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신학자의 과학 산책

제1부 : 04. 갈릴레이와 뉴턴의 과학과 신앙

w.j.lee 2024. 5. 31. 10:08

제1부 신앙에 대한 과학의 도전

 

04. 갈릴레이와 뉴턴의 과학과 신앙

 

신앙의 모토는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가 가르친 것처럼 "이해 하기 위해 믿어라" 즉 믿음을 통해 불확실한 진리를 확실히 아는 것이지만,

과학의 모토는 "의심을 통해 감춰진 새로운 진리를 찾는 것"이다.

대체로 교회를 포함한 종 교 공동체는 오래된 전통을 올바른 신앙을 판단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데,

기독교에서 중시하는 전통으로는 예배(성사)나 성직 "제도, 그리고 신앙고백(신조)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전통들은 교회 안에서 상당한 권위를 지니고 있지만, 전통이 언제나 진리를 판단하는 올바른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모세의 유일신 신앙은 이집트 제국의 통치 권력과 결합 되어 형성된 자연종교(범신론)의 전통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에 관한 증언도 당시의 유대교 전통의 관점에서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몽매의 어두운 구름이 짙게 드리운 중세 말엽에 

종교개혁가 들이 외친 "오직 신앙으로만!", "오직 성서 말씀으로만!"이란 절규도 

당시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가르침과는 상충하는 목소리였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기존의 통념에 대해 회의하는 과학의 정 신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소수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근대과학의 중요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과학자들 대부분이 가톨릭 국가가 아닌 개신교 국가 출신이라는 점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갈릴레이와 뉴턴은 자신의 과학 탐구와 관련하여 교회로부터 완전히 다른 반응을 경험했다. 

교회의 전통과 권위가 기세등등하던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갈릴레이는

자신의 과학적 소신 때문에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해 억압을 당한 반면,

프로테스탄티즘을 어느 정도 수용한 영국에서 활동한 뉴턴은 교회 성공회로부터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마음껏 과학 탐구의 자유를 누렸다.

상황은 달랐지만 이 두 과학자는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과 권위에 도전하여 그 아성을 무너뜨리고 인류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펼쳐 보여주었다.

이들의 도전이 있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에 기초해 거의 이천 년 동안이나 아무런 의심 없이 사물의 변화와 운동을 설명하는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갈릴레이의 과학과 신앙

 

성베드로성당의 시스티나 채플 정면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프톨레마이오스 우주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는 미켈란젤로가 상상한 지옥세계, 지상세계, 하늘나라의 광경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차례로 그려져 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이 웅장한 그림을 그린 미켈란젤로가 죽던 해에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밝힌 위대한 과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피사에서 태어났다.

천재 예술가가 사망하고, 새로운 과학의 아버지가 탄생한 1564년은 어쩌면 낡은 우주론과 새로운 우주론의 교체가 시작되는 해였는지도 모른다.

 

갈릴레이는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보다 빨리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래된 권위 있는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공기의 저항이 없다면 모든 물체는 무게와 상관없이 동일한 속도로 낙하한다"는 혁신적인 가설을 펼쳤다.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빠르게 낙하한다는 것은 우리의 직관은 물론 일상의 경험과도 일치하지만 갈릴레이는 직관과 경험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상상실험을 통해 그러한 직관이 모순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했다.

 

"만일 10킬로그램짜리 쇳덩어리를 낙하시킨 다음,

그와 똑같은 쇳덩어리에 1킬로그램의 쇳덩어리를 추가로 매달아 낙하 시키면 처음보다 무게가 늘어났기 때문에 낙하속도가 더 빨라질 것인가,

아니면 작은 쇳덩어리가 무거운 쇳덩어리보다 더 천천히 낙하하기 때문에 위에서 잡아당김으로써 낙하속도를 감소시킬 것인가?

마찬가지로 무거운 쇳덩어리를 아주 작은 쇠구슬로 나눈 다음, 가는 줄로 연결해서 떨어뜨리면 낙하속도가 감소될 것인가, 증가할 것인 가?" 

