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아론의 송아지

1-3. 일치주의

w.j.lee 2024. 4. 18. 13:28

 

3. 일치주의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은 우리 기독교의 성경과는 달리 권수의 구별이 없이 총 11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이라는 말은 아랍어로 "수라"라고 하 는데, 

성경처럼 1장, 2장 같은 숫자로 불리지 않으며 각 수라마다 고유한 이름이 있다. 

첫번째 수라는 "알파티하", 두번째 수라는 "바까라", 세번째 수라는 "이믈란"이라고 불리며 

이러한 고유한 이름들은 마지막 114번째 수라인 "나쓰"까지 계속된다.

 

내가 근무하는 회사에는 중동 및 북부 아프리카, 파키스탄 및 방글라데시 출신의 직원들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이슬람교 신자들이다.

이들 중에서 특별히 나와 가깝게 지내는 몇 사람이 있는데,

점심 때 같이 식사 하러 나갈 때면 종종 곤란한 경우가 발생한다.

아시다시피 이들은 코란의 계율을 따라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또 어떤 사람은 소고기라도 율법에 따라 도축한 고기(Halal meat) 이외에는 먹지 않으므로,

이런저런 것 들을 다 제하고 나면 선택할 수 있는 식당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돼지고 기를 금하는 코란의 계율은 2번째 수라인 "바라"에 처음으로 명시되어 있다.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를 먹지 마라.

또한 알라의 이름으로 도살되지 아니한 고기도 먹지 마라.

그러나 고의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먹을 경우는 죄악이 아니라 했거늘.

 

구약성경 레위기에도 돼지고기를 먹지 말고 심지어는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고 나와 있다(레 11:7-8).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레위기에 언급된 것처럼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한 편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베드로가 기도 중에 받은 계시를 통해서 구약과 유대교의 음식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기독교는 이슬람보다 돼지고기를 먹는 부분에 대해서 성경의 말씀을 유연하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시편 137편에는 나라를 잃고 적국에 끌려온 유대인들의 비통한 감정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시편 137편 저자는 바빌론 강가의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놓고 앉아서 시온을 그리며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시 137:1-2).

바빌론 사람들이 와서 시온의 노래를 불러보라고 청을 한다(시 137:3).

그 말을 듣고 시편 저자는 이렇게 되뇐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한다면...내 혀가 입천정에 붙을지로다"(시 137:4, 6).

감정이 점점 더 격해지다가 137편 은 결국 이렇게 끝을 맺는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가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시 137:8-9).

 

이 시편에 대해서 어떤 해석이 가능할까? 

여기 나오는 바빌론에 대한 증오의 표현은 우리를 하나님의 구속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원수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아니면 하나님의 공법과 공의를 훼파하는 악한 권력 내지는 외세에 대한 공의로운 분노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누구도 이 말씀을 온전히 실천한답시고

저 시편 저자의 격정대로 하나님의 선교를 방해하는 국가에 들어가서

젊은 엄마들에게서 어린아이들을 뺏어다가 바위에 내려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배경을 이루는 역사적 정황, 사회적 관습, 제도 및 문화 등은

성경이 기록된 시대의 것들이기 때문에 오늘날 그 것을 문자 그대로 따라 지킬 필요가 없으며

현시대에 맞게 합리적으로 적용해도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과 과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많은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과학적 정보를 전해주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에서 과학적인 내용을 찾으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의 본문 속에 반드시 "과학적인 사실성"(scientific factuality) 이 담겨 있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이런 관점을 지닌 그리스도인 들은 성경 본문과 현대 과학을 문자적으로 일치시키려고 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일치주의”(Concordism)라고 부른다.

 

창조과학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구분될 수 있다. 

첫 번째 범주는 성경본문과 현대 과학을 일치시키려는 일치주의적 해석이다. 

또 다른 범주는 성경 본문이 현대 과학의 성과를 포함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비일치적 해석이다.

 

아래 그림은 일치주의적 견해와 비일치 주의적 견해, 두 가지 범주에 속하는 다양한 창조과학의 종류들을 정리한 것이다.


일치주의적 견해를 따르는 창조과학은 물질의 기원, 

즉 지구와 우주의 나이에 관한 현대 과학의 이론을 얼마나 수용하느냐에 따라서 4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젊은 지구론으로부터 날시대 이론으로 내려갈수록 문자주의적 경직성은 완화되고 물질의 기원에 관한 현대 과학의 설명을 더 많이 수용한다.

 

비일치주의적 해석에 의거한 창조과학은 물질의 기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이들은 물질의 기원에 관한 현대 과학 이론을 전적으로 수용 한다.

다만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설명, 즉 진화론에 대한 수용 여부에 따라서 비일치주의적인 창조과학은 크게 3가지 다른 입장으로 나뉜다.

 

한국창조과학회에서 공식적으로 "젊은 지구론"을 지지하고 있으므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젊은 지구론만이 창조과학의 유일한 견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젊은 지구론이란 창세기에 나와 있는 문자적인 표현에 의거해서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 이삭 및 야곱에 이르는 모든 족장들의 나이를 전부 더해서 지구와 우주의 탄생이 6천 년 전에 문자적인 6일에 걸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창조과학의 형태다.

이 입장은 다양한 종류의 창조 과학 중 하나이며, 가장 극단적인 문자주의적 경직성을 가지고 성경 본문과 현대 과학을 일치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반면 유신 진화론은 다른 창조과학들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유신 진화론을 제외한 창조과학들은 교조주의적인 경직성에 의거해서

정도의 차이를 두고 현대 과학의 성과를 제한적으로 수용하거나, 혹은 과학 그 자체의 정의를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유신 진화론은 다르다.

모든 진리는 다 하나님의 진리라고 한다면, 과학을 통해서 밝혀진 자연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진리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유신 진화론은 현대 과학의 모든 성과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방 법으로 100% 수용하고 있다.

나는 유신 진화론 입장에서 이 책을 썼고 따라서 이 책에서 시도되는 창조과학에 대한 비판적 논조는 그런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전제하고 글을 읽어가기를 독자들에게 당부드린다.


출처 : 아론의 송아지(저자 임택규, 출판 새물결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