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아론의 송아지

1-5. 비일치주의적 창조과학

w.j.lee 2024. 4. 18. 13:28

 

5. 비일치주의적 창조과학

 

일치주의적 해석에 기초한 창조과학은 현대 과학이 제공하는 물질의 기원,

지구와 우주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수용하는 정도에 따라서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번 장에서 살펴볼 비일치주의적 해석을 따르는 창조과학도 몇 가지 입장으로 나눌 수 있는데,

비일치주의적 해석에 의한 창조과학에서는 지구와 우주의 기원,

즉 물질의 기원에 관해서는 아무런 이견 없이 오래된 우주와 오래된 지구라는 과학적인 설명을 전부 수용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비일치적 해석에 의한 창조과학은

생명의 기원과 다양성을 설명하는 현대 생물학의 "진화론"을 어느 정도까지 수용하는가에 따라서 3가지로 분류된다.

즉 물질의 기원에 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생명의 기원에 대한 입장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의 비일치론적 견해들이 생겨났다.

아래 그림은 진화론의 수용 정도에 따른 비일치론적 해석에 의한 창조과학의 스펙트럼을 도식 화한 것이다.

 

점진적 창조론에서 유신 진화론으로 옮겨갈수록 생명의 기원과 다양성을 설명하는 과학 이론, 즉 진화에 대한 수용성이 커진다.

앞장에서 설명했던 일치론적 해석의 간격 이론과 날시대 이론은 제한적이긴 하지만 지구와 우주가 오래되었다는 과학적 결과를 수용한다.

따라서 일치론적 해석의 간격 이론과 날시대 이론, 그리고 비일치론적 해석의 점진적 창조론을 묶어서 오랜 지구론이라고 부르겠다.

지금부터 비일치주의적 성경 해석에 기초한 창조과학의 종류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1) 점진적 창조론: 반복되는 하나님의 생명 창조사역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ism)은 우주와 물질의 기원에 관한 현대 과학 이론들을 모두 수용한다. 

그것은 138억 년 전 우주를 태동시킨 빅뱅이 있었고 제1세대 별들이 소멸되며 중원소들이 만들어졌으며, 태양은 제3세대 별로서 약 45억 년 전에 탄생했다는 현대 과학의 설명을 수용한다.

 

지구의 나이는 태양의 나이와 같은 45억 년이고 이 장구한 지구의 나이와 더불어 펼쳐졌던 

화산 활동, 지각 변동, 침식, 퇴적 및 대륙의 이동 등, 

지구 역사의 다양한 사건들이 지구를 형성하는 지층 속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인다.

 

점진적 창조론은 화석이 포함된 지각의 형성 시기를 추정하는 현대 지질학의 설명 역시 수용한다. 

따라서 화석상의 기록이 지구상에서 발생하고 멸종했던 생명의 역사를 바르게 설명하고 있다고 받아들인다.

예를 들면 점진적 창조론은 약 5억 4천만 년 전 캄브리아기의 절지동물인 삼엽충이 고대 바다에서 최초로 출현했고

3억 년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지구상 에서 생명의 역사를 이어오다가 약 2억 5천만 년 전 완전히 멸종되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는 화석 기록과,

2억 3천만 년 전 최초로 지구상에 등장한 공룡은 6천 5백만 년 전 대멸절 시기(Extinction Event)에 멸종했다는

모든 화석상의 증거들이 지구상의 생명 역사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점진적 창조론은 화석 기록이 지구상에서 전개되었던 생명 현상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는 고생물학의 설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생명의 진화라는 생물학적 설명은 수용하지 않는다.

지구상에서 심원한 세월에 걸쳐 새로운 종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소멸되어간 역동적인 생명의 역사를 받아들이면서,

생명의 진화를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는 점진적 창조론의 해석은 상당히 이율배반적이고 모순되어 보인다.

과연 점진적 창조론 에서는 진화라는 과학적 이론을 거부하면서 어떻게 지구상에서 전개된 생명 현상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점진적 창조론은 "하나님의 생명 창조 행위가 일회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해법을 제시한다. 

