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아론의 송아지

1-4. 일치주의적 창조과학

w.j.lee 2024. 4. 18. 13:28

 

4. 일치주의적 창조과학
 

3장에서 설명했듯이 창조과학은 일치주의적 성경 해석을 따르는 창조과학과 비일치주의적 성경 해석을 따르는 창조과학, 크게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일치주의적 성경 해석을 따르는 창조과학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1) 젊은 지구론(Young Earth Creation)
2) 성숙한 지구론(Creation with the Appearance of Age)
3) 간격 이론(Gap Interpretation)
4) 날시대 이론(Day-Age Interpretation)

 

젊은 지구론에서 날시대 이론으로 옮겨갈수록 성경 해석에서 문자 주의적 극단성은 감소하며 물질의 기원, 즉 지구와 우주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설명을 받아들이는 수용성이 더 커진다. 

아래 그림을 참고하길 바 란다.

 

이제부터 일치주의적 성경 해석을 따르는 창조과학에 대해서 구체적 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1) 젊은 지구론: "100층 빌딩의 주춧돌을 뽑아버려라"

 

3장에서 이미 소개한 것처럼 젊은 지구론(Young Earth Creation)은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의 나이를 전부 더해서 지구와 우주의 나이가 6천 년정도 되었다고 주장하는

문자주의적 경직성이 가장 심한 극단적 형태의 창조과학이다.

젊은 지구론에 따르면 지금부터 6천 년 전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문자적인 24시간에 따라, 총 6일에 걸쳐서 우주와 지구 그리고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을 창조하셨다.

 

젊은 지구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현대 과학의 거의 모든 성과를 부정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뒤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지구와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는

젊은 지구론이 주장하고 있는 6천 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오래되었다는 과학적인 증거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러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지구와 우주의 기원이 6천 년 전이라는 주장은

마치 지구가 편평하고 태양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또한 오래된 우주와 지구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들은 과학계 안에서만 논의되는 그저 음풍농월(吟 : 읊을 음, 風 : 바람 풍, 弄 : 희롱할 롱, 月 : 달 월) 식의 담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이론은 우 리의 실생활에 직접적으로 응용되어 인류에게 막대한 편익을 선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오래된 지구를 증거하는 지질학적 성과들을 통해 우리는 자원을 개발하고 석유를 시추하여 우리의 문명과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에너지를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지질학적인 성과가 없었다면 인류는 자동차를 움직일 가솔린도, 해외에 나갈 때 타고 가는 비행기를 운용할 항 공유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젊은 지구론이 한국창조과학회의 공식적인 입장이고 많은 그리스도인이 젊은 지구론만을 창조과학의 유일 한 형태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 과학이 제공하는 알토란 같은 편익을 향유하면서도 정작 현대 과학의 성과를 부정하는 젊은 지구론의 모습은 마치 100층짜리 빌딩의 스카이라운지에서 쾌적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그 빌딩의 주춧돌을 뽑아내려고 안달하는 모습과 별 차이가 없다.

 

2) 성숙한 지구론: "인공 지능 알파고 하나님"

 

45억 년에 이르는 지구의 나이, 그리고 138억 년에 이르는 우주의 나이, 

이렇듯 지구와 우주의 오랜 나이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젊은 지구론자 들은 성경의 문자적 표현에 근거한 6천 년 나이를 고수하고자 무시해왔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넘쳐나는 과학적 증거들을 언제까지나 계속 외면할 수가 없어서 고안해낸 것이 바로 "성숙한 지구론"(Creation with the Appearance of Age)이다.

성숙한 지구론자들은 지구와 우주의 나이에 대 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현재 지구와 우주가 오래됐다는 과학적 증거는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하나 님께서 창세기를 통해서 주신 말씀대로 지구와 우주는 6천 년 전에 창조된 것임이 분명하다. 

