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아론의 송아지

1-6. 부도덕과 비도덕

w.j.lee 2024. 4. 18. 13:27

 

6. 부도덕과 비도덕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가 쓴 웅장한 비극인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테베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의 아들로 태어났다.

테베 왕 라이오스는 갓 태어 난 아들이 자신을 죽이고 생모를 부인으로 취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아폴론신의 신탁을 듣고 신하에게 갓난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그 신하는 갓난 왕자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들판에 내다버렸으며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들이 이 갓난아이를 발견하고 자식이 없었던 코린트의 왕 폴리버스와 왕비 메로페에게 바친다.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전후서의 고린도가 바로 이 코린트다.)

코린트의 왕 폴리버스는 이 갓난아이를 친자식 처럼 길렀다.

오이디푸스란 이름을 얻게 된 이 갓난아이는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자신과 관련된 신탁을 알게 되었다.

폴리버스 왕과 메로페 왕비가 자신의 생부모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닥칠 끔찍한 운명을 피하기 위해 사랑하는 부모와 자신의 왕국이 될 코린트를 떠나 정처없이 나그네 길에 오른다.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서 말이 끄는 전차를 몰고 길을 떠난 오이디푸스는 좁은 산길에서 다른 전차와 마주치게 되는데 서로 먼저 지나가기 위해 다툼을 벌이게 되고 그 와중에 젊고 혈기왕성한 오이디푸스는 상대방 을 죽이고 만다.

그 상대방이 다름 아닌 자신의 생부인 테베의 왕 라이오스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이윽고 긴 여행 끝에 오이디푸스는 테베에 도착하게 된다.

테베는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라이오스 왕은 산길에서 정체 모를 괴한에게 살해되었고,

여자의 얼굴에 사자의 몸통과 독수리의 날개를 지닌 스핑크스라는 사악한 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길을 막고 지나는 행인에게 수수께끼를 낸 다음

그 문제를 못 맞추면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해치거나 잡아먹고 있었다.

 

이오카스테 왕비의 오빠였던 크레온은 누구든지 스핑크스가 내는 수수께끼를 맞추는 사람을 이오카스테 왕비와 결혼시켜 테베의 왕이 되게 하겠다고 선포한다.

젊고 총명하고 패기만만한 오이디푸스는 제발로 스핑크스를 찾아가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간단히 맞춘다.

그러자 분에 못이긴 스핑크스는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테베에는 다시 평온이 찾아온다.

그런 다음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생모인 이오카스테 왕비를 부인으로 맞아 왕이 되어 테베를 다스린다.

 

시간이 지나 이 모든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날카로운 핀으로 자신의 두 눈을 찔러버린다.

제 친부모도 못 알아본 눈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테베를 떠나서 기약 없는 유랑길을 나선다.

 

프로이트의 심리학 용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도 유명한 이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결코 우리에게 도덕적인 교훈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는 존속살해, 근친상간 등 지금 시대의 막장 드라마에서도 차마 다룰 수 없는 패륜적 요소가 골고루 들어 있다.

이 이야기는 자신에게 주어 진 가혹한 운명을 거부하려는 오이디푸스 왕의 처절한 몸부림과,

또한 이러한 잔혹한 운명이 어떻게 기어이 관철되고야 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간적인 노력이나 수고가 신이 정해놓은 운명 앞에서 얼마나 허망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잘 그려낸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했던 운명이라는 것은 부도덕 한(immoral) 실체가 아니라 도덕과는 무관한, 즉 비도덕적인(amoral) 실체 라는 것이다.

즉 이 신화는 오이디푸스의 행위에 대해서는 도덕적인 가치 판단을 부여할 수 있지만

이러한 사건을 예정하고 관철시킨 운명이라는 실체에 대해서는 우리가 결코 도덕적인 가치 판단을 부여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그 유명한 공식 E=MC2이 뜻하는 바는 물리학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대략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물질과 에너지가 서로 다른 차원의 존재가 아닌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동일한 존재이며, 

아주 미세한 양의 물질이라도 에너지로 변환될 때는 막대한 양의 에너지로 바뀐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식이다.

 

자연에 대한 인류의 이해를 비약적으로 도약시켰던 이 위대한 공식은 과연 어떤 역사적 사건에 최초로 사용되었을까? 

이 공식은 제2차 세계대 전의 막바지였던 1945년 여름에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미국 정부가 그 당시 돈으로 20억 달러(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한다면 한화로 약 30조원 가까이 해당하는)의 예산을 들여서 극비리에 추진한, 맨해튼 프로젝트란 암호명으로 불리운 원자 폭탄 개발 프로젝트의 최종 성과를 판가름하는 실험이 추진된 것이다. 

 

1945년 7월 14일 미국 뉴멕시코 주 로스 알라모스에서는 인류 최초의 핵폭발 실험이 거행된다. 