이 이론은 하나님께서 심원한 지구 역사에 여러번 개입하셔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셨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특정 지질 시대의 지층에서 이전 시대의 지층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았던

새로운 종류의 생명체 화석이 발견되는 것은,

그 특정 지질 시대에 하나님께서 지구 역사에 개입하셔서 그 새로운 종류의 생명체를 특별히 창조하셨다는 것이

바로 점진적 창조론에서 설명하는 지구상의 다양한 생명 현상에 대한 해석이다.

 

그렇지만 이런 점진적 창조론은 과학적 일관성이 떨어지는 설명일 수 밖에 없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인과 관계를 밝혀내어 그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의 방법론은 언제나 자연주의적이다.

무신론 과학자는 물론이고 불교, 이슬람, 또는 기독교 신자 등등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과학자들도

최소한 과학 활동을 수행할 때만은 초월적인 신의 개입이나 조절을 배제한 채,

순수하게 자연 속에서의 인과 관계를 규명하여 자연의 모습을 설명해낸다.

예를 들면 의사들은 환자를 치료할 때 임상적으로 검증된 과학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약을 처방하고 필요할 경우 수술을 통해서 병이나 상처를 직접 고친다.

아무리 신앙심이 깊은 의사라 할지라도 검증된 약이나 수술을 통하지 않고, 매번 기도를 통해 신의 초월적인 개입을 끌어내어 환자를 치료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토목 엔지니어는 교량을 설계할 때 사용 하중을 감당할 수 있는 정확한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아무리 신앙심이 돈독한 엔지니어라고 할지라도 구조 계산을 등한시 하고 신의 초월적인 개입을 통해 교량의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듯 방법적 자연주의는 과학을 수행하는 데 있어 가장 근본이 되는 수단이다.

 

점진적 창조론은 생명 진화론을 제외한 모든 과학적 과업을 수행할 때는 방법적 자연주의를 수용한다. 

하지만 오직 생명 진화론에 있어서는 방법적 자연주의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초월적인 개입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과학적 일관성의 부재는 과학 이론으로서 점진적 창조론의 한계 를 드러낸다.

 

 

2) 지적설계론: 틈새의 신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의 엄청나게 정교하고 복잡한 구조는 결코 우연적이고 자연적인 과정의 산물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지적인 설계자의 통제 내지 조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리하이 대학교 생화학과 마이클 비히 교수가 『다윈의 블랙박스』라는 저서에서 주장한 환원불가능한 복잡성 (Irreducible Complexity)은 이 개념 을 잘 보여준다.

마이클 비히는 쥐덫의 예를 들어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을 설명했다.

간단한 구조의 쥐덫이라도 다음과 같은 여러 부품들로 구성되 어 있다.

 

(1) 받침으로 사용되는 나무 판자

(2) 실제로 쥐를 잡는 일을 하는 금속 해머

(3) 덫이 장치될 수 있도록 해주는 스프링

(4) 조그만 흔들림에도 풀리는 민감한 걸쇠

(5) 덫이 장치되어 있을 때 뒤로 제껴진 해머를 지지해주는 금속 막대 

(6) 이 모든 장치들을 제 위치에 고정시키는 꺾쇠

 

이렇듯 쥐덫은 여러 다양한 부품이 모여야만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고,

이 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결여되면 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을 것이다.

간단한 쥐덫조차도 여러 부품이 결합해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 는데

이것보다 수천 배, 수만 배나 더 복잡한 생명체를 형성하는 분자 기계들이

진화에 의해 점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체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이전의 진화적 전 단계의 선구체 (Predecessor)의 모습은

부품이 몇 개 빠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우연한 과정을 통한 진화가 아닌,

지적 설계자의 통제와 조절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이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이다.

 

그런데 사실상 이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은 다름 아닌 "틈새의 하나님"(God of the Gaps)'에게 호소하는 방식이다.

틈새의 하나님이란 과학기술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논증하려는 방식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적설계론은 분자 수준의 미시적인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생명 현상의 메커니즘은

너무도 정교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현대의 과학 기술로는 도저히 그 기원과 형성 과정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 즉 지적 설계자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렇듯 현대 과학의 설명이 미치지 못하는 틈새에 하나님이란 존재를 놓아두는 전략이 바로 지적설계론이다.

