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과학과 신학의 대화

Q25 동물의 고통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인가?

w.j.lee 2025. 1. 21. 01:03

 

동물의 고통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인가?

 


만약 하나님이 선하시고 사랑과 능력이 많으시다면, 동물(그리고 인간) 들이 포식 관계, 질병 및 자연재해로 인해 엄청나게 큰 고통을 받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자연적인 악'을 인간의 죄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나 과학에 따르면, 동물은 최초의 인간이 이 땅에 나타나기 전 이미 수백만 년 동안 서로 잡아먹었고, 암에 걸리기도 했으며, 기생충에 감염되었고, 허리케인과 지진으로 죽어갔습니다.

우리는 "만물이 다 그[리스도]로 말미 암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골 1:16)라는 고백과 우리가 자연 세계에서 발견한 것을 서로 조화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 몇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적인 악의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제시된 몇 가지 제안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각각의 문제 에 대해 논의해 볼 예정입니다.

이 중 어떤 제안도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창조 세계를 궁극적으로 구속하실 하나님올 신뢰하면서 소망 중에 기다리며 희미하게 볼 뿐입니다.

 

동물의 고통 문제

 

성경은 하나님이 선하시고 사랑과 능력이 많으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상에 반영되어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세상에 있는 고통과 악의 사례들도 봅니다.

종종 우리는 이런 역설적인 사례들 때문에 충격을 받으며, 하나님이 왜 그런 일들을 막지 않으시는지 궁금해합니다.

사람들은 현대 과학이 발전하기 훨씬 전 수 세기 동안 이 질문과 씨름해 왔습니 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세상을 이해하게 되면서 이 문제는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야기합니다.

 

세상의 여러 고통과 악은 명백하게 인간 죄의 결과입니다. 

이를테 면, 집단학살, 강간 및 수많은 악행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의도적 행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종종 "도덕적 악"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행동들에 도덕적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한 악을 경험하는 일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이 야기한 일이기 때문에 창조주가 선하시다는 사실과 양립하는 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기생충, 암, 허리케인 및 동물의 포식관계처럼, 인간 활동의 결과물이 아닌 '악'도 존재합니다.

이런 것들은 피조물(인간을 비롯한 모든 창조물)에게 엄청난 고통, 고난 및 죽음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결정은 이런 '악'이 발생하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흡연이 암을 유발하고 화석연료의 연소가 기후에 영향을 미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 자연적인 '악'들 중 많은 것은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 처럼 보입니다.

 

지구에서 벌어진 생명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그 안에 자연재해, 포식 관계 및 질병이 항상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고통, 죽음, 심지어 멸종을 통해 동물이 겪는 고난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세상을 이런 방식으로 만드신 걸까요? 

자연적인 악이 어떻게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요?

이런 것들은 쉬운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록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은 이 질문들과 지금까지 씨름해 오고 있습니다.

 

문제에 대한 가능한 접근

 

자연적인 악의 문제에 대해 두 가지 기본적인 접근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은 자연적인 악이 있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으 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시거나, 하나님의 원래 창조 세계가 인간이나 천사의 반역에 의해 파국적인 타락을 했음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세상, 곧 자연적인 악과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는 동물은 실제로 고통을 받지 않는다거나, 어느 정도의 고통은 필연적이거나 하나님이 만들기 원하셨던 방식의 창조 세계에 중요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접근 방식 1 : 하나님은 이 세상을 이런 방식으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무신론
동물의 고통을 포함한 악의 문제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갖게 했습니다. 

그들은 완벽하게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모습이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 에, 그런 신은 분명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악의 문제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무신론이 설득력 있 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 이성, 전통 및 개인의 경험으로부터의 증거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지지하는 합당한 토대를 제공 한다고 믿습니다.

인간의 타락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인 악처럼 자연적인 악도 궁극적으로 인 간의 죄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생충, 암, 허리케인 및 육식동물이 있는 세상을 만들지 않으셨다고 주장합니다.

그 대신에 이러한 자연적인 악은 최초의 인간이 죄를 짓기 시작했던 이후 에야 존재하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견해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장구한 역사를 가진 지구는 물론, 인간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동물들에 대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과학적 증거의 힘을 인정합니다.

이 증거는 동물들이 오늘날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살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기생충이 있었고, 동물들은 다른 동물을 죽이고 잡아먹었으며, 암에 걸리기도 했고, 자연재해로 인해 몰살당하기도 했습니다.

 

천사의 타락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을 인간의 죄 탓으로 돌리는 대신 타락한 천사를 자연적인 악의 근원으로 본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타락한 천사들은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방해했을 것입니다.