 

이러한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무거울수록 빨리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점을 날카롭 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물체가 공기저항이 없다면 동일한 속도로 낙하할 것이라는 갈릴레이의 주장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솜과 쇳덩이가 동일한 속도로 떨어진다는 주장은 수천 년간 지속된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 있는 가르침은 물론 사람들의 직관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진공상태의 유리 상자 안에서 솜과 동전을 떨어뜨리는 실험을 통해 두 물체가 동일한 속도로 낙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갈릴레이의 낙하법칙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이런 낙하실험을 눈으로 보면 직관과 위배되기 때문에 상당한 충격을 받기도 한다.

 

과학의 위대한 발견은 전통적인 관념을 깨고, 현상 너머에 숨겨져 있는 불변의 자연법칙을 찾아냄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또한 갈릴레이는 최초로 소리의 속도를 잰 사람이다.

그는 조수와 둘이서 각각 진자를 이용한 시계를 동일하게 맞춘 뒤,

서로 맞은 편 산봉우리로 올라간 후 미리 정한 시간에 한 사람은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소리가 도달한 시간을 재는 방법으로 소리의 속도를 측정하였다.

당연히 실험방법과 도구가 원시적이기 때문에 한두 번 만에 신뢰할 만한 데이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수백 번의 동일한 실험을 실행한 뒤에야 신뢰할 만한 의미 있 는 데이터를 얻었을 것이다. 

마침내 갈릴레이가 측정한 소리의 속도는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초속 약 340미터에 95퍼센트 정도 일치하는 정확한 수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음속을 측정한 다음 동일 한 방법으로 광속을 측정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광속은 초속 30만 킬로미터나 되기 때문에 그러한 원시적 도구로는 어림없는 도전이었다.

그 후 약 3백 년이 지나 20세기 초반이 되어서야 과학자들은 광속의 측정에 성공할 수 있었는데,

갈릴레이의 불굴의 탐구정신과 실험과 측정을 통해 가설을 확증하는 행위는 바로 근대과학의 방법이었다.

이러한 점이 그를 근대과학의 아버지라 부르게 만든 것이다.

 

앞부분에서 일본사람들이 영어의 'science'를 한자어 '科學'으로 표기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자는 '쌀을 됫박으로 재는 행위를 뜻 한다.

즉 어떤 물질의 분량을 측정하는 행위를 나타내는데,

이런 점에서 갈릴레이의 음속과 광속 측정의 노력은 과학의 본질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의 관점에서 이러한 갈릴레이의 행위를 어떻게 보았을까? 당시에는 가장 빠른 마차라고 해봐야 초속 10미터 남짓이었을 것이다.

이는 음속과 비교해볼 때 매우 느린 속도이며, 음속을 알았다고 해서 이익이 될 일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의 눈에 갈릴레이의 행위는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도 못되는 쓸데없는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갈릴레이의 행위는 과학의 중요한 본질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흔히 과학을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진정한 과학정신이란 오직 진리를 탐구하는 꺼지지 않는 열정의 불꽃이다.

 

우리나라는 과학을 도입할 때부 터 정부가 주도하여 오직 산업화의 수단으로,

보다 심하게 말하자면 돈벌이 수단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순수한 기초과학은 걸음마 수준이고,

산업기술력은 세계 최첨단을 달리는 기형적인 구조가 형성되었다.

황우석 사건과 같이 가끔 발생하는 과학계의 연구윤리 위반사건은 상업적 이익이 우선시되는 우리나라 과학계의 왜곡된 현실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벨상을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우물에서 숭늉 찾기'가 아닐 수 없다.

물신주의가 망쳐놓는 것은 교회뿐만이 아니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과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1632년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은 『천문대화』를 출판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가 출판된 지 80여년이 지났을 때다.

갈릴레이는 이로 인해 로마 교황청의 이단심문소에서 종교재판을 받아야 했고, 평생 가택연금 및 출판금지의 처벌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시기 위해 두 종류의 책을 주셨다고 믿었는데,

하나는 성서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라는 책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은 우주라고 하는 이 웅장한 책 속에 쓰여 있다.

이 책은 언제나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그러나 먼저 그 말을 배우고, 그것이 쓰여 있는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지 않으면 이 책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은 수학이란 언어로 쓰였기 때문에 이를 모르면 이해할 수 없다."

 

여기서 갈릴레이가 말한 철학이란 '자연철학'이며, 오늘날의 자연과학을 뜻한다. 