 

지적 설계론의 일차적 관심은 과학의 영역에 지적 설계자의 존재를 끌어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과학이고,

지적 설계자의 존재 여부가 매우 복잡한 자연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기 때문에

과학의 영역 속에 지적 설계자의 존재를 집어넣어야만 한다는 것이 지적설계론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따라서 지적설계론의 주된 관심은 "지적 설계자에게 집중되었고 "창조의 방법"인 생명의 진화에 대한 관심은 이차적일 수밖에 없다.

마이클 비히 같은 지적 설계론자의 경우는 공통 조상의 타당성과 진화를 수용하는 유연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초월적 존재인 지적 설계자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과연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지적 설계론에 따르면 초월적 설계자의 존재 여부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틈새의 신 외에는 없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콘크리트 구조물 중에 프리스트레스트 콘크리트 (Prestressed Concrete)라는 것이 있다. 

이 프리스트레스트 콘크리트라는 것은 구조물이 사용될 때 압축받는 부분을 시공할 당시에 아예 강한 힘으로 잡아당겨 놓는 것이다.

그럼 이 구조물이 사용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구조물 위로 자동차가 지나다니고 사람이 지나다닐 때 미리 잡아당겨서 인장력이 가해진 부분은 사용 중에 받는 압축력과 상쇄되어 결국 콘크리트가 아무런 부담을 받지 않는다. 

마치 우리가 격렬한 운동을 하기 전에 미리 스트레칭해줌으로써 근육이 뭉치지 않게끔 방지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용 중에 압축력을 받게 되는 콘크리트 부재에 강한 힘으로 잡아당기는 인장력을 가해줄 때,

콘크리트 부재는 미세하게 갈라져서 틈새들 (hair cracks)이 생기게 된다.

일반적인 경우 이러한 틈새는 콘크리트 구조물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일반적인 콘크리트 구조물에 이러한 틈새가 생긴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 틈새는 더욱 벌어져 깨지고, 그 틈새로 철근이라도 노출된다면 녹이 슬어 결국에는 구조물이 파괴될 수도 있다.

하지만 프리스트레스트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구조물이 압축 하중을 받게 되면 이 틈새들은 자연스럽게 아물어서 그 간극이 점점 더 좁혀 지고 결국은 완벽하게 봉합된다.

 

"틈새의 신" 전략에 의거해서 지적 설계자, 즉 하나님을 논증하는 방법은 이러한 한계를 안고 있다.

틈새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하나님을 논증 하기가 수월할 것이다.

반대로 틈새가 좁아지면 좁아질수록 하나님을 논증할 수 있는 입지는 점점 더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틈새는 하나 님의 창조하신 창조세계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창조세계를 이해하는 과학적 지식 속에 담겨 있다.

따라서 현대 과학이 발달하면 발달 할수록 하나님을 논증할 수 있는 틈새는 차츰차츰 더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프리스트레스트 콘크리트에서 틈새가 봉합되고 닫히는 것은 좋은 현상이지만,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하나님을 논증할 수 있는 틈새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은 

틈새의 신 전략을 채택한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겉보기에는 꽤 일리가 있어 보이는 이 틈새의 신 논증이 갖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과학 기술은 계속해서 진보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하나님의 입지는 계속 축소 되는 결정적인 허점을 바로 이 틈새의 신 전략은 노출할 수밖에 없다.

마이클 비히 교수는 1995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다윈의 블랙박스』에서

박테리아의 편모와 동물 혈액의 응고 과정의 복잡하고 정교한 메커니즘을 근거로 지적 초월자의 존재를 논증했다.

하지만 불과 2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박테리아의 편모 및 혈액의 응고 과정에 대해 진화적 측면에서의 메커니즘이 훨씬 더 많이 밝혀졌다.

이렇듯 과학적 지식의 진보는 틈새의 하나님을 이용해서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의 치명적인 약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틈새의 하나님에 대한 비판은 본회퍼 목사님의 『옥중서간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을 우리의 불완전한 인식을 메워주는 미봉책으로 삼아선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해지더군.

사실상 불가피하기는 하지만, 인식의 한계들이 계속 밀려나면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도 계속 밀려나고,

결국에는 끊임없이 퇴각하고 말 것이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 안에서 하나님을 찾아야지, 인식할 수 없는것 안에서 하나님을 찾아선 안 되네. 

하나님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아니라 해결된 문제 속에서 우리에게 파악되기를 바라시네. 

