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영이 계시는 곳
찬 송 : 370장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성 경 : 고린도후서 3:13~18
나는 소금통 안의 소금입니까?
아니면 밖에 뿌려진 소금입니까?
하나님은 어두운 이 땅에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는데, 우리는 불행히도 세상의 수건에 가려져 빛되신 주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소금통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미록 한 알의 소금일지라도 주의 영이 계신곳을 향해 뿌려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원 목사 ㅣ 석곡교회
(고후 3: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 3: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 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요 절 :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 3: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 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요 절 :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복음'이라 부르는 '복된 소식'의 유래는, 승리를 거둔 로마 장군들이 개선문을 지날 때 앞선 사람이 크게 외치던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후 '복음'은 그들 손에 고난 당하던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 눈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패배자로 보였지만,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자신들이 진정한 승리자였습니다.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자신의 책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꿀이니'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왜 소금이었을까요? 우리가 원하는 삶은 꿀 같은 달달한 인생이지, 진실을 마주한 쓰디쓴 인생이 아니데도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얼굴의 광채, 즉 없어지고 마는 영광에 백성들이 주목하지 않도록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의도와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백성은 수건을 쓰는 것이 영광이라 생각하며 수건을 썼습니다. 진리가 왜곡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라질 영광만을 추구하며 수건을 쓰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불평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드냐고. 진실은 우리의 환부를 찌르기에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쉽지 않아도 진리를 보려면 수건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헛된 영광은 포기해야 합니다. 나를 세상의 소금으로 살게 하시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주의 영이 계신 곳에서 진리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하며 참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주의 영이 계신 곳은 단순히 교회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사람들이 거하는 곳, 그 곳이 바로 주의 영이 계신 곳입니다. 예수 안에 참 소망이 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를 눈멀게 하는 수건을 벗어버리고 소금 통에서 쏟아져 나와야 합니다. 달달한 인생만을 보게 하는 수건은 버리고 희생의 세상을 맛깔나게 하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어리석어 보인다해도 용서하고 사랑합시다. 두려워도 불의한 모든 것과 마주합시다. 그래서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참 자유와 진리가 있음을 증거하기 바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후 '복음'은 그들 손에 고난 당하던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 눈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패배자로 보였지만,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자신들이 진정한 승리자였습니다.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자신의 책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꿀이니'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왜 소금이었을까요? 우리가 원하는 삶은 꿀 같은 달달한 인생이지, 진실을 마주한 쓰디쓴 인생이 아니데도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얼굴의 광채, 즉 없어지고 마는 영광에 백성들이 주목하지 않도록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의도와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백성은 수건을 쓰는 것이 영광이라 생각하며 수건을 썼습니다. 진리가 왜곡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라질 영광만을 추구하며 수건을 쓰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불평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드냐고. 진실은 우리의 환부를 찌르기에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쉽지 않아도 진리를 보려면 수건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헛된 영광은 포기해야 합니다. 나를 세상의 소금으로 살게 하시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주의 영이 계신 곳에서 진리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하며 참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주의 영이 계신 곳은 단순히 교회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사람들이 거하는 곳, 그 곳이 바로 주의 영이 계신 곳입니다. 예수 안에 참 소망이 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를 눈멀게 하는 수건을 벗어버리고 소금 통에서 쏟아져 나와야 합니다. 달달한 인생만을 보게 하는 수건은 버리고 희생의 세상을 맛깔나게 하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어리석어 보인다해도 용서하고 사랑합시다. 두려워도 불의한 모든 것과 마주합시다. 그래서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참 자유와 진리가 있음을 증거하기 바랍니다.
나는 소금통 안의 소금입니까?
아니면 밖에 뿌려진 소금입니까?
하나님은 어두운 이 땅에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는데, 우리는 불행히도 세상의 수건에 가려져 빛되신 주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소금통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미록 한 알의 소금일지라도 주의 영이 계신곳을 향해 뿌려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원 목사 ㅣ 석곡교회
출처 : 2017년 가정예배서 하늘양식
'신앙의 길 > 가정예배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구를 의지할 것이가?| (0) | 2017.05.23 |
---|---|
진정한 위로 (0) | 2017.05.22 |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0) | 2017.05.20 |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부부의 사랑 (0) | 2017.05.20 |
묵상은 내 영혼의 충전시간입니다 (0) | 2017.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