이 가능성은 초기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서 제기되었습니다.

C. S. 루이스(Lewis)도 그의 저서 『고통의 문제』 (The Problem of Pain, 홍 성사)에서 이런 가능성을 제안했습니다(그가 강경하게 고집하진 않았지만 말이죠).

또한 오늘날에는 이와 비슷한 설명들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이 가진 가장 큰 어려움은 이 입장이 필요로 하는 사건들의 순서입니다.

이 땅에 동물들이 살아왔던 시간만큼 자연적인 악도 함께 발생했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에, 천사의 타락은 지구 역사 상 아주 초창기에 일어났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 표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나아가, 타락한 천사들에게 창조적인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 다는 바울의 말(골 1:16)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접근 방식  2 : 하나님은 세계 지금 있는 방식 그대로 창조하셨다

 

자연 세계가 하나님이 의도한 방식대로가 아니라는 주장 대신, 다른접근 방식은 자연 세계가 지금 있는 방식 그대로 진정 좋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동물들이 서로 잡아먹고,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받으며, 심지어 멸종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이 세상을 지금 방식대로 창조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서도 이 주장을 설명하는 몇몇 방식이 있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그 방식들 모두 가능합니다.

 

동물은 실제로는 고통을 겪지 않는다

일부 사람들은 고통이 본래적으로 악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이 실제로 고통을 겪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명백하게 동물은 통증을 느낄 수 있으며, 우리는 가능한 한 그 통증을 예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물들은 우리 인간이 악이라고 여기는 고통을 느끼기 위해 필요한 의식은 아마도 가지 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동물이 단순한 로봇이나 기계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물들의 '고통'과 죽음은 핸드폰이 떨어져 부서질 때 받는 '고통'과 도덕적인 차원에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박테리아가 인간이 고통을 경험하는 방식으로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적 능력의 수준을 올려 고등 동물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생각을 고수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벌레는 여전히 고통을 겪지 않을지 모르지만, 새는 어떨까요?

포유류를 생각해 볼 때, 포유류의 뇌 구조와 인간의 뇌 구조가 유사하다는 점은 포유류가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아마도 조금 축소된 방식으로)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동물과 인간의 생리적 유사성을 인정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주장하기를 인간은 물리적인 의미의 뇌 이외에, 

다른 동물에게는 존재 하지 않는 비물질적인 마음 또는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고통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런 마음 또는 영혼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입장이 불편하지 않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동물의 고통을 부인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입장을 취하든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은 동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이에 우리가 그들의 안녕을 경시해서는 안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일한 방법 또는 더 큰 선

또 다른 사람들은 동물의 고통이 실재이고 악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고통으로부터 비롯되는 유익과 고통 자체를 하나로 묶어 조화시키려고 시도합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이 그분이 원하시는 종류의 창조 세계를 만드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통과 고통의 유익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허리케인'과 지진이 없는 세상은 생명이 없고 메마른 곳이 될 것입니다.

이런 재해들이 때때로 고통과 죽음을 가져온다는 사실은 비극적이지만, 생명 그 자체라는 더 큰 선과 비 교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긴 진화 과정은 하나님이 피조물들에게 바라시는 특성이 생겨나도록 만드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책임의 암시와 전조를 다른 동물에서 관찰 합니다.

가젤이 속도와 아치형 달리기를 통해 여러 세대를 거쳐 사자 보다 더 빨리 달리게 된 것처럼 도전적인 환경에 생명체를 배치하는
것도 이러한 능력들이 생겨난 방법일 것입니다.

 

이 견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고려해야 할 더 큰 선이 있음을 인정 하지만, 고통과 고난이 정말 전능하신 하나님이 더 큰 선을 주시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하나님은 손가락 만 한 번 튕기셔도 즉시 그런 것들을 창조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전능하신 하나님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네모반듯한 원을 만드는 것 같은 일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과 하실 수 없는 일을 우리가 명확히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실제로 지구상 생명체의 다양성을 어떻게 이루셨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큰 선' 논중의 확장

 

이러한 생각들을 더욱 깊이 파고들어 가면서 두 가지 제안을 추가적으로 고려해 보겠습니다.

각 제안은 '더 선'(Greater Good) 논증의 확장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자연세계를 위한 자유

이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느 정도의 자율성과 통합성을 가진 시스템을 창조하셨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지구는 판구조론 및 기상 패턴과 같은 동적 시스 템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때로는 피조물에게 고통스러운 죽음과괴로움을 초래하지만, 하나님은 물이 피조물을 익사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해서 물의 자연스러운 성질에 일반적으로(또는 어떤 사람들에 따르면 전혀) 간섭하거나 없애지 않으십니다.