이것은 하나님과 과학적 인식의 관계에 유효한 말이지만, 

죽음과 고난과 죄책에 관한 인간의 일반적인 물음에도 유효한 말이라고 할 수 있네..

 

"하나님을 우리들의 불완전한 인식을 메워주는 미봉책으로 삼아선 안 된다"는 것, 

1945년 5월 25일에 나치 독일의 테겔(Tegel) 수용소에서 친구 베트게(Bethge)에게 보낸 본회퍼의 서신 속에 나오는 이 말씀은 정말로 시대를 앞섰던 탁월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3) 유신 진화론: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

 

일반적으로 유신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이 용어는 적절치 못하다. 

진화론이란 종교적인 신념과는 무관한 과학 이론이므로 그 앞에 "유신"이란 접두어가 붙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유신 진화론은 객관적인 과학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는 신학적 설명이다.

그러므로 나는 "유신 진화론"보다는 "진화적 유신론"(Evolutionary Theism) 내지는 "진화적 창조론"(Evolutionary Creation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신학적 입장을 설명하는 데 더욱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진화적 유신론 혹은 진화적 창조론이라는 더욱 적합한 이름이 있지만 이 책에서는 기존의 용어와 관련 해서 독자들이 혼동하지 않도록 유신 진화론이란 이름을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유신 진화론이란 이름은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진화적 유신론 내지는 진화적 창조론이란 명칭이 더 적합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앞으로 논의되는 내용을 읽어나가길 바란다.

 

하나님의 창조를 해석하는 데 있어 다양한 비일치주의적 견해를 만들어내는 진화란 과연 무엇일까?

진화는 우주의 진화, 항성의 진화 등과 같이 정체되어 있지 않고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물리적 현상을 표현하는 용어로 많이 사용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생물학 용어다.

이 용어는 본질적으로 생명체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여러 종(species)들로 다양하게 분화되는 과정에서 관찰되는 자연 현상을 설명한다.

 

이러한 생물학 용어인 진화를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상당히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6천 년짜리 지구 나이와 부합하지 않는 모든 현대 과학을 지칭하는 의미로 진화라는 용어를 사용 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진화의 본래적 의미인 생물학적 진화는 물론이고 지구와 우주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는 지구 물리학 및 천체 물리학을 망라한 현대 과학의 독립적인 성과들이 전부 진화론이란 단어로 환원된다.

젊은 지구론이 이해하는 진화 개념에는 이렇듯 자의적인 왜곡이 내포 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해외 여행 도중에 "한국인이나 중국 사람들은 일본어를 사용한다"라고 주장하는 외국인을 만난다면 느낌이 어떨까? 

우리가 그에게 동아시아 문명이 중국에서 발원하여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으 며,

고대에 문화적으로 앞섰던 한국과 중국이 당연히 일본과 다른 언어와 문자를 보유하고 있다고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해도,

그가 전혀 납득하지 않고 한국과 중국이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사코 우기기만 한다면 우리는 필시 어이가 없을뿐더러 분노가 치밀 것이다.

지질학, 해양학, 지구물리학, 천문학 등 다양한 현대 과학을 생물학 이론 중 하나인 진화론에 모조리 쓸어담아 넣는 창조과학회의 아전인수식 진화론 정의와

또 거기에 부화뇌동하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과학자들이 느끼는 감정이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진화론이란 생물학의 범주에 속하며 분류학, 생태학, 고생물학, 유전학 및 분자 생물학을 연결하는 현대 생물학의 주요 기축 이론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러한 진화를 하나님께서 지구 위에 수없이 많은 다양한 생명체를 창조하신 수단으로 고백하는 것이 바로 "유신 진화론이다.

 

그러면 유신 진화론에서는 어떠한 교의학적 준거를 통해 진화를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경륜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해하는지를 알아보자.

 

진화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함의는 우선 하나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내어주시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창조세계와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비움의 행위를 케노시스(kenosis)라고 부른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무소부재하신 자신의 영역을 축소하신 다음 이런 자기 비움의 공간에 우리를 위한 창조세계를 만드셨다.

 

하나님의 창조 이후 전개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비움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 가 사건이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자신을 비우심으로써 창조세계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그 창조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실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여러 가지 자연 법칙들에 의해서 운행되고 있다.

중력의 법칙, 전자기력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등 자연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통제하는 법칙들이 존재한다.