곧 하나님께서는 6천 년 전에 지구와 우주를 창조하셨지만 단지 지구와 우주가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창조하셨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주장 앞에서 일부 기독인들은 솔깃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상하시고 찢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속 체세포에는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받은 염색체와 상동 염색체를 이루고

아버지 요셉에게서 받아야하는 부계 염색체를 대신하는 23벌의 염색체가 성령에 의해서 잉태될 적에

어떤 생화학적 메커니즘을 통해서 발현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은 복음서에 전혀 나와 있지 않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선언한다.

복음서는 예수의 수태 과정에서 성령이
어떻게 부계 염색체를 대체하는 23벌의 염색체를 만드셨는지에 대한 분자생물학적인 설명을 일절 제공하지 않는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도 마찬 가지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시라는 놀라운 선포가 담겨 있을 따름이지, 

창조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과학적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어찌됐든 하나님께서는 6천 년밖에는 안 되는 가까운 과거에 지구와 우주를 창조하셨지만, 

지구가 45억 년처럼 보이고 우주가 138억 년처럼 보이는 세상을 만드셨다는 이 주장을 과학적으로 반박할 방법은 없다. 

왜 냐하면 이 주장대로라면 모든 과학적인 증거와 결론들을 다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위에 덧칠된 실제로는 6천 년 전이지만 마치 오래된 것처럼 보이 도록 창조하셨다는 신학적인 주장은 

과학으로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성숙한 지구론은 현재의 과학적 증거들은 다 수용하면서도 초월의 영역에 계신 하나님을 끌어들여서 창세기의 문자적 표현인 6천 년 전 창조를 주장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이 긴 트렌치코트를 입고 검은 선글라스를 쓴 채로

허리를 뒤로 180도 젖혀서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는 장면은 지금도 곧잘 패러디되는 명장면 중 하나다.

하지만 "매트릭스"를 떠올릴 때 이런 명장면만 연상하고 영화의 줄거리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영화 "매트릭스"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사육하는 22세기 말의 기괴한 분위기를 그려낸 작품이다.

인공 지능 "알파고"가 인간 바둑 챔피언을 이겼던 최근의 사건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낸다면 이 영화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영화 속 22세기에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사육하고 있다. 

그 시대의 인간들은 인공지능이 만든 인공 자궁 안에 갇혀 있고

인간의 뇌에 이식된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에 의해서 

1999년이라는 시대를 살아간다는 가상 현실 의 착각 속에 빠져 있다. 

그 가상 현실 속에 빠져 있는 인간은 인공 자궁 속에 갇힌 채로

인공지능의 에너지원으로 이용당하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성숙한 지구론에서 과학의 역할이란 고작 매트릭스 속과 같은 가상 현실을 만들어내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허상과 환영만을 제공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주 빅뱅의 증거, 그리고 지구상에서 실제로 살지도 않았던 수 천만 년 전의 공룡 화석 등등,

온갖 과학적 증거들을 손수 조작하셔서 우주와 지구라는 책갈피 속에 끼워놓으셨으며

따라서 실제로는 6천 년밖에 안 된 젊은 지구와 우주지만

우리 인류의 눈에 마치 그것이 45억 년과 138억 년으로 보이게 하셨다는

성숙한 지구론의 주장은 하나님을 영화 "매트릭스"의 인공 지능같이 "인간을 기만하는 신"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렇듯 성숙한 지구론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저해하는 신학적 취약성을 지니고 있다.

 

3) 간격 이론: "창세기 1:1과 1:2 사이에 놓여 있는 크레바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 66권을 여는 창세기 1:1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 

창세기 1:1 바로 뒤에 나오는 2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간격 이론(Gap Interpretation)을 주창하는 이들은 창세기 1:1과 창세기 1:2 사이에 큰 간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우주와 지구의 태동은 까마득 한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지만, 

그 후 우리가 알 수 없는 대파국이 일어나서

창세기 1:2의 표현대로 혼돈하고 공허한 지구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간격 이론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대 파국이 왜 일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타락한 천사장의 반란을 제압하는 과정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남극 대륙이나 히말라야 산맥 같은 빙하 지역을 등반하다 보면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크레바스(Cravasse)라는 간극들이 존재한다.

