

미시 세계의 소립자들의 운동과 존재 방식은 거시세계와는 전혀 다른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실험을 통해 얻은 데이터의 해석에 있어 이론의 모델이나 패러다임이 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작업가설이 실험이나 관측에 영향을 끼치며,

결과적으로 관측 데이터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과학적 상상이나 유비 및 모델이 만들어지며 그것들은 새로운 이론으로 형성되는 과학적 방법론의 사이클을 구성한다.

이 구조와 과정은 실험관측과 이론을 서로 완벽하게 분리할 수 없다는 현대 과학이 지닌 딜레마를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종교적 방법론도 이와 아주 유사하다. 

먼저 원초적인 믿음이 있고,

이 믿음은 종교적 경험과 해석에 영향을 끼치며,

이러한 전제 위에서 이야기나 사건, 전례를 통해 종교적 경험을 하게 된다.

예컨대 종교적 환상 체험은 개인이 속한 종교 전통의 맥락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경험들은 상상과 유비와 모델을 거쳐 교리와 믿음으로 형성된다.

 

이 사이클은 과학적 방법론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이러한 방법론적 유사성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과학과 종교를 통해 우리가 발견한 진리가 완전한 최종 진리가 아닌 근사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고린도전서 13:12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때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공동번역).

 

통 합 (integration)

통합의 방식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자연신학'(natural thcology),

두 번째는 '자연의 신학'(theology of nature),

그리고 세 번째는 '체계 적 종합' systematic synthesis이다.

 

'자연신학'은 자연과 생명 현상에서 창조의 증거를 찾아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방식이다.

여기서는 자연과학적 설명을 신학적 목적으로 활용한다. 

자연신학은 신학을 입증하기 위해 과학적 설명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지만 포괄적인 과학 이론에 담긴 함축성을 찾아내어 신학적 논술을 재구성하는 데 참고한다. 

체계적 종합은 과정철학의 예에서 보듯이 과학적 설명을 신학 안에 수용하여 새로운 체계적인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자연신학의 대표적인 경우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인데,

그는 우주론적 논증에서 모든 사건은 그에 앞선 원인이 있어야 하므로 이는 필연적으로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운동을 부여한 존재로서 최초의 제1원인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근대과학자들은 자연의 놀라운 조화와 질서에 대하여 종종 신앙적 외경심을 표현하곤 했다.

우주를 마치 완벽한 시계처럼 정해진 질서와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운행하는 기계로 본 뉴턴은 완전한 세계를 고안한 설계자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상정하였다.

 

자연신학자로 가장 유명한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 1743-1805)는

"만일 어떤 사람이 황무지를 가다가 시계를 발견했다면 그는 당연히 그것을 만든 시계공이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라며

어떤 훌륭한 시계 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설계된 생명체를 보면서 이것을 창조한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신학의 설계논증은 흄(David Hume, 1711-1776)의 자연신학 비판과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서 위협 을 받았다.

또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종교적 믿음이란 본질적으로 인간 이성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므로 인간의 보잘것없는 추론과 발견에 기초한 자연신학의 방식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한편 자연신학과 국가권력의 문제를 간단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교회가 자연신학의 방법론에 근거하여 히틀러를 인정한 점은 자연신학의 큰 허점이 아닐 수 없었다.

본회퍼를 제외한 독일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연의 질서를 부여하셨듯이 이 세상의 권력도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논리에 빠져 잔혹한 전쟁범죄에 눈을 감고 나치 정권을 축복해주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최근 들어 새삼스럽게 자연신학적 토론을 불러온 것은 현대 우주론에서 제기된 '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 논쟁이다.

빅뱅우주론의 정립과정에서 물리학자들은 우주 안에 지성을 지닌 생명체가 출현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이 확률적으로 너무도 적다는 점에 주목하게 되었다.

예컨대 35억 년 이상 진행된 지구 생명의 진화의 결과로 인류가 생겨났고,

우주의 시간 단위로 볼 때 아주 최근에서야 인간이 우 주를 어느 정도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생명체 진화 및 지성의 출현의 전제조건으로서 현재와 같은 우주팽창률이 유지되기 위한 확률은 숫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수치이다.

 

팽창률뿐만 이 아니다.

지구 생명체는 탄소에 기반하여 생명을 영위하고 있는데 탄소 같은 무거운 원소는 무거운 별이 자신을 태우고 초신성으로 폭발할 때 만들어지며,

여기에는 우주의 네 가지 근본적인 힘(중력, 전자기력, 약력과 강력)의 세기가 결정적 요인이 된다.

이러한 수치들 을 우주상수라고 한다.

그런데 우주의 모습을 결정하는 몇 가지 우주 상수들과 법칙등 수많은 요인이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우주안에 지적 생물체의 존재를 출현하도록 설계한 것처럼 완벽하게 미세 조정 해놓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현대 과학자들이 우주가 놀라울 정도로 조화롭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들이 무작정 하나님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미세조정이 제기하는 함축성을 두고서 약한 인류원리, 강한 인류원리, 참여적 인류원리 등 몇 가지 상이한 해석이 있는데, 이 토대로 설계논증과 관련된 자연신학적 토론이 전개되고 있다.