근대 과학이 태동할 무렵인 18세기에는 인류가 이러한 자연법칙을 모두 파악한다면 인간이 미래에 벌어질 모든 일들을 계산해낼 수 있다는 낙관적인 결정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당시 인류가 파악했던 자연은 법칙에 의해서 일사불란하게 운행되는 기계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기계 같은 모습의 자연은 하나님의 개입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더 이상 창조세계에 간섭하지 않는 초월자일 뿐이고 자연은 창조 당시 하나님께서 입력해놓으신 법칙을 따라 기계처럼 구동되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매끄럽게 운행되고 있는 자연을 상대로 한 하나님의 초월적인 개입이나 섭리는 오히려 자연의 운행을 방해할 뿐이었다.

이러한 신관을 이신론(理神論, deism)이라고 부른다.

 

진화가 우리에게 함의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이신론적인 신이 아 니라는 것이다. 

진화는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자연 법칙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진화에서는 오히려 자연선택에 의한 "우연"이라는 요소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무신론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이 우연이라는 요소의 맹목적이고 방향성 없는 특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눈먼시계공」이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유신 진화론에서는 이 우연을 맹목적이고 방향성이 없는 것으로 파악 하지 않는다. 

이 우연이야말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목적을 위한 “의도된 우연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 더 이상 거기에 관여하지 않으시고 창조세계를 그냥 내버려두시는 이신론의 신이 아니다.

자연법칙을 창조하시고 자연 법칙에 따라 창조세계가 운행되도록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자연 법칙에 의해서 기계적으로만 움직이는 닫힌 결정론적 세계가 아니라,

우연이라는 요소에 의해서 미래에 대해 개방된 열린 세계로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창조세계를 초월해계신 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창조세계 안에 내재하시며 자연 법칙과 수많은 우연적 사건을 통제하심으로

끊임없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진화는 타율적인 통제가 아닌 자기 비움의 풍성한 사랑을 통해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속되는 창조의 경륜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극적이고 웅장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진화가 하나님의 계속되는 창조라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진화가 가지고 있는 "창발성"(emergency)이다. 

이 글을 읽는 일부 독자들은 창발이라는 단어가 생경할 수도 있다. 

예컨대 벽돌로 이어진 담벼락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벽이 얼마나 튼튼한가는 벽돌 한 장, 한 장의 강도에 달려 있다.

강도가 강한 벽돌을 썼다면 담벼락이 튼튼해 질 테고 그중 얼마간의 벽돌의 강도가 함량 미달의 불량품이면 당연히 그 벽돌이 배치된 담벼락 쪽은 내구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 전체를 구성하는 성질은 전체를 이루고 있는 요소 하나하나의 성질을 종합해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을 환원주의(reductionism)라고 하며 이는 현대 과학을 수행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바꿔 말해 과학적 탐구 대상 이 너무 복잡해서 전체적인 윤곽을 한꺼번에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에 그 과학적 탐구의 대상을 낱개의 요소들로 분해한 다음,

분해한 각 요소의 성질을 종합해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과학을 수행하는 방법이다.

이는 복잡한 자연 현상을 우회하여 단순하게 접근하려는 전략이기도 하다.

 

하지만 창발은 이러한 환원주의의 한계를 넘어선다. 

때로는 전체의 성질이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성질을 뛰어넘어 전혀 다르게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창발이다.

 

물을 예로 들어보자. 물은 두 개의 수소 원자와 한 개의 산소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물질이 산소와 반응하면 강렬한 열과 빛이 발생한다. 

이 것이 "연소"라고 부르는 화학 반응이며 우리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불에 탄다"라고 표현한다. 

수소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원소이지만 유원지에서 파는 풍선에는 수소가 들어 있지 않고 헬륨이 들어 있다.

그 이유는 수소가 산소와 격렬하게 반응하여 폭발하는 가연성을 가지고 있어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질을 가진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물 이라는 화합물은 그 구성 요소인 수소 및 산소와는 정반대의 성질을 가지 고 있다.

수소와 산소와는 달리 물은 오히려 연소 작용을 막는 성질이 있다.

만약 우리가 수소와 산소의 성질을 잘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2개의 수소와 1개의 산소가 결합된 물의 성질을 예견하기란 쉽지 않다.