빙하 아래서 얼지 않은 물의 흐름이 일으킨 응력 또는 다른 여러 가지 전단력이 가해져서 빙하 표면이 쪼개지며 생긴 이러한 크레바스는 그 깊이가 때로는 수백 미터에 달하기도 한다.

빙하 지역을 등반하는 탐험가들에게 치명적인 위험 요소인 크레바스 같은 어마어마한 시간적인 틈새가 창세기 1:1과 1:2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 간격 이론의 요체다.
이 간격 이론은 오래된 지구와 오래된 우주라는 과학 이론들을 상당히 제한적으로 받아들이는 창조과학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4) 날시대 이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 날에 안식을 취하신 기사를 창세기 1장과 2장 전반부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사용된 하루를 뜻하는 "욤"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하루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종종 정해지지 않은 긴 기간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창조 기사를 설명하는 최초의 7일에 쓰인 히브리어 욤이라는 단어는 물리적인 24시간이 아니라 굉장히 긴 시간대를 의미한다는 것이 바로 날시대 이론(Day-Age Interpretation)에서 주장하는 핵심 내용이다.

 

이 해석을 지지하는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인 제럴드 슈뢰더(Gerald L. Schroeder)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이용해서 날시대 이론을 논증 하려고 한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의 흐름은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라 상태에 따라서 변한다.

빠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고 더 나아가 빛의 속도로 운동하게 되면 시간은 정지한 다.

그리고 중력의 크기가 강해지면 시간의 흐름은 점점 느려지면서 영화 "인터스텔라"에 등장하는 거대 블랙홀 근처의 사건의 지평선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정지한다.
따라서 제럴드 슈뢰더는 빅뱅 직후의 우주가 현재 우주를 이루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좁은 공간에 모여 있는 거대 중력이 작용하는 상태 였고,

이러한 거대 중력계에서 "하루"는 현재의 지구와 같은 약한 중력계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수십억 년에 이를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창조가 진행된 6일이 실상은 100억 년 이상의 긴 시간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에 등장하는 날들이 슈뢰더의 해석대로 수십억 년이 될 수도 있다면 셋째 날 창조된 지구상의 식물들은 태양이 창조된 넷째 날이 될 때까지 수십억 년이나 태양이 없는 상태에서 생존해야만 한다.

에너지원인 태양이 없는 곳에서 수십억 년을 생존할 수 있는 식물들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날시대 이론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라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 한 토막을 생각나게 한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잔혹하게 사람을 죽이는 강도였다.

그는 아테네의 언덕에 집을 지어놓고 집안에는 쇠로 만든 침대를 놓아두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나그네를 붙잡아서 쇠로 만든 침대에 강제로 눕힌 다음

침대 길이보다 키가 작은 사람은 침대 크기와 맞게 잡아 늘려서 죽이고,

침대 길이보다 키가 큰 사람은 침대 길이에 맞게 몸을 잘라 죽인 잔인한 강도였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올바르지 않은 기준에 무언가를 억지로 맞추려는 것을 풍자하는 말로 사용된다.

날시대 이론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떠올리게 한다.

창세기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장엄한 천지창조를 현대 과학이라는 견고한 쇠침대에 억지로 욱여넣고 있다는 생각을 지 울 수가 없다.

 

5) 일치주의적 창조과학의 한계

 

지금까지 다양한 일치주의적 창조과학의 견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여기에는 젊은 지구론 같은 극단적 형태의 일치주의도 있고, 간격 이론이나 날-시대 이론과 같이 다소 느슨한 형태의 일치주의적 견해도 있다.

그러 나 극단적 형태든지, 느슨한 형태든지, 모든 일치주의는 성경의 진실성이 어떻게든 현대 과학의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성경의 창조 기사가 함의하는 진리의 영역 속에는 과학적인 내용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일까?

