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신학자의 과학 산책

제2부 : 03. 양자 역학과 하나님

w.j.lee 2024. 5. 31. 10:06

제2부 현대과학과  기독교

 

03. 양자 역학과 하나님

 

관측자 개입과 상호관계성
양자역학은 그동안 고전역학으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원자와 소립자들이 현묘한 춤을 추고 있는 미시세계라는 비밀스러운 무대의 장막을 걷어주었다.

무대에서 공연되고 있는 춤들은 그동안 우리가 물리세계에 대해서 품었던 직관과 심각하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우리가 품었던 직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존재의 가장 밑바탕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확실한 그 무엇원자이 존재하며,

그들의 운동은 정확하게 측정이 가능할 것이라는 직관이었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관측과 무관한 객관적 세계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세계의 진짜 모습을 확인하려고 하는 순간, 우리 자신이 이미 세계 속에 개입하고 참여하여 세계의 모습을 바꾸
어 놓기 때문이다.

 

유명한 이중 슬릿 실험은 두 개의 슬릿(틈) 사이를 통과한 빛이 벽에 여러 줄의 간섭무늬를 만드는 실험이다.

이 실험을 통해 나타나는 간섭무늬는 빛의 파동성을 보여준다.

여러 줄의 간섭무늬는 호수 의 물결처럼 빛이 양쪽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며 서로 간섭을 일으켜서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런데 빛 입자(광자)를 하나씩 발사하면서 각각의 광자가 어느 슬릿을 통과하는지를 관측해보면 빛은 오직 하나의 슬릿만 통과하는 것으로 측정될 뿐만 아니라 간섭무늬도 만들어지 지 않는다.

이는 마치 빛이 자신을 측정하는 것을 알아차리고서 파동으로 행동하는 것을 멈추고 입자로 행동하는 것과 같다.

반대로 측정을 멈추면 다시 빛은 파동처럼 행동하여 간섭무늬를 만들어낸다.

사실 및 입자가 자신을 측정하는지 알아차리고 행동양식을 바꾼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양자세계에서는 항상 이런 일이 일어난다.

 

관측행위 자체가 전자나 광자의 운동과 존재형태를 바꾸어 놓는데, 이 현상은 관측방법이나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미시세계의 소립자들이 지닌 근본적인 속성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미시세계의 소립자들이 춤추는 곳은 관객과 무관하게 진행되는 객관적인 무대가 아니라, 항상 관객의 눈길과 감탄, 그리고 한숨과 손짓 하나하나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무대다.

김춘수 시인의 시는 이러한 세계의 일면을 잘 노래하고 있다.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여겨 보아주시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뒷마당에 뒹구는 질그릇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각각 따로 불러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미 있는 존재로 변화시켜주셨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의 부름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서로를 마주보게 된다.

그리하여 서로에게 잊히지 않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연과 목적

 

양자역학에서 불확정성 원리란 원자 주위를 회전하는 전자의 검출 가능성은 위치에 따라 확률적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개별적인 관찰은 순전히 우연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우연이란 필연의 반대말로서 그 개념 자체로 목적이나 의도를 배제한다.

그런데 세계에서 목적을 배제하면 하나님의 자리도 사라지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선한 의도로 창조하셨고,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역사를 이끄신다고 고백한다.

즉 우연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배척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 과학자인 자크 모노(Jacques Lucien Monod, 1910-1976)는 '우연과 필연'이란 자신의 책에서 자연에 존재하는 우연은 유물론을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곧 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진화 과정에 작용해온 광범위한 우연은 이 우주가 목적이 없는 세계임을 가리킨다고 했다.

그는 "광대한 우주 안에서 인간 역시 우연히 출현한 외로운 존재일 뿐"이라고 묘사했다.

앞에서 라플라스 가 "결정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하나님이란 가설은 필요 없다"는 말을 했다고 소개했는데, 결정론과 반대되는 '우연'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도 하나님의 자리는 위협을 받는다.

 

불확정성 원리에 깃든 우연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양자역학에서 예측된 범위 내에 존재하는 개별적 사건의 우연이란, 진정한 우연이 아니라 자연법칙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현대과학으로 탐지되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되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응답은,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에 반대하면서 제기했던 '감추어진 변수'와 비슷한 개념이다.