그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우주도 '제2의 성서'로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경륜을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이 '제2의 성서'인 우주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읽을 수가 있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성서는 모두 라틴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서를 읽으려 면 라틴어를 공부해야 하듯이,

'제2의 성서인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서는 수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갈릴레 이의 주장을 위험하고 불온한 생각으로 규정했지만,

갈릴레이의 과학적 탐구심의 동기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위대함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어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둘러싼 교회의 두려움과 단죄를 두고,

성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늘나라에 가는지를 알려주는 책이지, 어떻게 하늘나라 친구가 돌 아가는지를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천구가 어떻게 운동하는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수학의 언어로 쓰인 '제2의 성서'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문대화」의 서언에서 자신의 믿음직한 후원자였던 토스카나 대공에게 바치는 헌사에서 갈릴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보다 높은 곳을 우러러보는 사람은 보다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철학의 본래의 대상인 자연이라고 하는 웅장한 책을 연구하는 것은, 바로 높은 것을 우러러보는 방법인 것입니다. 이 책에서 읽는 모든 일은 모두가 전능하신 창조주의 솜씨이며, 그중에서도 창조주의 훌륭한 솜씨를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것에 최대의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자연물 가운데서 우주의 창조야말로 으뜸이라고 생각합니다.

 

뉴턴의 과학과 신앙

 

미켈란젤로의 사망과 갈릴레이의 탄생이 같은 해에 일어난 것 처럼, 

묘하게도 갈릴레이가 사망한 해의 크리스마스 날에 

만유인력과 역학법칙을 발견하여 기계론적 우주론의 성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Sir Isaac Newton, 1642-1727)이 태어났다.

시골의 농장주였던 뉴턴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세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미숙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일주일 후 유아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아무도 그가 오래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당시로서는 흔치 않게 85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그가 스물세 살이 되던 해에 영국 전역에 페스트가 유행하는 바람에 그는 케임브리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머물게 되었다.

뜻하지 않은 휴가를 얻은 그는 여유롭게 산책을 하거나 사과나무 아래 앉아서 사물의 운동을 일으키는 근원적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사색에 잠기곤 했다.

 

뉴턴 역시 갈릴레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 대한 회의와 도전을 통해 과학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세계가 네 가지 원소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믿었는데,

그것들을 가벼운 순서대로 나열하면 불, 공기, 물, 흙이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과 변화가 4원소의 본성에 근거한다고 설명하였다.

불꽃이 하늘을 향하는 이유는 불이 있어야 하는 위치가 원래 하늘이기 때문이며, 새의 깃털이 바람에 날려 공기 중에 떠돌다가 살며시 내려앉는 이유는 깃털에 공기의 원소와 흙의 원소가 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돌멩이를 들어 공중에 놓으면 아무도 힘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왜 땅으로 떨어지는 가?"라는 질문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돌이 지닌 본성이 이 세계 에서 맨 아래에 위치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는데,

이 러한 설명은 모든 이에게 아주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에 수천 년동 안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앞에서 갈릴레이는 낙하의 법칙은 발견했지만, 낙하를 일으키는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런데 뉴턴은 이러한 관습적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뉴턴이 사과나무 아래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순간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았다는 그 유명한 전설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부분은, 

뉴턴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 회의를 품고 보다 더 지적으로 만족스러운 설명을 찾고자 끊임없이 고민해온 과정 끝에 마침내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했던 새로운 개념을 움켜쥐었다는 사실이다.

 

즉 뉴턴은 보이지 않는 어떤 동인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을 그저 사물이 지닌 본성으로 귀결시킴으로써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아리 스토텔레스적 사고방식에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관습적인 믿음에 대한 뉴턴의 회의는 수천 년 동안 모든 사람이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 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도전이었고, 

그 도전은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낙하운동의 근본적인 이유, 즉 만유인력이라는 진리를 발견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뉴턴의 역학이론 은 1687년에 출판한 「프린키피 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책에 담겨져 있다.

갈릴레이와 마찬가지로 뉴턴도 이 우주를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로 믿었다.

그리고 갈릴레이가 말한 대로 '제2의 성서'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우주라고 일컫는 책'을 연구하였다. 

그는 책의 앞부분에서 물체가 운동하는 배경인 공간과 시간은 인간의 감각으로부터는 완전히 독립된 무한하고 균일하고 연속적인 실체로서,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라고 전제하였다.