실험은 성공리에 진행되었고 여름 사막의 태양이 작열하는 염천과는 비교도 안되는 수천도의 고온이 인간에 의해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

트리니티(Trinity)라는 이름이 붙여진 핵폭탄의 폭발실험을 참관하던 하버드 대학교 물리학과의 케네스 베인브리지 교수는 옆에서 실험에 참관하던 맨해튼 프로젝트의 수장이었던 오펜하이머 박사에게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제 우리 모두 다 죽일 놈들이 되어버렸구먼."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다.

 

1945년 7월 14일 인류 최초의 핵폭발 실험으로부터 우리나라가 해방의 감격을 맛본 8월 15일에 이르는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차례로 피폭되며 엄청난 인명이 살상을 당한다.

이는 현대 과학의 엄청난 성과가 대량 살상 무기로 악용되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사례다.

도대체 과학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핵 폭탄을 만들어내는 현대의 첨단 핵물리학이라는 것이 과연 윤리적 가치가 있는 것일까?

과학자들이란 과연 도덕적인 사람들인가?

여러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이 점에 대해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과학이란 과연 도덕적인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과학은 도덕적인 실체가 아니다. 

과학은 어떤 것이 도덕 적인가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으며,

이것은 단지 과학이란 실체의 활동 영역과 한계를 의미하는 것일 뿐 과학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실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앞서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이 운명을 비도덕적 (amoral)인 존재, 즉 도덕과는 무관한 존재로 이해했던 것을 살펴 보았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과학은 결코 도덕적인 실체가 아니다. 

하지만 부도덕한(immoral) 실체 역시 아니다. 

과학은 비도덕적인 실체, 즉 도덕과는 무관한 실체라는 것이다.

 

핵물리학은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의 미시적 구조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그 지식을 어떻게 올바로 사용할지는 알려주지 못한다.

우리는 그 지식을 암의 고통에서 인류를 구하는 항암 치료에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자원이 부족해서 에너지난에 허덕이는 제3 세계 사람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류를 살상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지구를 초토화시키는 핵무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현대 천문학의 빅뱅 이론, 지질학에서 밝혀낸 45억 년 된 지구, 생물학의 진화론 등 현대 과학의 대표적인 성과를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이러한 이론들은 무신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에 기독교적인 가치와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별히 그들은 진화론이 인간성을 파괴하는 비도덕적인 이론이라는 비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이 바로 과학이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다치거나 때로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때 얼마만큼의 에너지가 떨어진 사람을 다치게 하는가는 다음 공식에 의해 정확히 수치적으로(정량적으로) 표현된다.

 

E = mgh

 

위의 공식에 떨어지는 높이와 떨어지는 사람의 몸무게를 대입하면 떨 어지는 사람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는지를 대략 알 수 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사람이 다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사람이 다친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거북하기만 하다.

사람이 다치거나 상하는 것은 슬픔과 안 타까움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이 도덕적이려면 과학자들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사람이 다치지 않고 멀쩡할 수 있다고 설명해야 할까?

 

우리가 그런 식으로 자연을 기술할 수는 있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자연 현상이 그렇게 바뀌지는 않는다.

당연히 사람이 안전장치 없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다치거나 죽는다.

그래서 낙하 높이와 낙하체의 질량이 떨어졌을 때 가해지는 에너지가 서로 어떻게 정량적으로 관련되는가를 알아내어 수리적으로 표현해놓은 것이 위의 공식이다.

즉 우리가 경험한 바를 가장 잘 설명한 것이 위의 공식이다.

이것을 경험 적합성'(empirical adequacy)이라고 하며 이는 과학 이론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를 잘 설명한 말이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면 자칫 몸이 상할 수도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자연을 무수히 많이 관찰해서 얻은 결론이었다. 

여기에 어떠한 부도덕한 요소가 있는가? 

마찬가지로 자연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고 멸 종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단지 우리가 자연을 관찰해서 파악한 사실일 뿐이다.

자연 선택과 적자 생존을 설명한 이 말 속에 부도덕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가?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통해 확인된 설명이 과학이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무신론, 유신론 등의 세계관적인 신념이 전제되거나(이것은 앞 장에서 이미 설명했다),

도덕적인 가치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다.

과학은 결코 도덕적인 실체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타락하고 부도덕한 실체도 아니다.

도덕과는 관계없는, 비도덕적인 실체가 바로 과학이다.

따라서 도덕과 무관한 과학이라는 실체를 부도덕하다고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과학은 비록 도덕적인 실체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 인류는 이러한 과학적 성과물들을 도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우리가 그것들을 잘 사용할 때 현대 과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된다.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와 다스리심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는 현대 과학의 성과물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묘수를 찾아내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가장 긴급한 사명 중 하나일 것이다.


출처 : 아론의 송아지(저자 임택규, 출판 새물결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