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한국의 說話

산동마을 산수유 전설

w.j.lee 2017. 7. 26. 19:06

산동마을 산수유 전설


구례 계척마을에 있는 산수유나무.

 

중국 산동성에 살던 처녀가 시집오면서 가져와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崔致遠 857~?) 신라 말기 대학자로 유명한 그는

868년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된다.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 만인 874년, 최치원은 열여덟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 중국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시행한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 후 최치원은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게 된다.


@최치원

그런데 신라방에 있던 아가씨 가운데 동아라는 이름의 여인이 최치원을 사모하게 되었다.

귀족 출신인데다 인물도 훤칠하고,

더구나 빈공과에 합격한 후 토황소격문 등을 써서 세상을 놀라게 한 인물인지라

여인이라면 누구나 최치원을 흠모할 만하였다.

우연히 동아와 알게 된 최치원 역시

오랜 외국 생활에 힘든 심신을 편하게 해주는 동아가 싫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신라방 근처에 있는 적산 법화원에서 자주 만나 사랑을 속삭였다.

법화원은 823년 신라 해상왕 장보고가 당나라에 머물던 시절 거액을 들여세운 불교 사찰로,

당시 적산 인근에 위치한 신라방에 살던 동포들이 모여 단합을 도모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885년, 최치원이 급히 귀국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전갈을 받은 것이다.

떠나기 전날, 최치원은 동아에게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런데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최치원은 당나라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잊고 말았다.

더구나 당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천재가 귀국하였기에 진성여왕은 최치원을 붙잡았다.

부성군 태수로 있던 어느 날, 최치원은 갑자기 동아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겠다고 약속한 지 벌써 8년이 지났다.

그래서 임금에게 청하여 893년 사신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이 횡행하여 중국행이 무산되고 말았다.

동아가 보고 싶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최치원이 다시 간청하여

얼마 후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게 되었다.

업무를 마치고 짬을 내어 신라방에 간 최치원은 서둘러 동아를 찾았다. 8

년 만에 만난 동아는 무척 수척해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동아에게는 장수아라는 딸이 있었다.

알고 보니 최치원이 떠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동아가 이웃마을 장 씨와 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늦게 돌아온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기다리지도 않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고 사는 동아를 보니 최치원은 세상이 싫어졌다.

그렇게 최치원은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

돌아가는 최치원을 동아가 먼발치서 바라보고 있었다.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세상살이에 염증을 느꼈다.

골품제도도 문제이지만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고,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하며 배운 지식을 써먹는다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최치원은 산천을 유람하며 지내다 말년에 지리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췄다.


905년, 중국 산동성 신라방. 결혼한 지 2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말이 없는 동아에게 장 씨가 수사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수아는 최치원이 남기고 간 선물이었다.

최치원이 귀국하던 885년 동아는 이미 수아를 임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런데 수아를 낳을 때까지도 최치원이 돌아오지 않자

수아 부모가 수아를 강제로 이웃마을 장 씨와 결혼시켜버린 것이다.

물론 착하디 착한 장씨는 핏덩어리 수아를 친딸처럼 여기며 지금껏 키웠다.

수아 역시 장 씨를 친아버지로 알고 살았다.

며칠 뒤, 장씨가 수아를 불러 출생의 비밀을 들려주었다.

그러더니 신라로 가서 친아버지를 찾으려면 신라 사람과 혼인을 하라 하였다.

결국 수아는 장사를 하러 신라방에 들른 신라 청년과 혼인을 하기로 하고 함께 배를 탔다.

신라로 떠나는 수아에게 어머니는 작은 비단 주머니를 주었다.

오래전 최치원이 동아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20년을 애지중지하며 키웠던 딸을 떠나보내는 장 씨의 가슴도 찢어질 것 같았다.

장 씨가 수아에게 산수유 묘목을 주면서 고향생각이 나거든

산수유 꽃을 보면서 향수를 달래라 하였다.

수아가 태어나 살았던 산동에 지천에 깔린 것이 산수유라 사실 수아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워낙 흔하게 보아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 청년과 결혼하여 구례로 시집온 수아는 친아버지 최치원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였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지리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다행히 구례가 지리산을 끼고 있는지라

수아는 남편과 함께 틈만 나면 지리산 일대를 이 잡듯이 뒤졌다.

하지만 최치원의 행방은 찾을 길 없었다 그러는 수아를 시어머니가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최치원의 딸이라는 사실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살림은 내팽개치고 친아버지를 찾아다니는 며느리나,

그런 며느리를 도와주는 아들이나 다 미웠던 것이다.

더구나 우리말조차 서툴러서 대화도 잘 통하지 않아 시어머니의 구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수아는 산수유나무를 찾곤 하였다.

시집오자마자 심어놓은 산수유나무가 제법 자라서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면 고향 산동 생각에 잠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해 봄, 최치원이 쌍계사를 다녀갔다는 소문을 들은 수아 부부가 서둘러 쌍계사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쌍계사 입구에 있는 바위에 커다랗게 쓰인 글씨가

바로 아버지 최치원의 글씨라는 말을 듣고

수아는 한 동안 글씨 앞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최치원이 쌍계사 입구 바위에 썼다는 석문(石門)과 쌍계(雙磎) 글씨.

쌍계사에서 그나마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하였던 수아 부부가

근처 마을을 돌아보다 마을 앞 냇가 건너편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는 또 다른 글씨를 발견하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몇 년 전에 누군가가 귀를 씻고 산으로 들어간다며

세이암(洗耳)이라고 손가락으로 새겼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최치원이 틀림없었다



최치원이 귀를 씻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면서
너럭바위에 손가락으로 새겼다는 세이암(洗耳)이라는 글씨.

돌아오는 길에 수아 부부는 범왕리에 있는 자그마한 푸조나무를 보게 되었다.

생김새가 희한하게 생겨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마을 할머니 한 분이 몇 년 전에 어떤 도인이 지나가다

지팡이를 꽂아둔 것이 싹이 난 것이라 이야기하였다.



@최치원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꽂아 자랐다는 푸조나무.

할머니께 들은 인상착의는 쌍계사 스님께 들은 인상착의와 흡사하였다.

역시 최치원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가까이에 아버지 흔적이 이리도 많이 남아 있다니..

그런 수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그분 말씀이,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아 있고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을 것이라던데.."

할머니 이야기를 들은 수아는 친아버지인 최치원이 지리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더 이상 찾지 않기로 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수아는 그동안 못했던 것을 다하려는 듯 시어머니 봉양에 온 힘을 다하였다.

그러는 사이 산수유나무는 무럭무럭 자라났고,

열매의 다양한 효능을 알게 된 인근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산수유 씨를 받아가는 바람에 구례 일대가 온통 산수유 천지였다.

그리하여 아예 지명조차 산동마을로 바뀌게 되었다



산수유 열매.


출처 : 설화 그 원석을 깨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