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아론의 송아지

1-2. 도푸강과 성경 무오

w.j.lee 2024. 4. 18. 13:29

 

2. 도푸강과 성경 무오

 

혹시 독자들께서는 "도푸강"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내가 이 말을 처음 접했던 것은 지금부터 약 20여 년 전 일본에 머물 때였다.

나는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만 1년 동안 일본 회사에 파견 근무를 나갈 기회가 있었다.

 

동경만 횡단도로(東京灣橫斷道路)는 1990년대 중반 일본 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발주했던 대표적인 대형 토목 건설 프로젝트였다.

동경만 횡단 도로는 약 10km에 걸친 해저 터널과 바다위를 가로지르는 5km가량의 교량으로 구성된 복합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나는 해저 터널 부분이 가와사키(川崎)라는 도시 연안에 조성된 인공 섬에 접속되는 구조물을 축조하는 현장에서 근무했었다.

물론 나를 제외하고는 주변 사람 모두가 다 일본인 엔지니어들뿐이었다.

나는 결혼 전이었기에 비슷한 나이 또래의 일본인 총각 직원들하고 친하게 어울려 지냈다.

햇살이 따뜻했던 어느 늦가을 오후였다.

평소에는 각자가 담당하던 공사 구역들이 달라서 여럿이 동시에 만나기가 어려웠지만 그날은 다소 한가해서

가을 햇살을 잔뜩 머금고 비릿한 갯내음 물씬나는 뻘 위에 모여 이런저런 잡담을 나눌 기회를 가졌다. 

대화 중 영화 이야기로 주제가 바뀌었다.

한 일본인 엔지니어가 나에게 질문했다.

"임상은 영화 좋아해요?"

"물론 좋아하지요."

"그렇다면 도푸강을 보셨나요?"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도푸강 이라니? 도대체 그게 어떤 영화지?"

도푸강이라는 이름이 너무 생소해서 그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랴쇼 몽"이나 "란"(亂)같은 고전 일본 영화이겠거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도푸강이라니요? 금시초문인데, 일본 영화인가요?"
"에이 임상, 영화 좋아한다면서 도푸강도 모르고, 영화 좋아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네! 그걸 어떻게 일본 영화로 착각하나, 아주 유명한 하리웃또(할리우드) 영화인데."

"일본 영화가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라니." 머릿속이 점점 더 헷갈리기 시작했다. 

할리우드 영화인데 이름이 도푸강이라 할 수 없이 다시 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누가 출현하나요?"
“도무 쿠루주(탐 크루즈, Tom Cruise)가 나와요."
그와 동시에 나의 입에서는 반사적으로 영화 제목이 튀어나왔다. "아하, 탑건(Top Gun)!”
내 기억으로는 나 이외에 일본 엔지니어가 세 명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명다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와! 임상, 발음 죽이는데요! 다시 한 번 발음해봐요."
"탑건!"
"도푸간?"
"아니, 도푸가 아니고 탑! 탑건!"
"다푸간?"

"......"

 

특정 언어와 문자권에서 태어나 그 문자를 통해 자신의 언어를 표현 하던 사람이

다른 언어를 접했을 때는 자신이 사용하던 원래 문자로 다른 언어를 표기해서 그 언어의 발음을 담아내려고 한다.

위의 사례는 영어가 일본어를 통해서 표현될 때, 일본 문자가 담아낼 수 있는 발음의 제약성 때문에 영어 고유의 발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예를 보여주는 경우다.

 

이것은 성경 무오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고백 하듯이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이렇듯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말씀을 주셨다.

그 것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뿐만이 아니라 우리 이전 역사 속에 살았던 모든 인류와 우리 뒤에 이 땅에서 살게 될 후손 모두에게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메시지다.

또한 성경은 원래 쓰였던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같은 언어뿐 아니라 수천 가지의 인류가 쓰고 있는 모든 언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러한 장엄한 메시지를 인간의 유한한 언어와 문자 체계가 하나도 빠짐없이 담아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너무 지나친 주장이 아닐까? 

물론 이 주장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오류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아내는 인간의 언어와 문자가 갖고 있는 한계를 지적하고자 함이다.

 

따라서 인류 역사 전체와 모든 인간의 언어를 포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지극히 제한적인 인간의 언어와 문자에 담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쓰는 숭늉 사발에

내가 일했던 동경만 자락으로부터 미국 서해안에 이르는 광할한 태평양 바닷물을 전부 담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만큼 무모한 객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은 문자 하나하나가 무오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로서의 성경이 무오하고 완전하다는 것이 성경 무오설의 올바른 이해일 것이다.

 

문자적 성경 무오설에 입각해 성경에서 과학적 사실성을 찾아내려는 창조과학의 노력이야말로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을

좁디좁은 인간의 한계 속에 가두는 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무한성(Divine Infinity)을 인간의 유한한 틀 속에 집어넣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인간의 유한한 틀 속에 넣고 가두는 것,

우리는 이와 동일한 사건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바로 출애굽기 32장에서 찾 아볼 수 있다.

시내 산 정상으로 십계명을 받기 위해 올라간 모세가 사십 일이 지나도록 내려오지 않자,

그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론을 강요해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

애굽에서부터 자신들을 이끌었던 모세가 사라진 불안감이 결국 우상을 만드는 큰 죄악으로 귀결된 것이다.

지금부터 3,500 백 년 전, 시내 산에서 돌아오지 않던 모세를 신뢰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 듯이, 

우주와 지구의 기원과 관련해 성경의 문자적 표현과는 다른 설명을 제공하는 

현대 과학에 대해 위기의식과 불안감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창조과학"이라는 것도 

결국 아론의 송아지의 현대적 변형일 것이다

 

물론 이렇듯 극단적인 문자주의를 주창하는 창조과학회의 동기 자체는

기독교의 창조 신앙을 변증하려는 선한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 사실이다.

창조과학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 그 선한 의도 자체까지 부정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그 의도가 초래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정직하게 직시하고 그것을 바로잡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교회가 큰 혼란과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이 문제를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출처 : 아론의 송아지(저자 임택규, 출판 새물결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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