 

진화에는 이러한 창발적인 성질이 담겨 있다. 

진화를 통해서 새로운 종이 등장할 때마다 이전 단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롭고 예견되지 않는 특징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사람과 침팬지는 약 5백만 년 전에 모종의 진화적 분기점을 통과하며 서로 다른 종으로 진화되었다.

따라서 인간과 침 팬지는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진화적인 분기를 체험한)  근연 관계가 가까운 종 이기 때문에 유전자의 많은 부분이 일치한다.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98%가 동일하다고 알려져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특징을 침팬지와 유전자가 다른 2%의 차이로는 도저히 설명해낼 수 없다.

이렇듯 진화가 가지고 있는 창발적 특징은 심원한 시간 속에서 진화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가 계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를 통해서 창조세계는 과거의 사건에 종속되어 결정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종말에 대해서 전적으로 개방되어 있으며,

궁극적인 종말의 새로운 창조를 향해서 창발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종말론적인 희망을 찾아낼 수 있다.

 

 

4) 비일치론적 해석에 근거한 창조과학에 대한 소고: 진화론과 진화주의

 

지금까지 비일치론적 해석에 의거한 창조과학의 종류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았다. 

비일치론적 창조과학이 3가지 다른 형태로 분화된 이유는 앞서도 언급했던 바와 같이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현대 과학 이론인 진화론에 대한 수용여부 때문이다.

과학 이론인 진화론이 교회에서 배척받 는 주된 이유는 진화론이 무신론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교회 안에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진화론이야말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적 이론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하버드 대학교의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 

시카고 대학교의 제리 코인(Jerry Coyne), 

그리고 터프츠 대학교의 다니엘 데닛(Daniel Dennett) 등 진화 생물학을 전공하는 세계적인 석학 중 

유달리 강성 무신론자가 많고 또 그들이 진화론을 이용해서 무신론적인 신념을 변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진화론을 과학적 옷을 입은 무신론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진화론은 무신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과학 이론일 뿐이다.

찰스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섬을 탐사한 1835년 이후 약 24년에 걸쳐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1859년 진화론의 단초를 알리는 『종의 기원』을 출간한 이유는,

그가 무신론적인 신념으로 똘똘 뭉쳐서 이 세상을 무신화하기 위한 무신론 경전을 출간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윈이 24년의 연구 끝에 자연에서 관찰되는 객관적인 현상에 대한 가장 과학적인 설명을 내놓은 것이 바로 『종의 기원』이며 이 저서가 진화론의 출발을 알리는 서곡이 된 것이다.

따라서 진화론은 유신론을 지지하지도, 무신론을 뒷받침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연계에 존재하는 현상에 대해서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할 뿐이며 이것은 자연 이면에 존재하는 세계관적 신념이나 초월적인 신앙의 영역과는 철저히 무관한 것이다.

 

물론 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과학 이론인 진화론을 이용해서 무신론적인 세계관을 확장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경우 그들은 순수하게 가치중립적인 과학 이론인 진화론만을 이용해서는 무신론 논증을 전개할 수가 없다. 

진화를 통한 우연적이고 자연적인 과정에 의해 만물이 생겨났기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증은 더 이상 과학
적인 진술이 아니다. 

이 주장은 이미 과학적인 진술을 형이상학적이며 종교적인 진술과 결합시켜놓은 것이다.

이렇듯 과학 이론인 진화론을 이용 해서 무신론적인 신념이나 세계관을 확증하려고 하는 시도를 "진화주의" 라고 하며 이러한 시도는 과학 이론인 진화론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과학 이론인 진화론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진화론을 이용해서 무신론적인 가치를 확장하려는 진화주의에 있다.

따라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무분별하게 혼용되고 있는 진화론과 진화주의를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교회는 가치중립적 과학 이론인 진화론이 함부로 무신론을 제창하는 진화주의로 변질 되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다.

 

혹자는 진화론은 부도덕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진화론에서 이야기하는 자연 선택, 적자 생존, 멸종 등의 개념은 잔혹하고 부도덕하기 때문에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관찰되는 자연 현상에 도덕적인 가치를 부여해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과연 슬기로운지에 대한 논의는 다음 장에서 이어나가도록 하자.



출처 : 아론의 송아지(저자 임택규, 출판 새물결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