즉 아직 알려지지 않은 다른 법칙이 존재할 것이란 기대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신학적 설명은 '틈새의 하나님'God of gap으로 표현되는 문제가 있다.

과학이 언젠가 이 틈새를 채울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찾아내면 하나님의 자리는 또다시 퇴각해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또 다른 응답은 필연과 우연 모두 하나님의 설계에 포함된 방식 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하나님의 역사는 완벽하게 예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상부 수준에서의 필연적인 법칙과 하부 수준에서의 일정한 범위 내에서 피조물들의 자유가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신 본성을 발휘하는 과정으로 창조를 이해하는 과정신학과 잘 호응한다.

 

양자역학과 섭리

 

서양철학은 지난 2천 5백년간 대체로 존재론Ontology과 인식론 Epistemology 이란 두 주제에 매진해왔다.

존재론은 말 그대로 "존재의 근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룬다.

이에 대해 "정신 혹은 신이 다"라고 대답하면 '관념론'유신론이고,

"아니다. 만물의 근원은 물질이다. 정신은 물질의 산물일 따름이다"라고 대답하면 '유물론'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식론은 "진리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의 질문을 다루는데, 인식론 내에는 다양한 논의와 입장이 있지만 근대과학의 성공과 관련하여 가장 대표적인 입장이 '고전적 실재주의'(고전적 사실주의, Classical realism)다.

이 입장은 우리가 관측을 통해 '실재'reality를 확실히 인지할 수 있고 그에 상응하는 언표로 정확한 기술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립되는 입장은 '상대주의'Relativism로서 절대적이고 보편적 진리란 없으며 각자의 고유한 관점에서만 유용한 상대적 진리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양자역학의 관측자 개입 현상과 불확정성 원리가 강력하게 말해 주는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인식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없으며, 또한 우리의 인식과 실재 사이에는 플랑크 상수로 표현되는 근본적인 불확정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식론적 한계를 결코 넘어설 수 없으며, 이는 곧 우리가 실재에 대해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방정식들은 일정한 수학적 공식과 인식론적 모델을 사용해서 소립자들의 운동과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아무런 오류 없이 확률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에 부합하는 새로운 인식론적 전략으로서 '비판적 실재주의'Critical realism가 제기되었는 데,

이 입장은 고전적 사실주의의 순박한 낙관주의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물리세계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완전히 부정하는 상대주의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가 실재를 있는 그대로 완전히 인식하고 기술할 수는 없지만 신뢰할 만한 방정식과 인식론적 모델을 통해 '근사적 진리' Verisimilitude 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오늘날 자연과학의 지적 성과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다수의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바로 비판적 실재주의의 입장을 지지한다.

영국의 과학-신학자인 존 폴킹혼은 비판적 실재주의를 열렬히 지지하면서, “인식론이 존재론을 주조한다" 는 다소 파격 적인 선언을 했다.

이는 거시세계에 존재하는 우리의 인식체계로는 실재, 즉 미시세계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있는 모습 그대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일정한 인식론적 장치나 모델을 통해서만 근사적 실재를 파악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존재론 자체가 인식론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실재의 단일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다양한 언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학시대에 여전히 기독교인으로서 고유한 인식론적 모델을 사용해서 이 세계를 인식하고 묘사 하는 것에 대해 보다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양자역학의 방식으로 하나님과 우주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 우주는 하나님의 인식 안에 파지되고 재현되는 세계이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하나님은 세계에 참여하게 되고, 세계는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계, 혹은 역사라는 연극 무대의 보이지 않은 연출자가 되신다.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연출하시는 무대라면 그 연극의 주제는 구원일 것이다.

하나님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무대를 지켜보고 계시지만, 무대에서 벌어지는 연극은 도저히 하나님이란 연출자가 계신 것처럼 보이지 않은 경우가 일반적일 것이다.

역사라는 실재 세계 속에서 수많은 악인들이 나타나 권력을 쥐고 약한 이들을 괴롭히며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까지나 악인들의 승리를 허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연출자로부터 손짓과 몸짓으로 사인을 받은 배우들이 나타나 결국 구원의 길을 제시할 것이다.