그는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보편적인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는 가정하에 인간의 감각을 초월하는 실체로서 공간과 시간의 절대성을 강조했다.

 

뉴턴은 1713년에 출판한 '프린키피아' 제2판에 하나님에 관한내용을 추가하였다.

 

행성과 혜성들은 오직 만유인력 법칙에 의해서만 그 궤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들 법칙으로부터 궤도의 규칙적인 위치를 최초에 스스로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태양과 행성과 헤성의 체계는 지혜와 힘으로 충만하신 존재자의 계획과 지배로부터만 태어날 수 있다. 그는 영원하시고 무한하시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다. 그 분은 영원에서부터 영원으로 이어지고, 그의 존재는 무한에서 무한으로 미친다. 그분은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시고, 모든 사물을 지배하시며, 어디에든지 계신다. 지고하신 하나님이 필연적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은 모든 것에 의해 인정된다.

 

뉴턴은 덧붙여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알지 못하며, 그분이 지으신 우주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곧 우주의 합리적인 구조와 질서정연한 운행을 보면서, 궁극인(제1원인)으로서 참으로 현명 하시고 뛰어나신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초판이 나온 지 26년이 지나 이제 70세를 넘긴 노인이 된 뉴턴의 사색은,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의 신비를 보다 진지하게 고백하는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뉴턴은 역학 외에도 광학과 연금술 등 평생에 걸쳐 과학의 다방면에 몰두한 위대한 과학자였지만,

기독교와 성서의 연구에도 몰두하였다. 

지금도 남아 있는 그의 친필 원고들을 살펴보면, 그가 과학에 관한 기록보다 성서 연구에 관한 원고를 훨씬 더 많이 남겼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에게 뉴턴의 중력이론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완벽한 법칙으로 여겨졌다. 

사실 뉴턴 역학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행성들의 운동은 물론 인간이 실제 생활에서 경험하는 모든 물체의 운동들을 거의 완벽하게 기술할 수 있 는 법칙이었다.

 

예컨대 대포에서 발사되는 포탄의 궤적이라든지 움직이는 물체의 충돌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에 근거하여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의 개념을 확고히 다졌다.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절대시간의 지배를 받는 무한하게 뻗은 3차원 공간이 바로 뉴턴의 세계였다.

이는 3차원 좌표 및 공간과 무관한 또 하나의 시간 축으로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세계인데,

이로써 뉴턴은 새로운 시대, 곧 근대과학에 기초한 기계론적 우주론의 시대를 열었다.

 

뉴턴 물리학의 성취에 고무된 서구의 지식인들은 이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도취하여 계몽주의를 꽃피웠다.

계몽주의 시대의 백과사전파는 이 세계의 모든 지식을 체계적으 로 작성할 수 있으리라는 지적 낙관주의에 근거했다.

이러한 낙관주의적 사조는 인식론적 철학의 관점에서는 결정론적 세계관으로 이어졌는데,

이 세계의 모든 사건은 철저히 인과율에 따라 발생하기 때 문에 미래의 사건 역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앞에서 언급한 나폴레옹 황제의 신망을 얻은 라플라스다. 

그는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와 운동은 철저하게 인과율을 따르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충분한 데이터를 알고 있으면 우주의 모든 일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그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극단적인 확신은 "우주의 공식을 달라. 그러면 우주를 만들어 보이겠다"는 과감한 주장에서 극치를 이룬다.

 

뉴턴의 물리학이 우주의 모든 운동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과학이라는 믿음은 19세기 말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당시의 '근거 없는 자만심'을 잘 나타내는 이야기가 있는데,

스위스의 어떤 특허청장이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게 나올 것이 없어 사표를 내야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가 거의 끝날 무렵 과학계에 약간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뉴턴의 이론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몇 가지 예외적인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이를 두고 "청명한 하늘에 걸린 작은 구름 두 조각"이라고 표 현했지만,

이때까지도 당시 과학으로 설명이 잘 안 되는 이 '작은 구름' 정도는 곧 과학의 발전에 의해 모두 깨끗하게 해명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작은 구름 조각이 하늘을 가득 뒤덮는 먹장구름이 되었다.


출처 : 신학자의 과학 산책 (저자 김기석, 출판 새물결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