마찬가지로 불이 피조물을 태워 죽일 수 있다고 해서 불의 자연스러운 성질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고통을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개입하시고 간섭하 신다면, 안정성 혹은 예측 가능성 없는 혼란스러운 세상이 초래될 것 입니다.

 

또한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억압하거나 명령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그들의 세상을 탐험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일종의 자유를 주십니다.

심지어 그 자유가 피조물 자신에게나 다른 피조물에게 고통을 가져다줄지라도 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진정한 사랑의 능력이 다른 피조물의 제한된 능력을 거치며 진화되어 온 역사 속에서 발전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육체적·정신적·정서적 삶의 원료는 각자의 환경이 주는 어려움에 대해 반응해 왔던 다른 종들 속에 축적되어 왔습니다.

인간이 그들로부 터 물려받은 것이 하나님을 진정 사랑할 수 있는 능력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비평가들은 이 접근 방식이 지나치게 불간섭주의적이거나 심지어 이신론적인 것처럼 보인다고 비난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다스리시고 지휘하신다고 할 수 있는 걸까요?

사랑은 결코 구속하지 않는 것일까요?

다른 한편으로,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이 모든 세부적인 과정을 일일이 명령하시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궁극적으로 얻어내시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십자가 방식을 본받는 실재의 본성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만드셨다'는 일반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는 다른 견해들처럼, 십자가를 모델로 여기는 견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성취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자연 세계 가 작동하는 방식에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모델로 여기는 견해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 본성에 대한 가장 위대한 계시, 곧 예 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및 부활 사건으로부터 단서를 취하며 더 나아갑니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측면은 필연적이거나 피할 수 없는 악 정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새로운 생명을 발현시키기 위해 고통과 죽음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죽음과 고통은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 원하는 바를 이루시려고 사용하기로 결정하신 과정입니다.

이것은 죽음과 고통이 실제로 선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음과 고통에 목적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 성숙을 위해 우리 삶의 시련을 사용하시는 것처럼(약 1:2-4),

우리는 진화 과정 안에 있는 자연선택을 보며 그 안에서 우리와 같은 피조물을 만들어 내는 목적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살다가 죽은 모든 피조물이 단순히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 곧 소모품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심지어 멸종된 종(존재했던 모든 종의 99퍼센트 이상이 멸종했습니다)조차도 내재된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일각에서는 멸종이 낭비일 뿐이며 선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으로부터 비롯되는 굉장한 선함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영겁의 진화적 발전 동안 훨씬 더 많은 종들이 오직 짧은 기간 동안만 존재하고 번성했습니다.

이 창조 세계는 결코 낭비가 많은 세계가 아닙니다.

오랜 연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창조 세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고 생산 적인 세계입니다.

 

이 견해가 가진 난점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 시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직관이 도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 대해 우리는 욥이 받은 답만을 얻을 수 있는지도 모릅 니다. 그것은 사실 이 한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 나님과 그분의 역사에 대한 더 깊은 계시였습니다(욥38-41장).

 

고통에 직면할 때 우리가 받을 위로의 근원

 

자연적인 악의 문제에 대한 이러한 '해결책' 중 어느 것도 완전하게 만 족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또한 그 해결책들이 전부 상호 배타적이지도 않습니다.

즉, 한 해결책의 요소가 다른 해결책의 요소와 결합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지금 우리가 희미하게 보고 있으며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 세계 전부를 구속하실 것, 곧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될 것 을 믿습니다(사 35장; 롬 8:19-22; 골 1:20).

 

그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 형상을 지닌 우리를 창조 세계의 청지기가 되도록 동반자 삼아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우리는 풀어야 할 난해한 퍼즐이 아니라 하나님 형상을 반영할 기회로서 우리가 마주하는 자연적인 악에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 님의 궁극적인 구속을 기다리면서도 우리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정의로운 목적에 맞춰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괴롭게 하는 고난을 마주하면서도 우리는 믿음 안에 굳건히 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이 반드시 죄로 인한 것은 아니며 (요 9:2-3), 고통이 생기는 이유가 언제나 분별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고자 애쓰는 대신, 우리는 고통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고통받으시고 마지막에는 온 창조 세계를 고통에서 구하신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롬 8:18-25).


출처 : 과학과 신학의 대화(우종학 지음, 정모세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