예컨대 모세와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신호를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역사의 무 대에서 대행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상보성 원리와 관용

 

양자역학은 빛이나 소립자들이 입자와 파동의 양면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미시세계에서 물리적 실재가 지니는 모든 성질들은 상호보완적으로 쌍을 이룬 짝(켤레)으로서만 존재한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입자와 파동이라는 두 특성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립자들은 이 양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닐스 보어는 1927년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초"라는 강연에서 처음으로 '상호보완성 원리'를 제안했다.

이 개념이 내포하는 보다 중요한 의미는 하나의 실재에 서로 반대되는 물리적 특성이 있음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그 물리적 특성의 한계를 정량적으로 분명하게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전자 에서 위치와 운동량은 상보적인 특성을 지니는 물리량인데, 전자의 위치를 더욱 명확하게 할수록 운동량에 대한 정보는 불명확해진다.

이는 마치 서로 시소를 타고 있는 것과 같다. 

한쪽을 끌어내리면 다른 쪽이 반드시 올라가버린다. 

상보성 원리를 제안한 보어는 이를 보다 일반적인 경우에도 확대해서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개체로서의 생명체와 분자의 집합체로서의 생명체도 상보적이라는 것이다. 

한 생명체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분자 단위로 환원하여 파악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개체 로서의 생명체는 사라지게 된다. 

반대로 개체로서의 생명체의 모습만 파악하면 세포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분자 단위의 현상을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보성의 확대 적용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게 되자 보어는 이를 윤리학에서 정의와 자비 관계에도, 심리학에서 이성과 감정 관계에도, 문학의 형식과 내용 관계에도, 그리고 과학과 신학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언뜻 일리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확대하여 일반화시키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뒤따랐다.

대체로 동양적 사고방식 으로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데 반해, 정밀한 분석과 비교에 초점을 맞추는 서양적 사고방식으로는 수긍보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었다.

양자세계에서의 상보성과, 인간과 사회 속에서의 상보성의 맥락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범주 오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상보성 에 대한 신조를 지닌 보어는 1947년 물리학에 대한 공헌으로 작위를 받을 때 음양이 그려진 태극도를 자신의 문장으로 선택했다.

 

동양사상가들은 이러한 상호보완성에 대해 일찍부터 깊이 주목 했다. 

주역과 태극도는 상보성 원리를 잘 보여준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친숙한 태극 문양은 음과 양의 머리와 꼬리가 서로 맞물리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태극도설은 중국 송나라 때 주돈이(周敦頤, 1017-1073)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우주론적 도형인 태극도를 지어 천리의 근원을 밝히고 만물의 시작과 종말을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주돈이는 정호, 정이 형제와 장재 , 그리고 가장 탁월한 사상가로 칭송받는 주희와 더불어 우리가 주자학 혹은 성리학이라고 부르는 신유학을 구성하였다.

만물의 생성과 기원에 대하여 설명하는 태극도설(太極圖設)은 이렇게 시작된다.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태극은 운동하여 양을 낳고 운동이 극에 달하면 고요에 이르고 고요함으로써 음을 낳는다.

고요가 극에 달하면다시 운동한다. 

한번 운동하고 한번 고요하니 서로 각각의 근원이 되며, 음으로 갈리고 양으로 갈리니 음양의 양의(兩儀)가 수립된다.

양과 음이 변하고 합하여 수, 화, 목, 금, 토[오행]를 낳고,

이 5기()가 순리롭게 펼쳐지면서 사계절이 운행된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며,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여기서 주돈이는 만물의 생성이 태극으로부터 근원되었으며, 태극은 동시에 곧 무극이라고 설명한다.

태극에서 음양이 나오고, 음양의 조화에 의해 오행이 생겨났으며, 오행은 다섯 가지 기 또는 원소로서 천지와 인간과 만물이 모두 이 다섯 가지 기로부터 생성된 것이 라고 설명한다.

