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14. 월요일
하나님 때문에 기쁩니다
찬 송:
95장 -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성 경:
나훔 1:6~7
(나 1:6)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나 1: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요 절 :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나 1: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요 절 :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누구와 만나고 교제하는냐' 혹은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무엇을 통해 행복과 만족을 누리고 있는가'를 보며 그 사람의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앙샐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쁨과 감사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선포하는 내용을 보면 기쁨의 근원은 나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 혹은 환경이나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무엇을 얻거나 원하는 바를 성취했을 때, 또는 목표를 이루거나 삶의 여건이 개선되었을 때 우리는 기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것들로 기뻐하기 전에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합 3:17~19)처럼,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런 상식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신앙인을 당황하게 하는 내용이 나훔서에 나옵니다.
'나훔'이란 뜻은 '위로'입니다.
그런데 나훔이 전한 말씀이 유다 주민들에게 위로가 되는 이유가 당황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나훔이 전한 메세지는 원수인 앗수르 수도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니느웨의 파괴에 대한 예언이 이어진 뒤, 그 니느웨에 대해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3:19)는 탄식으로 끝이 납니다.
원수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것을 보며 위로 받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진노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기까지 합니다.(2)
과연 이러한 위로와 기쁨이 정당할까요?
물론 앗수르의 기나긴 학정(虐政)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유다 주민들이 가진 일시적인 감정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죄악과 불의의 최후에 대한 무섭고도 사실적인 묘사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상황이든 주변 여건이든 혹은 원수의 멸망이든 그 어떤 것도 기쁨과 위로의 근원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7)
선하신 주님,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여호와만이 우리의 기쁨의 이유가 되십니다.
하나님 때문에 기쁘고 하나님 때문에 살맛나는 우리를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됨됨이를 인정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기쁨이 되시는 하나님,
삶의 무게와 힘겨움으로 인해 지쳐 있는 우리에게
위로와 회복의 은혜를 허락하옵소서.
주변의 여건과 상황에 멈춰 있는 시선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오늘도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성복 목사 ㅣ 돈암동교회
'누구와 만나고 교제하는냐' 혹은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무엇을 통해 행복과 만족을 누리고 있는가'를 보며 그 사람의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앙샐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쁨과 감사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선포하는 내용을 보면 기쁨의 근원은 나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 혹은 환경이나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무엇을 얻거나 원하는 바를 성취했을 때, 또는 목표를 이루거나 삶의 여건이 개선되었을 때 우리는 기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것들로 기뻐하기 전에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합 3:17~19)처럼,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런 상식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신앙인을 당황하게 하는 내용이 나훔서에 나옵니다.
'나훔'이란 뜻은 '위로'입니다.
그런데 나훔이 전한 말씀이 유다 주민들에게 위로가 되는 이유가 당황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나훔이 전한 메세지는 원수인 앗수르 수도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니느웨의 파괴에 대한 예언이 이어진 뒤, 그 니느웨에 대해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3:19)는 탄식으로 끝이 납니다.
원수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것을 보며 위로 받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진노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기까지 합니다.(2)
과연 이러한 위로와 기쁨이 정당할까요?
물론 앗수르의 기나긴 학정(虐政)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유다 주민들이 가진 일시적인 감정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죄악과 불의의 최후에 대한 무섭고도 사실적인 묘사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상황이든 주변 여건이든 혹은 원수의 멸망이든 그 어떤 것도 기쁨과 위로의 근원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7)
선하신 주님,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여호와만이 우리의 기쁨의 이유가 되십니다.
하나님 때문에 기쁘고 하나님 때문에 살맛나는 우리를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됨됨이를 인정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기쁨이 되시는 하나님,
삶의 무게와 힘겨움으로 인해 지쳐 있는 우리에게
위로와 회복의 은혜를 허락하옵소서.
주변의 여건과 상황에 멈춰 있는 시선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오늘도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성복 목사 ㅣ 돈암동교회
출처 : 2018년 가정예배서 하늘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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