성경이 선포하는 진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창 1:1),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롬 3:23),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것"(요 3:16),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해방시켰으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 없다는 것"(롬 8:1),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 12:28-34)는 하나님의 계 명을 실천하여,

"하나님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화해를 이룬"(사 11:1-10)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인 새 하늘과 새 땅"(사 65:17; 벧후 3:13; 계 21:1)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결코 물리학적인 지식, 생물학적인 정보, 지질학적인 내용, 천문학적인 상식 등을 가르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일치주의자들은 성경의 절대성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치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그 성경의 절대성이란 것은 따지고 보면 반드시 과학에서 확보돼야 한다.

이것은 결국 성경의 권위를 과학의 권위 아래 종속시키는 것이다.

성경이 쓰일 당시의 고대 근동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성경이 기록되면 안 되고 반드시 현대 과학의 성과가 들어 있어야만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가?

과학적인 사실성만이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밝혀줄 유일무이한 증거인가?

그래서 성경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인류가 이해하는 첨단 과학을 소개한다면, 지금부터 100년이 지난 22세기가 도래하면 과연 어떻게 될까?

과학은 진보하기 마련이니 22세기를 살아가는 인류는 성경은 시대에 뒤 떨어진 낡은 과학 지식을 제공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성경에는 일부다처라든지 노예제도 같은, 지금 우리 시대에는 불합리한 것으로 간주하는 고대의 관습과 제도들이 별다른 비판 없이 서술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불합리한 가치와 관습에 대해서 아무런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을까?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서 현대 과학의 성과물이 꼭 언급되어 있어야 한다면,

같은 맥락에서 고대의 불합리한 제도와 관습들에 대한 비판과 함께 대안으로서 더욱 인도적인 현대적 사회 체제 및 가치들이 반드시 성경에 있어야만 한다.

 

현대의 과학적 사실성을 담아내는 성경이 어째서 고대 사회에 비해서 더욱 하나님의 뜻에 가까워진 현대 사회의 숭고한 가치 체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는가?

만일 성경이 지구의 지질학적 역사가 6천 년이라는 과학적 성과를 담고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가 있다고 어떤 그리스도인이 주장한다면

그는 노예제도 같은 비인간적인 제도에 대해서 하등의 비판도 하고 있지 않은 성경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임을 변증할 수 있을까?

 

과학적 사실성은 성경의 경전성을 증명할 만큼 가치가 있으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기에 노예제도 같은 비인간적인 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예언자적인 외침은

과학적 사실성에 비하면 하등의 가치도 없는 쓸데없는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일치주의적 창조과학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심각한 과학 우월주의에 빠진 것으로 진단할 수 있다. 

이들은 과학적 사실성이 객관적인 진리이고 인류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찾아낸,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가치나 체제 등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것들이라고 여기는 과학 우월 주의에 경도되어 있다.

 

성경에는 성경 저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우주와 자연에 대한 이해 같은 고대의 과학적 상식이 표현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 저자들의 삶의 전반적인 배경, 즉 문화, 관습 그리고 역사적인 상황 등도 역시 투영 되어 있다.

우리는 성경이 쓰일 당시의 고대 세계의 관습, 제도, 문화 등은 현대인이 추구하는 가치와 맞지 않듯이

성경이 쓰일 당시의 과학적 상식과 우주관이 현대의 첨단과학 내지는 우주관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한계를 가진 인간의 육신을 입고

2천 년 전에 로마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이라는 특정한 지역에 찾아오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성경의 표현들이 수천 년 전의 고대 근동 지역의 과학적 상식, 역사적 상황, 문화적 배경 및 사회적 가치 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성경의 문자적인 표현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성경 저자들의 수준에 맞추어 자신을 낮추신 그분의 겸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극단적인 형태든지, 느슨한 형태든지, 형태를 막론하고 과학적 사실성만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드는 절대적인 조건이라고 여기는 일치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진짜로 존중하는 행위가 될 수 없다.

이러한 해석 방법은 오히려 성경의 권위를 과학의 권위 아래 종속시키는 행위이며,

과학의 도움 없이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즉 복음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아론의 송아지(저자 임택규, 출판 새물결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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