 

기독교 신학을 상보성 원리에 비추어보면 아주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필자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이 지나치게 이분법적 대립구도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죄와 구원, 심판과 축복, 지옥과 천당, 거짓과 진리, 죽음과 생명 등 모든 것을 선악구도에서 대립적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결국 십자군 전쟁에서 드러나 는 것처럼 세계의 역사가 침략과 지배로 점철되는 결과를 낳는 것에 일조했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율법보다는 사랑이 더 위대하며, 하나님의 본 모습은 심판자가 아니라 자비로운 아버지이심을 가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론의 수립 과정은 곧 다른 생각을 가진 공동체를 심판하는 정죄의 과정이 되었고, 

이는 기독교의 스펙트럼을 좁혀 대단히 편협한 종교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돌아보면서 양자역학이 던져준 힌트에 착안하여 상보성의 신학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태극기는 전 세계 국기 중에서 가장 탁월한 작품일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국기에 기껏해야 자신들의 자랑거리 단풍잎나 영토별 혹은 이념자유, 평등, 박애 등을 상징하는 문양이나 색깔을 그려 넣었지만, 

우리의 태극기는 우주의 보편적 원리인 상보성을 나타내는 태극문양을 그려 넣는 대단한 지혜를 발휘했다.

 

우주의 전일성

 

양자역학의 불완전한 측면을 드러내려고 과학자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 로젠 이 제안 한 'EPR 사고실험'(그들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용어)은,

결국 실험결과 이 들의 추론과 반대의 결과를 입증함으로써 'EPR 패러독스'라고 불리고 있다.

이들의 제안이란, 서로 정반대로 회전하는 쌍입자를 서로 멀리 떼어놓은 다음에, 한 입자의 스핀을 측정했을 때 같은 쌍을 이루는 멀리 떨어진 다른 입자의 스핀도 동시에 확정된다면,

이는 어떤 정보도 빛보다 빨리 전달될 수 없다는 상대성이론에 어긋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여러 차례의 실험에서 정말로 한 쌍을 이루는 입자 중 하나의 스핀 방향이 확정되면 동시에 다른입자의 스핀도 확정되는 기가 막힌 결과를 보여주었다. 

 

여기서 중요 한 포인트는 '동시에'라는 데 있다. 

이 현상을 다소 과장되게 표현하면, 온 우주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마치 젤리처럼 한 덩어리로 출렁거리는 세계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내쉬는 한숨과 웃음조차 저 우주의 끝자락까지 곧바로 전달되는지도 모르는 일이며, 여기 마당에 핀 작은 국화꽃 한 송이가 온 우주에 향기를 전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EPR 실험의 결과는 그러잖아도 환원주의에 염증이 나있던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 예술가들을 자극하여 '전일론'이라는 새로운 사조를 낳게 했다.

전일론이란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 사상은 마치 어디선가 혜성처럼 나타난 신선한 뮤지션의 매력적인 노래가 유행하듯이, 많은 사람들의 열광을 불러일으켰고 다양 한 영역으로 퍼져나갔다.

프리초프 카프라는 이러한 유행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원래는 "Tao of Physics" 물리학의 도라는 매우 매력적인 제목을 달고 나온 책에서 그는 현대물리학이 그리는 현묘한 물리세계를 힌두교, 불교, 중국사상, 도교, 선 사상과 비교하면서 그 공통점을 제시했다.

당연히 많은 열광적인 호응과 더불어, 보어가 상보성 원리를 확대 적용했을 때보다 더 강력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어쨌든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편으로는 동양의 신비주의와 종교전통이 서구에 매력적인 모습으로 소개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일부 인문학자들에게는

현대물리학이 밝혀낸 물리세계가 그동안 지겹도록 오래 지배했던 뉴턴-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폐기시키는 중요한 메시지로 여겨졌다.

무엇보다도 환원주의에 대항하  '물질'→'생명'→'정신'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위계를 다시 세우고 새로운 통합적 세계관을 구성하는 데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돌이켜보면 물리세계를 규명하려는 시도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게서 시작되어 뉴턴에 의해 한 번 완성되었다가, 

20세기 들어 다수의 과학자들에 의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재구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이론은 각자의 영역에서는 매우 정교하고 훌륭하게 자기의 역할을 완수함에도 불구하고,

이 둘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과제는 아직까지 요원해 보인다.

이 말은 우리가 아직까지 거시세계 와 미시세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여전히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 있으며,

"하나님은 왜 이토록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을 사용하여 물리세계를 구성하 였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 점에서 신학자들은 모든 것 을 다 설명할 수 있는 '대통일 이론'Grand unified theory의 발견에 도전하는 용기 있는 과학자들에게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비록 낙관적이지는 않지만 만일 이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그때는 우리들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보다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출처 : 신학자의 과학 산책 (저자 김기석, 출판 새물결 플러스)