 

영국의 대표적인 소립자 물리학자였다가 신학자가 된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 1930)은

자신이 과학과 신학의 토론에 참여하는 이유는

과거 아퀴나스 시대의 자연신학처럼 신을 직접 증명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이 조화로운 우주의 배후에 존재하는 신성한 목적 -이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든 달리 부르든 간에- 을 넌 지시 암시하는 수준의 수정된 자연신학을 제안하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자연의 신학'theology of nature은 자연신학과 달리 과학적 설명에서 부터 출발하지 않고 종교적 경험과 역사적 계시에 근거한 종교를 그 출발점으로 설정한다. 

그러나 전통적 종교의 교리를 현대의 과학적 지식에 비추어 재구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리하여 과학과 종교는 크게 보아 각자 독립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지만 세부적인 주제들,

예컨대 창조, 섭리, 죄와 죽음, 부활 등에 대하여 종교적인 설명을 할 때에 과학적 발견을 참조해서 새롭게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테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 SJ)은 예수 그리스도, 역사의 종말,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전통적 신학의 도식에 머무르지 않고 진화론적 도식을 빌려서 신학적 성찰을 펼쳤다. 

샤르댕의 자연의 신학에서 역사는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나선형으로 진화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의식이 광물에서 출발하여 생물과 정신적 존재를 거쳐 진화의 끝자락에서 성취해야 할 최종적인 모습이다.

 

현대의 여성생태학자들과 생태신학자들 역시 자연의 신학이라는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들은 생태계 위기의 현실 가운데서 창조 신앙의 신학적 성찰을 재구성하면서 기후변화와 생태계 멸종에 관한 과학적 예측을 차용하여 전개하고 있다.

기후변화와 생태계 위기 문제에 대해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학과 종교의 협동이 필요하다.

과학은 현상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예측을 담당하고, 종교는 사람들에게 윤리적 동기를 제공하여 행동에 나서도록 조직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바버가 마지막으로 분류한 '체계적 종합'(systematic synthesis)이란 과학과 종교를 하나의 종합적인 형이상학의 구도 하에 체계적으로 결합시켜 일관된 단일 세계관을 구성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과정 사상을 들 수 있다.

화이트헤드(A. N. Whitehead)가 제창한 과정신학의 거대한 구상 속에서 물질과 정신, 육체와 마음, 자연과 인간, 시간과 영원은 이원론적 구분을 뛰어넘어 유기체적으로 서로 연결된 존재로 종합된다.

 

이 두 가지 카테고리는 그동안 전통적으로 과학과 종교가 각각 주도권을 행사해온 고유한 영역이었다.

과정신학에서 신은 세계를 초월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 내재한다.

신은 전지전능한 통치자 이기보다 새로움과 질서의 원천으로서 사건들 속에 내재하며,

피조물의 고통 가운데 동반하면서 그들이 지닌 원초적 본성이 진화를 통해 귀결적 본성으로 발전해가도록 설득하는 존재로 사유된다.

 

지금까지 이안 바버의 구분에 근거하여 과학과 종교의 네 가지 관계 유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 유형론은 과학과 종교 간의 토론을 시작할 때 대개 맨 먼저 다루는 주제인데,

바버 외에도 여러 학자들이 각자 다른 기준을 가지고 두 영역의 관계 유형을 규정한다.

 

폴킹혼의 경우는 과학과 신학의 만남을 '동화'(assimilation)와 '공 명'(consonance)의 두 유형으로 나누었는데,

동화란 과학적 함축성에 동화하여 종교적 진리를 사유하는 것을 말하며,

공명이란 과학적 설명과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 각각의 자치권을 어느 정도 보장하면서 양자 사이에 조화로운 울림공명을 찾는 방식을 말한다.

전자는 통합에, 후자는 대화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테드 피터스(Ted Peters)는 과학주의, 과학 제국주의, 교회 권위주의, 과학적 창조론, 두 언어 이론, 가설적 공명, 윤리적 중첩, 뉴에이지 영성 등으로 보다 세부적으로 분류하고 있다.

 

오늘날 곳곳에서 문명의 위기를 알리는 경고음이 높아가고 있다.

핵무기와 원전, 기후변화, 지구온난화, 생태계 파괴, 신자유주 의로 인해 심화되는 양극화, 지구촌 시대로 인한 종교, 인종, 문화 간의 충돌 등이 문명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과학의 힘만으로, 혹은 종교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이러한 문명의 위기를 직시하면서 동양의 전통적 종교와 지혜를 바탕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하는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 1939)의 주장은

우리에게 한국 상황에서의 과학 정신과 기독교 정신간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 2007: The Turning Point: Science, Society, and the Rising Culture, 1982.)

 

유불선으로 대표되는 우리나 라의 전통적인 종교 문화는 서로를 극단적으로 배척하기보다는 오랫동안 공존하면서 하늘과 땅과 인간의 조화로운 합일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한두 세기 전에 서구로부터 도입된 기독교와 과학이 우리나라에서 서로 갈등하고 적대시하고 있다.

그것은 한 편에는 진리탐구라는 과학 정신의 진면목이 아니라 돈벌이 수단으 로서의 과학이 과학을 대표하고,

그 반대편에는 비지성적인 문자주의적 해석에 기반한 '창조과학회'가 과학에 대응하는 한국교회의 대표주자처럼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우리는 과학 기술에 대한 성숙한 성찰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날로 심각해지는 생태위기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서도 과학과 종교의 진지한 대화가 절실히 필요하다.

겉보기에는 과학적 진리와 믿음의 진리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서로 통하는 하나의 진리 임을 기억해야 한다.


출처 : 신학자의 과학 산책 (저자 김기석, 출판 새물결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